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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황상운 교도. |
| 바위산 꼭대기에 푸른 싹이 돋아났습니다. "아! 눈부셔."
새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어? 이게 뭐야? 온통 돌멩이와 바위뿐이잖아!"
예쁜 꽃과 친구들이 반겨 줄거라 믿었던 새싹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내리쳤습니다. 후드둑! 후드둑! 빗방울이 온몸으로 떨어지는 순간 새싹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야. 아야. 너무 아파." 여린 새싹에게 빗방울은 묵직한 방망이 같았습니다.
새싹은 차갑고 묵직한 빗방울을 맞으며 이리저리 휘청거리다가 그만 벼랑 밑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악, 여 여긴…." 새싹은 그제야 자기가 서 있는 곳이 벼랑 끝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우루룽-쾅! 천둥소리가 크게 울릴 때 새싹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밤새 쓰러져 있던 새싹이 드디어 눈을 떴습니다.
"이제 정신이 드니?"
새싹 옆에 있는 바위할머니였습니다.
새싹은 다시 한 번 아찔한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덜컥 겁이 나 뿌리에 잔뜩 힘이 들어 갔습니다. 새싹은 푸념하듯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왜 바람은 나를 이런 곳에 떨어뜨리고 갔을까요? 나도 다른 씨앗들처럼 기름진 땅에 자리 잡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부러워 말거라.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동물들의 먹이가 되는 씨앗도 있고 땅 속에서 썩어버리는 씨앗도 있단다. 그에 비하면 넌 아주 다행이잖니?"
"다행이라고요? 언제 저 아래로 떨어질지 모르는 이런 곳에서 자랄 수나 있겠어요? 바깥세상이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무슨 소리! 나무가 되려면 땅 속에서 나와야지. 넌 씨앗을 품고 싶지 않니? 힘든 시간이 지나면 너도 멋진 나무가 되어 씨앗을 품을 수 있을 게다."
"씨앗이라고요?"
새싹은 어렴풋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씨앗을 품었던 나무가 손을 흔들며 마지막으로 외쳤던 목소리가 아련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습니다.
"안녕, 아가야! 어디든 날아가서 꼭 멋진 나무가 되렴." 새싹은 씨앗일 때부터 꿈 꿔 왔던 일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맞아. 난 멋진 나무가 돼야 해. 그래서 꼭 씨앗을 품고 말거야.' 새싹은 더 이상 절벽 아래를 보지 않았습니다. 꿈을 다시 찾은 날부터 새싹은 달라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해가 반짝하고 떠오르는 날에는
"굳이 해님 얼굴을 볼 필요가 뭐 있어? 그냥 이렇게 따뜻함을 느끼면 해님이 내 머리 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에는 "아파도 참아야 해. 먹구름은 금방 지나갈 거야."
새싹은 바깥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어느덧 새싹의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도 길게 뻗어 나갔습니다. 굵은 빗방울이 온몸을 내리쳐도 예전처럼 아프지 않았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바위할머니처럼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숱한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새싹은 서서히 푸른 소나무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소나무는 낭떠러지 밑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아찔하게 높았지만 전처럼 떨어질 것 같은 마음은 조금 덜했습니다. 절벽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도 볼 수 있고 물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위할머니. 이제는 낭떠러지 밑을 봐도 전처럼 많이 무섭지 않아요."
"그래,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법이지. 나도 아주 오랫동안 쓸쓸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니 네가 날 찾아와 주지 않았니?"
소나무는 그날 밤 하늘에 빛나는 초롱초롱한 별빛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높은 벼랑 위에 있으니 별이 참 가깝게 느껴지는구나. 바위할머니도 저 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래었겠지?'
다음 날 소나무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소나무야! 네 머리 위에 둥지를 틀어도 되겠니?"
독수리가 소나무 주위를 돌며 말했습니다.
"정말? 여긴 벼랑 끝인데 그래도 둥지를 틀겠니?" "괜찮아. 새끼들이 나는 훈련을 하려면 여기가 딱 좋은 걸."
독수리의 말에 소나무는 들 뜬 마음으로 기분 좋게 허락했습니다. 독수리는 소나무 머리 한 가운데 둥지를 틀고 한 개의 알을 낳았습니다.
소나무는 혹시라도 알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뿌리에 힘을 꽉 주었습니다.
독수리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얼마가 지났습니다. 빠지직 빠지직 둥지에서 소리가 나더니 독수리 새끼가 태어났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나르느라 바빴습니다.
소나무는 아기 독수리가 태어나자 마치 제 새끼라도 되는 양 비바람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벼랑 끝에서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네 새끼를 벼랑 끝으로 떨어뜨리다니?"
어미 독수리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를 테니까."
어미 독수리의 말이 끝나자 정말 놀랍게도 아기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었습니다.
소나무는 말없이 날아가는 아기 독수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바위할머니도 살며시 웃음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나무에게도 솔방울이 생겼습니다. 솔방울 안에는 작은 씨앗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드디어 씨앗을 품은 멋진 나무가 된 것입니다.
소나무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떨어뜨리듯 씨앗들을 몸에서 떨어뜨렸습니다.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갈 때 소나무는 손을 흔들며 외쳤습니다.
"안녕! 아가야. 어디든 날아가서 멋진 나무가 되렴."
아주 옛날 자기를 품었던 소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씨앗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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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김선일 교도/강동교당 |
|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하고 그림책 〈누구 발자욱이지?〉, 위인동화 〈나이팅게일〉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지금은 유아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틈틈히 동시와 동화를 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