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 출신인 정래교(1681~1759)는 뛰어난 시인이자 저술가였다. 그의 저서 가운데 「백태의전(白太
醫傳)」은 의원 백광현의 전기다. 태의란 어의를 이르는 다른 말이다. 백광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기 수술법을 개발한 의원이었다. 지금껏 약물치료에 의존해오던 종기를 외과적 수술로 치료하게
되면서 그 탁월한 효능이 입증되었으니, 그의 치료법은 우리나라 의학史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
었다. 종기 치료제인 ‘이명래 고약’이 6‧25전쟁 이후에까지 명성을 떨쳤을 정도로 종기는 20세기에 들
어와서도 치명적인 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백광현은 마의(馬醫) 출신이었다. 조선조에서는 말이 통신과 교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마의도 그만큼 중요한 존재로 대접을 받았다. 다만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잘못된 신분제도 탓에 마의
는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정통파 의원이 아닌 백광현은 의서는 한 장도 읽지 않은 채 말도 천부적인
직감으로 침술을 통해서만 치료했다. 백광현의 탁월한 침술을 알고 있는 이웃 가운데는 더러 사람을
치료하는 데도 그를 부르는 자들이 있었고, 이론적으로 맥락이나 경혈을 알 턱이 없는 백광현은 여전
히 직관으로 침을 놓아 거뜬히 병자를 고쳐주곤 했다. 그러다가 종기 치료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
다. 여러 사람에게서 종기 치료효과를 확인한 백광현은 아예 종기 치료 전문가로 전업했다. 고질적인
종기에도 탁월한 치료효과가 나타나면서 그의 명성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신의(神醫)라
는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종기는 고대 중국의 사서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전기까지 종기
치료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청인 치종청(治腫廳)이 있었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에게 걸리는 심각
한 질병이었다. 종기는 조선 왕실의 고질병으로 왕들의 사인(死因)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
고 있기도 하다.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와 궁인들은 수양대군의 지독한 등창(등에 나는 종기)을 보면
서,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천벌을 받았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종기 치료를 핑계 삼아 정치
적 목적으로 효종과 정조를 독살하기도 했다.
천민 신분인 백광현이 어떻게 그 어려운 태의(太醫), 즉 내의원 의관의 자리에 올랐는지는 기록이 없
다. 당시 내의원 의관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대대로 의원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잡과과거 의원시험에 합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어의가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어의가 된 사람을
본원인(本院人)이라고 불렀다. 둘째는 사대부에서 천민까지 의술이 탁월한 자는 천거를 통해 어의가
될 수 있었다. 이를 의약동참(醫藥同參)이라고 불렀는데, 백돵현은 과거 합격자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둘째 경우에 해당하는 듯싶다.
『숙종실록』 재위 21년(1696) 12월 9일자 기록에 의하면, 숙종은 백광현을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보내 그의 각기병을 치료해주라고 명했다. 그 기록에 덧붙여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큰 효험
을 봤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의라 이르고 있다.>고 씌어 있다. 실록에서 신의라는 별칭을 인정했을
정도면 그의 종기 치료술이 얼마나 큰 효과를 나타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백광현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현종개수실록』 재위 11년(1670) 8월 16일자 기록이다. 현종의 병이 나은 것을
기념하여 어의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거기 백광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공이 있을
때마다 승차하여 숙종 10년(1685) 5월 2일에는 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천민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오
를 수 없는 고위직이다.
백광현은 현감이 된 뒤에도 전혀 교만하지 않고 위급한 병자 가족이 찾아오면 신분을 묻지도 따지지
도 않고 무조건 달려가 치료해주었다. 그는 몇 번이고 왕진을 계속하여 병자를 고쳐냈다. 한때 임금
과 왕족들을 치료하던 귀하신 몸이 신분이나 빈부를 따지지 않고 모든 백성들의 부름에 응하여 치료
를 해주었다는 것은 시골의 보통 의원보다 겸허하고 소탈한 자세다.
종기 치료에 관한 한 백광현과 쌍벽을 이룬 종의(腫醫)가 있었다. 피재길이다. 그는 자신이 들은풍월
로 개발한 고약을 써서 종기를 치료했다. 재위 17년(1793), 정조는 머리에 난 종기가 점점 번져서 생
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의들의 갖은 노력에도 차도가 없을 때 누군가 피재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천거했다. 미천한 신분의 떠돌이에 불과했지만 따질 계제가 못되었다. 궁으로 불려가 정조의 증
상을 살핀 피재길은 웅담을 주재료로 만든 <웅담고>로 사흘 만에 정조의 고질을 완치시켰다. 정조는
즉석에서 피재길을 정6품 침의(鍼醫)에 제수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 뒤인 재위 24년(1800) 6월 28일, 정조는 48세의 건장한 나이에 정기로 죽었다.
이때도 피재길은 <웅담고>를 써서 정성껏 치료했지만 전과 같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찍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노론 벽파와 손
을 잡고 손자인 정조를 독살했기 때문이었다. 정순대비는 왕실의 금기를 깨고 어의들을 모두 물리친
채 이미 정신이 혼미한 정조를 독대하여 독약을 썼고, 그 직후 정조의 몸에서 갖가지 독살증상이 나
타나면서 승하한 것이다.
정조가 독살되기 직전, 조선의 역사에는 이미 나라가 기울 불길한 전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국
에 호열자(콜레라)가 크게 유행하면서 정조 23년(1799) 1월 7일에는 노론 영수 김종수가, 1월 18일에
는 남인 영수 채제공과 소론 영수 서명응의 아들 서호수가 당쟁으로도 모자라 날짜마저 다투듯 잇달
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각 당파 지도자들의 줄초상에 이어 5개월 뒤에는 정조마저 승하했으니, 정조
를 독살한 정순대비는 열한 살 어린 정조의 아들을 보위(순조)에 올려놓고 나라를 통째로 안동김씨들
에게 떠안겼다. 이때부터 문재인 정권의 좌파 세도정치처럼 안동김씨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온갖 부정부패가 자행되어 조선은 빠르게 망국의 길로 내달았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하루가 다르게 만추 의 짙은 풍경이 도처에 치장 되어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낙엽이 점차 쌓여가는 발목 깊이 처럼 금방 나목이 되어 가겠지만 지금은 좋습니다. 많이 즐기시며 활기찬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