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진달래
강 문 석
천지사방에 기화요초 피어나는 사월이 중순으로 접어들자 전국방방곡곡 지자체들도 시기를 놓칠세라 다투어 꽃 축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집만 나서면 거의가 공원이고 유원지로 바뀐 세상이 축복처럼 다가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범어사에서 북문으로 오르는 산길도 약간 경사진 것을 빼면 잘 가꾼 공원의 산책로처럼 정겹고 평안하다. 띄엄띄엄 쉼터에 벤치가 들어서고 나무데크 계단까지 여러 군데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창 봄을 만끽할 수 있는 평일의 한낮인데도 등산로에선 가뭄에 콩 나듯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너덜지대 바윗장 밑을 흐르는 청아한 계곡물 소리가 산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해준다. 화사한 벚꽃이 진 자리엔 연두색 잎이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고 코끝에 닿는 바람에도 꽃향기가 묻어있다. 늘 이맘때면 그래왔듯 북문 광장이 가까워지자 군데군데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어났다. 아파트 화단에 철쭉이 피어나는 걸 보면서도 왜 금정산의 진달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일까. 하마터면 산을 빠르게 오르기 위해서 금강공원에서 케이블카에 오를 뻔 했었다.
순간의 실수로 오늘의 만개한 진달래 탐방 기회를 놓칠 뻔 했으나 이렇게 찾게 되었으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금정산성 북문 일대에만 얼굴을 내밀던 진달래꽃은 이제 성을 따라 동문까지 이어진다. 금정산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굳이 여수의 영취산이나 강화도의 고려산, 거제의 대금산과 창원의 천주산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부산의 진산에서 그 정취를 만끽하면서 봄의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돈을 들여서 식재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진달래는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정과 한을 상징하는 꽃이라 그만큼 애정이 간다. '사랑의 희열'이라는 꽃말을 가진 진달래는 삼천리금수강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토종 봄꽃이기도 하다. 아주 척박한 땅에서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붉게 물들인 모습으로 꽃을 피우는 그 생명력은 잦은 외침 속에서도 연연히 이어오는 우리민족의 혼을 그대로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능선을 따라 걷는 이 구간은 조망이 시원한 것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동쪽으론 하얀 건물들이 그림처럼 다가오는 금정시가지와 그 너머의 회동수원지에다 고개를 약간 들면 장산과 해운대 그리고 광안대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론 종점에 다다른 유장한 낙동강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전방에서 마주오던 젊은 외국인 커플이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목례를 해왔다. 청년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넘겨받아 진달래꽃을 배경으로 서너 컷 풍광을 담아주자 엄지를 치켜세우며 “캄사합니다”를 연발한다. 네덜란드에서 찾아온 여행객이었다.
의상봉 밑 산불감시초소 근무자는 “와 노랑은 안 찍고 빨강만 찍능교?”란다. 그가 말하는 노랑은 길섶 바닥에 붙은 민들레와 노랑제비꽃이었고 빨강은 진달래를 이르는 것이었다. “아 예 북문 옆에서 미리 노랑은 다 찍어서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진달래 사진은 제대로 찍기가 쉽지 않다. 우선 동백이나 영산홍처럼 꽃의 색상이 화려하게 붉지 않고 가지가 벌어져 소담스럽게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옅어진 햇살을 역광으로 끌어들여 찍고 또 찍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김동환의 ‘봄이 오면’이나 ‘산 너머 남촌에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면서 빼놓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진달래는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기도 하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어린 시절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또래들과 고향집 앞산을 올라 꽃잎을 따먹던 추억이 살아난다. 진달래는 독성이 없어서 화전을 붙이거나 술을 담가서 먹었고 참꽃이라 불렀다. 여기에 비해 같은 시기에 피는 철쭉은 독성을 가져서 개꽃으로 불렀다.
지난주에 몰운대유원지 들머리에서 진달래꽃을 따는 할멈을 목격하곤 야단을 친 일이 떠올랐다. “여긴 바로 길옆도 아닌데 좀 따면 어떠냐?”는 대답에 “자연을 망치는 짓인 줄 알라”고 엄하게 나무랐던 것. 비닐봉지에 절반쯤 딴 할멈을 저지하여 길로 내려서고 보니 장애인 전동차에 앉아있는 할아범이 기다리고 있어서 곧바로 후회했다. 혹시 남편의 불편한 몸을 위해 채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자 노부부에게 연민의 정이 솟았기 때문이다.
진달래의 연분홍빛 꽃은 갓난아이 볼처럼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특유의 달콤한 향기는 방금 머리 감은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내음과 같아서 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자를 처음 알게 되었던 시절 한적한 길을 거닐며 손을 잡았던 그때 가슴 떨리며 흥분되었던 그 마음이 연분홍빛 진달래 꽃잎 색깔을 닮았을 것 같다. 진달래는 두견화라고도 부르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옛날 중국의 촉나라에 '두우'라는 천신은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인간 세상에 내려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단다. 급기야 천신은 백성의 신망을 받아 촉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촉나라는 위나라에 망하게 되고 두우는 도망하여 복위를 꿈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던 것. 한이 맺힌 두견새는 밤이고 낮이고 슬피 울었다. 죽은 망제의 혼이 된 두견새는 그 맺힌 한으로 피를 토하며 울었고 피를 다시 삼켜 목을 적셨다.
두견새의 피맺힌 한이 땅에 떨어져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진달래꽃이 붉어졌다. 두견새는 봄이 되면 더욱 슬피 우는데 특히 빛깔이 붉은 진달래꽃만 보면 더 슬프게 울었고 한번 우는 소리에 진달래꽃이 한 송이씩 떨어졌다고 한다. 두견새는 밤새 울기도 한다. 사위가 조용한 봄밤에 밤새워 우는 새의 울음소리를 듣다보면 정말이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쌓인 한이 없다면 어찌 저렇게 울 수 있을까. 봄밤에 밤새도록 우는 새의 울음은 안타깝고 절절하다. 모녀가 산에 올랐다가 봄꽃에 취한 어미가 목 놓아 울었다는 실화는 갈 길 바쁜 사람의 가슴에 큰 울림을 전하고도 남는다. 내 생애에 이러한 꽃놀이가 몇 번이나 더 있을까 하고 울었다니 더욱 애잔하다. 아직 금정산 진달래를 찾지 않았다면 이미지로 먼저 만나보고 서둘러 산을 올라볼 일이다. 인생은 즐기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첫댓글 진달래 사진도 찍는분 마음에따라 풍경이 사뭇달라보이네요 고문님과 자연이 서로 소통하는듯 보입니다~~!!^^
Have good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