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
‘가즈오 이시구로(石黑 一雄)’는 일본 큐슈 나가사끼(長崎)에서 1954년 태어났으나, 다섯 살이던 1960년 해양학자이던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고 켄트대학 철학과를 나온 뒤, 이스트앵글리아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82년에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해 우리나라 작가 한강이 수상하기도 한 ‘부커상’을 받았고, 2017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9년 발표한 「남아 있는 나날」이 소설은 1995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책 표지에는 책에 대한 찬사와 비평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 10년을 통틀어 최고의 작품이라 할 만하다.”(보스톤 글로브) “가즈오 이사구로는 독창적이다. 그리고 이 책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슬픈 책이다.”(도리스 레싱) 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를 상상하면서, 책을 읽는다면 재미가 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1994년 개봉한 멜로영화인데, 줄거리는 이렇다.
“영국 달링턴가는 모두가 알아주는 유명한 귀족 집안이다. 달링턴가의 집사 스티븐슨(안소니 홉킨스 분)은 집사장이라는 신분을 넘어 달링턴가의 충복으로, 그가 하는 일 모두는 달링턴가를 위한 것이 가장 먼저다. 달링턴가의 일이 최우선인 그는 하녀장 캔튼(엠마 톰슨 분)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것은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라고 치부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달링턴가가 나치 지지자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달링턴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달링턴가는 미국 정치인에게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스트븐슨은 달링턴가를 지키려고 한다.
스트븐슨은 이미 달링턴가를 떠나 결혼하였다가 이혼한 하녀장 캔튼을 다시 부르지만, 그녀는 손녀를 키워야 한다며 제의를 거절한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게 된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장원을 배경으로 그려 낸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직업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하고, “나는 오랜 세월 달링턴 홀에서 그분을 모시면서 세상이라는 바퀴의 중심축에 내가 꿈꾼 만큼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달링턴 경에게 35년을 바쳤다.”주인공의 독백이 헛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때는 1956년 여름,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는 생애 첫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여행을 통해서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지난날들을 회고하게 된다. 그가 무려 35간 모셨던 노신사 달링턴 경은 밀실에서 비공식 회담을 주재하고, 외교 정책을 좌우하던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스티븐스는 그림자처럼 그를 도왔고, 집사의 직무를 통해 세상의 중심축에 닿아 있다는 내밀한 만족감을 느끼기조 하였다. 하지만 어느 날 세간의 존경을 받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라는 오명을 쓴 채 사회적으로 추락하면서 스티븐스의 경력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미 주인에 대한 존경을 넘어 맹목적인 헌신을 자처하던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완벽한 도덕관을 가졌다는 믿음을 놓지 못한다. 평생 집사의 업무에만 매달린 탓에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스티븐스에게 달링턴 홀이 상징하는 세계는 단지 ‘일’이 아닌, 삶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집사’는 결국 얼마나 ‘위대한 주인’을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역설하면서 끊임없이 지난날을 정당화하려 든다.
작품은 달링턴 홀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이야기지만, 공간을 지키는 스티븐스의 관점과 이곳을 찾아오는 숱한 정치가들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기에 세계정세를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다. 대영제국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미국의 현실주의적 기반으로 넘어가는 상황, 그런 변화의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스티븐스가 고집스레 지키고자 했던 자기희생적인 직업관과 장인 정신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꽉 막힌 ‘시대의 잔여’로 상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스 인생은 어쩌면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황혼 녘에 깨닫는 사랑과 허무함, 그런 것으로 인해서 말이다. “말해 보세요, 스티븐스씨! 당신은 왜,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죠?”주인공이 좋아했던 하녀장이던 캔턴의 말이 자꾸 꼽씹어지는 이유다.
“진정한 의미의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라들에는 실제로 사용되는 칭호가 무엇이든, 오직 하인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 오직 영국 민족만이 할 수 있다. 대륙 사람들 여러분도 물론 동의하겠지만, 켈트족도 대체로 마찬가지인데 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격한 순간에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며, 따라서 최소한의 도전적 상황 외에는 전문가다운 품행을 유지하지 못한다. 좀 전의 비유로 돌아가 말하자면,(표현이 다소 거칠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들은 지극히 사소한 자극에도 자신의 양복과 셔츠를 찢어 버리고,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사람과 흡사하다. 한마디도 말해 ‘품위’는 그런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이 점에서 우리 영국인들에게는 외국인들에 비해 중요한 강점이 있으며, 여러분이 위대한 집사를 떠올릴 때 거의 당연히 영국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58쪽
“회담은 1923년 3월 마지막 주 어느 비 오는 날 아침에 시작되었다.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응접실이 무대였는데 참석자들 중 상당수가 ‘비공개 인사’였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사실 내가 봐도 약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격식에서 벗어난 모양새였다. 연약한 여성을 연상시키는 그 공간에 검은 양복의 근엄한 신사들이 소파 하나에 서너 명씩 어깨를 맞대고 우글거리며 앉아 있는 광경이 묘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평범한 사교 행사의 모양새를 유지하자는 일부 인사들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여, 잡지나 신문에 공개하는 방안까지 추진했을 정도였다.
이 첫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응접실을 들락날락해야 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달링턴 나리께서 하셨던 개막 연설은 기억이 난다. 먼저 손님들께 공식적으로 환영의 뜻을 표하신 다음, 베르사유 조약의 여러 조항들을 완화해야 하는 강력한 도덕적 논거를 개괄하시고 당신께서 독일에서 직접 목격했던 크나큰 참상들을 강조하셨다.”--- 118쪽
“내가 마셜 씨나 레인 씨 같은 우리 세대의 ‘위대한 집사’들과 같은 반열에 낄 만큼 훌륭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1923년의 회담, 특히 그 마지막 날 밤이 내 직업상의 발전에 전환점이 되었다는 말은 순전히 내 나름의 소박한 기준에서 하는 이야기란 점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날 밤 내게 붙어 다닌 중압감을 고려한다면, 내가 그날 마셜 씨 같은 사람의 ‘품위’ 혹은 내 부친의 그것을 약간이나마 보여 주었다고 감히 말한다 해도 지나친 자기 착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143쪽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좀 지루한 것 같아서 번역가 김남주(부산출신, 서울대 영문과 졸업, 번역가)선생의 후기를 보기로 한다.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라고, 그러면서 “탈링턴 홀의 새 주인이 된 미국 신사 페러데이는 전 주인의 경우와는 다르게 스티븐스가 이지적으로 충성을 각오해 선택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스티븐스는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달링턴 홀과 함께 그에게 양도되었다.”그리고 새 주인의 내준 6일 동안의 휴가를, 주인이 내준 포드를 타고 떠나면서, 무수한 매듭 끝에 도달한 스티븐스의 궤도 수정은 그의 삶만큼이나 정곡을 벗어나 있었는데, “하루의 끝 무렵에 삶 전체를 돌아보고 도달한 결론치고는 미흡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농담과 유머를 위해서는 계급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같은 계단에 서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바, 이제 스티븐스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상호 소통의 길로 나아갈 것”을 생각하게 되고 “독자들은 그것을 믿고 싶어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길이지만, 힘든 발걸음을 스티븐스의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 도와 줄 것”이라고도 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사족이지만, 작품에서 켄턴 양은 유능하고 합리적이면서 조금쯤 비겁하고 타협적인 바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녀는 집사보다 낮은 총무로서 경력을 마쳤지만, 스티븐스에게는 없는 삶의 나침반을 갖고 있었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랐다. 그녀는 거부당한 꽃병을 들고 스티븐스의 방에서 나가 자신을 사랑한 벤에게로 갔다. 물론 때로는 후회하고 방황하지만, 그곳이 자기 자리임을 알고 만족한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그래서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인 저녁에 편안히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원작의 향기를 살리면서, 한 시대를 요약하는 우아한 풍미를 시각화하는데 뛰어난 ‘제임스 아리보리’감독의 영화에서 ‘엠마 톰슨’은 정말이지 켄턴 양의 화신이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