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의 이름은 영화광에게 폭넓게 반향되고 있다. 이들 형제는 공동으로 각본을 쓰며, 형인 조엘이 감독을, 동생인 에단이 제작을 맡는데, 어떤 장르로 작업하든 그 장르의 고전적인 기율을 숙지한 상태에서 비틀 줄 아는 재능이 보인다. 조엘 코엔은 1954년 태생이며, 뉴욕대 영화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저예산 공포영화를 주로 연출하는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The Evil Dead>(1983)에서 편집조수를 맡는 것으로 영화경력을 시작했다.
코엔 형제의 이름은 뉴욕 근교의 일부 극장에서만 개봉된 <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 (1984)가 평론계의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음 작품인 <아리조나 유괴사건 Raising Arizona>(1987)은 20세기 폭스의 배급망을 타게 되고 코엔 형제는 서서히 주류로 진입했다. <분노의 저격자>가 하드 보일드 서사 구조와 필름 누아르의 시각 스타일, 그리고 모더니즘영화의 수사학을 합친 가작이라면 <아리조나 유괴사건>은 카메라의 시각적 개그와 파격에 가까운 이야기 구조로 독특성을 이뤄낸 영화이다. 그러나 거의 걸작 수준의 작품을 이뤄낸 것은 <밀러스 크로싱 Millers Crossing>(1989)일 것이다. 앞의 두 작품과 달리 퍽 고전적인 스타일로 조직된 이 영화에서 코엔 형제는 하워드 혹스와 같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 시절에 활동하던 대가급을 떠올리게 하는 기량을 보여준다. <바톤 핑크 Barton Fink>(1991)는 90년대 코엔 형제의 작업방향을 예감하게 해주는데, 예술가를 질식시키는 할리우드, 불가해한 현실, 그 현실 앞에 절망하는 작가가 보여지지만, 코엔 형제는 작가가 체험한 현실에 엄숙한 절망을 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작가가 처한 현실이 현실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모호하게 만들어 현실과 재현의 경계를 짓궂게 헤쳐놓으려는 듯이 보인다. <허드서커 대리인 The Hudsucker Proxy>(1994) 역시 앞의 두 작품과 연속선상에 있는 미국 신화의 황금기를 다룬다. <밀러스 크로싱>이 갱들이 활약하던 금주법하의 30년대가 배경이라면, <바톤 핑크>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절정에 있던 40년대가 배경이며, <허드서커 대리인>은 미국 산업이 영화를 누리던 50년대가 배경이다. 세 시기를 세가지 분위기로 세 도시에서 다뤄내는데, 스타일이 모두 다르다. <허드서커 대리인>은 할리우드 고전영화 시대 때나 가능했던 동화적인 해피엔딩의 꿈을 다시 꾸미지만, 그렇다고 프랭크 카프라식의 세계관에 공감하는 구석도 없다. 대신에 선배들의 영화에서 이야기 구조와 영감을 빌려오고 재기발랄한 기교로 화면을 끌고가는 극단적인 영화 수사학에 몰두한다.
칸에서 감독상을 받은 <파고 Fargo>(1996)는 영화광의 재치있는 수사학에 함몰될 것 같았던 코엔 형제의 작품세계가 현실을 블랙유머로 통찰할 수 있는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장인의 재산을 노려 아내의 유괴극을 계획하는 자동차 세일즈맨과 유괴극을 실행하는 삼류 건달들, 그리고 이들을 쫓는 여경관 마지의 일상을 병행해 보여주는 <파고>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우스꽝스러움 뒤에 비극을 감춘 미국 시골의 중산층 삶의 양면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그뒤로 코엔 형제는 <위대한 레보스키 The Big Leboski>(1998)로 다시 한번 냉소적인 유머와 화려한 스타일의 재능을 보여줬다.
대공황기를 무대로 미시시피강을 따라 초현실적인 여행을 한다는 내용의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2000), 평범한 인간의 일탈이라는 소재로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 칸느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1) 2004년 톰 행크스 주연의 코미디 범죄 영화 <레이디 킬러> 2006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 <사랑해,파리>, 칸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여 조직위원장 질 자콥이 직접 제작과 편집을 맡고, ‘영화관(館)’ 하면 떠오르는 느낌을 주제로 역대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 35명이 3분짜리 스케치 33편을 찍어 완성된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2008년 아카데미 시상식 8개 부문 노미네이트 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번 애프터 리딩> 등을 감독 하였고, 2009년에는 <시리어스 맨>을 연출했다. 씨네21
영화비평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맥베스의 비극' 조엘 코엔이 만들어낸 비극의 모습은
노쇠한 육체에 깃든 애상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비극’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다 실로 가까운 곳에서 그 비극을 보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또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해도 우리는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의 희곡들은 스크린 위를 끈질기게 파고들었고, <맥베스> 또한 수차례 영화화되었다. 그중에는 오손 웰스, 로만 폴란스키,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진지한 거장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조엘 코엔이 이 유명한 비극을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저 거장들 못지않게 양식적인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그들과는 달리 빼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코엔 형제의 형 조엘이 과연 어떤 모습의 비극을 완성해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코엔 형제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장르영화의 문법만큼이나 문학작품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제는 제임스 M. 케인과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으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그러니 조엘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 해서 새삼 놀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맥베스> 안의 범죄 계획, 살인, 강박적인 불안과 공포, 죄의식의 고통과 파국, 초현실적인 존재와 장치들은 서사에 내재되어 있는 필름누아르의 성격들과 공통점이 있고, 시대극을 많이 만들어온 코엔 형제의 이력이 조엘 코엔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선택한 필연적인 이유가 되었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특히 매카시의 소설과 희곡 <맥베스>의 명백한 차이는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매카시는 지리적 풍경과 무드, 시청각적 이미 지 묘사에 능한 작가다. 소설의 배경에 따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텍사스에서 촬영한 코엔 형제는 “소설 자체가 풍경을 강조하지 않으면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이”었으며, “로케이션은 그 자체로 캐릭터”라고 말했고, 이 영화를 보기만 한다면 누구든 형제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명민한 코엔 형제는 미국의 지리적 풍경을 하나의 캐릭터로 끌어오는 데 뛰어난 감각을 발휘해왔다. 지역적 특색은 영화의 리듬을 좌우하기도 했다. 가령 우리는 빠른 속도로 행진하는 <파고>(1996)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상상할 수 없으며, 메마르고 차가운 풍경을 품고 있는 광활한 대지 없이는 이 영화들이 성립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초현실적 세계의 매혹적인 이미지들
그러나 희곡 <맥베스>엔 지리적 풍경이 없다. 배경은 명시되어 있지만 그곳들은 연극의 무대 혹은 영화 안에서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기획되고 설계될 수 있는 미지의 공간들이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할 수도 있고, 구로사와 아키라처럼 번안할 수도 있으며, 오손 웰스의 표현주의적 실내극처럼 만들어질 수도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조엘 코엔은 오손 웰스의 길을 간다. 그러나 그의 길 위에는 웰스만이 있는 건 아니다. <맥베스의 비극>의 세계 안에는 프리츠 랑,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칼 드레이어, 잉마르 베리만, 찰스 로튼의 스타일이 어른거리며, 목록은 더 길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기하학적인 구조의 성 안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치형 기둥들이 서 있고, 창백한 인상을 풍기는 텅 빈 공간들에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듯 드리우는 출처 모를 그림자와 세계를 찢어놓기라도 할 듯한 날카로운 나뭇가지의 그림자들이 비치고, 음산한 안개가 1.37:1 비율의 흑백 화면을 에워싸는 표현주의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세계다.
이 세계 안의 시각적 이미지들은 더없이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게다가 마녀와 노인으로 등장하는 캐스린 헌터의 기괴하게 꺾이는 신체 움직임과 여러 질감을 내는 목소리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맥베스의 비극>의 흥미로운 세계가 시각적 스타일이나 정교하게 설계된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분명 아니다. 이 영화는 기괴하고 강력하며 공포스럽기까지 하지만 동시에 깊은 애상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서사는 원작과 같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나, 카메라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인물이 보내는 시선의 방향으로 숏이 부드럽게 연결되며 연극적인 요소들과 영화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이 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코엔이 희곡을 각색하며 구성을 바꾸지 않았고 후반부의 몇 대목을 제외하고는 대사를 거의 편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실은 신기한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은유적인 표현과 운율을 지닌 대사들, 긴 독백들은 고유의 음악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곧 영화적인 리듬을 담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간의 영화적 리듬
그럼에도 이 영화의 운동감이 돋보이는 장면들은 레이디 맥베스(프랜시스 맥도먼드)와 맥베스(덴절 워싱턴)의 긴 독백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등장한다. 이 장면들에서 운동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유려하게 장면을 구성하는 코엔의 능력 때문이지만 장르를 변주하는 능력 또한 빛나기 때문이다. 특히 맥베스가 고뇌를 거듭하는, 아치형 기둥들이 길게 놓인 복도는 장르 전환이 활발히 진행되는 공간이다. 덩컨 왕(브렌던 글리슨)이 맥베스의 성에 도착할 때 맥베스는 처음으로 이 복도에서 독백을 시작한다. 그 내용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무서운 야망 사이의 번뇌인데, 맥베스가 이 양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갑자기 복도 옆으로 난 창들이 환해지며 그 너머로 웃고 담소를 나누는 여인들이 비치는 세속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순간 맥베스는 각성하며 살해 계획을 단념하고자 하는데, 이때 복도는 연극 무대와 같다. 하지만 범죄를 단행해야 할 밤이 깊어지면 이 복도는 곧장 범죄 스릴러가 펼쳐지는 장소가 되고, 다음날 아침 문지기가 희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걷고 난데없이 넘어지기도 하면 영락없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장이 된다. 이렇듯 장르가 변주되는 공간이 위치한 세계 안엔 다양한 영화적 리듬이 들어찬다.
하지만 <맥베스의 비극>의 가장 빼어난 점은 이 영화의 정교한 형식들이 아니라 캐스팅에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도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덴절 위싱턴과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같은 배역을 맡았던 어느 배우들보다 나이가 많다. 그들은 야망이 실현되어도 그것을 유지하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아 보이고, 후대를 잇기에도 늦어버린 나이에 이른 것 같다. 처음 맥베스가 등장하는 순간 그의 다리는 여느노인의 다리와 마찬가지로 허벅지 안쪽 근육이 약해져 둥글게 휘어 있고, 레이디 맥베스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그녀의 야욕으로 들끓는 얼굴은 생기로 가득차 보이지만 그 불길 같은 마음이 잠잠해지면 그녀의 얼굴은 이내 메마르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엄한 서사보다 이 노쇠한 인물들의 육체에 더 짙은 애상이 배어 있는 걸 볼 것 같다. 그런 노년에 접어든 부부가 진정 마음을 동요시킨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홍은미(영화평론가) 2022-02-16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