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라는 게 그렇다. 늘 똑같이 흘러가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상상하지도 못한 장면에서 확 달라질 때가 있다. 방송기자로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으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던 강남구 전 OBS 기자도 그랬다. 대학 졸업 이후 기자가 됐고, 정신없이 사회생활이 시작됐고, 앞만 보며 성공을 향해 달리는 대한민국의 흔한 중년 남성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인생이 확 뒤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혈액암의 일종인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았는데, 의료사고로 인한 급작스러운 죽음이었어요. 이후로 제 모든 것이 달라졌죠.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아내가 떠나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제 일이 됐습니다.”
긴 연애 끝에 만난 사랑하는 아내가 떠난 빈자리는 컸다. 먼저 회사를 그만뒀다. 어린 아들은 그가 직접 키워야 했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희생을 해야 하느냐, 회사를 그만둘 필요는 없지 않느냐 진심 어린 조언을 보내줬지만 그는 이미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가치관이 달라져 있었다. 사회적인 성공은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가장 원망스러웠던 것은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사랑한다 말해주지 못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남은 소중한 한 사람, 아들에게는 그런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일은 언제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물론 정규직의 형태는 아니겠지만요. 아이와 함께하는 이 시간만큼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놓치기 싫었어요.”
주부 아빠가 되다
회사를 다니면서 육아휴직 기간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서 아이의 육아와 집안일, 그 모든 것을 챙기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인터뷰 역시 아들 민호의 수업이 끝나는 2시 이전에 이루어졌다. 그의 삶은 모든 것이 아이 위주로 돌아간다.
“직접 해보니 쉽지는 않죠. 집안 살림이라는 게 하면 티가 안 나도 안 하면 티가 나는 일이잖아요. 요리도 정말 어렵고요.(웃음) 아직도 민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경제적인 문제다. 남구 씨 역시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집 근처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친다. 대치동에서 논술강사 생활을 한 경험과 기자 경력, 여기에 아이를 좋아하는 그의 성향이 더해져서 선택한 일. 수입은 회사 다닐 때 수준에 비하면 낮은 편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햇빛이 들어오는 게 참 예뻐요. 아침에는 해가 빨리 올라가거든요. 계절마다 미세하게 다른데 그걸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경제적인 것도 해결되면 좋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지금이 좋습니다.”
간혹 아들에게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렇게 본인이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 어쩌면 본인의 이기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린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와서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속상함을 표현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저도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해요. 제가 처음에는 엄마의 죽음을 말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거든요. 아이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는데, 아직은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상황이 변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러면 또 그때 상황에 따라 고민하고 행동하면 될 것 같아요.”
그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많이 구하는 편이다. 심리학 교수들과의 상담도 적극적으로 받는다. 아프고 슬픈 일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파도 드러내는 것이 옳다는 것을 배웠다.
글쓰기로 치유, 지금 꼭 안아줄 것
“아내를 떠나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슬픔의 감정에 병원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어서 잘못 풀면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죠. 많은 분들이 술이나 이성에 의지하면서 자기를 파괴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혼자서 글을 쓰는 것으로 풀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요.”
사람마다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르다. 저마다 애도의 방법도 있다. 강남구 씨는 글쓰기로 그 시간을 견뎌냈다. 아내를 보내고, 도대체 왜 아무도 애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건지 괴로웠지만 글을 쓰면서 본인의 복잡한 마음을 하나씩 정리했다. 아들을 키우면서, 병원과 싸우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본인만의 시간에는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그것이 무엇이든 쓰다 보면 정리가 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조금씩 가라앉힐 수 있었다.
“건강하게 시간을 견뎌내고 싶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절로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심리학과 교수 등 전문가 상담도 적극적으로 받고, 관련 책도 많이 읽으면서 건강하게 이 시간을 지나가려고 해요.”
KBS <인간극장> 프로그램을 통해 사연이 소개됐다. 최근에는 <지금 꼭 안아줄 것>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나왔다. 한꺼번에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아서 살짝 혼란스럽긴 하지만, 본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고맙고 기쁘다.
“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예요.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 그러니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꼭 안아주라는 것.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저에게 이메일이나 쪽지로 고민을 털어놓는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제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심리학 공부를 시작 할 생각이에요. 누구나 살다 보면 힘든 시기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때 제가 어떤 말씀이라도 건네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별하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눈앞의 사람도 언젠가는 차갑게 떠날 수밖에 없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시간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뼈저리게 느낀 그의 말대로, 우리에겐 가까이에서 느껴야 할 소중한 것들이 참 많을지도 모른다.
“아내와 마지막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면 뭘 했을까 정말 많이 생각해요. 아마도, 일 분이라는 시간을 가족의 얼굴만 보면서 보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