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 2005년 7월 16일 제29대 황위 계승자 이구(李玖) 황태손(황제의 맏손자)이 일본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손이었던 그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일본 측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화장실 양변기에서 우측 45도 기울인 상태로 온 몸이 시커멓게 변한 상태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당시 일본 측의 발표에 황손들은 “어처구니없다”며 공식발표에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이구 황태손의 죽음은 5년이 지난 지금도 표면적으로는 심장마비이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황손들의 답답함을 더하고 있다.
◆심장마비가 아닌 의문사
75세에 생을 마감한 이구 황태손은 일본 아카사카에 위치한 로열프린스호텔 3층 302호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국민들의 기억 속에 점점 사라져 가던 황태손의 삶은 별안간 죽음으로 관심을 모으게 된다.
이구 황태손 사체가 발견된 후 일본은 한국에 알리지 않고 유해와 내장을 표백하고 방부제 처리했다. 한마디로 일본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손 시신을 조용히 부검한 셈이다. 일본 측이 발표한 심장마비설(說)로만은 그의 죽음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게 황손들 측 주장이다. 아울러 한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검게 변한 사체는 약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 그의 죽음에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이구 황태손과 사촌지간인 이석 씨는 “이구 황태손이 일왕궁 옆(로열프린스호텔)에서 빚더미에 올라앉아 객사한 것에 대해 확실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며 “건강상 문제가 없던 이구 황태손이 갑작스레 의문사를 당한 것에 대해 일본 경찰은 형식적 부검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세히 알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구 황태손 어린 시절 (사진제공: 황실문화재단)
◆기구한 삶을 보낸 마지막 황태손
이구 황태손의 삶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 자화상이다. 안희천 서울교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가혹한 침략을 겪었던 100년 전의 치욕스러운 아픔의 대단원이 이구 황태손의 죽음이다.
이구 황태손은 대한제국황실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 이은의 직계 외아들이다. 하지만 그의 국적은 한국, 일본, 미국 중 어느 곳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 실제로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국여권 발급을 거부했으며 이를 딱하게 본 미국 정부는 영주권을 그에게 줬다.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그는 이중국적을 지녔다.
아울러 그의 외척은 일왕가(家)였다. 어머니는 잘 알려진 대로 이방자(나시모토 마사코) 여사로 현재 아키히토 일왕의 어머니인 나카코와 사촌자매 사이다. 즉 아키히토 일왕과 황태손의 경우 혈족상으로 이종 육촌형제가 되는 셈. 이구 황태손은 한일 황실에 가장 밀접하고도 묘한 위치에 놓인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일본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간 이해관계에 얽힌 희생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일왕가에서는 후계자를 본 이들이 없다는 점이다. 일왕가가 바라보는 이구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2005년 8월 12일에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그에게 자유는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이구 황태손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다뤘다. 일본 땅에서 사실상 인질처럼 살다 간 그의 모습, 한국정부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를 7개월간 받지 못한 사실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양자 선임에 있어서도 고인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안희천 서울교대 교수는 “이구 황태손께서는 양자를 끝까지 거부하셨다. 당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이 아무리 양자 선임을 요구해도 추후 2~3년 후라고 쓰고 날인하셨던 분”이라며 양자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이구 황태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종약원 측은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원(이상협) 씨가 황사손으로 추대됐다. 그는 의친왕의 10남 이갑 씨의 아들이다. 안 교수는 “이상협 씨는 후계 검증 없이 발표됐다. 그는 이구 황태손의 후처 아리다 여사(일본국적)에게 양자로 입적됐다”며 “입적 당시 이구 황태손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법적으로 봐도 황태손의 후계자가 아니다. 조선왕실이 600년 만에 아리다 황실로 바뀐 셈”이라고 한탄했다.
이석 씨는 “영친왕과 이구 형님이 사망한 나이가 74세로 동일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생을 마친 곳에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반복되는 게 의아하다”며 “반드시 사인을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에 덧붙이자면 이방자 여사와 히로히토(소화)천황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같습니다.
아래는 "이석"씨가 제기한 "이구" 황세손 사망에 얽힌 의혹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와 히로히토천황은 같은 일본에서 함께 했다.
천황가는 근친 결혼을 기본으로 하며 히로히토와 이방자여사는 6촌간이다.
왕세자 "이구"씨가 영친왕의 친자가 아니라 조선 통치를 위한 정치적인
야욕에 의해서 히로히토(천황)과 이방자여사 사이에 불륜으로 탄생한
"서(장)자"라 본다면아래의 이석씨가 올린 글의 의문들이 모두 풀립니다.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님께 삼가 아룁니다.
빈청에 보내신 조의 화환을 보고 슬픈 맘 가눌 길 없어 단장의 심정으로 글월을 올리는 바입니다. 저는 조선 왕조 26대 임금님이셨던 고종황제의 2남 의친왕의 11번째 아들 이석입니다.
지난 7월 16일 일본 동경의 아카사카 뉴프린스호텔 202호실 싱글룸에서 비명횡사하신 고종황제의 셋째 아드님 영친왕(1907년 이토히로부미에게 인질로 잡혀가심)의 아드님 이구씨(75세)의 의문의 사망 사실에 놀라 며칠째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사촌 형님이 되시고 영친왕의 황세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나셔서 15세인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끝낸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미국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1963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이구씨 부부가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동안 이구왕자는 선진 건축학을 국내에 도입하여 각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고 1975년경 사업에 손을 댔지만 불순한 세력들의 견제로 인해 부도를 맞으면서 일본으로 가 계셨습니다.
그러던 1996년 대한민국으로 영구귀국을 결정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사시다가 이번 일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분의 장례식장(창덕궁 낙선재)에서 상청을 돌보며 그 분의 너무나 급한 사망 소식에 놀라고 걱정이 되어서 그분의 왕실 동생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사망 원인과 시신을 자세히 조사하여 국민 모두가 알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사망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혹이 있습니다.
첫째, 그 장소가 의혹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같은 곳에서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도 돌아가신 곳은 과거에 영친왕께서 사용하시던 궁으로 현재 일본 아카사카에 위치한 호텔입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바로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사망 시점에서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국내의 검.경은 물론 의사, 종친까지 누구 하나 그것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한국인의 입회가 거의 원천봉쇄 된 상태였습니다. 한국 국적의 시민이 죽었는데 국내에 연락이 바로 되지 않았다.
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외가라 할 수 있는 일본 왕족에게 일본 경찰은 "은밀히 처리할 것"을 요청하면서 화장을 시도하려한 점은 더욱 의혹을 증폭시킨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답변 : 일본 황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구씨는 히로히토의
아들이며 현 아키히토 천황의 이복형제로 일본황실의 황손입니다.
일본 황실 내부의 일이므로 이구씨의 시신에 관한 부분을 한국에서
입회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대한제국의 왕세자이므로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비밀이 밝혀질 경우에는 국민감정이나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증거인멸 차원에서 은밀히 화장을 하려고 하였던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셋째, 사망 원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일본에서 밝힌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호텔의 종업원이나 초동수사에 동원된 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화장실 변기 위에서 우측 45도 방향으로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으며, 얼굴이 검은 색이 돌았다"라고 합니다 국내 의학계에 따르면, 심장마비의 경우 이러한 증상은 나타날 수 없으며, 독극물에 의한 사망의 사례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내가 본 답변 : 일본 황실의 가족이 전해준 비밀 ;
일본 황실의 혈통(왕자;서자)임을 이구씨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왕세자로 떠받들어지고 있음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이 일본 황실에 전해지게 되었고, 혹이라도 이구씨가
"양심선언"을 할까봐 진실을 감추기위해서, 이구씨의 입을 영원히 함구하게
하려고 일본 황실에서 독살을 했다고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측의 사건 처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의문의 사망 이후 심장마비라고 사인을 밝히면서 부검을 실시한 점과 유해의 국내 운구를 위해 피부 표백과 장기의 방부제 처리가 철저히 이루어 진 점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동경과 서울의 비행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삼복 더위로 인해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방부제 처리를 했다는 점은 그들의 말이 이해 할 수 없는 의혹 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답변 : 이구씨의 시신을 통해서 혈액형및 DNA검사를 통해서
영친왕의 친자가 아닌 것이 밝혀질 경우에 한국 국민의 감정과 양국의
정치적인 부분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므로
모든 것을 감추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며 방부처리및 표백을 하여
더 이상의 혈통에 관한 추적이나, 되지 않도록 했다고 봅니다.
대통령님. 작금의 문제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광복 60주년이 바로 다음 달로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이제 대한황실의 정통 혈손은 사실상 대가 끊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철저히 유린 당한 우리의 역사 조선! 부디 살피시어 조선의 살아있는 핏줄로 살아가는 저 이석과 그외 직계 황손들의 소원이오니 이번 사건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해 보다 면밀히 살펴주십시오. 사건 당시의 보다 명확한 정황 파악과 일본측 사람들과의 진술 확보 등 적극 국가가 나서서 이미 영원에 잠들어 계시지만 한점 의혹없이 후손들에게 진실이 알려지길 바라는 바입니다. 명성황후에 이어 고종황제, 융희 황제까지 일본에게 죽임을 강요 당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부디 굽어보시어 역사의 마지막 장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 도움을 주십시오. 간절히 바라옵니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 2005년 7월 16일 제29대 황위 계승자 이구(李玖) 황태손(황제의 맏손자)이 일본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손이었던 그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일본 측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화장실 양변기에서 우측 45도 기울인 상태로 온 몸이 시커멓게 변한 상태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당시 일본 측의 발표에 황손들은 “어처구니없다”며 공식발표에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이구 황태손의 죽음은 5년이 지난 지금도 표면적으로는 심장마비이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황손들의 답답함을 더하고 있다.
◆심장마비가 아닌 의문사
75세에 생을 마감한 이구 황태손은 일본 아카사카에 위치한 로열프린스호텔 3층 302호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국민들의 기억 속에 점점 사라져 가던 황태손의 삶은 별안간 죽음으로 관심을 모으게 된다.
이구 황태손 사체가 발견된 후 일본은 한국에 알리지 않고 유해와 내장을 표백하고 방부제 처리했다. 한마디로 일본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손 시신을 조용히 부검한 셈이다. 일본 측이 발표한 심장마비설(說)로만은 그의 죽음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게 황손들 측 주장이다. 아울러 한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검게 변한 사체는 약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 그의 죽음에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이구 황태손과 사촌지간인 이석 씨는 “이구 황태손이 일왕궁 옆(로열프린스호텔)에서 빚더미에 올라앉아 객사한 것에 대해 확실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며 “건강상 문제가 없던 이구 황태손이 갑작스레 의문사를 당한 것에 대해 일본 경찰은 형식적 부검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세히 알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구 황태손 어린 시절 (사진제공: 황실문화재단)
◆기구한 삶을 보낸 마지막 황태손
이구 황태손의 삶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 자화상이다. 안희천 서울교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가혹한 침략을 겪었던 100년 전의 치욕스러운 아픔의 대단원이 이구 황태손의 죽음이다.
이구 황태손은 대한제국황실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 이은의 직계 외아들이다. 하지만 그의 국적은 한국, 일본, 미국 중 어느 곳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 실제로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국여권 발급을 거부했으며 이를 딱하게 본 미국 정부는 영주권을 그에게 줬다.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그는 이중국적을 지녔다.
아울러 그의 외척은 일왕가(家)였다. 어머니는 잘 알려진 대로 이방자(나시모토 마사코) 여사로 현재 아키히토 일왕의 어머니인 나카코와 사촌자매 사이다. 즉 아키히토 일왕과 황태손의 경우 혈족상으로 이종 육촌형제가 되는 셈. 이구 황태손은 한일 황실에 가장 밀접하고도 묘한 위치에 놓인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일본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간 이해관계에 얽힌 희생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일왕가에서는 후계자를 본 이들이 없다는 점이다. 일왕가가 바라보는 이구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2005년 8월 12일에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그에게 자유는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이구 황태손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다뤘다. 일본 땅에서 사실상 인질처럼 살다 간 그의 모습, 한국정부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를 7개월간 받지 못한 사실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양자 선임에 있어서도 고인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안희천 서울교대 교수는 “이구 황태손께서는 양자를 끝까지 거부하셨다. 당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이 아무리 양자 선임을 요구해도 추후 2~3년 후라고 쓰고 날인하셨던 분”이라며 양자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이구 황태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종약원 측은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원(이상협) 씨가 황사손으로 추대됐다. 그는 의친왕의 10남 이갑 씨의 아들이다. 안 교수는 “이상협 씨는 후계 검증 없이 발표됐다. 그는 이구 황태손의 후처 아리다 여사(일본국적)에게 양자로 입적됐다”며 “입적 당시 이구 황태손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법적으로 봐도 황태손의 후계자가 아니다. 조선왕실이 600년 만에 아리다 황실로 바뀐 셈”이라고 한탄했다.
이석 씨는 “영친왕과 이구 형님이 사망한 나이가 74세로 동일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생을 마친 곳에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반복되는 게 의아하다”며 “반드시 사인을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에 덧붙이자면 이방자 여사와 히로히토(소화)천황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같습니다.
아래는 "이석"씨가 제기한 "이구" 황세손 사망에 얽힌 의혹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와 히로히토천황은 같은 일본에서 함께 했다.
천황가는 근친 결혼을 기본으로 하며 히로히토와 이방자여사는 6촌간이다.
왕세자 "이구"씨가 영친왕의 친자가 아니라 조선 통치를 위한 정치적인
야욕에 의해서 히로히토(천황)과 이방자여사 사이에 불륜으로 탄생한
"서(장)자"라 본다면아래의 이석씨가 올린 글의 의문들이 모두 풀립니다.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님께 삼가 아룁니다.
빈청에 보내신 조의 화환을 보고 슬픈 맘 가눌 길 없어 단장의 심정으로 글월을 올리는 바입니다. 저는 조선 왕조 26대 임금님이셨던 고종황제의 2남 의친왕의 11번째 아들 이석입니다.
지난 7월 16일 일본 동경의 아카사카 뉴프린스호텔 202호실 싱글룸에서 비명횡사하신 고종황제의 셋째 아드님 영친왕(1907년 이토히로부미에게 인질로 잡혀가심)의 아드님 이구씨(75세)의 의문의 사망 사실에 놀라 며칠째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사촌 형님이 되시고 영친왕의 황세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나셔서 15세인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끝낸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미국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1963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이구씨 부부가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동안 이구왕자는 선진 건축학을 국내에 도입하여 각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고 1975년경 사업에 손을 댔지만 불순한 세력들의 견제로 인해 부도를 맞으면서 일본으로 가 계셨습니다.
그러던 1996년 대한민국으로 영구귀국을 결정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사시다가 이번 일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분의 장례식장(창덕궁 낙선재)에서 상청을 돌보며 그 분의 너무나 급한 사망 소식에 놀라고 걱정이 되어서 그분의 왕실 동생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사망 원인과 시신을 자세히 조사하여 국민 모두가 알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사망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혹이 있습니다.
첫째, 그 장소가 의혹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같은 곳에서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도 돌아가신 곳은 과거에 영친왕께서 사용하시던 궁으로 현재 일본 아카사카에 위치한 호텔입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바로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사망 시점에서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국내의 검.경은 물론 의사, 종친까지 누구 하나 그것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한국인의 입회가 거의 원천봉쇄 된 상태였습니다. 한국 국적의 시민이 죽었는데 국내에 연락이 바로 되지 않았다.
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외가라 할 수 있는 일본 왕족에게 일본 경찰은 "은밀히 처리할 것"을 요청하면서 화장을 시도하려한 점은 더욱 의혹을 증폭시킨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답변 : 일본 황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구씨는 히로히토의
아들이며 현 아키히토 천황의 이복형제로 일본황실의 황손입니다.
일본 황실 내부의 일이므로 이구씨의 시신에 관한 부분을 한국에서
입회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대한제국의 왕세자이므로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비밀이 밝혀질 경우에는 국민감정이나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증거인멸 차원에서 은밀히 화장을 하려고 하였던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셋째, 사망 원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일본에서 밝힌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호텔의 종업원이나 초동수사에 동원된 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화장실 변기 위에서 우측 45도 방향으로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으며, 얼굴이 검은 색이 돌았다"라고 합니다 국내 의학계에 따르면, 심장마비의 경우 이러한 증상은 나타날 수 없으며, 독극물에 의한 사망의 사례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내가 본 답변 : 일본 황실의 가족이 전해준 비밀 ;
일본 황실의 혈통(왕자;서자)임을 이구씨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왕세자로 떠받들어지고 있음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이 일본 황실에 전해지게 되었고, 혹이라도 이구씨가
"양심선언"을 할까봐 진실을 감추기위해서, 이구씨의 입을 영원히 함구하게
하려고 일본 황실에서 독살을 했다고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측의 사건 처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의문의 사망 이후 심장마비라고 사인을 밝히면서 부검을 실시한 점과 유해의 국내 운구를 위해 피부 표백과 장기의 방부제 처리가 철저히 이루어 진 점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동경과 서울의 비행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삼복 더위로 인해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방부제 처리를 했다는 점은 그들의 말이 이해 할 수 없는 의혹 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답변 : 이구씨의 시신을 통해서 혈액형및 DNA검사를 통해서
영친왕의 친자가 아닌 것이 밝혀질 경우에 한국 국민의 감정과 양국의
정치적인 부분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므로
모든 것을 감추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며 방부처리및 표백을 하여
더 이상의 혈통에 관한 추적이나, 되지 않도록 했다고 봅니다.
대통령님. 작금의 문제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광복 60주년이 바로 다음 달로 다가오는 시점입니다. 이제 대한황실의 정통 혈손은 사실상 대가 끊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철저히 유린 당한 우리의 역사 조선! 부디 살피시어 조선의 살아있는 핏줄로 살아가는 저 이석과 그외 직계 황손들의 소원이오니 이번 사건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해 보다 면밀히 살펴주십시오. 사건 당시의 보다 명확한 정황 파악과 일본측 사람들과의 진술 확보 등 적극 국가가 나서서 이미 영원에 잠들어 계시지만 한점 의혹없이 후손들에게 진실이 알려지길 바라는 바입니다. 명성황후에 이어 고종황제, 융희 황제까지 일본에게 죽임을 강요 당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부디 굽어보시어 역사의 마지막 장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 도움을 주십시오. 간절히 바라옵니다.
일본인의 성윤리 도덕 모르시나요 특히 일본 왕실의 경우 옛날에 다른 씨족 하고 혼인 없어네요 근친 결혼 이지요 사촌 내지 육촌 사이 최고 배우자 이런 풍습은 신라 왕실에도 있고요 일본 왕가에서 그런 전통 이다 보니 일본인들도 근친 결혼 이네요 자세한 성문화는 다음에 기술하지만
@역학자몰론 무슨뜻인지 알지만 .. 지들끼리 근친간 수시로 기분좋을때 지랄하다가 그래도 남의 나라 왕자한테 시집보내면서 지 씨앗을 넣었단 말 은......그리고 영친왕하고 방자여사하고 첫아들이 진왕이라고 하는 하는데 이상하게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서 죽었지요...아마 이구가 둘째일것입니다...방자여사가 원래 불임증환자라고 들었읍니다...그래서 대한제국황통을 끊을려고 보낸것 같은데..덜컥 첫아들을 낳으니..일본황실서 방자여사 진단한 의사를 처형시켰단 말이있었읍니다...방자여사가 원래 소와 황후로 내정되었었다고 하네요..글쎄 사진보니..친가계통은 아니고 외가를 많이 닮은것 같고....근친혼보다 근친간 간통행위
심장마비는 글자 그대로 심장이 마비 되어서 죽음 이라 얼굴색이 검을리없어요 보통 자연사 노쇠 해서 죽음 맞이 하면 얼굴이 검어질수 있는데 이때 얼굴이 검어지는것은 신장에서 인체에 오염된 물질 죽 쉽게 오줌이나 이런것 물질 제대로 배출 못 하면 얼굴이 검어서 죽을수 있네요 인체에 해로운 독약 먹으면 이때 신장이 제대로 배출 못 해서 얼굴이 검어지네요 오래 동안 다량의 알콜 흡수하면 그렇고요 그래서 간장 계통 환자들 신장 계통 환자들은 죽으면 얼굴이 까맣네요
첫댓글 중요한 것은 사망 원인 얼굴이 검어다 는 하는 것은 독살 입니다 독살에 한표
저두 독살에 한표... 저는 이할아버지를 멀리서 뵌적이있습니다. 시골 군청에 오셨었는데.. 할아버진데도 광채가 났던 기억이있습니다. ㅎㅎ
이구가 그쪽으로 많이 닮았네요!
이게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이방자 여사하고...씨앗을 잉태하고 ... 결혼을 ...아니..이건 ..
일본인의 성윤리 도덕 모르시나요
특히 일본 왕실의 경우 옛날에 다른 씨족 하고 혼인 없어네요
근친 결혼 이지요 사촌 내지 육촌 사이 최고 배우자 이런 풍습은 신라 왕실에도 있고요
일본 왕가에서 그런 전통 이다 보니
일본인들도 근친 결혼 이네요
자세한 성문화는 다음에 기술하지만
@역학자 몰론 무슨뜻인지 알지만 .. 지들끼리 근친간 수시로 기분좋을때 지랄하다가 그래도 남의 나라 왕자한테 시집보내면서 지 씨앗을 넣었단 말 은......그리고 영친왕하고 방자여사하고 첫아들이 진왕이라고 하는 하는데 이상하게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서 죽었지요...아마 이구가 둘째일것입니다...방자여사가 원래 불임증환자라고 들었읍니다...그래서 대한제국황통을 끊을려고 보낸것 같은데..덜컥 첫아들을 낳으니..일본황실서 방자여사 진단한 의사를 처형시켰단 말이있었읍니다...방자여사가 원래 소와 황후로 내정되었었다고 하네요..글쎄 사진보니..친가계통은 아니고 외가를 많이 닮은것 같고....근친혼보다 근친간 간통행위
@천랑성 성행한것인가..........
심장마비는 글자 그대로 심장이 마비 되어서 죽음 이라
얼굴색이 검을리없어요
보통 자연사 노쇠 해서 죽음 맞이 하면 얼굴이 검어질수 있는데
이때 얼굴이 검어지는것은 신장에서 인체에 오염된 물질
죽 쉽게 오줌이나 이런것 물질 제대로 배출 못 하면
얼굴이 검어서 죽을수 있네요
인체에 해로운 독약 먹으면 이때 신장이 제대로
배출 못 해서 얼굴이 검어지네요
오래 동안 다량의 알콜 흡수하면 그렇고요
그래서 간장 계통 환자들 신장 계통 환자들은
죽으면 얼굴이 까맣네요
반도 조선을 자기의 핏줄 황제가 다스리면 진짜 자기나라가 되니까 계획적으로 그랬겠죠.
죽여버린것은 이구가 진실을 고백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구요.
이방자 여사는 일본 왕실의 공주로서 그런 뜻을 가지고 정략 결혼을 한거구요.
좋은 글 감솨 함돠
우린 일본의 속국인가?
정치 행탤 보면 그렇기도 한것 같고
그래서 목포 제주간 해저터널 만들어 나중에 일본과 연결 시키려는 것일까/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일본만 좋게 만들려는...
쓰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