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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파선되다
행 27:38-44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행 27:38-44 / 식사가 끝나자 선원들은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실었던 양식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39) [파선] 날이 밝자 어느 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래밭이 있는 항만이 보였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바위돌을 헤치고 모래밭까지 배를 대야 할지를 의논하다가 40) 어쨌든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묶었던 밧줄을 늦추었다. 그리고 앞돛을 올려서 바람을 타고 해변 쪽으로 나아갔다. 41) 그런데 배가 두 물살이 합치는 곳에 끼여들면서 모래톱에 얹혀 버리는 바람에 이물은 모래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고물은 심한 파도로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42) 군인들은 혹시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이라도 치면 곤란하니까 아예 죽여 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대장에게 물었다. 43) 그러나 바울을 살리고 싶었던 율리오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뛰어 내려 육지로 올라가고 44) 나머지 사람은 널조각이나 부서진 배조각에라도 매달려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무사히 육지로 올라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호를 가볍게 하여 육지에 가까이 대려고 남아 있던 밀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육지를 향해 가까이 가다가 그만 배가 모래톱에 걸려 파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모두 살아났습니다.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38-41) 바울의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미 유라굴로를 만났을 때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배의 짐과 기구들을 버렸었습니다(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를 육지에 가까이 대려면 더 가볍게 해야 하므로 배에 남아 있던 밀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밀을 버린 것은 밀보다 생명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아지자 그들은 육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그곳에 상륙시키기 위하여 닻을 끊어버리고 돛을 올리고 해안으로 가다가 그만 뱃머리가 모래톱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고, 배의 뒷머리는 큰 물결에 부딪혀 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예언한 난파(22절)는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42-44) 알렉산드리호가 모래톱에 걸려 파선하게 되었을 때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을 죽여 없애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 때문에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울 때문에 다른 죄수들도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백부장 율리오로 하여금 군사들이 죄인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무산시켜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던 로마 사역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말씀의 신실함과 그 말씀이 성취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행 23:11).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실 뿐만 아니라 변개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백부장은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육지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조각 또는 배의 물건을 붙잡고 육지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백칠십육 명의 모든 사람들이 육지에 상륙하여 살아났습니다.
적용: 알렉산드리아호의 사람들은 배의 짐과 기구를 비롯하여 밀까지 바다에 내려놓았습니다. 당신이 이미 내려놓은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열망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시다.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다. 그것은 수단일 뿐이다. 바로 주님의 보혈과 은혜이다. (찰스 스펄전·미국 설교자)
< 설 교 >
풍랑속에서 마른떡 한 조각을 들고
류영모 목사
I. 죽음의 계곡에서 드리는 감사
어느 한 가정이 가을 들녘 아이들과 함께 야외에 나갔습니다. 과수원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농장 주인이 아이들이 귀엽다고 사과 하나씩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미된 사람이 아이들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럴땐 어르신들게 뭐라고 말해야 되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다섯 자 있잖아. 다섯 자." 그랬더니 여섯 살난 딸 아이가 사과를 불쑥 내밀면서 "깎아 주세요." 여덟 살난 오빠란 녀석은 "뭘 이런걸 다." 그러더랍니다.
망망 지중해 해상에 276명을 태운 선박 한척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배안엔 로마로 호송되는 죄인들과 호송 군인들 그리고 상인들까지 가득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배가 광풍을 만나 파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광풍은 대작하고(14절), 풍랑은 극심하여(18절),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는 절박한 지경이었습니다(20절). 그야말로 생과 사의 씨름, 대자연과 인간의 싸움이 전개된 것입니다. 싸움은 처절했습니다. 풍랑은 인간의 무기인 화물과 선박 기구들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대자연과 이상 더 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장기화되었습니다. 276명은 죽음의 계곡을 여러차례 내려갔었을 뿐 아니라, 공포와 전율에 떨기를 14일간이나 계속했습니다. 이같이 처절한 생지옥 같은 고난 중에 지위 명예 부귀영화같은 세상적인 것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가치도 효험도 없었습니다. 다만 현재 목숨이 일엽편주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침몰 익사되지 아니하고 구사일생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살아남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한 조각의 마른 떡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제창한 히브리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을 찾았고, 그에게 감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떡 한 조각이란 그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실로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한 조각의 떡을 들고 하나님께 축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축사"란 몇 가지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개정과 개역개정판은 "축사"라고 번역을 했고, 현대역과 공동역은 "감사기도"로 번역했고, 표준역과 새번역은 "감사"로 번역했습니다. 외국번역의 경우 독일역, Living Bible, KJV, 일본역은 한결같이 "감사"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축사란 감사 또는 감사기도입니다. 바울은 떡 한조각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린 것이지요. 그것도 한치 앞 생명을 예측할 수 없는 풍랑속에서 말입니다.
II. 한 길이 막힐 때 다른 길을 여신다
일반적인 감사란 부족한 것이 넉넉해졌을 때, 약한 것이 강해졌을 때, 잃은 것을 찾은 후에 하는 법인데 오늘 본문 18절 "그들의 재산인 화물을 다 잃은 후에" 드린 감사였습니다. 싸 가지고 나온 모든 짐을 남김없이 전부 잃은 후에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빵 한조각 외에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19절, 그들 구원의 방편인 선박 기구를 잃은 후에 감사했습니다. 선박을 움직이는 기구란 구원의 방편입니다. 구사일생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상실했다는 것은 살 수 있는 여망을 다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방편을 잃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감사! 높은 차원의 신앙인만이 아는 멋이지요. 시련속에서의 감사! 이것은 감사의 조건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참된 감사란 잃었느냐 얻었느냐 하는 조건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감사 덩어리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라도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유목민들이 살았습니다. 양을 치면서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아 살아온 유목민족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모여 살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한번은 양들이 샘물을 마시러 갔다가 그 샘에서 나오는 걸쭉한 물을 마시고는 양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우디 아라비아에 사는 유목민들은 '이 사막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하나 둘 마을을 다 떠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행크 다니엘이란 사람은 도대체 양들이 먹고 죽는 걸쭉한 물이 무엇이냐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그것은 석유의 원료입니다. 원유였습니다. 사람들은 양들이 다 죽어가서 이제는 절망이요 살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원유라고 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행크 다니엘은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절망된 일이 있습니까? 좌절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두어 가실 때에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을 준비하셨다가 여러분에게 주시고 만족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입니다.
하나의 문을 닫으실 때 하나님은 다른 한 문을 열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아! 이분이 메시야 였구나. 풍랑도 잔잔케 하고 바람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났습니다.
저는 어린나이에 지난 번 섬기는 한 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처녀 목회지에서 생명을 건 목회를 했습니다. 교회는 날로 성장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제 목회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를 계속해서 섬길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서 섬길 것인가? 기도하는 가운데 몇 곳에서 청빙서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히고 설히는 가운데에 저를 초청해준 교회는 갈 수가 없게 되었고, 그 교회도 있을 수 없는 목회 막다른 골목, 절망의 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맨손으로 새로운 교회를 새로 시작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섬기는 영광스런 한소망교회가 된 것이지요.
내 인생이 빈손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은 미리 큰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III. 고난중 감사
사도 바울 일행을 보십시요.
고난 중에 감사했습니다. 어떤 고난중에 감사했는가?
20절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절망적인 고난중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23절 14일간이나 먹을 수 없을 만큼 고난이 극심한 중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욥기의 서두 1,2장을 보면 욥이 일시에 그의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고 열명의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게 됩니다. 몸은 나병같은 악창에 걸려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긁으며 고생하는 인간 최악의 재난에 시달리는 참상이 보입니다. 심지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욕을 합니다. 또 평소에 그를 따르고 존경하던 친구들까지도 네가 평소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천벌을 받느냐고 비난을 했습니다. 만약 욥이 현세적인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이런 극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기를 학대하여 목이라도 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오매 하나님은 거두어 가실 권세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고 얼마든지 더 주시기도 하실 수 있다!
미국 청교도들이 역경 중에도 감사했던 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유래였습니다. 지금부터 약 400년전 청교도들은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그 살벌한 대서양을 향해하면서 추위와 풍파에 시달렸고, 견디다 못해 죽어가는 가족과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200여 구의 시체를 묘지 하나 쓰지 못하고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겨우 100여명 정도의 살아 남은 청교도들이 미국 매사추세츠 프리마우스 항에 도착했으나 그 곳 땅은 황망했고 먹을 것 하나 없었습니다. 허약해진 몸에 병은 찾아왔지요. 닥쳐오는 혹한을 막을 수 있는 옷이나 따스한 거처조차 없어 죽어 넘어지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자식을 혹은 이웃 친척을 언 땅 파고 묻어야 했던 그들의 쓰라림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원주민들, 인디언들의 급습으로 인한 인명 피해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 고난을 택한 하나님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는 커녕 이런 고난 중에서도 봄이 오자 씨를 뿌렸으며 가을이 왔을 때 첫 수확을 거두고, 첫 추수 감사 잔치를 마련했는데 그때 참석한 인원은 겨우 50명이었다고 북미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정착 생활의 적이며 방해꾼이었던 인디언들까지 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 축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처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감사할 수 있는 조건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때 진정한 감사를 배운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나를 용납하십니다. 우리 또한 무조건적 환경에서 감사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IV. 생명·구원 감사
특별히 오늘 본문은 코로 숨쉬고 사는 이 자체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감사할 수 있는가? 고난 중에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숨을 잃지 아니한 때문입니다. 화물은 다 잃었습니다. 선박 기구도 전부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도 훨씬 귀한 목숨은 잃지 아니했습니다. 어느 것이 귀합니까? 재물인가요? 목숨인가요?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잃지 아니한 것이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감사는 바로 구원 얻은 생명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추수는 내 영혼이 천국으로 추수된 것입니다. 내 생애 최고의 추수는 예수를 얻은 것이요. 신앙을 얻은 것이요 하늘나라를 얻은 것입니다.
코로닌이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늘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사람이라구요."
어느 여성도가 장암으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여 장 3분의 2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암뿌리가 위에 뻗치게 되었습니다. 다시 입원하였고, 위 3분의 2를 떼내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점점 암뿌리가 온 몸에 뻗치게 되었고 여성도는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진통제 주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번 맞으면 4시간 이상 그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시간이 짧아졌습니다. 1시간이 멀다하고 주사를 맞았지만 맞을 때 뿐이었고 얼마 후에는 그런 효과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사의 효과가 없게 되자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몸을 뒤척이며 앙상한 손가락을 서로 마주잡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 큰 고통은 그녀의 정신적인 아픔입니다. 그녀에게는 어린 두 딸이 있었습니다. 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것들을 두고 죽어야 한다는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울었습니다. 점점 죄어 들어오는 육체적인 괴로움에서 그녀는 울고 또 울어야만 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이 그녀의 병실을 찾아 들어갔을 때 그녀는 울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아픕니다. 하나님 정말 괴롭습니다. 죽는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일을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것들을 생각할 때 더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런 아픔과 고난 때문에 주님을 향한 감사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불평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고통의 눈물과 아픔으로 찡그러진 얼굴이지만 그녀가 드린 감사야말로 진정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감사의 것입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래 기도하니까 어떤 생각이 떠 오릅니까?"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토록 아끼는 네 딸 들보다 못하지 않은 독생자를 나는 널 위해 보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처음엔 아파서 울었는데 지금은 예수님 때문에 웁니다.
예수님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직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며 울어보았습니까?
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침이 없고 무엇으로도 다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 믿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 믿고 기뻐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 믿고 헌신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는 것이 기적입니다.
은혜의 동산 마지막날 새벽이 되면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씨를 뿌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상황속에서 저는 이 영성훈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날 새벽 이 노래를 부르며 얼마나 울고 또 울었던지 "주님 사랑합니다. 이 종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지금도 내 신앙이 드라이하고 건조해 질 때에 내 삶이 곤고해 질 때에 저는 혼자 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V. 떡 한 조각 감사
사도 바울은 한 조각의 떡이나마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14일간 먹지 못했던 처지에서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감사의 이유인 것입니다. 비록 떡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나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복이라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늘 불행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다른 친구는 늘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늘 불행이는 "부모 복도 없고, 아내 복도 없고, 직장 복도 없고, 돈 복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늘 행복이를 찾아갔습니다. 가보니 그에게 늙고 못 배운 부모가 있고, 이쁘지 않은 아내가 있고, 직장도 평범했고, 집은 형편없이 작았습니다.
"행복할 꺼리라곤 하나도 없는데 뭐가 그리 행복한가?"고 늘 불행이가 물었습니다. 늘 행복이는 그 친구를 데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수술대 앞에서 초조해 하는 사람들, 병실에 누워 앓고 있는 환자들, 링겔을 꽂은 채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영안실에서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늘 행복이가 물었습니다. "보라 남들에게 없는 건강이 있고, 날 걱정해 주는 가족이 있고, 작지만 내 집이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는가?" 이 말에 늘 불행이는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불행이들이 있습니까?
언젠가 장애인 올림픽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전세계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장애인을 지켜보며 내 손 발을 어루만져 보았습니다.
손발이 있음을 감사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감사하고, 굶지 않을 만큼의 쌀과 입이 있으니 감사하고, 자유스런 내 나라가 있으니 감사하고, 오늘도 맥박이 뛰고 있음을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감사했습니다.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교우들이 내 곁에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더 충성하지 못해 죄송했고 더 사랑하지 못해 송구했습니다.
일전에 이중표 목사님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나오는데 목사님이 책 한 권을 주셨습니다. 아내가 운전을 해 주길래 옆에서 앞장을 펼쳐보는데 제일 먼저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어린 시절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주셨던 누룽지를 서로 먹으려고 "이거 내 거야." "이거 내 거야." 싸우고 있을 때에 어머님이 들어오시더랍니다. 나무랄 줄 알았는데 눈물을 훔치면서 "부잣집에 태어났더라면 기름진 음식에 잘먹고 잘 살았을 텐데 가난하고 못난 부모 만나서 배 골고 사는구나." 하고 눈물을 훔치고 나가시더랍니다. 목회를 하다보니까 어머니 생각이 나더랍니다. '능력 많고 사랑 많고 훌륭한 목사 만났으면 내 교인들 기름진 음식에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텐데 못난 목사 만나서 배 골고 사는구나.'
그렇게 자비롭고 인자하신 훌륭하신 목사님이 썼던 글을 보면서 '나는 뭔가? 나는 왜 이렇게 못났고. 왜 이렇게 사랑이 모자라고. 부족한 목사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못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 마음이 없어서 그런줄 알고 하나님 앞에 아버지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건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피 흘려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나는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어릴 때 얼마나 사랑했는가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내 손 붙들고 "내가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어린 영모 두고 죽는 것이 미안하다. 아프다. 안타깝다." 환상인지 실제로 보았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림처럼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 가슴속에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더욱 넘치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난 목사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소중했던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습니다. 평생 생명처럼 사랑하자. 가족처럼 사랑하자. 함께 개척교회를 섬기던 소중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내 자식보다 내 아내보다 그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를 섬기기가 어려웠던지 하나씩 둘씩 그들이 내 곁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떠날 때마다 내 가슴속에는 사랑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교인들을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사랑의 배신이 두려웠습니다. 사랑하고 나면 또 사랑의 배신이 찾아올까? 지난 주간에 한없이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나만 아픈 것이 아니고 떠났던 그들 또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또 사랑의 배신으로 찾아온다 할지라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 못난 종을 하나님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기도하며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VI. 감사의 결과
1. 감사를 배우십시요.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배에 동승한 276명 모두가 한마음으로 감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끝난 다음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아무런 기구도 없는 배가 멀리데라는 섬에 밀려갔습니다. 거기서 토인의 환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사가 구원을 초래한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는 기적을 초래합니다.(마14:9) 유대 광야에서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들고 하나님께 축사하니 5병2어가 5천명이 먹고 12바구니 남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2. 감사는 생의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어느 자매님의 간증입니다. 하루는 작은 아이가 학교를 다녀와서 책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하고 묻기에 "하나님이 너를 낳으라고 하셨기에 너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엄마 내가 예뻐요." "그럼." "엄마 나 예쁘게 키워 주셔서 고마워요. 엄마 감사해요." 이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 그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우리 교회에 다니는 것을 감사할 때 한소망교회는 나의 교회가 됩니다. 가정에서 서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나의 아내가 되고 나의 남편이 됩니다. 살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할 때 나의 조국이 됩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 사는 의미가 있고 보람을 느낍니다.
3. 감사는 생의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①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감사의 생활은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밝은 면 보다는 어두운 면을 보고 또 좋은 점 보다는 나쁜 점을 먼저 생각하기에 창조적일 수가 없고 발전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원망과 불평이 도사리고 오해와 시기, 견고한 진에 시달리며 삽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은혜가 충만하여 성령이 지배하는 삶이 가능해 집니다.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대인 관계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부정적인 때는 근심 걱정이 가실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때는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가 넘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다른 축복이전에 감사하는 나 자신을 바꾸어 줍니다. 존재 자체를 감사 존재로 바꾸어 줍니다.
② 감사에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 붙잡혀 심한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차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에 옥터가 흔들리고 쇠고랑이 끊어지고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모든 일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어떤 환경에도 감사할 때에 모든 악조건의 환경이 변하여 축복의 환경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의 쇠고랑은 풀어지고 간수장이 오히려 무릎을 꿇고 사도 바울의 복음의 사슬에 얽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면이 막힌 환경에 고민하고 낙심하신 분이 계십니까? 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진정으로 찬송하십시오. 악조건이 변하여 호조건이 될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이 있는 곳에 온전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의 조건(축복)을 생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며, 사랑을 심으면 행복을 거두고 감사를 심으면 축복을 거둔다는 하나님께서 우주 창조시부터 세우신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힘껏 감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조건이 더 많이 생기는 축복의 원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없는 영원한 천국의 빛을 주실 것"이라고 매튜 헨리가 말했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감사하는 자에게는 축복입니다.
믿음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영생을 얻습니다. 감사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축복을 얻습니다. 헌신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능력을 얻습니다. 충성의 열쇠로 하나님의 창고를 열면 건강을 얻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영육간에 건강이 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들의 마음을 좁히고, 감사와 찬송은 우리들의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성도가 축복받는 직통로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사합시다. 얽혀진 환경에서도 감사합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입니다.
지난 20년동안 추수감사절 설교를 해 왔습니다. 어떤 설교를 했나 제 설교 노트를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번도 20년동안 추수감사주일에 했던 모든 설교들이 단 한번도 여러분 나라가 금년에는 참 평안했습니다. 이런 설교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사회가 너무나도 안정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이런 설교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고난도 없었고 평안하기만 했던 지난 1년으로 인하여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런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마다 정치는 어려웠고 사회는 불안했고 경제는 고통가운데 있었으며 공동체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니, 우리는 영생이 있으니, 예수님이 있으니, 소망이 있으니, 꿈이 있으니, 감사하자고 외쳤던 설교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12년 한소망교회를 섬기면서 감사한 일들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100가지, 200가지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지만 헤아리지 않아도 내 가슴속에 잔잔히 남아 있는 감사들이 어떤 감사들이 있을까? 한번 더듬어 보았습니다.
새로운 교회 한소망교회라는 이름만 가지고 남의 유치원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방석 하나 깔지 못하고 의자 하나를 놓지 못하고 마이크 한 대 설치하지 못하고 어떻게 예배를 드릴까? 하늘을 멍하니 보고 길을 걸어가는데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 강희숙이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우연히 마주치더니 "목사님 만나려고 제 주머니에 돈이 있었군요. 목사님 개척교회 하는데 얼마나 힘드세요." 5백만원 주머니를 제게 맡겨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집으로도 가지 않고 시장으로 달려가서 의자를 샀고 마이크를 구입하여 셋팅을 하고 그날밤에 그 마이크 틀어놓고 혼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달 두달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날 아침에 아내가 일어나더니 쌀 독 앞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습니다. 아차! 싶어서 쌀독을 열어보니 쌀독이 비었습니다. "괜찮아 한 두끼 굶으면 되지 뭐. 죽나!" 그러고 있는데 그날 아침 지금 대구에서 목회를 하는 박희종이란 친구 목사가 있습니다. 대봉교회 담임으로 내려간 친구인데 쌀 두말을 차에 싣고 와서는 "굶지나 않나 하고 왔어."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쌀 밥 지어서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능곡 지하실 예배당을 팔았습니다. 신도시 상가 예배당은 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한 두 번 우리는 백석고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마이크를 셋팅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혼자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신도시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비 내리면 비 맞고 예배를 드리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기적도 주실 수 있는 분이신데 비를 거두어 가십시요. 구름을 거두어 가십시요."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백석동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데 놀랍게도 백석고 마당에만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밤이면 우리는 정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철야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 도시를 살리게 해달라고 기회를 달라고 이 도시를 복음화하고 민족을 깨우는 교회로 써 달라고 아래를 향하여 손을 들고 우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여느때처럼 금요일 밤 램프불을 밝히고 그 당시에는 집사였던 김균태 장로가 나팔을 불면서 교인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 오늘은 교인들이 오기가 텄구나. 몇 사람이지만 우산 쓰고 예배를 드리자.' 그러고 있는데 평소에 오지 않던 교인까지 꾸역 꾸역 모조리 언덕을 올라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마친 다음에 "비 오는데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비 오는데 내가 안가면 아무도 안 올 것 같아서 왔다고"합니다. 그런 교인들의 기도가 있었길래 오늘 이 교회가 있었구나. 지난 12년 돌이켜 보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감사할 조건이라곤 없어 보이는 바로 그때, 가장 감동적인 감사를 내 생애 가장 진한 감사를, 소중한 감사들을 그때 할 수 있었구나. 이것이 신앙이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구나.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닌 것을, 감사는 영원한 문제인 것을, 신앙의 문제인 것을, 마음의 문제인 것을.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모진 풍랑 한 가운데서도 마른떡 한 조각을 들고 우리 모두 함께 감사하십시다. 제창할 수 있는 사람. 가슴속에 터져나오는 감사를 주체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참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 그를 두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어려운 시대에, 우리 한소망의 모든 성도들이 오늘 이 예배시간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사업에 기적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구조되니라.
양항모 목사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하게 되면 보편적으로 모든 일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 어려움을 많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잘못된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악한 일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내 생각보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보다 비교적 착하게 살게 되고 좋은 일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 착한 삶을 사는 그때는 힘들고 어렵지만 결국은 좋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이런 원리가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산다고 해도 항상 잘되고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신앙으로 바르게 잘 산다고 해도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역사하는 나라이고 함께 살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생활이란 쉽고 편한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더 잘하려고 할수록 이 세상의 삶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 믿음을 지키고 사는 삶은 때로는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들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선택받은 우리들에게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해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다가 천국까지 가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언약이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배를 타고 가면서 풍랑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가는 로마행 길도 쉽지는 않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거의 죽게 될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로마까지 가기는 하지만 그 길은 매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타고 가던 배가 광풍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다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구조되었지만 그 과정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배를 거기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본문 38-39절에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풍랑을 만난 배가 육지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고 난 후에 떡을 떼어서 축사하고 나누어서 먹게 했습니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이 276명이었고 그들이 다 배불리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밀을 바다에 다 버리고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그들이 먹고살아야 할 밀을 바다에 버린 것은 대단한 결심이었습니다. 아직 로마에 도착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인지 무인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먹고 살아야 할 곡식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대형선박이 들어갈 수 있는 항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작은 배나 댈 수 있는 경사진 항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지혜를 모아서 거기에 배를 들여다 댈 수 있는지를 의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그 배에 탄 사람은 한 사람도 죽음을 당하게 하지 않고 다 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 탄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들이 먹어야 할 곡식들을 미련 없이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 배를 이 항만에다가 들여다 댈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의논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논과 결단 뒤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최후의 승리가 약속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는 기필코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사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할까 봐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고 그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편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받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혜도 주시고 힘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면 참 평안한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만 뭐든 다 해달라고 조르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책임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지런한 것이 인생을 사는데 큰 무기입니다.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해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지 않을 때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내가 좀 더 부지런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때 나를 통하여 나를 믿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려는 이 일에 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이 구원이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그 구원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본문 40-41절에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해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닻을 끊어버렸습니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려놓은 닻을 배의 무게를 생각해서 끌어올리지 않고 줄을 끊어서 바다에 버렸습니다.
동시에 키를 풀어 늦췄습니다. 키는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기구입니다. 배가 바람을 따라 자연스럽게 항만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줄을 풀어서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이 조정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방향을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돛을 올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으로 향해 들어갔습니다. 여기 돛은 아마도 배 앞쪽에 있는 작은 돛으로 보입니다. 큰 돛은 이미 버렸기 때문입니다. 작은 돛이지만 해안까지 접근하기에는 충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계속해서 닥칩니다. 배가 모래언덕을 만나서 배 앞쪽은 모래언덕에 부딪혀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고 배의 뒷부분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형편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그 결과가 좋아지면 더 힘이 나겠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다 나빠지면 힘도 빠지고 원망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도 깨지기 쉽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목회 생활을 해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려고 할 때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탄이 자기 종을 빼앗기는 순간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방해를 합니다. 일이 잘 안되게 하거나 갑자기 세례를 받을 수 없는 형편이 되게 만듭니다. 이럴 때 마음을 굳게 먹고 전진을 하는 사람은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옛날에는 부흥사경회를 많이 했는데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나면 꼭 시험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하고 다투게 되거나 오해를 하게 만들어서 받은 은혜가 없어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처음 집사가 되고 권사나 장로가 되려고 할 때도 크고 작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일꾼이 되려고 할 때 사탄은 역시 그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최고의 영광이지만 사탄이 볼 때 최악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일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신앙생활 좀 더 잘하고 하나님 나라에 좀 더 충성하려고 할 때 사탄의 시험이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런 고비를 한 번 더 넘어설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가 가는 길이 더욱 든든해집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본문 42절-44절에 “42.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라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는 육지에 닿지 못하고 파손되기 직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죄수들을 호송하던 군인들이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죄수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죄수들을 호송하는 군인들은 만약에 죄수가 도망했을 때 그 죗값을 대신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수가 도망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두면 대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예 죄수들을 죽여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군인들의 뜻을 막았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는 백부장의 명령이라 거부하지 못하고 그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내려서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헤엄을 찰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배에 있는 널조각이나 물에 뜰 수 있는 물건들을 의지해서 육지로 나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배에 탔던 276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약속하신 대로 다 무사하게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배에 탔던 죄수들이 군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바울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군인들이 죄수들을 다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죄수들뿐만 아니라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다 무사하게 구원을 받는 것은 역시 바울 한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시기 위해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다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일하는 사람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시고 특별히 보호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보통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돌보시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동역하는 교회의 모든 일꾼도 특별한 사람입니다. 목사도 특별하지만 목사와 함께 교회를 맡아서 일하는 직분자들이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 교인들이 다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특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지만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런 복음의 일꾼이 될 때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엄청난 구원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만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많은 어려움들을 당합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일꾼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하게 보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보람된 일임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