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가르치는 유치원이 늘고 있고 한 달에 수업료가 100만이라 한다. 공교육의 초등학교도 영어로 수업을 하는 학교가 등장했고 원어민을 모셔야 하겠다고 야단들이다.
싱가포르 정부를 본따서 그렇게 되고 있는 모양인데 싱가포르는 우리나라로 치면 영등포 쯤 되는 작은 나라로서 생존전략으로서 그렇게 하지만 우리가 따라갈 것은 없다고 본다.
그렇게 따라가서 영어에 능통한 기업인이 많아 생기는 이점이 있다 하자.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말을 잊고 기업인이 되면 무엇 하는가? 가뜩이나 국어가 미숙한 판에 유치원과 학교에서 영어로 가르치면 국어는 더 미숙해진다.
일본을 보라, 늘 우리보다 앞선 일본이 싱가포르를 따라가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네는 또 한번 시행착오를 시도함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돈을 따라감에 있어서 기적을 바라서 허둥대는 일을 말아야 한다.
제 정신을 차리고 국어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 국어발음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국어를 놓치면 민족을 잃는다. 우리 민족은 우리다 하는 그 맛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을 놓아버리고 돈을 따라가다니!
제정신을 차리고 좀 천천히 했으면 어떤가? 영어로 하기에 경쟁이 붙을 전망이니 한심하다. 국어작문을 가르치고 정확하고 아름다운 국어를 쓰기를 쓰기부터 가르치자.
理性과 判斷
강 병 조
1. 理性
理性(reason)에 대한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2) <철학> 진위(眞僞), 선악(善惡)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
3) <철학>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4) <철학> 칸트 철학에서, 선천적 인식 능력인 이론 이성과 선천적 의지 능력인 실천 이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좁은 의미로는 감성, 오성(悟性)과 구별되어 이데아에 관계하는 더 높은 사고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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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는 그의 공저 <뇌를 움직이는 마음 마음을 움직이는 뇌> 속의 <뇌와 마음: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장을 쓰면서 이성의 감성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신의학이나 신경과학의 연구에서는 情緖와 認知(cognition, 理性)를 마치 완전히 독립적인 메커니즘인 것처럼 다루어왔다. 그러나 동물의 진화과정에서 動機(motivation)와 정서를 담당하는 부분의 뇌가 인지를 담당하는 뇌 부분보다 먼저 진화되었으며, 동기와 정서를 담당하는 뇌가 인지 일반을 담당하는 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가 점차 수용되고 있다.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 주임교수이신 Antonio Damasio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정서가 이성적 처리인 의사결정 과정의 밑바탕에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과 실험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는 전두엽 피질이 손상된 환자와 정상인을 대상으로 실험하였다. 정서적으로 중립적인 평온한 농가 사진 등과 감정을 유발시키는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 나체, 심한 재난 등의 사진을 보여준 결과, 정상인은 중립적 사진과 정서적 사진에 상이하게 반응하였는데, 환자는 중립적 사진과 정서적 사진에 같은 정도의 정서적 흥분(피부 전도 반응)을 보였다. 또 복권과 같은 카드게임에서 모험 상황(거액을 탈 가능성이 있지만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는 선택지)과 중립적 상황(적은 액수를 타지만 투자액수도 적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한 실험 결과, 정상인은 모험 상황을 선택할 때 정서적 반응을 보였으나 전두엽 손상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 결과는 전두엽이 인지와 관련된 정서를 담당하고 있음과 인지적 결정을 할 때에 그 근저에 정서가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Antonio Damasio 1999년, 이정모 2006년).
이와 같이 Antonio Damasio 교수는, 20여 년 간의 전두엽 손상 환자의 실험 및 동물 실험을 통하여, 뇌 부분들과 추론 및 결정-내림 과정 사이의 밀접한 결속을 알아내었다.
2. 判斷
결정-내림 즉 판단에는 두 종류의 판단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감정적(emotional) 또는 직감적 (intuitive)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reasional) 또는 인지적(cognituve) 판단이다.
전자는 앞내측전전두엽(ventro-medial-prefrontal lobe)(그림의 파랑색과 노란색 부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이 부위는 하부에 있는 편도를 위시한 감정의 중추와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 판단하게 된다. Sigmund Freud가 말한 초자아(super-ego)의 기능이 이 부위의 기능이다. 이 부의는 의식적인 면 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면도 많이 관여된다. 즉 죄를 짓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이 생기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무의식적으로 혼자 기분이 좋은 것이 이 부위의 기능 때문이다. 이 부위가 파괴되면 말이 없어지고, 음식도 잘 먹지 않게 되며, 감정이 없어지고, 자발성이 없어지며, 의욕도 없어지고 게을러지게 된다.
후자는 후외측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lobe)(그림의 보라색 부위)의 기능이다. 이 부위는 피질하 감정의 중추와 연결이 적어서 감정의 지배를 적게 받게 되며 무의식적인 요소가 적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Sigmund Freud가 말한 자아(ego) 즉 집행 기능(executive function)이 이 부위의 기능이다. 이런 판단은 손익 계산을 하여서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이 부위가 파괴되면 계획이나 목표를 세울 수 없고, 정신의 융통성이 감소하며, 인지 기능과 운동성이 떨어지고, 고집스러우며 판단력이 부족하게 된다(Antonio Damasio, 1999년).
이성적 판단의 예를 들면, 원수로서 전쟁을 치룬 미국과 베트남이 서로의 나쁜 감정을 극복하고 상호 도움이 되게끔 무역을 하고 외교관계를 맺은 것 등이다. 감정적 판단의 예를 들면 한일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가 과거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나쁜 감정 때문에, 계속 일본을 원수의 나라로만 생각하고 피차 이익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이성이, 한 가지 뇌 부위에 의존하기 보다는 많은 단계의 신경구조들과 연합하여 협연하는 몇 개의 뇌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전전두부피질(prefrontal cortices)에서 뇌하수체와 뇌간에 이르는, “상위-수준” 및 “하위-수준”의 뇌는 이성을 형성함에 있어 연합하여 작용한다.
理性의 신경구조에 있는 하위수준은, 한 생물체의 생존에 필요한 신체기능과 더불어, 감정과 느낌의 과정을 조절하는 부위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하부 단계들이 실제적인 모든 인체 장기에 직접적이고도 상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따라서 이성기능, 결정-내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 행위와 창의력이 최고점에 도달하도록 조절하는 작동사슬에 신체를 위치하도록 한다. 감정, 느낌, 그리고 생물학적 조절 기능 모두는 인간 이성에 작용한다. 우리 생물체의 하위 순위의 배열이 상위 이성의 고리에도 존재하고 있다.
비록, 찰스 다윈이 인간의 신체 구조에 존재하는 하위 기원의 지울 수 없는 흔적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 사실의 본질을 미리 제시했었지만, 가장 독특한 인간 수준의 정신기능에 있어서도 진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고등 이성이 저등 뇌에 의존한다고 해서 고등 이성이 저등 이성으로 변하지 않는다. 윤리적 원칙에 따르는 행위가 뇌 중심부의 단순한 회로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윤리적 원칙을 비하시키지 않는다(Antonio Damasio, 1999년)
참고문헌:
이정모: 뇌와 마음: 무엇이 문제인가? 뇌를 움직이는 마음 마음을 움직이는 뇌.
성영신 강은주 김성일 엮음. 해나무. 2006년. 91쪽.
Antonio Damasio(김린 역): 데카르트의 오류 Descartes' Error. 중앙문화사. 1999년.
칸트의 도덕철학
장 기 홍 정리
칸트 철학의 발달단계
칸트 학자들은 그가 교수에 임명된 1770년 이전을 준비기(準備期)라 부르고 이후를 그의 ‘비판철학의 시대’ 혹은 비판기(批判期)라 부른다. 준비기의 논문들에 이미 칸트의 도덕에 대한 이론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의 준비기는 다시, 1762년까지의 ‘제1기’[볼프의 유리론(唯理論)의 영향을 받던 시기]와 그 후의 ‘제2기’로 나뉜다. 제2기는 영국의 경험론의 영향으로 회의(懷疑)론으로 기울던 시기이다. 청년 칸트의 시대는 ‘볼프-라이프닛츠의 철학’이 풍미하던 때라고 한다. 볼프는 라이프닛츠의 후계자이다.
도덕에 관하여 볼프-라이프닛츠의 완성설(完成說)은 이성(理性)을 완성하는 것이 도덕이고 행복이라고 가르쳤다. 도덕이 사람의 본분이요 그 완성이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영국의 도덕철학자들은 경험론의 영향으로 도덕에 있어서 감성의 구실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도덕적 감성이 즉각적으로 선악을 구별한다고 보고 이 소질을 조화적으로 발달시킴이 도덕의 목적이요 행복이라는 그들 나름의 완성설을 주장했다.
칸트는 볼프처럼 이성의 주역(主役)을 믿었으나 감성을 중요시하던 프랑스의 루소의 사상에 심취하여 그 영향도 받았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자연을 손상시키는 문명을 줄이고 교육을 통해 인간의 완전한 회복을 도모하면 완성가능성(perfectibility)이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루소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에 눈떴으나 루소와는 달리 이상주의(理想主義)적 도덕설을 마련했다.
루소가 생각한 인간본성의 회복이 아니고 그는 악한 인간본성의 정복을 생각하여, 이성, 의무, 이상, 당위(當爲), 도덕의 명령(命令)성을 주장했다. 칸트는 완성이라는 기약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상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할 의무와 당위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이성과 감성의) 두 사상적 흐름을 흡수하여 극복하고 초월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성 주도의 비판철학으로 승화시켰다. 칸트 도덕의 보편성, 형식(形式)성, 자율성 및 반(反)행복주의의 토대가 이때 마련되었다. 루소를 중국의 맹자(孟子)에 비해본다면 칸트는 순자(荀子) 비슷한 점이 있어 보인다.
칸트 철학의 요점
그는 인식이 (1) (Hume과 더불어) 주관적(主觀的)임을 주장하면서도 (2) (Hume과는 달리) 그 주관에 보편타당성이 있음을 (즉 先驗的임을) 강조한다. 자연에 관한 (주관적) 인식은 시공(時空) 인과(因果)라는 형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주관적 제한(制限)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한 제한을 받지 않는, 즉 주관과 독립된, 실체, 물자체(物自體)는 인식의 권한 이외의 것이다(사람이 알 수 없다). 즉, 인식은 주관, 경험, 시공인과의 현상계의 일이다. 초경험적, 초감각적 세계에 대하여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기독교 교리 가운데는 순수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게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실천이성의 도덕의 세계는 다르다. 도덕도 현상계의 일부인 사람이 현상계 안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서, 실천적 이성 곧 도덕적 의지(意志)가 관여한다. 이 이성은 의지(意志)에 해당하며 자유롭고 자발적(自發的)임이 특징이다. 자유가 도덕의 전제이다. 철저히 인과율이 지배하는 자유 없는 세계에 살지만 인간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후회하고 참회하는 등 도덕적 자유의 여지가 있다.
이는 사람이 도덕을 통해서 현상계 이상의 본체(本體)의 세계에 접하게 됨을 의미한다. 도덕적 요구를 통해서 인간은 현상계 이상의 세계에 관여하게 된다. (도덕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리에 참여한다는 뜻이 된다.) 실천이성의 우위(優位)요 탁월성이다. 도덕계에 의해서 자연계는 의의를 얻고, 존엄성을 가지게 되고 명예를 얻는다. 칸트의 제자인 피히테는 더 나아가 이론이성은 실천이성에게 복속(服屬)해야 한다고 하여 두 이성의 통일을 꾀했다.
칸트 자신은 두 이성의 대조를 더 부각시켰었다. 두 세계는 지배원리가 전혀 다르다. 자연계에는 목적이나 가치의 개념은 관계가 없다고 보았고, 도덕세계에만 목적과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칸트는 자연과 도덕계가 결국은 하나인데 둘이 조화를 이루자면 자연계에도 가치와 목적의 개념이 적용되어야 하겠다고 그의 ‘판단력비판‘(1790)에서 논하게 된다. 사람의 견지에서 볼 때 자연계 특히 생물계에는 목적활동이 있으므로 기계적 인과(因果)의 자연계에도 전체로서 목적이 있다고 관찰(觀察)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관찰이지 (그 이상의) 인식(認識)은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목적이란 주관적인 것이었다. 쉘링과 헤겔은 스승의 목적관을 발전시켰다. ‘목적’을 객관적이라 봄으로써 두 이성의 통일과 두 세계(자연과 도덕계)의 통일을 꾀했던 것이다. 이들과 피히테는 신(新)칸트학파라는 유심론(唯心論)학자들이다.
칸트의 도덕론
비판기의 칸트는 3개 비판서를 썼는데,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은 지(知)에 관하여, ‘실천이성(實踐理性)비판’은 의(意)에 관하여, 그리고 ‘판단력(判斷力)비판’은 정(情)에 관하여 논했다. 지정의(知情意) 중 지(知)와 의(意)는 이성(理性)에 속하고, 실천이성(곧 도덕적 이성)은 의지(意志)와 대등한 것으로 칸트는 보았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선험적(先驗的)인 즉 보편타당(普遍妥當)한 이성이 사람의 의지(意志)를 지배하거나 관여할 수 있나 없나를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도덕에 보편적 법칙 같은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칸트의 일생은 보편타당성의 추구였다. 이제는 도덕에서도 보편타당성 여부를 검토한 것이다. 개인 저마다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되고, 인류 모두의 도덕판단의 바닥에 보편(普遍)한 [선험적(先驗的)] 법칙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도덕법(道德法)이라는 근본법칙이 있어야 도덕이 성립되고 선악에 판단이 된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는 도덕적 천재였다’고 아베교수는 말하면서, '칸트는 사람이 학문 속에 자기 체험을 드리우는 것을 금기(禁忌)로 알았지만 그의 도덕법의 개념에는 그의 체험이 들어 있다'고 했다. ‘실천이성비판’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가 거듭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할수록 점점 더 새로이 점점 더 크게 찬탄과 외경의 감정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둘 있으니, 위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우리 안에 있는 도덕률이다.’ (Two things fill the mind with ever new and increasing admiration and awe, the oftener and the more steadily we reflect on them: the starry heavens above and the moral law within.)
‘의무(義務)여, 너 숭고 위대한 이름이여, 너는 사람들 마음에 들거나 좋아 할 것을 아무 것도 내놓지 않으면서도 복종(服從)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복종은 싫어도 하거나 강제나 위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법칙(法則)에 따른 의지(意志)의 발동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 안에 있는 이 의무의 법칙은 욕망과 반대되어도 결국 존중(尊重)된다. (육신은) 이것저것 하고 싶고 피하고 싶어서 넌지시 반항을 꾀하지만 결국은 모두 그(의무의 법칙) 앞에서 침묵하고 만다.’(‘실천이성비판’ 중에서)
이 구절을 읽으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내 안에 두 마음이 있어 선(善)을 지향해도 방해를 받는다’고 했던 사도 바울의 말이 연상된다. 바울은 다소 비관적으로 말했던 것 같이 들린다. 그러나 칸트는 적극적으로 도덕심, ‘도덕의 의무’의 우위를 역설했다.
안에서 들리는 도덕의 소리. 사람은 식욕, 명예욕, 향락, 행복 등 갖가지 욕구(慾求)에 분주하지만 사람의 타고난 소질(素質)인 도덕적 명령은 ‘이래야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고 양심의 소리, 안으로부터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것이 ‘당신의 고귀(高貴)함의 근원’이라 하면서 칸트는 원천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과의 혈연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사람에게 명예를 안겨주는 이 자랑스러운 거절(拒絶), 이 고귀한 소질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실천이성비판’ 중에서).
범인(凡人)이 오히려 양심적이다. 의무(義務)의 소리, 양심의 소리라는 이 도덕적 사실은 범인의 마음에 오히려 확실하다. 자연계의 사실은 전문학자가 더 정확히 알지만 도덕은 평범한 사람이 더 잘 안다. 필부필부(匹夫匹婦)는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지구가 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전문학자가 바로 안다. 그러나 도덕의 세계는 학자들은 오히려 판단에 우유부단해도 민초(民草)는 선악(善惡)정사(正邪)를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그처럼 자연계와 도덕계는 다르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의 학문, 곧 ‘실천이성의 학문’이 따로 필요함을 느끼고 ‘道德形而上學原論’(1785)과 ‘實踐理性批判’(1788)을 썼다.
두 세계에 걸친 인간. 여러 욕구와 행복을 추구해갈수록 의무의 소리도 엄중하고 날카롭게 대들며 다가온다. 본능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 같이 인간도 그런 면이 있으면서도 인간특유의 세계, 도덕적 세계가 있다. 인간은 오성(悟性,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감각적 경험적 세계를 추슬러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했고 그것을 이용하여 이세상의 행복을 추구해왔다. 그런 한편 인간은 전혀 다른 이성(理性)의 소리, 의무의 소리에 접하게 되는데 이 소리에 복종하자면 행복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할 때가 있다. 이 절대명령의 소리는 행복마저 거부하라 한다. 초감성적, 초경험적 세계에 인간을 이끌어가서, 그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데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타이르는 그 능력을 이성(理性)이라고 칸트는 보았던 것이다.
상식을 형식(形式)으로 포장하기. ‘實踐理性批判’이 출판되자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고 평했는데, 이에 대해 칸트는 그렇다고 했다. 자기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실천하고 있던 상식적인 도덕을 새로운 방식, 새로운 형식으로 정리하고 포장하여 자각(自覺)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무릇 행복을 찾아 가고 있으나 행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쾌락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얻으려면(條件)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부(條件附)의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단언적(斷言的), 필연적, 만인통용의 보편적 충고가 아쉽다. 행복에 이용되는 그런 것이 아닌 순수한 이성이 요구하는 것은 만인에게 통용되고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야 하겠다. 의무의 의무된 본질은 보편적 형식(形式)을 취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그는 이것을 정리하여 ‘당신이 행하려는 바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해도 될 것인지, 즉 보편타당한지를 생각하고, 그런 준칙(準則)[격률(格率)] 아래 행하라’ 했다. 논어와 복음서에 나와 있는 대로 ‘남이 네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도 행하라’‘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는 말씀들은 거의 그와 같은 격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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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08년 3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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