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 Story
말 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7명의 누이들 틈에서 자란 배리 이건(애덤 샌들러). 여자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 배리는 누군가 길에 버린 풍금을 발견하고, 사무실에 갖다놓는다. 바로 그날, 한 여인을 만난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사무실 옆 카센터를 찾아온 레나(에밀리 왓슨)는 배리에게 자동차 키를 맡기고 간다. 여동생의 직장 동료였던 레나는 배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두 사람은 펀치에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레나를 만나기 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폰섹스 업체에 전화를 걸었던 배리는 협박에 시달린다. 고개의 신상정보를 빼내 가족과 직장에 알리겠다는 악질 사기꾼에게 걸려든 것이다.
■ Review
<펀치 드렁크 러브>는 <매그놀리아>의 한 에피소드를 빼내 곱게 다듬은 듯한, 작은 사랑 이야기다. 70년대 포르노 업계의 흥망성쇠나, 이리저리 얽힌 인물들의 상처와 고통을 그리며 우리 세계의 불가해성을 그려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이 단 95분 동안 하나의 사랑에만 집중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과 내덤 샌들러의 기묘한 조합은, 전혀 의외의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미국 최고의 코미디언 중 하나인 애덤 샌들러가 그려내는 사랑 이야기는, 정말 가슴을 얼얼하게 만든다. 타이슨의 핵주먹에 맞기라도 한 듯이.
<웨딩 싱어>나 <빅 대디> 같은 애덤 샌들러의 이전 영화들에도, 아주 약간씩의 고독과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펀치 드렁크 러브>는 그 가벼운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쾌한 발걸음을 보여준다. 스텝을 밟으며, 멍한 감동을 안겨주는 애덤 샌들러는 분명 새롭게 태어났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펀치 드렁크 러브>의 ‘코미디’를 위해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작가로 잠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앤더슨이 재창조한 애덤 샌들러의 배리 이건은 아직 미숙한, 소년의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캐릭터다. 다소 엉뚱하고, 다소 폭력적이며, 세상사에 순진한 소년. 모 회사의 제품을 사면 항공사 마일리지를 준다는 광고를 본 배리는 머리를 굴린다. 그리고 행동에 옮긴다. 가장 싼 제품인 푸딩을 사면, 단돈 몇천달러로 평생 공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가끔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앤더슨은 <타임>에 실린 실제 인물의 기사를 읽고, 푸딩을 사모으는 배리 이건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플롯은 절묘하게 커브를 틀면서 관객을 황홀지경으로 끌어들이지만, 진짜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 플롯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배리와 레나의 사랑의 힘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애덤 샌들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바웃 슈미트>가 잭 니콜슨의 영화인 것처럼, <펀치 드렁크 러브>는 애덤 샌들러의 영화다. 그동안 애덤 샌들러가 연기한 역은 대체로 패배자이거나 멍청이였다. 하지만 배리 이건은 단순한 패배자나 멍청이가 아니다. 애덤 샌들러의 배리 이건은 고독한 남자다. 평소에는 소박하고 온순하지만 때때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 뭔가 난처한 상황에 몰렸을 때, 뭔가를 때려부수지 않고는 그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도움을 청해도 소용없다. 치과의사인 매형에게 ‘자주 펑펑 울곤 해요’라며 조용히 호소하면, 다음날에는 모든 누이가 알고 있다. 쉴새없이 참견하고, 앞뒤에서 종알거리는 누이들을 피하는 방법은 분노밖에 없었다. 평상시의 무표정은, 그런 부조화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화장실을 때려부수고 태연히 돌아온 배리에게, 식당 매니저가 물어본다. 당신이 부쉈나요? 아니오. 그럼 누가 그랬죠? 모르겠는데요? 배리는 태연하게, 타인에게 자기를 숨긴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애덤 샌들러는 그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가 그려내는 사랑 이야기는, 일종의 연극이다.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조작된(긍정적 의미에서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다. 레나는 어떤 조건이나 판단없이, 운명적으로 배리를 사랑한다. 거기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 그것만이 소심하고 겁쟁이인 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 그 사랑의 출발점은 개구리비보다는 훨씬 사실적인 풍금이다. 배리의 눈앞에 버려진 풍금 하나. 그 풍금을 치면 흘러나오는 음악은, 배리를 꿈같은 사랑으로 이끌어간다. 배리가 하와이까지 쫓아가서, 마침내 호텔 로비에서 레나와 멋진 키스를 할 때, 주변은 온통 그림자로 사그라든다. 오직 그들의 사랑만이 빛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는 이 세상을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보이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때로 무척이나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전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태연하게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는 이 세상을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보이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때로 무척이나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전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태연하게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 역시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단 하나의 이유로 용납이 된다. 건달을 보내 폭력을 휘두른 ‘매트리스 맨’을 찾아간 배리는, 한손에 수화기를 들고 당당하게 말한다. 나에게는 ‘사랑의 힘’이 있다고. 배리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 사랑의 힘이고, 덩달아 영화까지도 오색찬란하게 승화시켰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플롯은 절묘하게 커브를 틀면서 관객을 황홀지경으로 끌어들이지만, 진짜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 플롯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배리와 레나의 사랑의 힘이다. 앤더슨의 연출 기교와 드라마틱한 갈등이 단순한 재기가 아니라, 위대한 재능임을 <펀치 드렁크 러브>는 보여준다. 지난해 칸영화제는 그 위대한 재능에게 감독상을 공동으로 준 것이다.
:: <펀치 드렁크 러브>의 배우들
그놈, 멋지지 않아서 좋구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루이스 구즈만
에밀리 왓슨은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꿈의 공간이 맞닿아 있다면, 에밀리 왓슨은 그 경계 너머에서 잠깐 넘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어떤 추악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아무리 더럽혀져도, 오직 그녀만은 구원받을 것 같다. 그 무구함, 그 몽환적인 작은 웃음 때문에. 에밀리 왓슨이 발견된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도 그랬고, <레드 드래곤>에서도 그랬다. 이제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는 애덤 샌들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직장 동료의 가족사진에서 본 배리를 찾아오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과감하게 키스까지 요구한다. 에밀리 왓슨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배리 이건의 그 무조건적인 투항은 쉽게 상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폰섹스 회사를 운영하는 딘 트럼벨 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멋진 배우다. 하지만 용모나 몸이 멋지지는 않다. 그 탓에 주연을 맡기는 힘들지만, 조역으로는 늘 빛난다. 권태에 지친 얼굴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폴 토머스 앤더슨이 만든 <리노의 도박사>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에 모두 나왔다. <레드 드래곤>에서는 드래곤의 실체와 만나는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기자로 나왔고 <올모스트 페이모스>에서는 소년에게 음악‘평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비주류 평론가로 나왔다. ‘멋지지 않기 때문에’ 늘 집에 틀어박혀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뮤지션과 팬에게 비난을 받는 평론가의 우울한 초상을 ‘멋지게’ 보여준다.
지난해에만도 <펀치 드렁크 러브> <웰컴 투 콜린우드> <플루토 내쉬> <몬데 크리스토>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한 루이스 구즈만은 배리의 충실한 부하 직원 랜스 역을 연기한다. 올해에는 애덤 샌들러와 잭 니콜슨이 함께 나온 <성질 죽이기>에 출연했다. 사회운동가라는 낯선 전직을 가진 루이스 구즈만은 <패밀리 비즈니스> <블랙 레인> <칼리토> <트래픽>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글: 김봉석(영화평론가)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