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80대중반이상의 노인들은
철이들어
6.25전쟁을 겪었으며
전쟁의 공포,
고통,
굶주림과 추위에 대해
체험적
증언을 할수있는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오래동안
전쟁을 준비한 북한의 인민군은
'폭풍' 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38선 전역에서불법남침을 시작했다.
불과 사흘만에
서울이 점령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기까지의 1129일,
3년동안
13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국군이
13만 7.899명이 전사했으며
17개국 장병이 참전한
UN군은
3만7.902명이 전사했고,
그중
미군이 3만3.668명이었다.
북한의 인민군도
52만이 전사했으며
통일 직전
참전한 중공군은 14만8.602명이 전사했다.
이 참혹한 전쟁으로
한반도는
초토화 되었으며
전쟁의 잿더미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난것이 아니고
잠시
휴전으로 멈췄을 뿐이며
그 상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있다.
1. 베개를 업은여인.
서울이 함락된 며칠후
우리가 살고있는 인천에
인민군탱크가 들어 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으며
남쪽으로 가는
넓은 신작로엔
피난민의 물결이 넘쳐났다.
경기도 경찰국소속
경찰(경감)이었던 아버지는
어떤 사건조사때문에
경기도
광주경찰서에 출장중이었으며
그때는
전화가 있는집이없어
연락두절인채
어머니와
우리삼남매 4명은
급하게
옷가지를 챙긴 보따리를 들고
피난길에 나섰다.
얼마를 가다 앞을보니
젊은여자가
베개를 싸업고 가는게 보였다.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왜 베개를 업고 가느냐고 묻자,
그 여자는
'내애기'를 외치며
미친듯이
오던길을 뛰어서 되돌아 갔다.
급히 나오느라
애기대신
베개를 업고 나온것이다.
전쟁이 그런것이다.
경황이 없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며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극도의
공포에 쫓기는 무리일 뿐이다.
지금도
전쟁이 터지면
국민-민간인의 처지는 하나도 달라질게 없다.
2. 시골에서의 피난생활.
몇시간을 걷다보니
사람들이
여러갈래의 샛길로 빠져나가
길은 넓어졌지만
배가 고파 견딜수가 없었다.
우리도
서쪽에 보이는
어떤 농촌마을을 향해
방향을 바꿨다.
한참가다
오이밭을 만나
허기를 면할수 있었다.
날이 저물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어떤 초가집
추녀밑에 서서 비를 피했다.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는데
오라는데도,
갈데도 없는 신세였다.
비로서
한기와 굶주림이 엄습했으며
춥고 배고픈것이
끝이라는 체험을했다.
어머니는
그 농가에 들어가
우리의 사정을 얘기했다.
그집 주인은
우리를 살펴본후
헛간에서
자도 좋다고 했다.
우리는
볏짚을 깔고 새우잠을 잤다.
결국
우리는 그집에서
9.28 수복때까지
3개월간의 피난생활을 했으며
그때가
마침 보릿고개여서
온갖
악식으로 견뎌야 했으며
나는
그때 처음으로
풀떼기를 먹어봤다.
어머니와 나는
온갖
어려운일을 했으며
지게를 지다 넘어지고,
낫질을 하다
손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농가의 주인내외는
선량한 분들이었고
우리를
끝까지 돌봐주었다.
나중에
나와동갑인 그집 아들은
우리집에와서
중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그
분들에게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있다.
3. 폭격과 후폭풍.
하루는
논에서 잡초인 피를 뽑고있는데
미군비행기가 한대 나타나더니
논옆
수인선 협괴의 교량을 폭격했다.
폭음도
정말 대단했지만
후폭풍에 날린 우리들은
옆에있는
염전의 소금창고에 밀려가
부딛쳐 쓰러졌다.
그 창고벽이
나무가 아니라 콩크리트였다면
우리는
다 죽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무서운 꿈을꾼다.
4. 인천상륙.
9월의 어느날밤,
인천이있는 방향의 하늘이
밤새 훤히밝았다.
밤새도록 인천이
함포의 사격을 받은것이다.
다음날 어머니는
집에가서
우리가 돌아갈수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나는
아침일찍 혼자서
수인선 철길을 따라 하루종일 걸어서
송도를 지나
우리집에 도착했다.
도중에
도랑에 처박혀
퉁퉁부은
시체 여럿을 봤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보니
길건너에 있던 큰동네 하나가
흔적도 없이
통채 사라지고 없었다.
포격은
정말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집은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
동네에는
피난에서 돌아온 집이
하나도 없었다.
할수없이
나는 한시간이나 걸어
아버지의 친구집에 갔으며
그분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저녁상을 차려줬다.
쌀밥을
한술떠서 씹어삼키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쌀밥이
그렇게 좋은 음식인줄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70년이나 지난 지금도
나는
밥한톨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5. 전사.
9.28수복후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목이 빠지게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후
아버지의
친구 몇분이 찾아왔고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전했다.
어머니는 기절했고,
나는
멀쩡하던 사람이
기절하는 모습을 그때 처음봤다.
경기도 광주,
아버지가
매장된곳에 갔을때
500여평이 넘는 큰밭이
농사를
짓지못한채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수백명의 경찰관 시신이
묻혀있기 때문이었으며
촌노들은
지휘관 이었던 아버지를 기억,
별도매장한
위치를 알려줬다.
발굴된 유골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치아로,
나는
아버지의 회중시계로 아버지임을 확인했다.
유골은
현장에서 화장됐고
나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안고
경기도경이 제공한 짚차로 운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이후
청상과부인 편모슬하에서
우리식구가 겪은 고생은
어머니의 표현대로
'우리의 고생은 소설로는 다 못쓴다.' 였다.
그러나 억센
이북여자인 어머니는
우리형제를
대학까지 교육시켰고
동생은 외과의사가 되었다.
6. 부산피난시절.
통일을
목전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었을때,
같은동네
해군장교의 주선으로
우리는
인천부두에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갔었다.
부산은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오라는데도, 갈데도 없는
피난민 신세였다.
그때 부산은
피난민으로 넘쳐났다.
함께 피난한
몇집의 어른들이
광복동
언덕에서 쓰레기장을 발견,
그 쓰레기를
한옆으로 밀어내고
가마니와 대나무로 임시 거처를 지었다.
나는
광복동교회 중등부에 나갔고,
부장을
맡고계시던 장로님이
나를
자기가게에서 일하게 했다.
그게
영도다리옆 '천사당' ,
부산에서는
제일 큰 양과점이었다.
그곳에서의
일은 힘들었다.
식사는
그곳에서 하고
일주일에
쌀 소두한말이 급료였다.
커다란
설탕통에서
설탕을 옮겨담다
그 냄새에
졸도한일도 있었으며,
도너츠를 오래굽다
팔이 벌겋게
화상을 입는일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나중에는
하루에
모찌(일본식찹쌀떡)
400개까지 싸는 기술자가 되기도 했다.
저녁때가 되면
가마니동네 꼬마들은
계단에 모여앉아 나를 기다렸다.
양과를 구운후
짜를때 생기는 자투리를 모으면
큰봉투하나가 되는데
나는
장로님의 허락을 받고
이 자투리를 가지고 가서
애들을 물론,
어른들 까지도 나눠드렸다.
피난지의
궁핍한 생활에서
그 양과자 자투리는 요긴한 간식이었다
7. 상봉.
그때 부산에는
국내피란민은 물론
미군의 철수와함께
남쪽에 내려온
북한의 피란민도 많았다.
모든 전선주와 벽은
가족을 찾기위해
손글씨로만든 크고작은 벽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기적같은 일은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도
전선주에 붙어있는 벽보를 보고
어머니의 작은오빠,
즉
작은 외삼촌을 만나
우리의 거처로 모셔왔고,
얼마후
큰외삼촌의 자녀인
남매도 찾아서 합류했다.
갑자기
식구가 7명으로 늘어
길 건너편에 공터를 만들고
가마니, 대나무,
맥주깡통을 펴서만든
양철지붕으로 집을지었다.
그러나
비만오면 물이새고,
추워서 잘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외사촌누나는
밥장사를 시작했고,
본래
상인인 외삼촌은
노점을 시작했으며
나와 같은 또래인 외사촌은
장로님의 배려로
천사당에서 같이일했다.
우리의
가마니집 바로밑에는
큰 일본집이 있었는데
그때
김병로 대법원장이 거기 사셨다.
휴전이 되어
우리가 부산을 떠날때
식구 모두가
돈벌이를 했기때문에
오히려
여유가 생기기까지 했다.
외삼촌은
인천에 와서 노점상으로 시작,
작은가게를 사서
모자, 가방, 학생복 장사로
큰 돈을벌어
삼층짜리 빌딩을 짓기까지 했다.
어머니도
작은 가게를 사서
오래동안
털실장사로 우리들을 키웠다.
정말
이북사람들은 강인했다.
8.휴전선.
나의 중학교시절은
무서운
전쟁으로 점철됐다.
죽을고생을 했고,
춥고 배고픈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일찍이 체험했다.
전쟁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치유되지않고
잊혀지기를 기다린다.
지금우리는
겉으로봐서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모두는
'휴전선' 아래에서 살고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서쪽의 예성강과
한강어귀인
교동도에서부터
개성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과 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까지 155마일(약250키로)이
군사분계선이며
양측이
2키로씩 비무장지대(DMZ)를 설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휴전은
종전이 아니다.
언제든지 전쟁은
다시
계속될수 있는것이다.
우리의
안보가 취약해지면
절대로 안되는 이유다.
지난 현충일,
720세대가 사는 우리 아파트단지의
국기게양율은 5%,
이러고도
전쟁이 나면 이길수 있을까.
우리모두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휴전선 아래에서 살고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잊으면 안된다.
그게
생사가 걸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그 무서운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못하고있다.ㅡyorowon
첫댓글 전쟁세대가 아직 살아남아 가슴 아픈 과거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 우리 생전에 이런 비극이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내 나라, 내 가족을 지켜기 위해 우리는 무얼하였는가? 6.25 70주년을 맞이하여 모두가 잠시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