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골프가 인생과 같다고 하지만 이 말씀은 바로 골프의 진수를 간파한 것이 아닐까? 골프의 발전적 변진(變進) 과정이란 결국 그렇게 몸과 마음에 익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프에는 피할 수 없는 슬픔이 곁들어 있음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골프는 함께 즐겨주는 동반자가 있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한편 무심한 세월은 동반자를 하나씩 둘씩 예외 없이 저승으로 끌어갔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노인들의 슬픔은 함께 골프를 치던 사람들이 어느새 소리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들에게서 노령의 적막과 고독을 이기지 못해 차라리 귀향(歸鄕)하고 싶다는 푸념을 자주 듣게 된다. 아니 이민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JP 자신의 푸념이기도 하다.
“어언 인생 80이 넘어서니 주위의 친구들이 어느새 유명을 달리해 먼 저승으로 모두 가버리고 이제 홀로 남아 있는 듯 외로움을 짙게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에요. 1961년 조국 근대화를 추진하는 주체세력으로서의 민주공화당 을 함께 조직했던 김성희 박사, 윤천주 박사 모두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분 다 골프를 누구보다 좋아해 말년까지 함께 필드에서 미래를 설계하며 의지를 다지고 인간적인 정의와 동지애를 가슴에 새겨서 공유(共有)했던 분들이었건만…. 골프는 인생에 즐거움도 주지만 참기 어려운 슬픔도 주는 동반자이기도 합니다 그려….”
이낙선 전 상공부 장관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지난 호에 나왔지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JP가 OB낸 공 맞고 도망간 상역국장
70년대 초 어느 토요일이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JP는 일과가 끝난 오후 1시가 넘어서 사무실을 나와 이미 약속되었던 대로 이낙선 장관, 윤천주 장관, 그리고 구자춘 서울시장 등 네 사람이 한양CC에 갔다.
그런데 국무총리 일행이라고 해서 여러 앞 팀들이 양보해줘 빨리 7홀까지 갔을 때였다. 다음 8홀이 숏 홀인데 7홀과의 경계에 안전을 위한 높은 망(網)이 쳐있으나 밑부분을 사람이 구부리고 드나들 수 있게 비워놓았다.
마침 JP가 티샷을 했는데 심한 훅이 나서 그 망 쪽으로 볼이 얕게 날아가는 것 아닌가. 마침 8홀 쪽에서 누군가가 망 아래를 엎드려 나와서 공을 주우려다가 “볼”이라는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오니까 뒤돌아서는 순간 그의 등에 볼이 맞았다.
놀란 총리 경호원이 달려갔는데 웬 일인지 볼에 맞은 사람이 힐끗 쳐다보더니 펜스 밑으로 구르듯이 빠져나가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와 함께 플레이하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JP와 일행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쫓아갔던 경호원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공에 맞은 사람은 상공부 상역국장이고 다른 세 사람은 실업인들”이라고 했다.
공에 맞고 도망간 이유는 토요일이라지만 일과가 끝나지 않은 시간에 나와서 플레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상관인 장관과 총리가 서 있는 걸 보자 아픈 건 고사하고 혼비백산해 도망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이 장관이 총리 공관에 와서 “공에 맞은 국장은 별일 없으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국장 일행은 쓴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삼성그룹에서 제일모직·삼성물산 사장 등을 역임한 이은택 사장은 JP와는 공주중학교 동기였는데 절친한 친구였지만 간암으로 50대에 아깝게 세상을 등졌다.
이 사장 역시 생전에는 함께 골프를 광적으로 즐긴 사람 중 한 명이다. 이 사장의 서울대 상과대학 동기 중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 박건석 미륭상사 사장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골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데 그렇게 절친하던 세 사람이 안양CC에서 플레이하다가 사소한 일로 골프클럽을 내동댕이치면서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 급기야는 박건석 사장과 김재순 의장은 절교하겠다는 막말까지 내뱉으며 헤어졌다고 이은택 사장이 JP에게 전한 적이 있다.
“마침 그날 밤, 박 사장은 집에서 투신자살을 했어요. 허 참, 명운이 이렇게 허무하고 무상할 수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가 세상을 그렇게 버리게 된 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루머가 돌아다녔지만 그만이 알고 간직한 채 떠나간 비극이 되고 말았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인생(人生), 깊이 고뇌하기에는 너무나 짧다”고 했는데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믿기지 않는 그 비보를 접하고 나는 세네카의 말을 되뇌었어요.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박건석 사장이 이 세네카의 말을 가슴 한구석에 새기고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막된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도 그때가 잊히지 않아요.”
역사에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해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을 회상했다. “박 대통령께서 경호실장을 내가 추천해드린 대로 오정근 장군을 채용하셨더라면 아마도 10·26이라는 천추에 한(恨)이 남을 불행은 없었을 것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일응 오 장군을 동의하셨다가 밤 사이에 차지철 의원으로 변경하셨는데 이로 인해 대통령께서는 화를 자초하시는 결과가 되었지요.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은 충성 경쟁을 벌이다 대통령까지 저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오정근 장군은 JP와 절친한 사이였다. 63년 JP의 망명 아닌 망명길에도 그는 동행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일상(日常)을 JP와 함께했던 지기(知己)였다. 그는 다재(多才)한 위인이었지만 특히 골프는 프로급이었다. 그가 기가 막히게 보여준 놀라운 홀인원은 전설로 전해진다.
“저승에 가서도 골프나 칩시다”
수원CC 구코스의 16홀에서 벌어진 일이다. 170야드의 거리에 있는 그린 바로 왼쪽 옆에 은행나무가 있고 그린 너머에는 OB 마크가 있었다. 그린 바로 앞과 오른쪽에는 벙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 장군의 티샷이 크게 훅이 났는데 그 공이 왼쪽 은행나무 기둥에 맞더니 우측으로 튀어 그린 너머의 OB 마크에 맞고 다시 후방으로 날더니 홀에 정확하게 들어가는 것 아닌가! 이게 신기(神技)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 장군 자신도 어안이 벙벙했었다.
후에 공화당 의원인 된 오 장군과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갔을 때의 일화는 그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호방한 일화다. 카라치에도 골프 코스는 있다고 들었지만 무덥고 골프장 자체가 험하다 하여 골프는 단념하고 열대동물원을 안내받아 둘러보고 나오던 길에 벌어진 일이다.
JP 일행 앞에 우거진 녹음이 짙은 큰 고목이 있었는데 그 밑에 열대과일을 늘어놓고 평상에 한 사람이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나 봤더니 과도(果刀)로 발가락 사이의 때를 벗기고 있었다.
거기 사람들은 모두 맨발로 다니고 있으니 때도 많이 끼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몰라도 과일 좌판 앞에 다가선 오 의원이 망고를 청했는데 발가락 때를 벗기던 그 과도로 망고를 잘라서 주는 게 아닌가.
“오 의원은 태연하게 그것을 받아 아주 맛있게 먹으면서 나에게 권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싫다고 하고 먹지 않았는데 그 과일가게에서 떠나면서 뒤돌아봤더니 평상에 다시 앉은 상인은 여전히 발가락 사이를 바로 그 과도로 후비고 있질 않습니까.”
그때서야 “오 의원 저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시오. 유감스럽게도 오 의원은 저자의 발가락 때를 망고와 함께 먹은 거요. 하…” 하고 말했더니 놀란 오 의원이 “저런 망할 친구 보겠나, 그래서 망고 맛이 씁쓰름했구먼 허허. 저놈 덕분에 더러운 때 약(藥)을 먹었으니 배탈은 아니 나겠지…” 하고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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