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6 : 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7. 중언부언하지 말라 8. 구하기 전에
마 6 : 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주께서는 권고하신 기도는 골방 기도다.
골방 기도가 가장 이상적인 기도로 참으로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기도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나는 기도한다’라고 알리거나 보이려 하거나 또 사람들에게 말하는 기도가 아니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참으로 바른 기도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기도를 들으시며 ‘드러나게’ 갚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좋은 것을 드러나게 주실 것이다.
1]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
* 왕하 4: 33 -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등을 가지고 있다.
2] 문을 닫고
* 사 26: 20 -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사 26: 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마지막 심판 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런 심판 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습관화하기 원하셨던 것 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3]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신다.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주께서 앞에서 은밀한 구제를 가르치심 같이 여기에서 은밀한 기도를 가르치신다. 골방의 기도가 가장 이상적 기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기도이다.
사람에게 '나는 기도한다.'고 나팔을 부는 기도가 아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기도를 들으시며 '드러나게'(전통사본)갚으실 것이다.
마 6 : 7. 중언부언하지 말라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중언부언’은 주문을 외우듯이 헛된 말을 반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간절한 기도를 할 때 말의 반복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당하겠지만, 무조건 말이 많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기도이다.
구제와 기도할 때 은밀한 중에 할 것을 권하고 계시며 또한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지적하신다. 중언부언에 원어의 두 단어가 나타나는데battologhvahte(바토로기아: 말더듬) 필요없는 말의 반복이며polulogiva/(포뤼로기아: 다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인격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바른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면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 사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우리의 영적 유익이 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롬 8: 28).
1]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이 세 번 언급되고 있다(5: 47. 6: 32). 본문은 두 번째의 언급이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인접해 있기에 자연적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그들과 섞여 살았다. 그들은 이방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동을 비난함과 아울러 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치셨던 것같이 이들 이방인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는 기도의 장소와 그 동기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면, 본문은 내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2] 중언부언 하지 말라.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어원도 분명치 않으므로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Erasmus).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의미 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呪文)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神)을 질리게 했다.
* 왕상 18: 26, 28 -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3]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 사 65: 24 -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 히 11: 6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께서는 기도의 말에 대해서도 가르치신다.
그는 이방인들이 하는 중언부언의 기도를 경계하신다. 기도의 간절함에서 나오는 말의 반복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그러나 무조건 말이 많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인격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바른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면 많이 기도함이 무의미하고 무력(無力)하다.
마 6 : 8. 구하기 전에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인격적이게, 차근차근하게 기도할 것이며, 기도하기 전에 기도할 내용을 생각하며, 중요한 기도 제목들을 묵상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대화의 주제를 먼저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들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시지만, 하나님의 일들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 겔 36: 37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1]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强化)되어 쉽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신앙관에 미혹되어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지 말라는 당부이다.
* 왕상 18: 26-28 –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아시느니라'(*, 오이덴)는 말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직관적 인식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전부터 간구하는 자의 삶에 깊이 개입해 오신 분으로서 그 필요(necessity)를 익히 알고 계신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당신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원하시기 때문에 구하기를 원하신다(Hill). 그래서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기도와 많은 노력을 통해서 탈취하듯 복(福)과 소원을 가져옴으로써 그 간구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헛된 말만 반복하는 이방인의 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 할렐루야!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영적 유익이 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독생자를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그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다.
우리가 이 사실을 참으로 인식한다면, 우리 기도는 정돈되고 안정되고 신중하게 드려질 것이다.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기도할지를 생각하게 되며, 기도 제목을 묵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대화의 주제를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기도의 주제를 생각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의 세계에서도 '우는 아기에게 젖을 준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세계에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이상을 주신다.
* 엡 3: 20 -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것까지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가져오는 우리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신기한 방법이다. 우리가 기도하되, 중언부언하지 말고 정돈되고 안정된 신중한 기도를 드리도록 힘써야 한다.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의 문을 엽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마음의 문을 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