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세계사적 위상: 文明건설세력의 챔피언 그는 18년간 수많은 폭력시위 앞에서도 한 번도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런 거창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 맞아 죽은 시위대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화는 세계적 성공사례이고 朴正熙이야말로 진짜 聖人君子이다. 趙甲濟
朴正熙의 세계사적 위상: 文明건설세력의 챔피언 朴正熙는 대한민국 역사 74년의 18년간 국가 지도자였다. 이 기간 그는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최단 시간내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 이 나라를 빈곤과 굴종에서 구하고 일류국가로, 자유통일로 가는 길을 열었으며 그 성공방식은 후발국가들의 모범이 되어 인류에 기여하고 있다. 1. 朴正熙는 文明건설자이다. 삶의 진보로 정신의 풍요를 가져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의 문명 건설 전략은 중국, 월남, 르완다 등지에서 참고서가 되어 더 많은 인류를 문명 세계로 포섭하였다. 실천론에 보편적 성공원리가 들어 있었던 덕분이다. 2. 朴正熙는 管仲에서 비롯된 동양적 실용정치의 맥을 이은 經世家였다. 주체적 實事求是論者였다. 사실과 현실에 입각하여 정책과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항상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주체적 실용정신이야말로 東西古今을 관통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정치적 성공 원리이다. 3. 朴正熙는 李承晩, 文武王과 함께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이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최초의 국민국가를 세운 李承晩의 정통노선을 이어받은 그는 國力, 즉 富國强兵의 측면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만들었다. 오늘의 한국은 GDP 세계 13위권, 세계 최장수국, 공업생산 및 수출 세계 5위권, 세계 7위권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적인 민주복지국가인데 그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4. 朴正熙는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위대한 경영자이고 국가건설 대전략가였다. 그는 18년간 자조정신-자립경제-자주국방-자유통일의 4단계 대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최단 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1961년의 한국은 最貧國 대열에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은 最富國 그룹에 있다. 그가 유신선포로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건설은 일류강대국으로 가는 막차였다. 국력을 조직화하여 능률을 극대화한 그의 경영술엔 가정, 기업, 국가 등 모든 조직의 운영에 다 통용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원리가 있다. 이를 찾아내어 응용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박정희를 연구하는 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좋은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 국가운영에 항구적으로 기능하도록 한 그의 일하는 방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박정희는 헬기로 전국을 시찰하면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8년간 자조정신-자립경제-자주국방-자유통일의 4단계 대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5. 朴正熙는 超人이었다. 더러운 강물을 들이마셔도 영혼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거대한 바다, 즉 새로운 시대를 빚어낸, 그러면서도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 자신의 한을 민족의 한으로 승화시켜 수백 년 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대폭발시킨 사람이었다. 6. 朴正熙는 남자의 美學을 보여준 武士였다. 부인이 총을 맞았을 때, 그리고 자신이 총을 맞았을 때 보인 행동은 준비된 것도, 훈련된 것도 아닌 그의 삶의 총체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체념한 듯 해탈한 듯 하였다’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한국에서 약800년만에 등장한 군인정권은 '교장 같은 장군' 덕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근대화 혁명에 성공하였다. 7. 朴正熙는 前任者와 後任者를 잘 둔 행운아였다. 李承晩이 지도한 자유민주주의 건국, 강군 건설, 교육확대, 한미동맹, 농지개혁이 박정희 식 고도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그의 國政 노선을 부정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킨 全斗煥이 있었기에 박정희는 더욱 빛난다. 8. 朴正熙는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고 말한 사람이지만 李承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근대화 혁명가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건설자이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우상화와 교조화를 거부하고,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맞추어 민주주의를 變容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자주적 민주주의자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고 박정희는 집을 지었다. 민주주의의 3 요소인 안보, 자유, 복지의 인프라를 만든 두 분이다. 두 사람은 혁명가와 건설자를 겸한 사람이다. Revolutionary and Visionary였다. 9. 朴正熙 또한 실수나 결함이 적지 않은 인간이었다. 한글專用 정책은 한국어의 반신불수를 초래하여 국민교양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으며 名門 고교를 없앤 것은 국가 엘리트 양성의 통로를 막은 실수이다. 정규육사 출신이란 물리적 후계자 그룹은 양성하였지만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할 정치세력 육성에는 실패하여 좌익의 도전과 이에 따른 박정희 지우기를 부르고 말았다. 반면, 김일성은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역이용, 민주투사로 위장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꾀하였는데 이 전략이 1980년대에 적중, 그 뒤 한 세대의 젊은이들을 좌경화시켰다. 10. 朴正熙는 조선조적인 士農工商의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하였으나 신종 양반세력의 보복을 받았다. 그는 군인, 기업인, 과학 기술자를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세계를 무대에서 雄飛하도록 하였지만 조선조 양반세력의 후예들인 지식인 집단의 비판 앞에서 苦戰하였고 死後에는 그의 딸까지 이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박정희는 위선적 지식인들을 守舊사대세력으로 규정, 경멸해 마지 않았지만 이들은 때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자, 때로는 민중민주주의자로 행세하면서 자신들의 사대성을 감추고 박정희를 포위 공격하였다. 박정희는 말년에 미국, 북한, 남한 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3면 공격을 받았다. 비록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신종 양반 지식인 세력의 공격 때문에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실패하였다. 박정희는 조선적 봉건 잔재와 싸우다가 戰死한 셈이다. 11. 朴正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일의 여하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다. 적화통일이 되면 그는 중국의 장개석 정도의 평가를 받을 것이고, 자유통일로 귀결되면 신라의 삼국통일을 예비한 진흥왕, 또는 소련 공산제국의 붕괴를 준비한 레이건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12. 이젠 朴正熙를 우리 곁의 친구로 맞아들일 때이다. 망국, 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 재건, 도약의 과정에서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났던 그였다.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오고 간 그의 삶은 우리의 부모와 삼촌들이 겪었던 표준적 삶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상이 아닌, 독재자도 영웅도 아닌 우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13. 그가 꿈꾸었던 한국은 특권층을 몰아낸,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이었다. 이것이 소망일 뿐 아니라 생리라고 했다. 그는 가난을 스승이자 恩人이라고 불렀다. 박정희는 가난이란 스승 밑에서 배운 수백만의 同門이 건재하므로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가난을 이기는 이가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된다고 한다(토마스 칼라일). 가난의 제자들이 박정희의 영도 하에서 건설한 ‘천국 다음 한국’을 가난의 기억이 없는 세대가 ‘헬 조선’이라 저주하고 이들이 주도권을 잡은 한국이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하였지만 신종 양반 특권층의 의식화에 넘어간 부하가 쏜 배신의 총탄으로 생이 끝났으며 그의 딸은 선동 언론, 정치검사 및 판사, 제왕적 국회, 그리고 귀족노조가 작당한 촛불 狂風의 희생자가 되어 지금 감옥에 가고 말았다. 14. 나는 탄생 100주년이던 2017년 이런 자문자답을 한 적이 있다. "朴正熙가 만든 국민국가의 문명적 토대가, 민주와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남북한 좌익, 즉 계급투쟁 세력의 총공격에 직면한 지금 무슨 수로 진실 정의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 과연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는 自衛능력을 갖춘 것인가, 핵무장한 북한정권과 권력을 잡은 친북세력의 협공 속에서 대한민국은 반공자유민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은 자유통일·분단고착·적화통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박정희가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너무 엄혹하고 국제정세는 유동적이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여러 번 목숨을 걸었다. 형은 우익 손에, 부인은 간첩 손에, 자신은 부하 손에 죽었고 딸은 신종 양반들 손에서 정치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박정희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처럼 목숨을 걸어라! 자유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자유의 방파제 역할은 그만하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려라! 나의 답은 간단하다. 적이 목숨을 걸고 달려드니 너도 목숨을 걸어야 게임이 될 것 아닌가?' 박정희에게 1년 동안 물은 답은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까? 이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附記: 그는 18년간 수많은 폭력시위 앞에서도 한 번도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런 거창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 맞아 죽은 시위대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화는 세계적 성공사례이고 朴正熙이야말로 진짜 聖人君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