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41 ~ 1943
소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를 원작으로 한 <강박관념>은 밑바닥 인생들을 주인공으로 해 금지된 소재인 불륜을 다루었다.
카메라, 거리와 현실 속으로최초의 ‘네오리얼리즘’영화 <강박관념> 탄생
드디어 ‘네오리얼리즘’영화가 왔다.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새로운 영화가 1943년 <강박관념>과 함께 도래했다. 이론 진영이 요구한 이탈리아영화의 혁신에 화답한 영화가 바로 루키노 비스콘티의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강박관념>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비평가인 안토니오 피에트란젤리는 이 영화를 “네오리얼리즘영화”라고 명명했다.
1943년 이탈리아 영화계에는 ‘네오리얼리즘’이란 신조어가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다. 올해 초 비평가인 움베르토 바르바로는 기존 이탈리아영화의 관습을 비판하고 새로운 영화를 요구하면서 ‘네오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썼다. 이후 이 용어는 마치 혁명구호처럼 영화저널, 영화클럽, 영화학교로 번져갔다. 바르바로의 이론은 1942년 제기된 자바타니의 주장에 기초한 것으로, 그는 “영화감독은 당대의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인위적인 플롯, 전문배우를 버리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강박관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제임스 M. 케인의 하드보일드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원작으로 한 <강박관념>은 밑바닥 인생들을 주인공으로 해 금지된 소재인 불륜을 다루었다. 이는 파격적인 것이었는데, 범죄와 비도덕적인 것이 영화에 담겨서는 안 된다는 무솔리니 정권하에서 만들어진 이탈리아영화 대부분은 말끔한 중류 계급의 멜로드라마였던 것이다. 반면 비스콘티는 세트를 벗어나 포강계곡 근처로 나아가 메마른 땅, 작열하는 태양, 땀에 전 노동자들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그곳의 한 선술집에서 매춘의 노역에서 벗어났으나 지긋지긋한 부부생활에 갇힌 여주인공과 떠돌이 노동자가 눈이 맞아 여주인공의 남편을 죽인다는 것이 대략의 줄거리이다. 비스콘티는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으로 <토니>(1934)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을 되살려냈다. <토니>는 비전문 배우를 기용해 로케이션 촬영으로 하층 노동자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린 영화였다. 극영화 데뷔작을 준비하는 비스콘티에게 케인의 소설을 권한 것도 바로 르누아르였다.
한편, <강박관념>은 국내외 상영이 모두 금지될 지경에 처해 있다. 국내에서는 영화의 거친 내용에 놀란 정부가 상영금지 혹은 대폭삭제 상영을 명령했고, 판권을 해결하지 않고 무단으로 케인의 소설을 도용한 터라 해외 상영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르보의 시대는 끝났는가
<두 얼굴의 여인> 흥행 참패, 소속사 해고 조치
추락하는 여신에겐 날개가 없었다. 1941년, 여신으로 숭배되던 그레타 가르보가 소속사인 MGM으로부터 해고됐다. 이제 더이상 가르보가 보여줄 것이 없다고 판단한 MGM은 그를 스크린 밖으로 밀어냈다. 최근 몇년간 그는 미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큰 인기를 누려왔다. 하지만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시장이 막히자 그의 효용가치는 바닥을 드러냈다. 해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스크루볼코미디 <두 얼굴의 여인>의 처절한 실패였는데, 항간에는 이 영화가 ‘가르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에서 제작된 영화’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스톡홀름 출신인 가르보는 1925년 모리스 스틸러 감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MGM 대표 루이스 B. 메이어는 가르보와 스틸러가 만든 <괴스타 벨링의 이야기>를 보고 스틸러에게 계약을 제의했는데, 이때 스틸러는 가르보의 동행을 계약조건으로 제시했다. MGM은 이렇게 해서 할 수 없이 데려온 가르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 ‘스웨덴의 노마 셰어’라는 별명을 붙이고 셰어가 거절한 시시한 멜로드라마 <급류>에 그를 출연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첫 러시 시사 뒤 ‘큰 떡’을 손에 쥐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뒤 가르보는 은막의 여신으로 승승장구했다.
MGM은 가르보의 유성영화의 데뷔를 미뤄왔다. 무성영화의 스타가 유성영화에서 깨지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던 탓이다. 하지만 무작정 그럴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1930년 MGM은 ‘가르보가 말을 한다!’는 홍보카피와 함께 그를 유성영화 <안나 크리스티>에 출연시켰다. 여신으로 우러르던 가르보가 입을 연다는 사실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새로운 스타들이 급부상하는 것과 반비례해 그의 인기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숭배의 불씨를 되살려줄 계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MGM은 1939년 에른스트 루비치의 코미디 <니노치카>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번에는 ‘가르보가 웃긴다!’라는 카피와 함께. 이어 가르보는 스크루볼코미디 <두 얼굴의 여인>으로 다시 한번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가르보는 쌍둥이다!’라는 카피가 이번엔 먹혀들지 않았다. 이제 가르보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안 것이 바로 그를 발탁해 대스타로 키웠던 MGM이었다.
영화인 노조의 추락
수뇌부, 파업 막아주겠다며 뇌물 받아 징역형
파업을 막아주겠다며 할리우드 스튜디오 대표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노조 수뇌부에 징역이 선고됐다. 1941년 가을, 뉴욕 대법원은 국제무대기술노동자연맹(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ritical Stage Employees, 이하 IATSE)의 수뇌부인 조지 브라운과 윌리 비오프에게 사기 혐의로 각각 징역 8년과 10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할리우드 내 파업을 막아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십세기 폭스 대표 조셉 센크로부터 모두 100만달러를 받아챙겼다.
이러한 IATSE의 부패상은 조셉 센크에 대한 수사에서 드러났다. 센크는 세금 포탈과 위증 혐의를 비롯, 모두 39개의 사유로 검찰에 기소돼 1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조사과정에서 그가 할리우드 제작사 대표들을 대신해 이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1893년 조직된 IATSE는 1939년 현재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하는 영화인 4만명을 거드린 막강노조. 할리우드 노동자 3만명 가운데 1만2천명이 여기 소속이다. 그만큼 막강한 조직이나 할리우드 경영진과 유착하면서 어용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만큼 IATSE에 반발해 새로운 노조를 건설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조직이 스튜디오노조협의회(Conference of Studio Unions). 1941년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난 뒤 조직된 단체로, IATSE 소속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IATSE 수뇌부 구속은 IATSE에 적잖은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영화산업에 독립제작자 급부상
웰즈, 디즈니, 채플린 등 톱10으로 꼽혀
1942년 2월18일치 <버라이어티>는 ‘독립제작자의 급부상’을 미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경향으로 진단하는 기사를 실었다. <버라이어티>는 “앞으로 나올 중요한 할리우드영화는 이들의 손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활동 중인 독립제작자 ‘톱10’을 꼽았다. 이 명단에는 데이비드 셀즈닉, 사뮈엘 골드윈, 세실 드밀, 월트 디즈니, 찰리 채플린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쟁쟁한 이름 가운데 ‘원치 않게’, ‘졸지에’ 독립제작자로 나서게 된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오슨 웰스이다.
이미 연극무대와 라디오 방송에서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입증한 오슨 웰스는 최종 편집권을 포함한 영화제작의 전권을 위임받는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RKO와 계약하고 할리우드로 건너왔다. 영화의 모든 형식을 혁신하기로 ‘맘먹고’ 만든 데뷔작 <시민 케인>은 “천재가 일을 내다”(<할리우드 리포터>)라는 상찬을 들었지만, 주요 배급망을 통해 극장에 풀리지 못했다.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이 영화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며, 자기 소유의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리지 못하도록 했고, 할리우드를 향해서는 이 영화를 배급할 경우 보복 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시민 케인>은 변두리극장이나 독립극장에서만 개봉됐고, 이는 흥행 부진의 주원인이 됐다.
RKO 안에서 웰스의 입지는 극히 좁아졌다. RKO는 웰스의 다음 영화 <위대한 앰버슨가>를 마음대로 가위질했고, 급기야 그가 촬영 중이던 다큐멘터리 <잇스 올 트루>의 제작지원을 중단해버렸다. 그를 발탁했던 RKO 대표 조지 셰퍼가 회사를 떠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새로 부임한 피터 라드본은 아예 그와의 재계약을 거절했다. 그 바람에 독립제작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웰스는 RKO로부터 <잇스 올 트루>의 촬영분을 사들인 뒤 자비로 촬영을 계속했다. 또한 웰스는 몇개의 독립 프로젝트를 구상했는데, 그중 프랑스의 악당 앙리 랑두의 실화에 토대한 신작 소재는 5천달러를 받고 찰리 채플린에게 팔기도 했다. 아직까지 웰스의 차기작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호기롭게 할리우드에 입성하던 때와는 정반대의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워너, 험프리 보가트 ‘금이야 옥이야’
살해 협박에 10만달러 생명보험 가입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는 `여자라면 사랑하고 싶은` 멋진 남자로 완성됐다.
1942년 11월 워너브러더스가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 사망에 대비해 10만달러짜리 보험을 들었다. 그와 잉그리드 버그만 사이를 의심한 아내 메이요 메소트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그의 사망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보험에 가입한 것이다. 아직 보가트는 살해되지 않았고 따라서 워너브러더스도 보험금을 타지 못했지만, 이번 일은 보가트에게 거는 워너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카사블랑카>의 대사를 인용한다면, 보가트는 정말 ‘운명에 따라’ 스타가 됐다. 1937년 워너브러더스와 계약한 그는 주급 1천달러를 받으며 B급영화의 주연과 A급영화의 조연을 오락가락했다. 그에게 스타로 발돋움할 전기를 마련해준 영화는 <시에라 산맥>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워너의 A급배우 조지 라프트가 거절한 로이 얼로 출연해 주목받았다. 그는 1941년 무슨 인연인지 또다시 라프트가 거절한 영화 <말타의 매>의 주인공 샘 스페이드 역에 캐스팅됐다. 라프트는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라며 <말타의 매> 출연을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 원작인 대시엘 해밋의 소설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2번이나 영화화됐지만 한번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터였다. 하지만 “올해 최고의 미스터리스릴러”(<타임스>)라는 평가를 들은 <말타의 매>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타’로 들어간 보가트 또한 급부상했다. 워너는 그를 갱스터 영웅이었던 제임스 캐그니, 에드워드 로빈슨의 뒤를 이어 워너를 중흥시켜줄 배우로 점지했다. 그래서 제작비 80만달러가 들어가는 A급영화 <카사블랑카>의 남자주인공으로 한때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라프트를 고려했던 제작자 할 왈리스는 이들을 제치고 보가트를 캐스팅했다. 이번에는 보가트가 라프트를 이긴 것이다. <카사블랑카>는 보가트의 매력을 한껏 부풀려주었다. 여기에는 시나리오 작가가 여러 차례 바뀐 것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곧 작가마다 로맨스, 유머, 냉소주의, 액션 등 줄거리와 함께 주인공 ‘릭’에게 새로운 성격을 추가하는 바람에 릭의 캐릭터는 극중 대사처럼 “여자라면 사랑하고 싶은” 멋진 남자로 완성됐다.
단 신 들
독일 영화산업, UFA로 완전 통합
1942년 독일의 영화산업이 완전히 국유화됐다. 독일의 모든 영화사들은 UFA-필름이라는 거대한 회사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나치는 영화산업의 모든 부분을 망라하는 183개 회사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집권 뒤 독일영화를 통제하기 위해 국유화를 시도해왔다. 이에 따라 독일 내 영화사들을 사들여 1939년에는 독일의 영화사 수가 이미 18개로 줄었다. 그리고 이 영화사들조차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스탈린상 수상
1941년 5월15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알렉산더 네프스키>로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유럽 침략자들에게 맞서 러시아 수호 전쟁을 이끈 중세의 왕자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당시 점증하던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한 저항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애국적 영화로 평가받았다.
영국, 사실 재현한 세미다큐 인기
영국에서 사실을 재현한 세미다큐멘터리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1942년 데이비드 린과 노엘 카워드가 공동 연출한 구축함 선원들에 대한 영화 <우리가 복무하는 곳에서는>은 상업적인 스튜디오에서 처음 시도한 세미다큐멘터리로, 높은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다. 또한 1941년에는 영국 공군 비행사들이 과거에 겪은 실화를 연기한 <오늘밤 타겟>이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전쟁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합성해 줄거리를 만든 세미다큐멘터리는 기록영화의 진실성과 픽션의 허구가 주는 정서를 결합해 영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캐롤 롬바드, 비행기 사고 사망
1942년 1월17일 할리우드 스타 캐롤 롬바드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올해 그의 나이 34살. 클라크 게이블의 아내이기도 한 롬바드는 그녀를 태운 비행기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부딪치는 바람에 동승한 어머니, 에이전트와 함께 사망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반나치 풍자극 <죽느냐, 사느냐>가 그녀의 유작이 됐다. 글 심은하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