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길, 구도의 길
봉정암에 가 보신 적이 있는가? 해발 1244m. 설악산 8부 능선쯤에 터 잡고 있는 봉정암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기 힘든 사찰(암자)이 아닌가 싶다.
해발 높이로만 따진다면 지리산 법계사(1450m)보다 200여m가 낮지만, 이동거리가 만만치않다.
봉정암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백담사 코스를 기준으로 해도 오로지 두 발로 걸어가야 하는 거리가 편도로만 무려 10.6㎞에 달한다. 왕복으로 50리가 넘는 산길. 기나긴 수렴동·구곡담 계곡을 지나 설악산 암릉미의 대명사로 통하는 용아장성의 한쪽 끝 편에 발을 올려놓아야 봉정암을 만날 수 있으니, 이쯤 되면 ‘고행의 길’을 넘어 ‘구도의 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봉정암을 하루에 왕복 탐방하려면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인제 용대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이동한 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야 하니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당일 탐방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5월 중순 설악산 입산통제가 끝나면, 강원도 인제 백담사∼봉정암을 잇는 등산로에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등산객들 가운데는 지팡이에 의지한 연로한 할머니들도 적지 않다. 봉정암을 만나기 위한 순례 행렬이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양산 통도사)의 희소성과 가치가 이런 풍경을 연출해 놓았다.
■주먹밥과 미역국-보시심 일깨우는 산사(山寺)의 나눔과 배려
그 봉정암에 ‘주먹밥’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코로나19 창궐 이후에는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주먹밥 제공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점심·저녁때에 맞춰 봉정암에 오르면 지금도 공양밥을 제공한다고 하니 어느 쪽이든 고맙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5년 전, 한동안 봉정암의 풍광과 운치에 매료돼 백담사∼봉정암 코스를 여러 번 탐방한 일이 있다.
봉정암 코스의 마지막 관문인 ‘깔딱고개’를 올라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사찰 경내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데, 양동이에 수북히 담긴 주먹밥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집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공깃밥 한 그릇은 족히 될 크기. 이 깊은 산속에서 이만한 요깃거리를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한개 한개 집어가기 편하도록 비닐 봉지에 정성껏 싼 마음씨며, 미역국까지 마음껏 퍼먹을 수 있도록 곁들인 배려가 산행의 피로를 순식간에 잊게한다.
맛은 또 어찌나 감탄스럽던지.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그대로 주먹으로 뭉친 밥인데도 김과 참깨, 참기름을 더한 듯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주먹밥 치고는 그야말로 ‘특식’인 셈이다. 등산객들은 너나없이 주먹밥을 한 개씩 들고,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이 마주 보이는 산사의 양지바른 뜨락에 걸터앉거나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정암 사리탑 조망터에 올라 요기를 했다.
봉정암은 사계절 언제 만나도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경이롭다. 말 그대로 천하제일경을 품고 있는 가람이다. 그런 곳에서 먹는 맛인데, 무엇인들 감칠맛이 돌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봉정암의 주먹밥은 분명 오래 기억되기에 충분한 맛이었다. 설악산 8부 능선, 높디높은 봉정암까지 찾아온 산객의 수고를 위로하면서, 베풀고 나누라고 가르치는 산사의 보시심이 주먹밥을 통해 온전히 전해진다고나 할까.
■명당터에서 만나는 천하제일경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 바위산을 끼고 있는 천하제일의 명당터라고 하는 봉정암의 적멸보궁 법당과 사리탑(보물 제1832호)에는 매일 순례객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길게는 밤을 새워 삼천배를 올리고, 짧게는 백팔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리탑 제단 앞에는 “기도가 끝난 뒤 시주물을 공양간으로 가져다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자녀들의 시험 합격을 바라고, 가정의 화목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업장소멸을 기도하는 그들의 수고에 절 집 사람들의 정성이 더해져 다음에 찾아오는 탐방·순례객들에게 주먹밥 공양물로 제공되는 것이니 만인의 정성으로 빚은 맛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봉정암의 밥은 사람만 먹는 것이 아니다. 사리탑 제단에 차곡차곡 쌓인 쌀 포대 가운데 몇 개는 비닐이 뜯겨져 있다. 그 뜯겨진 구멍으로 삐져나온 쌀을 먹기 위해 다람쥐 몇 마리가 사람들이 백팔배 기도를 올리는 중에도 열심히 제단을 들락거린다.
“아하 이놈들이 쌀을 먹기 위해 포대를 찢었구나.” 여러 마리가 쉴 새 없이 쌀을 입에 물고 오르내리면서 제단 위는 물론 바닥에까지 쌀이 흩어져 있으나 사리탑 앞에서 하염없이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객들은 아무도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 사람과 자연은 설악산 높은 산사에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다.
그런데, 봉정암에서 더 희한한 것은 ‘미역국’이다. 미역은 바다에서 나는 산물이다. 설악산 깊은 산속과는 가까워 질수 없는 먹거리 임에 분명하다. 차라리 시래기 같은 산간 마을의 먹거리가 산사(山寺)에서 국으로 제공된다면, 궁합이 맞다고 할 수 있겠으나 봉정암의 국거리는 분명 미역이니 묘한 일이다.
아마도 대량 소비를 위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쉴새없이 몰려드는 수많은 탐방객과 순례객들에게 공평한 공양물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비용 면에서 대량 공급이 가능한 효과적인 재료를 찾아야 하고, 그 조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서민 먹거리가 미역인 것이다.
이른 아침, 백담사를 출발해 10.6km 산길을 걸어 점심 무렵에 봉정암에 도착하면, 탐방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허기를 느끼게 된다. 그런 때 급시우(及時雨), 즉 때맞춰 내리는 비처럼 봉정암 주먹밥이 제공되니, 그 맛이 오래도록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리라.
지금도 봉정암에서는 매끼 때 맞춰 공양밥에 단무지, 미역국을 제공한다고 한다. 코로나 전염병 때문에 추억의 주먹밥 제공은 어렵게 됐지만, 등산·탐방객들을 위한 배려와 나눔은 여전하다. 오는 5월 중순, 설악산 입산통제가 해제되면 백담사∼영시암∼수렴동·구곡담 계곡∼깔딱고개∼봉정암 코스를 찾아 설악산 계곡미의 백미를 만끽하고, ‘나눔과 배려’의 미덕을 음미해보는 특별한 체험의 주인공이 되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