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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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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구나>-왕소군
무진당 추천 0 조회 1,055 10.12.28 07:04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육의 옛 그림 읽기♣-그림, 스토리에 빠지다④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구나>

-왕소군-

 

 

한 여인이 있었다. 꽃같이 아름다운 그녀는 말 위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렀다. 슬픔을 비파에 담아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던 지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그 모습을 보며 날갯짓을 잊고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 때 비파를 타며 부른 노래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구나.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다니.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삼백예순날을 하냥 봄꽃으로 피어나야 할 스무 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봄을 느낄 수 없게 된 걸까. 그녀의 이름은 왕소군(王昭君).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힐만큼 미색이 뛰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으나 그 때문에 비극적인 생을 살아야했던 그녀의 삶은 수많은 시인과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공간을 초월하여 2천년동안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황제에게 외면당한 궁녀 #

한나라 원제(元帝 기원전 75~33년)때의 일이다. 양가집 출신이었던 왕소군은 18살의 나이로 궁녀로 뽑혔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어떤 여자가 봐도 질투를 느낄 만큼 기품 있고 고상했다. 왕소군 그녀도 자신의 미색이 어느 정도인 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미모라면 황제의 마음쯤은 간단하게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명대(明代) 구영(仇英:16세기 초엽)이 송나라 인물화를 보고 베낀 <송인물화임모(宋人物畵臨模)>를 보면 왕소군의 궁궐생활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곱게 단장을 끝내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는 여인의 자태에서는 강한 자기애가 느껴진다. 공필(工筆: 대상을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기법)과 밝은 채색으로 그린 여인들은 모두 가냘픈 몸매를 하고 있고 얼굴과 손이 희고 가늘다.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여인들의 자태에서, 원작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구영의 임모 솜씨를 확인할 수 있다. 구영의 붓끝에서 탄생된 왕소군의 이미지는 밝고 화사하다. 어둠이나 사나운 감정의 굴절 따위는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 같다.

 

 

1)구영, <송 인물화 임모>, 명, 비단에 색, 27.2×25.5cm, 중국 상해박물관

:거울을 보고 있는 왕소군의 모습은 하늘을 날아디니는 비천(飛天)처럼 곱고 유연하다.  체형은 뱀과 같은 곡선이 특징인데 이것을 사형(蛇形)이라고 한다. 사녀도(仕女圖:중국 미인도를 지칭)'는 대부분 사형으로 그린다. 따라서 중국 4대미인으로 알려진 서시, 왕소군,초선, 양귀비의 모습이 거의 비슷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럴 때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판별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삶에 얽힌 스토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서시와 물고기, 왕소군과 비파, 초선과 달, 양귀비와 꽃은 그림 속 주인공을 판별할 수 있는 상징코드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왕소군은 궁에 들어가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황제의 총애는 커녕 황제의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그녀는 당황했다. 자신보다 못한 궁녀들이 황제의 성은을 입고 화려한 방으로 옮겨갈 때, 따뜻한 발자국 소리를 기대할 수 없는 적막한 방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홀로 억색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로웠다. 투명한 눈물밖에 흘릴 줄 모르던 그녀에게 지밀한 궁궐의 암투는 언제나 모호해서 해독할 수 없었다. 해독되지 않는 운명 앞에서 그녀는 수시로 절망했다. 음모와 질투와 살육은 은밀한 눈짓 속에서 줄기차게 행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대한 희망은 헐거워졌다. 헐거워진 희망은 두려움과 통절함으로 대체되었고 확인되지 않는 확실한 적의(敵意) 속에서 그녀는 자주 자진(自盡)에 대한 유혹을 느꼈다.

구체적이면서 추상적이고, 일방적이면서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날카로운 적의가 실은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당시 황궁에는 전국에서 뽑혀 온 궁녀수가 수천 명이었다. 그 많은 궁녀들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던 황제는 화공이 그린 궁녀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선택했다. 구영이 화려한 궁궐 여인들의 생활을 그린 <한궁춘효도(漢宮春曉圖)>를 보면, 화공이 궁중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이 담겨 있다. 왕소군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쳤으리라.

그런데 그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궁녀는 많고 황제는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오직 황제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사는 수 천 명의 궁녀들이 아득하게 먼 곳에 앉아 있는 황제 앞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서도 무시했다. 굳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초상화를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자신의 미모라면 언젠가는 황제가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페어 플레이가 통할 거라는 그녀의 대책 없는 자신감이 얼마나 어리석었는 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연수(毛延壽)라는 화공은 그녀의 얼굴을 매력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두루뭉실한 여인으로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2)구영, <한궁춘효도>(부분), 견본채색, 30.6×574.1cm, 북경 고궁박물원

 

적의의 실체는 모호했지만 자신의 운명이 참혹하게 버려졌다는 것은 확실했다. 비정한 시간이 길어지고 절망의 속도가 가파르게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자살에 대한 충동 또한 격렬했다. 그 때 잡은 악기가 비파였다. 고립감으로 출구를 봉쇄당한 채 일방적으로 폐허처럼 버려진 후 그녀는 비파를 자신의 삶의 영역 안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해독 불가능한 황궁의 무서움을 견뎌내고 싶었다. 운명의 비정함에 대해 어떤 원망도 품지 않으면서 다만 손끝만으로 기갈 들린 외로움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비파였다.

손끝에서 감지되는 비파의 본질은 위로였다. 언어로 치환될 수 없는 외로움을 비파의 목메인 선율이 감싸 안아줬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먼 곳의 황제 대신 만질 수 있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비파의 언어가 훨씬 명징했다. 비파만 있다면 굳이 이 황궁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왕소군과 호한야 선우와 원제#

그런 어느 날이었다.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던 흉노의 통치자 호한야 선우(왕)가 황궁에 왔다. 호한야 선우는 두 나라간의 화친을 위해 한나라 공주나 후궁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전했다. 원제도 흔쾌히 승낙했다. 연회가 베풀어졌다. 원제한테 눈도장을 찍은 궁녀들을 제외하고 떠나보내도 아깝지 않을 별볼일 없는 궁녀들이 연회장의 시중을 들었다. 그 중에 왕소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소군의 자태를 본 흉노의 선우 눈빛이 갑자기 빛을 띠었다. 선녀인들 이렇게 고울까. 꽃인들 저렇게 아름다울까. 태양이 비춘다한들 저렇게 밝을 것이며 보름달이 뜬다한들 이만큼 은은할까.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지목하여 그녀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별볼일 없는 궁녀라 생각한 원제는 그 자리에서 허락했다. 그 때 비로소 원제는 왕소군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아, 하고 탄식하는 원제의 눈빛이 격렬해졌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어디에 저런 진주가 숨어있었더란 말인가. 정녕 저 여인이 나의 궁녀였단 말이냐.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황제의 약속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황제는 두 사람의 혼인을 승낙하고 왕소군을 흉노땅으로 보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한 번 가면 다시 보기 어려운 그녀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원제는 혼례준비를 핑계 삼아 왕소군을 사흘동안 황궁에 머무르게 한다. 그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사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잘 알 수가 없다. 풍문에 의하면 서로 헤어지기 아쉬운 두 사람이 사흘 낮 사흘 밤을 단 한 차례도 문밖을 나가지 않고 침실에서만 있었다고도 하고, 분노한 황제가 자신을 속인 화공 모연수의 목부터 친 다음 침실에 들어갔다고도 전해진다.(이래저래 나쁜 황제다.) 어찌 되었건 소문은 소문일 뿐이어서 그게 사실인 지 아닌 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황제인 원제가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소군(昭君)’이란 이름을 하사했다는 내용은 비교적 신빙성있게 구전되어 온다. ‘소군’의 뜻이 ‘한나라 황실과 황제를 빛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보면 힘없는 여인을 방패삼아 한나라의 안위를 지키려 한 황제의 안간힘을 읽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 새 약속한 사흘이 다 지났다. 왕소군은 남편이 된 흉노의 왕을 따라 궁궐을 나섰다. 일본 화가 히시다 ?쇼가 그린 <왕소군>은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맨 앞에는 슬픔에 쌓인 왕소군과 시녀 둘이 서 있고, 조금 간격을 두고 한 무리의 궁녀들이 뒤따르고 있다. 마치 구영의 <송인물화임모>를 보는듯한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인물 중 누가 왕소군이냐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이는 맨 앞의 여인과 두 번째 인물군 중 가운데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여인이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졌기 때문이다. 결국 맨 앞에 서 있는 여인이 왕소군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 작품은 명치(明治) 말기의 일본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당시 중국 전통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한다.

 

3)히시다?쇼,<왕소군>, 1902년, 비단에 채색, 168×370cm, 일본 산형 선보사 소장,

 

왕소군이 황궁을 떠나 국경을 넘는 부분은 왕소군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겨우 600자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고 짧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문학작품의 소재로 재창조되었다. 이백, 구양수, 왕안석, 황정견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에 의해 ‘왕소군(王昭君)’, ‘명군사(明君詞)’, ‘소군사(昭君詞)’, ‘소군탄(昭君歎)’등의 시가 쓰여졌고 국경을 초월하여 한? 중 ?일 세 나라 화가들이 왕소군 이야기를 그렸다.(왕소군을 ‘명군(明君)’, ‘명비(明妃)’라 부른 이유는, 서진(西晉)의 개국황제인 사마염의 부친이 사마소(司馬昭)였기 때문에 피휘(避諱)하여 소군(昭君)을 명군(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렀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비파를 든 채 한나라 국경을 넘어 흉노땅으로 건너가는 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 작가 히시다 ?쇼의 관심이 한나라 궁녀의 인물 군상이었다면, 조선의 작가 강희언(姜熙彦:1738-1784)이 그린 <소군출한(昭君出寒)>은 황궁을 떠나 국경선을 넘은 왕소군이 마지막으로 한나라 땅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모습을 그렸다.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는 왕소군은 그녀의 상징이 된 비파를 들고 있는데, 내용을 모른다면 마치 봄날에 나들이 가는 여인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 같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황색 모래 흰 풀도 비파 슬픈 곡조를 듣는 듯하구나(黃沙白草如聞琵琶哀然之曲)"라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제시가 적혀 있다. 진경산수 뿐만 아니라 인물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답게 강희언은 왕소군의 모습을 능숙한 필치로 그렸다. 중국 복장을 한 중국의 고사인물을 그렸는데도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왕소군의 모습은 그대로 조선여인같다. 강희언, 구영, 히시다 ?쇼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개인의 개성뿐 아니라 세 나라 미감의 차이까지 느낄 수 있어 흥미롭다.  

 

4)강희언, <소군출한>, 종이에 엷은 색, 23.1×26cm, 서울 개인

 

#명비의 노래#

왕소군이 국경을 넘어 추운 흉노땅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가 바로 ‘출새곡(出塞曲 변방을 나서는 노래)’이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구나’로 시작되는 애절한 노래는, 앞으로 왕소군이 살아야 할 추운 북녘땅이라는 공간적 의미와 떠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심정이 은유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원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문장은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측천무후 때 활동)가 왕소군을 생각하며 지은 시의 한 귀절이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왕소군이 부른 것처럼 와전됐다. 그만큼 동방규의 표현이 정곡을 찌를만큼 적절했음을 말해준다. 아무튼 왕소군이 비파를 뜯으며 한탄하듯 노래부를 때 그녀의 노래를 듣던 기러기가 날개 짓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낙안(落雁)’이란 단어는 미녀를 상징하게 되었다. 당대 시인 이태백은 이 장면을 떠올리며 “궁녀 왕소군이 옥구슬 안장 건드리듯/ 말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엔 눈물 흐르네/ 오늘까지도 한나라 궁궐 사람이더니/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의 첩이 된다네.”라고 묘사했고, “연지산이 있는 오랑캐땅은 언제나 추워 눈이 꽃을 이루니/ 미인은 초췌하여 오랑캐 모래땅에 묻혔으리”라는 시 한 수를 보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거이는 “얼굴 가득 오랑캐 사막의 먼지 쓰고 머리카락 바람에 휘날리며/ 눈썹에서는 연필 자욱 지워지고 뺨에 바른 연지도 지워져 버렸네/ 슬픔과 괴로움으로 바짝 말라 버리고 말아/ 지금의 모습은 문제의 그 초상화 그대로가 되고 말았네”라고 노래했다.

송대 시인 왕안석은 “황금 비파채를 봄바람같은 손에 쥐고/나는 기러기 보며 타면서/오랑캐에게 술 권하니/ 한나라 궁전의 시녀들/몰래 눈물 흘리고/사막의 길손들/오히려 고개 돌렸네”라고 애달파했다. 구양수는 흉노로 떠나는 왕소군의 모습을 ‘모래 바람 가차없이 옥 같은 얼굴 후려치네.’라는 표현으로 안타까움을 드러냈고 ‘붉은 얼굴 남보다 빼어나면 명 짧은 일 많거든, 봄바람일랑 원망 말고 스스로 탄식해야 하리’라는 구절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왕소군이 국경을 넘는 모습은 왕소군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여러 점의 그림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궁소연(宮素然)의 <명비출새도>가 으뜸이다. 금대(金代)의 화가인 궁소연에 대해서는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데, 그의 작품에서 추위 속을 뚫고 가는 일행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예사로운 작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손을 옷으로 감싼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왕소군과 시녀가 추위를 견디느라 말 곁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는 견마잡이의 모습과 함께 ‘모래 바람 후려치는’ 추위를 실감케 한다. 모두들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빠져 미모를 찬탄하느라 정신없을 때 궁소연은 그 외연 너머의 가슴 아픈 사연에 귀기울일 줄 아는 인간미를 잊지 않았다.

 

5)궁소연, <명비출새도>(부분), 금, 30.2×160.2cm, 일본대판시립미술관

6)궁소연, <명비출새도>(전체), 금, 30.2×160.2cm, 일본대판시립미술관

 

#일생을 기꺼이 산 여자#

국경을 넘어서도 왕소군의 인생은 계속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림 속에 나타난 그녀의 행적이 국경에서 끝나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 밖의 얘기에 의하면, 그녀는 흉노의 늙은 왕과 결혼한 후 딸을 하나 낳았지만 3년만에 사별했고, 그 나라 풍습에 따라 다시 왕의 아들과 결혼해서 딸을 둘 낳았지만 또 사별했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로 귀국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운을 띄웠으나 한 조정에서는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추운 흉노땅에서 주어진 시간을 다 산 다음 자연사했다.(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는 왕소군의 일생을 ‘얼굴 예쁜 여자의 팔자 사나운 이야기’쯤으로 듣고 흘려 버릴 수도 있다. 최근 중국 사람들의 움직임처럼 ‘나라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한 영웅’으로 미화하여 왕소군 살리기 작전에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왕소군은 그녀에게 덧씌워진 온갖 허상을 걷어내고 내게 사는 것의 당위성에 대해 절규한다. 어떤 운명이 오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내야 하는 삶의 절대명령에 대해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이런 나도 살았다. 그러니 너도 살아라. 겨우겨우 살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살아라. 세월에 의해 문드러지고 곤죽이 되더라도 자연사할 때까지 기꺼이 살아라. 그것이 인생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2천년 세월을 단 한 번도 말 안장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그렇게 외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외침에 귀 기울일 것이다.(조정육)

 

*참고문헌『』

-빙심, 동내빈 외,『그림으로 읽는 중국문학 오천년』, 예담, 2008년

-송철규,『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첫째권』,소나무, 2008년

-이원섭,『두보시선』, 현암사, 2006년

-이원섭,『이백시선』, 현암사, 2003년

-황견 엮음,『고문진보 전집』, 을유문화사, 2010년

-『故宮博物院 4-明の 繪?』, 日本放送出版協會, 1998년

-『近代日本美術の軌跡』, 東京國立博物館, 1998년

-『中國繪畵全集』1-28. 文物出版社 , 1997년

-『한국의 미20-인물화』, 중앙일보사, 1993년

 

#이상으로 네 여인의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에는 굴원을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오자와 탈자를 지적해주시고

  부족한 문장을 수정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 부탁 드립니다.

  꾸벅~~! #

  -조정육

 

*이 글은 『Art price』12월호에 실렸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 스.. - 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D..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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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2.28 18:13

    첫댓글 왕소군의 일생이 참으로 애절합니다 그 애절함 만큼이나 우리네 조선 여인들의 삶도 그닥 순탄치만은 않았나 봅니다 기황후나 환향녀라 불리우는 여인들의 경우처럼...

  • 작성자 10.12.29 06:05

    네, 기회가 되면 우리나라편만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것이 고민입니다. ^^*

  • 10.12.29 00:01

    비련의 여인들은 한이 너무 깊어, 죽음 이후에도 영혼의 안식을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 다닐 것만 같아요! 왕소군이 비파를 타며 부르는 슬픈 노래가 들리는듯...
    왕소군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국, 중국, 일본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 비교하며 잘
    감상했어요. 무진당님의 새 책을 읽게되면, 삶에 관한 새롭고도 따뜻한 시선을
    배우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힘내세요! & 관세음보살()()()

  • 작성자 10.12.29 06:08

    저의 글은 '그림'이 먼저라서 아무리 유명한 사건이라도 그림이 남아 있지 않으면 제외시켰습니다.
    기억될만한 얘기는 그림이 너무 많아 남아 있는 것도(선별해야 하니까) 즐거운 고통입니다.
    능력에 부치는 일을 시작했지만
    글을 준비하면서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소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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