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 2년 노인 장기요양보험] [上] 자식 책임에서 국가 책임으로
출처 : 조선일보 사회 ㅣ 2010,07,01 03:30
나라가 간병 '효도'… 가족 갈등도 줄어
20명 중 1명이 혜택받아 노인들 건강도 더 호전, 생업에 바쁜 개인들 부모 봉양 부담 덜어줘
경남 창원에서 농사를 짓는 김경순(가명·63)씨는 지난 5년을 전쟁처럼 살았다. 시어머니(올 3월 89세로 작고)가 치매와 간 질환으로 누운 뒤, 친정어머니(82)마저 수시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병 수발로 파김치가 된 김씨는 건강보험공단이 운영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한달 이용료(1인당 월 129만~151만원)의 20%만 부담하면 간호사·요양보호사·조리사가 상주하는 노인전문요양시설에 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부모를 시설에 보낸다는 죄책감이 있었지만 김씨 자신도 60대에 접어들어 더이상은 한계였다. 김씨는 "시어머니가 욕창(褥瘡) 한 번 없이 돌아가셨다. 내가 직접 모실 때보다 두 분이 훨씬 편안하게 지내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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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경남 창원시 대산면에 있는 노인 전문 요양시설‘아름다운요양원’에서 이 시설에 머무는 노인들이
김연희 원장(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요양보호사들과 함께 율동을 하고 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노인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된 지 2년이 됐다. 2010년 6월 현재 65세 이상 노인 536만명 중 30만명이 요양등급을 받고 그중 26만명이 요양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노인 20명 중 1명(4.9%)이 이 제도의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이 제도 도입 전까지 노인 병 수발은 전적으로 자식의 몫이었다. 노인을 간병하느라 자식까지 생업을 잃거나 골병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최성재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은 한국인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제도"라고 했다. 노인이 늘고 노령기가 길어진 반면 자식 세대의 생활은 분주해졌다. 이에 따라 노인을 돌볼 책임이 개인의 어깨에서 국가의 어깨로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됐다. 노인 입장에서도 자식이 효자건 불효자건, 병들었을 때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장치가 필요해졌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김종윤(48)씨는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90)를 14년간 모시면서 4남매를 대학에 보냈다. 시어머니는 평소 며느리 김씨를 친딸처럼 아꼈지만 7~8년 전 치매가 오면서 한번 화가 나면 3~4일씩 잠도 안 자고 폭언을 퍼부었다. 김씨는 "당황스럽다가도 그 시기만 지나면 어머니가 아기처럼 순진하게 내 몸을 만지며 '고맙다'고 해 오히려 어머니가 안쓰럽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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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살려 2008년 9월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동네 노인 5명을 돌보고 있다. 지난 5월 간암으로 별세한 A할아버지(당시 87세)는 매주 김씨가 오면 친자식이 온 것처럼 반가워했다. 김씨는 할아버지를 목욕시키고 안마를 한 뒤 집에서 싸간 반찬을 나눠주곤 했다. A할아버지의 딸은 장례를 치른 뒤 김씨에게 "자식도 못하는 일을 해주셨다"고 고개를 숙였다.
경남 창원에 있는 '아름다운요양원'은 간호사·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조리사 등 총 11명이 한 팀이 돼서 집에서 모시기 힘든 60~90대 노인 17명을 돌보는 시설이다. 정원수가 우거진 넓은 마당(3300㎡·1000평)에 벽돌집(495㎡·150평)과 한옥(264㎡·80평)이 각각 한 채씩 있고 노인들이 한 방에 2~4명씩 머물며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식사·운동·목욕·오락을 한다.
강정자(가명·82) 할머니는 장남 집에 살다 장남 사업이 망해 3년 전 이곳에 들어왔다. 시설 이용료·간식비·약값·기저귀값 등 월 50만원은 어렵게 사는 차남과 딸들이 조금씩 모아서 낸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처음 들어올 때 할머니의 자식들은 서로 "평생 안 본다"고 했다. 장남은 "관절염·허리디스크·고혈압·치매가 겹친 어머니를 지금껏 모셨는데 동생들이 몰라준다"고 했고, 형제들은 "부모 재산을 독차지한 형님이 이제 와서 시설 비용도 대라고 할 수 있느냐"고 했다. 그러나 강 할머니가 요양원 생활에 순탄하게 적응하면서 자식들은 감정이 누그러졌다.
이태화 연세대 교수(간호학)가 보건복지부 의뢰를 받아 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는 노인 2만2725명을 조사한 결과, 노인들은 요양 서비스를 받은 뒤 의사소통 장애가 줄어들고(25.59%→19.18%) 연간 입원일수도 최소 이틀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가톨릭대 김찬우 교수가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이용하는 노인의 보호자 1000명에게 설문한 결과, 10명 중 8명(75.9%)이 "가족관계가 좋아졌다"고 답했다.
아름다운요양원의 김연희(55) 원장은 "여기 계신 노인들은 가족들이 어떻게든 잘 모시려 하다가 자기 몸이 부서질 지경이 돼서 요양원을 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 갈등도 적지 않다. 김 원장은 "요양원에 모신 뒤 노인의 건강이 호전되면 자식들 관계도 호전된다"고 했다. 김 원장 자신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시어머니(2006년 별세·당시 87세), 뇌졸중으로 쓰러진 친정어머니(2007년 별세·당시 85세)를 간병할 때 형제간의 갈등을 직접 경험했다.
최성재 교수는 "서구에서도 1970~80년대에 '노인 요양 제도가 정착되면 자식의 책임감이 약해져서 서로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려 할지 모른다'고 우려했지만 연구 결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우리나라 역시 국가가 노인 봉양의 1차 책임을 지고 자식이 국가의 역할을 보완하는 체제로 옮아가는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