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소리 / 김희자
천지가 암흑이다. 어둠과 적요에 몸이 떨린다. 오전 열한 시쯤 되었을까? 초침 소리가 들리지만 나는 벽시계를 볼 수 없다. 옆 환자들은 오수에 들었는지 사위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빛이 없는 세계를 보며 나만의 암흑 속에서 산 지 어언 십 년. 나의 무의식 속에 무엇이 남았기에 아직도 이 어둠이 두려운가. 어둠보다 더 두려운 건 침묵이고. 나를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소리이다. 소리는 내 어둠을 어루만져주는 친구나 다름없다. 오늘따라 박 씨들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깊은 침묵 속,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들리는 것이 있다. 영혼이 고요할 떄 가장 미미하고 가벼운 것들의 존재가 느껴진다. 침묵을 깨는 한줄기의 미풍, 벽시계의 초침 소리, 복도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태양이 대지를 내리쬐는 소리, 작은 파리의 날갯짓 소리…. 마음의 소원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는 신의 음성 또한 들려온다.
눈 뜬 봉사가 되었지만 내 귀는 사통팔달이다. 말문을 여는 입은 볼 수 없지만, 말투에서 표정까지 읽어낼 수 있다. 내 기저귀를 갈아주는 간병인의 생김새와 상처를 치료해주는 간호사의 표정 또한 말하는 본새로 알 수 있다. 그들이 속삭이며 하는 말도 내 귀속으로 흘러든다. 복사뼈에 생긴 욕창을 치료하며 '상처가 더하네, 덜하네!' 속삭여도 또렷이 들려온다. 어떠한 말이 귀에 들어와도 소리 없는 소리로 나를 다스린다.
무력시위를 시작한 지 달포가 되어간다. 단식투쟁을 하다가 가족들의 성화에 한발 물러섰다. 이놈의 본능을 어찌하나. 아침에 죽을 몇 술 뜨지 않았더니 벌써 허기가 진다. 부쩍 집이 그리워져 미칠 것만 같다. 좋든 싫든 할멈과 이미 맞대고 살던 때가 그립다. 아옹다옹,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땟거리가 없어 당장 굶을 지경이었어도 그때가 호시절이었다. 흐르는 시간을 따르다 보니 남은 건 병든 육신뿐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 앞은 암흑천지다. 밤낮없이 지다가도 무료해지면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더듬는 버릇이 생겼다.
집에 가고 싶어 시작한 단식투쟁이다. 하지만 분노는 분노로 되받아치지 않는 가족들이 고맙기만 하다. 때때마다 죽을 쑤어 한 시간씩 걸어오는 할멈과 며느리. 에어컨이 아니면 버티기조차 힘든 무더위인데 때를 잊지 않고 찾아와끼니를 챙겨준다. 보호자가 필요 없는 병실이라 간병인이 챙겨줄 텐데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입맛을 잃은 지 오래지만, 식솔들의 수고로움에 죽 한 컵은 애써 삼킨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할멈과 며늘아기가 다녀가면 지독한 공허감에 시달린다. 시간과 싸움이 시작된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것이 상책임을 뻔히 알면서도 시간은 스스로 치유할 깜냥을 주지 않는다. 육체적인 장애가 정신적인 장애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비우기엔 인색하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던져진 존재가 인간이라 말하지만 나는 아직 정신수양이 부족하다. '참을 인' 자 셋이면 늑대도 양이 된다는데 내공이 빈약할 따름이다.
사람들이 며늘아기와 할멈을 효부 열녀가 따로 없다며 칭찬 일색이다. 요양병원에 맡겼으면 가끔 병문안만 와주는 것이 상례인데 내 가족처럼 때때마다 찾는 일은 드물단다. 밥 수발에 소홀하지 않겠다며 간병인이 떠밀어도 식구들은 나를 버려두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암만, 암만……. 이런 호강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지만, 가족들에게 짐이 되어 때론 미안하다.
나는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멀고 두 발에는 욕창까지 생겼다. 가려움증까지 있어 팔뚝에는 효자손이 매달려 있다. 집에서 해왔던 것처럼 할멈이 효자손을 내 팔에 묶어 두고 갔다. 나는 그것으로 가려움증을 해소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는 정말 효자손이 따로 없다. 복사뼈에 생긴 욕창을 치료받기 위해 하루 두 번 광선치료를 받는다. 거동이 불편한 나를 간병인들은 낑낑대며 휠체어에 태워 치료실로 간다. 거구인 나를 휠체어에 옮기는 수고 또한 모를 리 없다. 투덜대는 말이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 내 몸뚱이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남의 몸을 옮겨야 하는 그들의 수고를 어찌 모르랴.
좌측 침대에 있는 박 씨는 그 옆 침상에 있는 서 씨와 자주 싸운다. 싸움이라기보다 서 씨가 일방적으로 당한다. 텔레비전 때문이다. 박 씨는 리모컨을 자기 것인 양 독차지한다. 그러면서도 중풍으로 누워 지내는 서 씨에게 타박을 준다. 말까지 어둔한 서 씨는 이름처럼 영락없이 당한다. 따지고 보면 서 씨가 이 병실에서 선임자이다. 입원한 지 칠팔 년이 되었다니. 그런데도 입심 좋고 몸이 성한 박 씨가 방장 노릇을 한다. 우측 침대에 있는 박 씨는 허구한 날 오징이 젓갈 타령이다.냉동실에 오징어 젓갈이 가득해도 가족에게 연락하라며 실랑이를 벌인다. 젓갈을 핑계 삼아 가족들을 불러들이고 싶은 것이다.
집에 가겠다고 곡기를 끊었더니 내 팔과 다리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식구들이 영양제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시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도 나는 시위를 그만두고 싶지 않다.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아도 내 집에서 숨을 쉬다 죽고 싶다. 할멈의 체온을 느끼고 숨소리를 듣고 싶다. 이 또한 나 혼자 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하다.
아침이라고 눈을 떠도 밤이라고 눈을 감아도 내 앞은 암흑천지다.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간호사가 와서 혈압과 혈당을 재고 갔다. 나는 밤에 잠을 못 잤다고 버릇처럼 투정을 부렸다. 눈 뜬 봉사인 나에게 낮이 어디 있고 밤이 어디 있겠는가? 간병인이 와서 아무렇지 않게 내 기저귀를 갈아 끼우고 나는 아침 식사를 기다리며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하루는 늘 시작되었다.
몸이 가렵다. 효자손 거머쥐고 등을 긁는다. 가려운 데를 남이 알 리 없으니 내 몸은 내가 긁어야 한다. 옆 침대 박 씨가 "그 참 그만 좀 긁지?" 하며 혀를 찬다. 나는 "그 참 옮는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소!"라며 되받아친다. 박 씨의 면박이 또 이어진다. "옮기는 게 아니면 왜 그렇게 빡빡 긁소!" 더는 말이 필요 없어 나는 입을 봉해버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박 씨가 일어나 티브이를 켠다. 전국노래자랑이 재방송 되는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요하던 병실이 침묵을 깨며 부산해진다. 일층 식당에서 밥 냄새가 계단을 타고 솔솔 올라온다. 점심시간이 멀지 않았음이다. 오늘 점심 수발 당번은 누구일까? 병실 밖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이쪽으로 누군가가 오고 있다. 아주 익은 발걸음 소리다. 육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의 걷는 소리이다. 그 발걸음 또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소리 없는 소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