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가져온 글] - 원작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르헨티나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소위 에바 페론 에비타로 속칭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 이다.
중남미는 유럽 침략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망가지고 깨어진 대륙이다. 유럽의 침략자들에 의해 가장 강성하게 성장해 자신들의 목을 죄는 곳이 미국이라면 그 아래 중남미야 말로 침략자들에 의해 철저히 붕괴되고 파괴되어 21세기 까지도 그 아픔을 온 몸으로 겪는 곳이 바로 남 아메리카 대륙 일 것이다.
그리고 칠레, 아르헨티나, 등의 국가에는 민중들의 아픔을 위한 노래를 통한 맑은바람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누에바 깐시온" (Nueva Cancion)이다 누에바 깐시온은 영어로 하자면 New Song 즉 새로운 음악이다.
누에바 깐시온의 대모는 '비올레따 빠라'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칠레사람으로 팝송으로 미국식 의식주가 칠레를 몰아칠때 전국을 떠돌며 잊혀져 가는 노래들을 수집하기도 하면서 그것에 포크음악의 감성을 혼합하여 만든 노래 그것이 '누에바 깐시온'의 신호탄이 되었다.
누에바 깐시온의 노랫말은 폭력과 투쟁이 아니다. 거기엔 인권과 민주주의,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고난 받는 이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그녀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티나 미구엘에서 태어난다. 아르헨티나는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982년 12월 민주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근 170년간 잦은 군사쿠데타로 시달려 온 나라다. 원주민 인디오들은 16세기의 스페인 침략을, 이후 백인 농장주인들의 착취와 그 사람들을 지원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정 아래에 있었다.
1976년 초 쿠테타를 거쳐 정권이 비델라 군부로 넘어가면서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정치·사회적으로 탄압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1977년부터 군사독재가 종식되기까지 약 3년간 '더러운 전쟁' (Guerra sucia)이라 불리는 군부의 인권탄압으로 3만여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물론,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초들에게 희망을 노래하면서 군부에 맞서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 방송될 수 없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1979년 1월,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됐다. 그러나 그녀의 망명 생활은 소사의 음악에선 그녀가 새로이 눈뜨는 계기가 되어 안데스의 전통음악에 뿌리를 두면서 록과 재즈의 요소까지 넓혔다.
1982년, 마침내 소사는 망명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몰락했다. 귀국 후 한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그의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무대였다. 그리고 그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저 유명한 'Gracias A La Vida"이다. 원래 이 노래는 비올레따 빠라가 죽기 얼마 전에 쓴 곡인데 메르세데스 소사에 의해 전세계에 회자 되게 된다.
그녀는 오페라 극장에서 기타를 들고 이 노래를 불렀다. 감정이 북받친 그녀는 울먹였고 모인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삶을 감사할 줄 안다면 최소한 조금은 덜 부끄러운 길을 가게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망명생활중 마드리드에 머물면서 공연등 음악활동을계속했다. 그때 Joan Baez 나 Bob Dylon 등과 함께 전쟁의 만행을 고발하는 연주회를 가졌으며, 인종과 언어의 한계를 넘어 자유와 평화의 연대를 구축하는데에도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폭력적 투쟁이 아닌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이라는 누에바 깐시온의 구호대로 음악 하나로 세상에 호소했다.
1982년 복귀 이후 그녀는 지속적으로 앨범을 발표하고 순회 공연을 가지며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그러던 중 2000년 처음 신설된 라틴 그래미 시상식에서 Best Folk Album상을 수상 하게 된다. 어쩌면 스스로 들꽃이 되어 영혼으로 노래하고 민초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자 했던 그녀에게 저런 상따위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그녀의 사람사랑에 대한 세상의 작은 감사라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출처]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드립니다 |작성자 라파스
메르세데스 소사의 대표곡으로는
Kyrie(불쌍히 여기소서),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
Todo Cambia(모든 것은 변하네),
Yo Vengo A Ofrecer Mi Corazon(내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Misa Criolla(미사 크리올라 : 인디오 미사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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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소사(1972년)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노래운동은 한국의 1980년대 정세와 노래운동에 비교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보다 10여 년 앞서 전개된 이 노래운동에서 역사는 보편적 진리를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동서 양 진영은 철저하게 서로 다른 색깔로 무장한 채 모든 부문에서 영역 싸움을 해나갔다. 1차 대전, 2차 대전 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공고히 해나가던 미국은 소련의 세력확장에 대해 세계평화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따른 명분과 실력을 행사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적 격변기에 미·소는 한치의 양보 없이 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제3세계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항상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분쟁을 낳았다. 거기엔 한반도 남북분단을 비롯해 베트남 전,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과 반혁명들이 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념대립의 구도 속에 온전한 제3세계는 없었다. 미국은 좌파정부의 수립을 좌시 하지 않았으며 반공을 위해서라면 군사쿠데타 지원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과의 제반관계에서 미국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라틴 국가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정부세력,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리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뿌리깊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낳은 예증들이다
"노래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누에바깐씨온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인인 아따우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에 의해 1940년대부터 민속자료의 수집과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전통 민속의 회복 운동 적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운동의 시발점은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출범 전후로 볼 수 있으며, 보다 근원적인 동력은 쿠바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98년 쿠바는 독립운동가이며 혁명의 순교자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 가 이끈 독립운동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자본이 개입하고 대부분의 산업기반이 미국의 소유가 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정권은 민중의 삶과 이반된 채 부패의 깊은 골을 형성한다. 이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160 여명의 게릴라는 1,000명의 수비대가 지키는 몽카다 기지를 급습하지만 탈환에는 실패한다.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 기념일인 1953년 7월 26일이었다. 계속되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다 그로부터 5년 뒤 1959년 1월1일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고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Che Guevarra, Ernesto)와 함께 혁명을 완수한다. 바로 이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정치영역 뿐만 아니라 제반 문화운동에 대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문화혁명으로서의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쿠바혁명과 더불어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해방신학을 비롯한 매판자본론, 종속이론 등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다. 유럽의 전통 신학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하고 재해석한 해방신학은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ez)신부에 의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형성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최대 해결과제인 민중의 빈곤문제에 대해 인식의 자양분을 제공함으로써 혁명의 사상적 무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연대감을 형성한 누에바 깐씨온은 민족주의 정신의 파고를 타고 지식인과 예술가의 집단적 문화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미국의 팝과 록에 젊은층의 관심이 옮겨가는 과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민족 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대한 자각으로 활성화 되었다. 한편 이 새로운 노래운동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지에 머물지 않고 쿠바에서 진행 중이던 새로운 노래운동 Nueva Trova(대표적 가수: Pablo Milanes 와 Silvio Rodriguez) 에 영향을 끼쳤으며 혁명의 무기로서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에 제공되었다. 또한 대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계기와 맞물려 미국 내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누에바 깐시온은 라틴 아메리카에 동시다발적이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데 그 공통된 특징이 있다. 앞서 언급한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와 아르헨티나의 Nuevo Cancionero Argentino, 브라질의 Nova Musica Popular Brasileria 등은 새로운 노래운동의 같은 개념의 다른 이름들이다.
민중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끝끝내 승리하리라.
누에바 깐씨온의 본고장 칠레의 당시 정치경제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이 새로운 노래운동의 의미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칠레의 간략한 현대사는 다음과 같다.
184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는 1932년을 전후로 여러 차례의 쿠데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황에 시달렸다. 이후 민주적 정권 교체가 좌우익을 오가며 이루어졌고, 1964년에 기독교민주당(PDC)의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까지 칠레의 국내 정치경제 상황은 신제국주의론, 매판자본, 종속이론 등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실제상황이 악순환의 고리를 연결하며 발생한다.
1970년 당시 칠레는 초석과 동(구리)의 세계 최대 산지였으나 미국, 영국 등 외국 광산회사들이 독점적으로 지배권을 가지고 있어 이득의 대부분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미국 30대 다국적기업 중 24개 기업이 칠레 진출해있었고 은행을 제외한 18대 칠레 기업이 미국의 자회사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지주와 지배계층이 전 경작지의 4/5를 차지함으로써 토지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수도 산티아고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배계층인 지주, 산업자본가, 교회 등 기득권 보수세력은 민주선거에 의해 좌파로 정권이 이양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0년 9월4일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당시 62세)가 36.3%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민주선거에 의해 사회당 정권이 창출되었다.
[아옌데에 대해 짧게 소개하면, 그는 14세부터 구두수선공이던 무정부주의자 후안 데르마치를 통해 바쿠닌의 저작 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6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으며 의대학생회장으로 선출된다. 1932년 사회당에 입당하고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 된다. 1938-42년 보건장관을 역임했고,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네 차례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상원부의장과 의장을 지냈다. 이 사이 1952년,1958년, 1964년 세차례 사회당 또는 인민연합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선거운동에 누에바 깐씨온 음악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 비올레따 빠라로부터 영향받은 빅토르 하라와 인티-이이마니(Inti Illimani :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 낄라파윤(Quilapayun : 마뿌체어로 "세 명의 수염을 기른 사람"이란 뜻), 야뿌(Illapu : 께추아어로 "천둥·번개") 등의 그룹들이 그들이었다. 또한 같은 대륙의 음악인들도 이 새로운 노래운동에 참여한다. 우루과이의 다니엘 비에리티와 알프레드 시타로사, 페루의 왈츠의 여왕이라 일컬어진 차부가 그란다, 멕시코의 안파로 오초아와 로스 르크로리스타스,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 등이 그들이다.
제국주의적 착취의 근절과 독점타파, 그리고 농지개혁 등은 아옌데 정권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하여 구리광산, 철강 및 석탄 산업 , 은행 등 주요 산업을 전면 국유화하고 임금인상을 추진한다 . 특히 해외자본의 외국회사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감을 산다. 미국의 통신회사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m)의 국유화 조치는 칠레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당시 의장: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의 칠레에 대한 물밑 작전이 감행된다. 즉, 비축 구리를 방출시켜 구리의 국제시장가를 15.7% 하락시킴으로써 칠레로 외화유입이 차단되고, 계속해서 미국은 대외차관통로를 봉쇄함과 동시에 칠레의 미국산제품수입이 격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반(反)인민연합세력과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아옌데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경제봉쇄조치로 1973년 1월에 인플레이션 150%에 달하는 등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었다. 4월 광산노동자 파업, 의사·법률가·건축가 등 일련의 중산층이 반(反) 아옌데 세력으로 형성됐으며, 인민연합 내부에서 개혁의 혼선이 빚어지는 등 아옌데의 점진적 개혁노선이 한계를 노정한다. 결국 CIA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마련된 셈이었다.
1973년 3월 인민연합이 의회선거에서 과반수 지지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아옌데의 신임투표를 계획한다. 9월 11일 신임투표계획 발표예정일이었던 그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육·해·공 3군, 경찰대의 연합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평의회는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총사령관을 선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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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는 특유의 굵고 온화한 목소리로 누에바 깐시온을 상징하는 대가수이다. 물론, 그녀는 빼어난 노래 실력과 여타의 가수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자세'를 가진 여걸이지만, 그녀가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로까지 칭송되는 것은 그녀의 음악 인생이 모국인 아르헨티나와 남미의 질곡 많은 현대사와 괘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새로운 노래)은 본래 1950~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급속한 유입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숭고한 음악적 자산과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음악 운동이었다. 그 바탕에는 아르헨티나의 아따우알빠 유빵끼(Athaualpa Yupanqui),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를 필두로 한 전시대의 뮤지션들이 닦아놓은 '남미의 뿌리 찾기'의 전통이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화려한 치장을 제거한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단촐한 악기 편성이 주를 이루었으며, 가사에는 민중과 함께 하며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메세지를 담았다.
남미에 군부독재가 몰아친 1960년대~1970년대 초중반, 이들의 노래의 메시지는 더욱 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저돌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에 대해 군부는 금지곡 세례와 활동 제한, 강제 투옥과 출국 등의 초강수로 대응했다. 혼탁한 시대에 맞서 노래하는 사람의 책임을 다한 대가로 수많은 스타들이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며, 칠레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목숨까지 바쳤다.
이런 당시 남미의 정치적 상황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에,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그 사상이 여타의 남미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지는 것을 미국은 가만히 지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남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각 국의 보수 세력과 군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하여,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그들의 손 안에 묶어둘 수 있었다.
그토록 폭압적인 지배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종의 '목적음악'처럼 변질된 기분이 없지 않지만, 사실 누에바 깐시온은 어디까지 노래와 시의 만남을 추구하고 그 서정성과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남미의 음악 '혁명'이었다. 그들은 주옥같은 가사와 노래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켜내려 했으며, 노래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의 뚜꾸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노래 인생의 시작은 열다섯 살에 방송국의 아마추어 가요제에서 우승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프로뮤지션의 길을 걷지 않고 전통춤 강사로 살아갔지만, 1962년에 열린 가수와 시인들의 모임을 통해 누에바 깐시온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1965년에 코치킨 포크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며, 이것이 필립스사와의 첫 번째 음반 계약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는 작곡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곡보다 소사가 부른 노래가 더욱 유명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Gracias a la vida(생애 감사하며)'는 비올레따 빠라의 곡이고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는 유빵끼의 곡이지만, 오히려 소사의 목소리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토록, 그녀는 다른 이의 말과 음악을 완벽하게 자신의 말과 음악으로 변용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누에바 깐시온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의 명성을 쌓아간다.
1975년의 쿠데타로 아르헨티나에 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녀 역시 극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1979년, 그녀는 자신의 콘서트 장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이 날 공연을 본 청중들과 밴드 멤버들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갖은 위협에 시달리고 험난한 인생길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남편마저 죽으면서, 더 이상의 음악 활동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군사정권에 의해 영구 추방되어 끝 모를 유럽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한없는 절망으로 시작된 망명 생활이었지만, 그것은 존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해리 밸라폰테(Harry Belafonte)등과 교류하고 공연을 벌임으로서, 그녀의 음악 지평을 넓히는 동시에 유럽 전역으로 그녀의 명성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아르헨티나에서 살면서 헌신해온 그녀에게, 타향살이는 정신적 스트레스 뿐 아니라 목소리가 닫히는 위기까지 가져왔다.
결국 그녀는 1982년, 많은 위험과 위협을 무릅쓰고 아르헨티나로 귀국을 감행한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잉글랜드에게 패배했고, 군부가 몰락하면서 너무나 허탈하게 민주화를 맞이한다. 곧이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많은 이들에게 기념비적인 공연으로 남아있다. 특히 'Gracias a la vida'의 마지막 1분을 장식하는 관객들의 기립박수로부터는, 단순히 귀국한 대가수에 대한 감사와 축하, 민주화에 대한 경탄을 넘어서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이름이 아르헨티나 인들에게 주는 위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소사의 레퍼토리들이 보다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 부터이다. 아르헨티나를 넘어서,스팅(Sting), 밀뜬 나시멘뚜(Milton Nascimento) 를 비롯한 타국의 슈퍼스타들에게 초대받아 기꺼이 공동 작업에 임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베스트 앨범과 모음집이 출시되어 그녀의 음악을 접하기는 더욱 수월해졌다.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1997년, 그녀는 한 번 더 쓰러진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르헨티나의 평화와 환희, 그리고 노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몸에, 예순을 넘어 반응이 찾아온 것이다.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사이에 탈수현상으로 30kg이 빠지면서,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걸 이겨내고, 1998년 < Al Despertar >로 재기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만약 메르세데스 소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듣고 바로 '아, 좋구나' 느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그녀의 두터운 흉성과 특별히 오버하지 않는 무난한 보컬 스타일은 자칫 무미건조하게 들릴수도 있다. 또한 노래에서 뿜어 나오는 육중한 무게감과 지나칠 정도의 차분함으로 인해 절대 쉽게 가슴을 파고들지 않을 것이며, 특히나 요즘의 감성과는 절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미쳐 걸러지지 않은 잔해 같은 앙금들이 은연중에 베어 나온다. 그녀의 음악이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에 의한 압박감 탓이 클 것이다. 직선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소위 '한방에 보내는 음악'에 익숙하고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나칠만치 관조적이며 사색적인 소사의 노래는 그리 매력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소사의 노래는 가슴속 분노와 격정을 있는 그대로의 이상으로 분출하는 절창도 아니며, 기교와 기술이 넘쳐흐르는 솜씨 좋은 가수의 요령과 센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엔 그런 연출된 감정이나 훈련된 기술 따위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담담한 고백과 진실성이 들어있다.
이제 그녀의 나이도 일흔을 넘겼다. 아르헨티나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민중의 곁에서 몸소 함께 하며, 진실한 영혼이 담긴 노래로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그녀의 목소리는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해와 성찰을 품고 있다.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해석자'라는 영광스런 호칭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그녀가 과대평가 받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릇된 집권 세력에 적극적으로 저항을 표한 가수도 아니었으며, 민중을 위해 노래한 가수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같은 호칭은 과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소사 자신도 인정했다..그녀는 절대 사회참여적인 노래를 한적이 없다고, 처음부터 그녀의 관심은 그녀주위의 삶과 현실, 그리고 인간의 문제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견지하지는 않았을망정, 경제난과 군부정치에 이중으로 시달리던 아르헨티나 평민들의 괴로운 삶에,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한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런 그녀의 위상은 아무리 높게 평가되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전 시대 아르헨티나인들이 추앙한 인물이 '국모' 에비타였다면,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던 공통 분모는 메르세데스 소사였다.
'Gracias a la vida'.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많은 사람들, 기쁘고 슬픈 일들, 소중한 사랑들,자신이 겪고 만났던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고, 산다는 것 자체로 기껍고 행복하다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그녀는담담하게 노래한다. 비올레타 빠라의 원곡을 넘어서는건 물론이거니와,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노래로 자신있게 추천하는 곡이다.
요즘 가수들에 질렸다고 말하며, 진정한 가수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첫 손가락으로 꼽고 싶은 가수이다. 본질적으로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사실 그녀의 별 것 없어 보이는 매끄러운 인토네이션과 비브라토, 바이브레이션과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음정의 구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어느 정도의 연륜과 감상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모국 아르헨티나와 함께 했고, 그 고통에 아파하고 환희의 순간을 함께 했으며, 치욕으로 얼룩진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마지막 빛 같은 존재였던, 영원한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 메르세데스 소사. 설령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삶에 무한한 영광이 함께 하리라. 라틴 아메리카는 영원히 그녀를 추앙할 것이며, 전 세계인이 그녀의 노래에 담긴 치유와 회복, 기쁨과 사랑의 힘을 축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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