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65. 다얀 칸은 지역을 어떻게 장악했나?
▶ 혼인으로 호족 도움 유도한 왕건
[사진 = 드라마 속 왕건 부인들]
다얀 칸이 몽골을 다스린 방법은 고려의 건국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각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 한다.
각 지역의 호족의 도움을 받는 방법으로 왕건은 혼인 정책을 활용했다.
왕건에게는 모두 29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을 제외한 27명이 호족의 딸이었다.
이들에게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얻게 된다.
이러한 왕건의 혼인정책은 왕과 호족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처가인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건국 초기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국정을 원활히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 건국 후 그를 도와준 호족들이 오히려 족쇄가 돼 초기 왕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국정을 제대로 주도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한 호족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 국가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투쟁한 인물이 고려 네 번째 왕인 광종(光宗)이다.
▶ 혼인 통해 아들을 지역 수장으로 보내
[사진 = 다얀칸]
왕건은 호족들의 딸을 부인으로 받아들여 연대 관계를 맺었지만
다얀 칸은 반대로 아들을 각 지역 대 부족의 딸들에게 장가보내 그 지역을 장악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각 지역의 유목부족장들이 칸의 아들을 데릴사위 격으로 맞이해 그 부족의 수장으로 모시는 형태를 취했다.
11명의 다얀 칸 아들 가운데 두 명은 자손이 없어 단절됐지만
나머지 9명의 아들들이 낳은 자손이 대대로 몽골 여러 부장의 수장이 돼 오늘날의 몽골민족을 탄생시킨 것이다.
▶ 6개 투멘으로 분리 통치
투멘(tumen)이라는 것은 칭기스칸의 무덤 얘기를 하면서 소개한 적이 있다.
바로 칭기스칸의 묘를 지키는 만인대가 우랑칸 투멘이라고 설명했다.
투멘은 우리말로 하자면 만호(萬戶) 또는 만인대(萬人隊)를 말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통상 부족을 통합한 단위를 그렇게 불렀다.
다얀 칸은 자신의 지배 아래로 들어온 몽골인들을 6만호로 재편했다.
[사진 = 고비사막]
그는 몽골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 좌익에 3개 투멘, 3만호 그리고 우익에 3개 투멘, 3만호 등
모두 6개의 투멘으로 분리해 통치했다.
좌익과 우익을 나누는 방법은 몽골의 전통적인 배치 방법으로 모든 배치가 남쪽으로 향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좌익은 동쪽, 우익은 서쪽이 되는 셈이다.
좌우익을 가르는 기준은 고비사막이다. 고비사막의 남서쪽은 우익, 고비사막의 북동쪽은 좌익이었다.
다얀 칸은 동쪽에 있는 좌익은 주로 직접 통치 아래 두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익은 그 지역 부족에 보내진 아들들이 다스리면서 세습하게 했다.
▶ 지역 통치 수장을 지농이라 불러
각 지역을 통치하는 다얀 칸 아들을 지농(晉王:진왕)이라 불렀다.
이 명칭은 칸의 한쪽 팔(片腕:편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칸을 보좌하는 부왕(副王)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했다.
쿠빌라이가 과거 자신의 아들들을 각 지역에 보내 왕으로 삼았던 것이나
명 태조 주원장이 아들들에게 왕의 칭호를 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사진 = 6개 투멘 지역 분포]
좌익을 구성하는 투멘은 할하와 차하르, 우량칸 세 곳이었다.
우익을 구성하는 투멘은 투메트와 오르도스, 융시예브 등 세 곳이었다.
이름이 낯설기 때문에 좌우에 3개씩 투멘이 있었다는 것으로 기억하면 충분하다.
다얀 칸이 각 지역의 투멘을 장악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그 지역에 보낸 아들을 살해하고 반발하는 부족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무력으로 응징해 항복을 받아내기도 하면서 전 몽골 지역을 장악했다.
[표 = 6개 투멘의 분포]
▶ 여섯 개의 투멘 분포
각 지역 투멘은 이름도 생소하고 위치도 감이 잘 잡히지 않겠지만 간단히 설명하고 지나가자.
먼저 다얀칸이 직접 영향권 안에 두었던 좌익에 있었던 세 개의 투멘은 차하르, 할하, 우량칸이다.
▶ 차하르-과거 쿠빌라이 영지
[사진 = 돌룬노르(상도)]
그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것이 차하르 투멘이다.
이 지역은 과거 쿠빌라이가 뭉케로부터 영지를 하사 받아 자리 잡은 돌룬노르, 즉 상도 근처 지역으로 보면 된다.
지금의 중국 내몽골 지역으로 칭기스칸 시대 권황제로 불리던 무칼리가 다스리던 땅이기도 했다.
다얀칸 이후 대칸의 자리는 바로 이 차하르 투멘에서 이어가게 된다.
▶ 할하-현 몽골인의 조상
[사진 = 보이르 호수]
그 위 북쪽으로 있는 것이 할하다.
할하와 오이라트를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할하가 여기서 등장한다.
바로 현재 몽골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할하강과 보이르호수 근처지역에 살았던 부족들이었다.
이 부족의 이름은 할하강과 관련 있다고 앞서 설명했다.
다얀칸의 아들 두 명이 이 할하 투멘으로 들어가 수장이 됐다.
▶ 우량칸-칭기스칸묘 지킨 부족
[사진 = 헨티 산맥]
우량칸투멘은 헨티산맥의 산중에 자리하고 있었다.
헨티산맥은 바로 칭기스칸이 테무진으로 불릴 시절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뒤 다달솜 근처에서 그 곳으로 옮겨가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나중에 서하의 육반산에서 죽은 그는 이곳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량칸부족은 바로 이곳에 있던 칭기스칸의 묘와 그 이후의 칸들의 묘를 지키며 살아온 우량칸 천호의 후손들이다.
이 세 개의 투멘이 바로 좌익에 있던 투멘이다.
▶ 오르도스-황하 유역 칭기스칸 가묘
[사진 = 포두 해바라기 밭]
우익에 있던 세 개의 투멘은 오르도스와 투메트 그리고 융시예브다.
오르도스는 앞서 몇 차례 등장했던 명칭이어서 다소 낯설지 않다.
오르도스는 칸의 게르인 오르도의 복수로서 칭기스칸의 영(靈)을 모신 나이만 차강 게르를 떠올리면 기억이 날 것이다.
바로 다얀칸이 즉위식을 올렸던 칭기스칸의 가묘가 있는 곳이다.
지금 내몽골의 포두와 에진호르 근처 황하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 투메트-후흐호트 주변의 초원
[사진 = 음산 산맥]
투메트는 오르도스의 동북쪽에 있는 부족으로 음산산맥 일대에서 퍼져 살고 있던 유목민들이다.
지금 내몽골 자치구의 주도 후흐호트를 그 중심지로 생각하면 된다.
다얀칸을 만든 여걸 만두하이의 출신지도 바로 이곳 투메트다.
▶ 융시예브-영하․감숙지역
[사진 = 영하회족자치구]
마지막 가장 서쪽에 있는 융시예브 투멘은 오고타이 대칸의 아들에게 준 영지로서
지금의 영하회족자치구와 감숙성 일대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차하르 투멘지역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일찍부터 쿠빌라이에게 충성했던 부족들이었다.
부족의 이름은 무위(武威)의 한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 차하르투멘에서 이어간 대칸
[사진 = 천호제 편제]
이들 여섯 개의 투멘 이외에도 몽골민족의 구성원이 된 몇 개의 부족이 있지만 복잡하니까 생략하자.
여하튼 이 모든 지역의 수장을 다얀칸의 아들들이 차지했으니 결과적으로
서쪽의 일부 오이라트 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 몽골고원은 다얀 칸 시대들어 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얀 칸이 죽으면서 이후 대칸 자리는 동쪽 차하르 투멘에서 이어가게 된다.
다얀 칸이 죽은 뒤 셋째아들이 칸의 자리에 올랐지만 다얀 칸의 장손,
그리니까 칸의 장조카가 2년 만에 숙부를 압박해 폐위시키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보디 칸이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6개 투멘, 6만호는 이후 몽골의 정치적 체계의 바탕이 됐다.
▶ 몽골고원 중심부 차지한 할하
보디 칸의 치세 중에 헨티 지역의 우량칸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나머지 부족들이 힘을 합쳐
이를 제압하고 우량칸 투멘을 해체시켜 버렸다.
그 덕을 가장 많이 본 부족이 할하로 동쪽 끝에 있던 이들 부족은 이를 계기로 헨티 지역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오이라트를 더욱 서쪽으로 밀어내고 항가이 산맥까지 진출했다.
[사진 = 몽골 중부 초원의 게르]
할하족이 현재 몽골인의 80%가까이 차지하게 된 기반은 이때 마련된 것이다.
즉 이들은 몽골고원 중심부의 가장 넓은 목지(牧地)를 차지함으로써 현재 몽골민족의 선조로서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