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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병무기자 스크랩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무명용사 스토리가 발굴되었어요.
호박조우옥 추천 0 조회 124 15.05.19 19: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무명용사 스토리가 발굴되었어요.

 

 

 

어느 누구든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더라도 국가를 위해 몸바쳤는데 잊힌 분들이 이 땅에 아직도 많아 후손된 자로서 부끄럽습니다. 지난 3월 말 국방부는 반가운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6·25전쟁 65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분 가운데 12명 무명용사에 대한 사연을 발굴했다는 내용입니다. 수십 년 외롭게 남겨졌다가 빛을 보게 된 그분들 사연은 무엇인지 서울 현충원을 찾았습니다. 

 

 

 

5월 초 토요일, 서울현충원은 신록과 활짝 핀 꽃으로 싱그럽습니다. 마침 <해설이 들리는 현충원 견학>

프로그램을 하기에 잠시 따라가 보았습니다.

 

 


 

현충탑 내부에 있는 위패봉안관에서 자원봉사자가 열심히 설명하십니다. 사방 벽에 새겨진 것이 6 · 25전쟁, 월남전쟁 등에서 전사하고도 유해를 찾지 못한 10만4천 여 분의 위패라고 합니다. 지하에는 유해는 찾았으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6천여 무명용사들의 영현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대형 영현승천상 조각과 천장 그림이 가신 분들의 안식과 승천을 기립니다. 현충원 구석구석이 다 의미 있겠지만 특히 이곳에 와 유해나 이름 없는 분들 얘길 들으니 더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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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한강과 동작대교가 보이는 애국지사 묘역에 올라가 봤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무명용사 스토리 가운데 대를 이은 애국지사가 있어서입니다. 할아버지는 의병장으로, 아버지는 광복군으로, 어머니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여 나라를 위해 헌신한 집안이 있습니다. 따님 오희영씨와 남편 신송식씨는 대를 이어 광복군으로 활동하였기에 두 분 묘를 사진에 담아봤습니다. 조국을 위해 3대가 몸을 바쳤으니 가히 독립명문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내려오는 길에 애국정 정자에 모인 어르신들과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현충원에 온다고 하시네요. 사연인즉 형과 단둘이 6 · 25전쟁 중 월남했는데 군에 간 형이 전사하여 이곳에 묻히셨다고 합니다. 매일 오후 이곳에 와 형 무덤을 둘러본 것이 벌써 10년 세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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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분은 월남전에서 죽은 동료가 5월 초 현충원에 묻혔기에 이맘때면 꼭 찾아온다고 하시네요.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가슴 속에 한없는 사연을 안게 된 분들인지라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서울현충원에 온 사람이라면 꼭 찾게 되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29번 묘역에 있는 '호국부자의 묘'일 것입니다. 

 

 

 

이곳은 현충원 최초로 부자가 나란히 안장된 묘입니다. '그리워라. 내 아들아, 보고 싶은 내 아들아/ 자고 나면 만나려나, 꿈을 꾸면 찾아올까/ 흘러간 강물처럼 어디로 가버렸나' 아들을 잃고 통한에 찼던 어머니 마음이 묘지 앞에 새겨져 있습니다.

 

 

 

 

전시관에서 뜨겁게 살다간 부자의 이야기와 유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박명렬 소령은 1984년 팀스피릿 훈련 중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순직했습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들 박인철은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집안 소망대로 일반 대학을 진학했지만 끝내 꿈을 포기할 수 없어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합니다. 전투기 조종사가 된 박인철 대위는 2007년, 스물 일곱 나이로 야간 요격임무 수행 중 태안반도 해상에서 순직합니다. 가족들 요청에 따라 현충원에 먼저 묻힌 아버지 곁에 아들을 안장하였으니 부자가 함께 영면하게 된 것이지요.

기막힌 사연을 들려주는 호국부자 유품 앞에서 가슴에 치미는 먹먹함으로 한동안 말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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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발굴 스토리 가운데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활동으로 최근 밝혀진 '형제의 묘'도 있습니다. 50번 묘역에 있는 국군 8사단 강영만 하사와 2사단 소속 동생 강영안 이등상사의 이야기입니다. 동생은 저격능선전투에서 전사하여 현충원에 묻혔으나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형의 유골은 65년 만에 수습되어 조만간 이곳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민간인 최초로 무공 훈장을 받은 김재옥 여사는 33번 묘역에 있습니다. 여사는 6·25 전쟁 당시 동락초등학교에 집결한 북한군의 위치 정보를 국군에게 제공, 큰 승리를 거두도록 도왔습니다. 동락리 전투 당시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여 생활하던 중에 목숨을 잃었기에 배우자로서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사진을 더 찍으려 현충원을 다시 찾은 날, 마침 서울의 한 중학교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떠들썩하니 묘석을 닦는 아이들 소음을 고인들은 오히려 반겨주리라 싶었습니다.

 

 


 

현충원 5만 4천여 묘비 가운데 성만 새겨진 '이름없는 묘'가 54번 묘역에 있다기에 찾아가 봤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한 어느 소대장을 같은 전투를 치르던 황규만 소대장이 소나무 밑에 가매장했습니다. 14년이 흐른 1964년, 시신을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하였지만, 성만 알지 이름은 알 수 없어 오래도록 '이름없는 묘'가 되었습니다. 예편한 황 예비역 준장은 1990년, 무덤 주인공 이름이 김수영이라는 것을 노력 끝에 밝혀냅니다. 그러나 전쟁의 아픔과 황규만 장군의 전우애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이름없는 묘'로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아직 수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산야에 남겨진 무명용사가 13만여 위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계속 진행 중입니다. '마지막 한 분을 모시는 그 날까지…' 유품전시관 유해발굴실 앞에 새겨진 글귀가 우리가 할 일을 깨우쳐줍니다.

 

 

 

 

국방부 특별군악 의장행사가 끝나자 관람객들이 기념사진 찍느라 분주합니다. 현충원 앞 너른 잔디에 토요일의 여유와 평화가 펼쳐져 있습니다. 묘소를 찾아가 보도자료 이야기를 확인해서인지 풍경을 바라보는 제 마음에 뭉클함이 고입니다. 이런 여유와 평화를 선사해준 분들을 잊어선 안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취재: 청춘예찬 어머니기자 옥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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