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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겸손과 세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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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11 04:48
- 겸손과 세례
오늘 복음은 내일 주님의 세례 축일을 앞두고
주님과 세례자 요한이 한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의 세례가 더 정통인지
설왕설래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지요.
그리고 두 분의 제자들 사이에는 경쟁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세례자 요한도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려는 분이 아니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분이고 그런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게 하는 분들이었으면 두 분은 경쟁하셨을 겁니다.
나란히 횟집을 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들어오게 하려고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꾼들처럼 경쟁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고,
요한은 자기를, 그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우리를 주님께로,
주님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그분들이 베푸는 세례이고,
우리의 세례는 그 인도를 따라 주님과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분 사이에 경쟁은 없고 서로를 추어줍니다.
주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 가운데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고,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오늘 복음에서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모두 하느님을 지향하면 그분 앞에서 모두 작아지지만,
세상에서 자기의 성공을 지향하면 서로 경쟁하며 커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경쟁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그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저 경쟁을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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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11 05:57
학창 시절의 사회 친구 중에는 벌써 희망 퇴직한 친구들이 꽤 됩니다.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권했고, 이제 이 회사에 자기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퇴직하고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하는 일자리만 있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50대에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 참 속상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80이 넘는 나이임에도 서로 데려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이 최강야구의 감독이 바로 80대의 김성근 감독님이십니다. 최강야구 단장이 직접 찾아가 “감독님,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80대에도 취업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80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80대에도 사람들이 불러줄까요? 80대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지금 자리에서 일류, 즉 그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모습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들 만큼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고유함을 찾기보다 남들 따라 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면 끝까지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르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를 대치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남처럼’이 아닌 ‘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유함은 주님 안에서 그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때, 나의 고유함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던 사랑과 존경이 이제 예수님께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점점 줄어들고, 역사 안에서 사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원조 맛집이 있는데, 그 옆에 똑같은 메뉴로 식당이 생겼습니다. 원래 원조 맛집이 더 장사가 잘될 것 같지만, 오히려 나중에 생긴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입니다. 원조 맛집의 주인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옆집이 장사 잘된다고 기뻐할까요?
세례자 요한 역시 화가 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고유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이라는 자기 고유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 목적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으며, 주님 뜻에 따라서 자기 고유함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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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연이 하는 일에는 쓸데없는 것이 없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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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통해서, 빛이신 예수님이 선포됩니다. 그가 자신을 증언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은 그 자신을 비운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절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상대에게로 건너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그토록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하였을까요?
자신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지 않고 상대를 향하여 있었던 까닭일 것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한은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신랑을 향하여 있을 때라야 신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가 친구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었습니다.”(요한 3,29)
그렇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친구를 향한 까닭입니다. 친구인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할 때 우리는 비어집니다.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친구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떠나와 우리를 ‘친구’(요한 15,15)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역시 그분을 ‘친구’라 부를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때일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당신을 향하여 나아가는 바람에 자신에게서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향하여’ 희망을 두고 있는가? 오늘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랑’과 ‘신부’의 성경적 표상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상합니다(예레미아, 에제키엘, 호세아). 그리고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또한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자의 영혼과의 사랑을 아름답게 비유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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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고,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봅니다. 어떤 이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소신도 없어야 하고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고 합니다. 오늘날 정치판이 가관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헌신과 희생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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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목회 송년 모임이 있었습니다. 부부 동반으로 함께 했습니다. 모두 단정한 복장으로 모였습니다. 시작하면서 봉사자의 자세라는 ‘동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있는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사람에게는 알맞은 능력을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동영상은 한국에 있는 분이 보내 주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듯이 포도주와 곁들인 식사가 마련되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재미있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8개의 원형 테이블이 있었고, 테이블당 팀장을 뽑았습니다. 첫 번째 게임은 각자가 자신을 나타내는 특징 5가지를 적어내는 거였습니다. 저는 ‘하얀 머리, 로만 칼라, 검은 옷, 미소, 미사’라고 적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을 소개하는 특징을 적어서 사회자에게 제출했습니다. 사회자는 그중에 하나를 뽑아서 불러주었습니다. 못 맞출 것 같았는데 사회자가 2가지나 3가지만 이야기해도 잘 맞추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못 맞출 것 같았는데 서로에 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서 다들 잘 맞추었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남극에 있는 펭귄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새끼를 위해서 멀리 먹이를 찾으러 떠났던 엄마 펭귄은 반드시 자기의 새끼에게 먹이를 주었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성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인은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너희를 잊지 않는다.”
다음 게임은 음악의 첫 도입부를 듣고 제목을 맞추고, 팀원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게임이었습니다. 음악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멜로디인데 손을 들고, 제목을 맞추었습니다. 진행자가 다른 노래라고 하니, 아니라고 하였고 결국 진행자가 잘못 알았던 노래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는 노래의 멜로디가 나왔는데 손을 늦게 드는 바람에 다른 팀에서 맞추었습니다. 모두가 집중하면서 노래의 첫 멜로디를 듣다 보니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께로 갈 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눈빛만 보셔도, 우리의 옷차림만 보셔도, 우리의 발걸음만 보셔도 금세 알아보실 것 같습니다. 10개월이 조금 넘었는데, 저도 그날 모인 분들의 세례명은 거의 다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숨소리만 들으셔도 우리를 알아보실 겁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님이 평생 삶의 길잡이로 삼았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는 발걸음을 신중하게 하여라, 지금 네가 가고 있는 길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아시니, 우리의 발걸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발걸음이 되면 좋겠습니다.
점수가 가장 높은 게임이 있었는데 진행자가 마음속으로 정한 숫자를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이 또한 저는 도저히 맞출 수 없었을 것 같았는데 감수성이 예리한 분들이 있어서 잘 맞추었습니다. 진행자는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를 생각했고, 어찌 알았는지 그 숫자를 맞추는 분이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2025년은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숫자를 생각했고, 어찌 알았는지 그 숫자를 맞추는 분이 있었습니다. 끝으로 수도자, 부제님, 성직자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드는 게임을 했습니다. 각 팀에서 재치 있게, 재미있는 삼행시를 만들었습니다. 지나친 음주와 지루한 송년 모임도 있는데, 사목회에서 잘 준비해서 의미 있고, 재미도 있는 송년 모임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2024년을 보냈으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2025년에도 크신 사랑과 은총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업적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면 당연히 신부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기뻐하며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귀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2025년을 지내는 우리의 발걸음이 겸손과 사랑의 발걸음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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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모두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기도 부탁도 하고, 또 스스로 열심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내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으시도록 주님 앞에서 열심히, 정성을 다해 기도하지요. 누구 처럼요? 오늘 나오는 나병환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누구나 다 부자가 되게 기도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누구나 다 권력을 얻기 원하고 또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대통령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통령이 장사도 하고, 머리도 깎고, 회사도 다니지 않겠습니까?
오늘 나병환자가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와 맞을 때, 하느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조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육지와 바다를, 해와 달을, 낮과 밤을, 동물과 식물, 남자와 여자,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룹니다.
하느님의 뜻은 조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다 부자 되길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눔의 은총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눈을 가리지 않고, 나눌 수 있다면 모두가 부자가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권력을 달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큰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나병 환자처럼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에 합하여 지는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며 동시에 내가 바라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며 살아갑시다.
⭐빛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일명 스타라고 하는 유명인들이 플래시 앞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연신 터져 나오는 플래시는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빛나는 그들을 찍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의 하루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바라고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기를 말입니다. 또한 빛나지 않는 자기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그들의 하루처럼
우리의 하루가 찬란한 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이 찬란한 것이니까요.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찬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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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나의 발견인 겸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를 깨닫는 과정은 나를 아는데에서 시작한다. 그 끝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알고 어진 자는 자신을 사랑한다.”<순자>
자신을 알아서 사랑하는 자가 지혜롭고 겸손한 자입니다. 지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매력적인 사람들이요 존재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흡사 예수님의 배경처럼 생각됩니다. 자기는 사라지고 예수님을 환히 드러내는 배경의 겸손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소망”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커져서
텅 빈 공(空)이 되고
작아져
흔적없는 무(無)가 되어 살 수는 없을까
물러나
하늘 배경이 되고
내려와
땅 마당이 되어 살 수는 없을까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무아(無我)의 삶이겠다
진아(眞我)의 삶이겠다”<1999.12. >
이런 경지야 말로 겸손의 절정이자 극치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고 세례자 요한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이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품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준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요한의 겸손한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흡사 두분이 경쟁관계에 있는 듯, 질투심이 날만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합니다.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그의 겸손과 지혜를 반영합니다. 마음이 투명하기가 가을 하늘같습니다. 전혀 질투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예수님의 존재가 하늘 섭리의 결과임을 깨닫는 지혜로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이듯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이 겸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충만하다. 그분의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랑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요, 신부는 우리 믿는 이들이요, 신랑의 친구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신랑 예수님의 기쁨은 그대로 세례자 요한의 기쁨입니다. 겸손의 기쁨, 겸손의 아름다움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배경처럼 자기가 전혀없는 세례자 요한의 순수한 마음, 아름다운 겸손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세례자 요한이야 말로 겸손의 모범입니다. 겸손의 여정은 날로 그분 예수님은 커지시고 나는 날로 작아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날로 작아질 때 나는 “없어지는(lose)”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참나를 “발견하게(find)” 됩니다. 예수님은 날로 커지고 나는 날로 작아질수록 참나의 실현이자 구원입니다. 자기를 잃음으로 자기를 얻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요한 사도가 말하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겸손한 이들의 청을 들어주시며,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지켜 주시어 악마가 손을 대지 못합니다.
제1독서 요한1서, 주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 역시 겸손한 분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겸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작아진 겸손한 사람, 사도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예수님께 정통한 요한인지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예수님을 알고 참나를 아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참 멋지고 아름답고 겸손한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요한이나 막상막하의 겸손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겸손입니다. 하느님께 태어나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참되신 분 하느님 안에서 있을 때 참나의 상실이 아니라 참나의 실현이요 발견이요 구원입니다. 요한 1서를 멋지게 장식하는 사도 요한의 마지막 말씀이 평생화두로 명심할 말씀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우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참된 겸손의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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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나와 나의 그분 사이에>
욕심 가운데에 으뜸은
사람 욕심일 테지요
사람을 제 것 삼으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이에요
모든 욕심의 뿌리가
사람 욕심 아닐까싶네요
사람을 갉아먹는
온갖 더러운 욕심들은
사람 욕심의
또 다른 얼굴들이고요
돈이든 힘이든 자리든 연줄이든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안달하는 까닭도
그저 사람을 얻기 위함 아닐까요
자기 사람 만들려다 안 되니까
자기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의 사람이니까
시샘하고 미워하고 욕도 하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사람 사는 세상에 말이지요
내 사람 네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그냥 사람이지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그를 빚으신 분의 사람 말이에요
그분의 사람인 내가
그분의 사람인 누군가를
마치 그분 없는 나의 사람인양
어찌 나에게 얽어맬 수 있을까요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놓아주어야지요
오직 사람 내신 분에게 사람을
곱게 보낼 수 있도록 말예요
그분께서 앞서 보내신 내가 늘 그분처럼
모든 이를 정성껏 보듬어야겠지만
내가 결코 그분을 가리는
거추장거리 안 되길 바랄 뿐이죠
누군가 나와 함께 하기에
마냥 좋고 편하고 행복하다 한다면
나를 통해서 그분을 만났으리라 생각하며
살며시 옅은 웃음 지으면 그뿐이고요
어쩌다 누군가 나에게
그저 머물려는 듯싶으면
내가 아니라 그분이라며
한걸음 더 가라고 다독여야지요
사람을 내신 그분은 커지시고
그분이 내신 나는 작아져
나는 아쉬움 없이 사라지고
그분만 남는 언젠가 마침내
나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내가 아니라 나의 그분을 만나기를
사람 욕심 찌꺼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부족한 마음으로나마 기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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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3,25)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옹호하다
요한이 세례를 주었고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흥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있었고 요한에게도 사람들이 왔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라고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요한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지들은 놀라 유대인들과 말다툼을 시작했는데, 이는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훨씬 위대한 인물이며 그분의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아직 그렇게 이해하지를 못하고 요한의 세례를 옹호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요한에게 답을 얻고자 왔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 달리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스승님께 오도록 그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모든 피조물은 순수한 무입니다. 천사도 피조물도 아무개(有)가 아닙니다. 그들은 무에서 지어졌기에 부정합니다. 그들은 지금운 물론이고 전에도 무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싫어하는 것이 바로 무입니다. 그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바로 무입니다. 내가 나의 손바닥 위에 이글거리는 숯불을 올려 놓자마자. 그 숯불은 나에게 고통을 줄 것입니다. 이 고통은 바로 “무”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무”가 없다면, 우리는 부정하지 않을것입니다.
이 보기에서 . 액카르트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가 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무가 하느님의 무나 우리네 지성의 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무나 우리네 지성의 무는 우리에게 만물 - 가령 숯불과 같은 것 - 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를 다른 사물로부터 분리시키는 무, 곧 사라질 수 있고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무가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엑카르트는 우리네 피조물의 근원인 무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엑카르트는 무를 이렇게 뜻매김한다. “무는 무에서 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유는 유에서 유를 받아들인다." 엑카르트는 본 설교에서 무를 여의려면 - 없는 것이 없게 하려면 - 만물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은 순수한 무입니다. 나는 그들이 아무 가치도 없다거나 그들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순수한 무일 따름입니다. 존재를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나 무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 여부는 하느님의 현존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잠시라도 모든 피조물에게서 등을 돌리신다면. 그들은 무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31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유교기 하나의 세계 종교라고 주장하는 금장태는 한국 유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유교는 한민족에 전래된 최초의 보편적 사상이요 종교라는 점이다. 둘째 , 유교 사상은 한민족 사회의 통치 이념과 제도 및 사회 도덕 규범으로서 깊이 뿌리를 내려 가치론적으로 사회 통합적 기능을 해왔다는 점이다. 셋째, 유교는 개인과 가정의 윤리 의식 , 가치 질서 의식 , 의식에 내면화되어 있어서 겉으로 나타난 의식 차원에서는 탈유교화한 듯히지만 내면적 의식 차원에서 아직도 강렬한 삶의 규범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목적은 유교가 지향하는 것, 앞의 인용문에서 뚜웨이밍이 언급한 바 있는 유교적 인간이 지향하는 자기 초월성의 근거와 가능성으로서 유교가 이해하는 내재적 초월자, 인간의 도심(道心)과 천(天) 사상을 실펴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대우주 자연의 상호 관계성에 집중함으로쩌 ,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교가 어떻게 지평 융합되어 왔는가 그 일면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2,500여 년의 간 유교 정신사 속에 흐르는 유교의 천 사상을 한두 마디로 간추리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공자와 맹자 시대의 유학 정신, 이른바 원시 유가의 유학 정신과 11세기 전후로 유교가 불교나 노장 사상의 도전과 자극을 받아 형이상학 체계를 발전시켜 갔던 신유학 시대의 그것으로 대별해서 볼 때, 원시 유학 시대는 대체로 주재적 (主宰的) 천(天)사상이 농후하던 때요, 신유학 시대는 이법적(理法的) 천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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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작아진 만큼 더 커지는 진리를 /
박윤식 [big-llight] 250110. 19:35 ㅣNo.179206
영성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직면하는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이냐?’, ‘나냐?’ 하는 물음에서의 선택일 게다. 매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으려는 집착에만 빠진 지금의 나 때문에, 우리는 내 안에서 예수님을 아예 멀리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에 온통 못된 나만 자리 잡게 만들기도 한다. 마음 밑바닥에서 예수님과 경쟁을 해서 내가 이기고자 애쓴다. 이러다보니 믿음의 삶을 산다지만, 어떤 때는 그 도가 너무나 지나쳐 결국은 허무한 영적인 패자가 되기 일쑤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이처럼 분명히 밝힌다. 그는 때와 분별력을 갖춘 단지 그분보다 먼저 이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리 때문에 ‘어정쩡한 삶’을 사는지? ‘저긴 내가 가야 할 자리지, 나에게 꼭 어울리는 자리지.’라며 착각하곤 한다. 하여간 모르긴 몰라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나.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분과의 관계를 외쳤고, 그곳은 꼭 자신이 머물 자리가 아니라고 믿었다.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푹 숙인다. 실력 있는 이도 누구나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일 게다. 물론 실력 있다고 다 숙이는 건 아니리라.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다니는 시건방진 이들도 더러는 있더이다. 실력과 함께 ‘겸손을 가진 이’만이 자신을 요한처럼 낮출 줄 안다. 그런 이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반드시 표가 난다. 내면이 바깥에 드러나기에. 익은 벼가 숙이는 건 간단하다. 알이 찼기에. 하지만 설익은 벼는 숙이고 싶어도 못 숙인다. 알이 여물지 않았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학식이 높고 명성이 자자하더라도 숙일 줄 모른다면, 설익은 벼와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게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말해주는 가장 함축된 말일 것이다. 떠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자신의 역할이 끝남을 알았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라고 그를 칭찬하셨다. 지금껏 어느 누가 감히, 예수님께 이러한 말씀을 들을 지?
사실 인간적 면에서는 어쩜 두 분은 당대에 지극히 대립적 관계일 수도. 잉태 배경이나 탄생 시기로 보아 또래이시며 친척이셨고, 두 분 다 여러 제자를 가까이에 불러 가르침을 주셨기에. 어쩌면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며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훨씬 더 멋진 구도자처럼 보이기도 했을 게다. 더구나 망나니들과 함께 다니신 예수님보다 요한이 어쩌면 더 존경을 받았을 수도.
그럼에도 요한은 진작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라고 광야에서 외쳤다. 요한은 그렇게 그릇이 큰 겸손한 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조금만 스스로를 낮추면 큰 그릇으로 비칠 수 있는데, 종종 이를 외면해 난감을 겪기도. 내 아니면 결코 안 된다면서 겸손을 저버려, 주어진 은총마저 잃곤 한다. 자리에 연연하다 추한 꼴 보이기도. 신앙생활 할 만큼 한 이마저 이런 처신으로 만신창이 수모도 더러 받았었다.
이렇게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친교를 기뻐하였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그르다는 생각에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강력 거부하는 현 세태에, 요한이 보여 준 겸손으로 남을 위한 배려로 바뀌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작아지는 만큼 커진다는 진리를 기필코 터득하자. 이처럼 점점 더 작아질 때에, 예수님은 더욱 더 커지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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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1.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느 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이야기합니다.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그런데 요한이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29-30).
요한은 참으로 겸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경쟁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인류 최초의 죄는 하느님과 한 경쟁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어느 날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
하느님을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와가 저항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뱀이 유혹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까 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람이 자신처럼 되지 못하도록 시기하시고 경쟁하시는 분으로 의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원조들은 마침내 하느님에 대한 의심과 경쟁심으로 타락하고 말지요.
오늘 요한은 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으로 커지셔야 하고 우리 자신은 작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멋진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 최고의 사랑스러운 동반자, 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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