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역
- 강 문 석 -
그땐 자주 서울역 플랫폼에다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야간에 영화를 찍었다. 주로 청춘남녀나 가족들이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당시 서민들로선 공항이나 여객선터미널 이용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으니 대본도 기차를 타고 떠나는 이별로 설정했을 터이다. 영화에는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지 사위가 온통 어둠에 휩싸인 야밤에 열차에 몸을 싣고 눈물을 뿌리며 생이별하는 장면이 들어있고 개봉 후 관객을 생각했던지 촬영장면을 그대로 보여주곤 했다. 당시 학교는 서울역과 같은 동네인 동자동이었고 하숙은 서대문을 지나 독립문에서 비탈길을 올라야하는 인왕산자락에 붙어있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서만 오간 탓에 어부지리로 만날 수 있었던 추억 속 풍경이다. 그때 역에서 찍은 영화 중 ‘서울역 밤11시’나 ‘검은 장갑 낀 손’ 정도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세월은 어느새 반백년을 훌쩍 넘어섰으니 그 시대를 풍미했던 당시의 박암 문정숙 같은 은막의 스타들은 모두 먼 길을 떠났지 싶다. 한국동란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지 7년 만에 4.19가 일어났고 다음해엔 5.16이 터졌다. 4월과 5월 두 번의 혁명은 모두 입에 풀칠하기 힘든 춘궁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초근목피로밖에 연명할 수 없었던 서민들은 선거를 통해서라도 부정부패에 물든 정부를 바꾸는 게 꿈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선거운동을 벌였지만 그 바람은 독재정권의 총부리에 여지없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분연이 들고일어나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기아와 절망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며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건넜던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때의 국내 산업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을 오늘의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전국에서 가난을 이기고자 무작정 상경하는 농촌 소녀들이 속출하여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서울만 가면 살 수 있다는 뜬소문을 듣고 공장 취업이나 하다못해 식모살이라도 하겠다며 옆구리에 보따리를 하나씩 끼고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다.
열차는 그러한 가출소녀들을 서울역에다 쏟아놓았고 그들을 취업시키는 뚜쟁이들까지 생겨났다. 당시에도 역 광장은 지금처럼 넓었다. 바지저고릴 걸친 야바위꾼이나 약장수들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3년 동안의 동족상잔이 만들어낸 상이군인들이 광장엔 득실거렸다. 그들은 외다리에 목발을 짚거나 전투에서 잃은 한쪽 팔에 갈고리를 달고 부랑자로 나서서 구걸과 폭력을 일삼기도 했다. 승객들이 들고 오는 봇짐을 서로 맡겠다고 지게꾼과 리어카꾼들이 벌이던 쟁탈전은 당시의 각박한 인심을 보여주는 낯 뜨거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외에도 구두닦이나 껌팔이 신문팔이 소년들로부터 깡통을 찬 걸인들도 많았다.
당시의 서울역 풍경이 이처럼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은 것은 삶의 무게가 그만큼 컸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울 떠난 지 47년 만에 뜻하지 않은 직장 은퇴자모임을 맡으면서 서울을 수시로 드나들게 되었다. 가끔씩 바쁠 때 이용하던 국내항공편은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자연히 멀어졌다. 그래서 서울역을 밟게 되는 횟수가 그만큼 더 늘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추억 속 옛 서울역사는 더 이상 철도승객이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안타까움이 컸다. 그것은 세계 속의 대도시로 성장한 서울이 옛 역으로는 늘어난 철도승객을 다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서울역에서 차시간이 좀 남으면 바로 앞에 빤히 바라다 보이는 남산을 오른다.
하지만 한 시간 이내의 짧은 시간이라면 문화복합 전시공간으로 바뀐 옛 서울역 역사를 찾아 전시장에 걸린 작품을 주로 만난다. 가끔은 빈센트 고흐와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유료로 전시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국내의 신진작가들이나 아마추어들의 그림이나 공예품을 거저 보여주고 있어 마음 편하게 감상할 수가 있다. 2014년 9월 19일의 전시작품 주제는 <총천연색>이다. 화려한 원색으로부터 순박한 흑백까지 다양한 색상이 어우러진 공예품들과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남긴 묵필까지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역사 건물은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철도의 남대문역사로 처음 건축되었다.
그랬다가 1925년 르네상스풍의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고전주의 건축의 대칭적 구성과 고전주의 건축양식에서 벗어난 중앙 돔과 小첨탑 그리고 좌우 양 날개의 모습이 특징적인 건축물로 스위스 루체른역사를 모델로 디자인된 것이었다. 이때 1층 중앙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합실이 들어서고 2층에는 서양식 레스토랑과 역무원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광복 후의 서울역은 교통과 물류의 중심역할을 맡았고 1957년에 남부역, 1969년에 서부역 역사를 추가로 짓게 된다. 1974년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전국철도의 중심이자 서울 대중교통 허브로서의 역할이 더욱 증대되었다.
하지만 자가용이 보편화되고 2004년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옛 서울역은 그 기능이 상실되기에 이르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옛 건물을 마냥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1925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여행객들과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한반도 통일 후에는 서울역이 아시아를 거쳐 유럽 각지로 통하는 관문이 될 것이라니 유럽풍의 건물에 든 이곳 문화공간도 그만큼 많은 손님들이 찾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