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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 섬에 상륙하다
행 28:1-10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행 28:1-10 / [멜리데 섬에서] 우리는 상륙한 곳이 멜리데 섬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2) 섬사람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날이 추웠기 때문에 그들은 불을 피워 놓고 우리를 맞아 주었다. 3) 바울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속에 넣었다. 그런데 나뭇가지 속에 있던 독사 한마리가 뜨거움에 놀라 튀어나와서 바울의 손에 달라붙었다. 4) 섬사람들은 독사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살인자가 틀림없어! 바다에서는 살아 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결코 살려두지 않을 거야' 하고 서로 수군거렸다. 5) 그러나 바울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그 뱀을 불속에 떨어 버렸다. 6) 섬사람들은 바울의 몸이 부어 올라 당장에 쓰러져 죽으려니 생각하고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바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이번에는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7) 해변 가까운 곳에는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의 땅이 있었으므로 추장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동안이나 친절히 대접하였다. 8) 그때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고열과 이질에 걸려 앓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손을 얹어 낫게 하자 9) 그 섬 안에 있는 병자들이 다투어 찾아왔다. 바울은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 주었다. 10)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떠날 때에는 여행하는 데 필요한 온갖 물건을 배에 실어 주었다.
결국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죄수인 사도 바울이 리더의 위치에서 일행을 이끌었습니다. 배는 파선 했지만 276명의 선원 중 단 한명도 인명피해가 없었습니다.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1-6) 안전하게 구조된 후 알고 보니, 그 섬은 현재 ‘몰타’로 불리는 멜리데 섬이었습니다(1).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하고 바다에 빠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모닥불을 피워주며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2). 바울은 그들의 친절한 행동을 받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같이 돕기 위해 나뭇가지를 한 묶음 모아 땔감으로 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독사가 불길에 놀라서 바울의 손을 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3).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고 매달려 있는 모습을 원주민들이 본 것입니다(4). 원주민들은 난파선에서 헤엄쳐 나온 많은 사람들이 죄수라는 것을 로마 군인들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사가 바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이 사람은 살인자가 분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바울이 당한 불행이 바울의 저지른 죄에 대한 증거로 생각한 것입니다(4).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 위험한 뱀을 불에 툭툭 털어 버렸고,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며 쓰러져 죽지도 않았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멀쩡하니까 바울을 “신이다”라고 합니다(6).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7-10) 멜리데 섬에서 가장 유력한 지주였던 보블리오라는 사람은 바울 일행에게 사흘간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7). 친절을 베푼 대상을 ‘우리’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276명 전원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그 외 몇몇 사람들 정도를 초대해서 사흘 동안 머물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누가 있었든지, 그렇게 여러 명을 사흘씩이나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고 음식을 베풀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집에 머물며 보니,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하며 안수해주었습니다(8). 그러자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고쳤다는 소식을 듣고, 섬 주민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이 와서 또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9). 섬 주민들의 선의에 대해 치유의 기적으로 답한 바울에게, 그들은 다시 더 큰 호의로 화답을 합니다. 바울의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고, 쓸 것을 배에 실어줍니다(10).
적용: 복음을 증거하는 곳, 믿고 구원을 받는 현장에 표적이 나타나리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막 16:15-18).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는 불행이 있었지만 불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습니다. 당신은 선교, 전도의 현장을 펼치고 살아가는지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따라 환난 중에도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백성들에게 특별히 도움을 베푸셔서 위로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낙심하고 도망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백성을 위로하고 도우십니다.
< 설 교 >
멜리데 섬을 거쳐 로마로
사도행전 28:1-15 / 서금석 목사
육지에 상륙한 바울 일행은 그곳이 멜리데(Malta)섬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은 매우 친절해서 비가 오고 날이 추워지자 자기들에게 낯선 사람들인 바울 일행에게 불을 피워 줌으로써 몸을 녹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바울도 몸을 녹이기 위해 불 옆에 있었고, 불에 넣기 위해 땔감 나무를 집어 넣는 순간 뱀이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은 그 뱀이 독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믿어온대로 바울은 신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이 죽지 않자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루스드라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자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하려고 하기보다 신의 사랑을 입은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멜리데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Poblius)의 집에서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었는데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해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섬 안의 다른 병자들도 바울을 통해 고침을 받았고, 바울 일행이 겨울을 보내고 로마로 떠날 때가 되자,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잘 대접하고 배에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까지 준비해 주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을 보낸 바울 일행은 디오스구로(Dioskouroi)라는 배를 타고 수라구사(Syracuse)에 도착,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다가 레기온(Rhegium)에 이르렀고 다시 레기온에서 남풍에 의지하여 340km 떨어져 있는 보디올(Puteoli)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올에 도착한 바울은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죄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곳 보디올에서 7일 동안이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백부장의 이러한 배려는 바울이 폭풍 속에서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디올에서 7일 머문 후 바울 일행은 드디어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을 맞이 하기 위해 로마시로부터 50-60km 떨어진 압비오 광장(Forum of Appius)과 '세개의 숙소'라는 뜻을 가진 트리온 타베르논(Tres Tabernae)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로마의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한 가지만 물어봅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 도착한 것이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힘드시지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템플이라는 감독이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학들이 모인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설교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해서 당당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한 청년이 와서 따져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되는 우연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연이 생기고 안하면 우연이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한 것이라네."
그 말씀으로 인해 그 집회에 큰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여러분, 이제 대답하실 수 있지요? 우리의 삶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미항에서 뵈닉스로 가던 도중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바울 일행은 광풍 속에서 바울의 예견대로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한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곳이 멜리데 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멜리데 섬은 오늘날 '말타(Malta)'라고 불리우는 섬으로 시실리 남쪽으로 약 98km 떨어진 곳이며 전체 길이가 약 29km 너비가 15km 정도 되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겨울을 좀 편안하게 보내려고 뵈닉스로 가려고 했다가 폭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뵈닉스보다 로마에 훨씬 가까운 곳에 도착해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바울 일행이 멜레데에 간 것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평범한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우연일 수 있습니다. 광풍에 휩싸여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배가 파선되고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멜리데 섬까지 표류되어 온 것, 생각해 보면 우연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멜리데 섬은 바울도 그렇지만,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 누구도 그 섬이 멜리데 섬인지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무도 와 본적이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우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 믿음없는 사람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결코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왔다는 것이 우연일 수 없습니다. 요즈음도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되거나, 난파되는 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어떤 내용이 보도됩니까? 몇 명 죽고, 몇 명 실종되었다는 소식 아닙니까? 시체 찾지 못했으니 실종이지 실제는 죽은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즈음 배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태풍만나면 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배가 깨어지고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한 사람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배가 성능이 좋아서 그리되었습니까? 항해 기술이 발달되고 장비가 좋아서 광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고백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획일까요?
첫째는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의 능력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다른 증인들을 예비해 두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혼자 살아서 로마에 간 것이 아닙니다. 무려 275명의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혼자 살아서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는 가운데, 로마로 오는 도중 이러 저러한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또 다시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275명의 사람으로 하여금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보게 함으로써 자기들 입으로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살려 주셨어요. 폭풍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셨어요.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바울의 증거보다 죽음에서 살아난 275명의 증거가 더 위력적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섭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뵈닉스에 바울이 무사히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잘 보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하나님은 바울에게 지혜를 주셔서 뵈닉스로 가는 도중에 '하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뵈닉스로 가려했습니다. 결국, 뵈닉스로 가는 도중 광풍을 만난 것 역시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하던 사람들, 철저히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만을 의지하던 사람들의 고집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바울 한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뵈닉스로 무사히 가게 했다고 칩시다. 그랬다면 백부장, 선장, 선원들이 '와 역시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아마도 '역시 우리의 항해술은 뛰어나'하며 자화자찬 하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유흥도시 뵈닉스에서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온갖 쾌락을 즐기지 않았겠습니까? 뵈닉스에서 무사히 3개월을 보내고 로마로 갔을 때,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 누가 바울의 고백과 증거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것만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뵈닉스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광풍의 고난도 주셨지만 은혜도 주셨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뵈닉스에서 3개월 보내고 그 다음 봄에 로마로 출발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가면 로마에 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야만 했던 길을 광풍 때문에 떠 밀려오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멜리데 섬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됩니다.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섬 사람들의 입장에서 처음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생각 했겠습니까? 많은 수가 죄수 차림이었을 것이고, 난파되어 간신히 살아 육지에 올라온 사람들의 행색도 말이 아니었을 텐데 섬 사람들로서는 대하기가 편안해 보였겠습니까? 아니면 위협적으로 보였겠습니까? 당연히 위협적으로 보였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줍니다.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영접해 줬어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일 아닙니까?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뱀이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바울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까? 독사에 물렸다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지 않습니까? 유라굴로 광풍과 모래톱에 걸려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섭리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욥의 고백을 생각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인생이 고달프십니까? 순간 순간 나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걱정되어 불안하십니까? '인생은 고난이다'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세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여러분을 더 잘 아십니다. 내가 가는 길 - 나는 어두워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따뜻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당신의 넓으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지 않으세요? 영의 눈을 뜨세요. 기도하세요.
"주님, 내 삶 속에 지금 찾아와 주시옵소서. 제가 미쳐 생각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만져주시고 다스려 주옵소서. 고난 가운데 주님 뜻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역경 가운데 주님의 섭리하심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간구 속에 주님 만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몰려드는 사람들(7-9)
바울을 신(神)이라고까지 생각했던 멜리데 섬의 사람들 중 제일 높은 사람-보블리오가 있었습니다. 이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동안 친절하게 돌보아 줍니다. 7-8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7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그런데 바울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한 보블리오의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 즉 말라리아와 심한 설사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요즈음에도 말라리아와 이질은 그리 쉽게 치료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료 기술과 약이 허술했던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섭리였습니까? 보블리오가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바울 일행 가운데 의사 누가가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보블리오 부친에게 '기도하고 안수하매 병이 낫다'고만 했지만 의사인 누가의 역할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집안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가족들 중에 괜히 낯선 사람들을 집안에 들여 놓아 부친이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렸다고 바울 일행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섬에 사는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왔습니다.
9절을 봅니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쳐주자 이 소문이 모든 섬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 왔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베풀기 시작하니까 역사가 일어나고 그 역사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왜 섬 사람들이 바울에게 몰려왔습니까? 바울에게서 얻을 것이 있었어요. 먹을 것이 있었어요. 은혜가 있었어요. 기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바울에게 몰려왔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몰려올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일상 생활을 보세요. 무슨 모임이 잘 됩니까? 모여서 일단 먹는 모임이 잘됩니다. 먹으면 모임이 잘 돼요. 왜? 먹어야 사니까. 먹는 것 속에 나눔이 있어요. 먹는 것 나눌 때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흥하는 교회가 왜 부흥합니까? 나눠 먹기 때문이지요. 육의 양식도 자주 나눠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도 풍부해야 합니다. '춘천 중앙 교회만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다 육의 양식도 풍성하고 영의 양식도 넘쳐 흐른다'하면 모여 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간에 모이면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고, 나눔이 있고, 서로를 위해 사랑하며 기도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저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우리 춘천중앙 교회는 성도들간에 육적인 양식의 나눔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나눔도 풍성해 지시기 바랍니다.
나누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강단에 더 은혜가 넘치고, 성도들간에 더 사랑과 간증이 풍성해지고 사람과의 만남에서 음식과 차도 따뜻하게 나눔으로 많은 영혼들이 몰려드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3. 로마에 도착 바울(10-15)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의 겨울을 보낸 바울과 그 일행은 드디어 로마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릴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바울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입은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그 섬을 떠나려고 하자 감사한 마음으로 후하게 대접하고 또 로마까지 가는 길에 배에서 필요한 것들을 실어줍니다. 바울 일행은 폭풍 가운데 장사할 밑천인 밀까지 다 버리고 몸만 남았었지만 이제 필요한 것들은 멜리데 섬 사람들이 채워 줍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합니다.
바울이 어떤 신분으로 로마에 갔습니까? 죄수의 신분으로,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모습을 보니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병자도 고치고, 친구도 만나고, 로마에 와서는 형제들의 환대도 받고,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울의 삶을 보노라면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습니다. 움츠려들지 않았어요. 기죽지 않았어요. 오히려 담대해 집니다. 15절 말씀을 봅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만일 바울의 삶에 믿음이 빠진 평범한 삶이었다면 바울은 지금까지 버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수년동안 고생했고, 풍랑에서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맞으면서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나타난 바울을 보세요. 더욱 담대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내가 신앙생활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어찌되었을까?' 그런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런 고백이 매일 매일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전도하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체험한 주님의 능력을 말하면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면 그것이 바로 복음 증거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받은 은혜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 고난도 있고, 슬픔도 있고, 역경도 있고, 온갖 어려움이 쌓여 있어도,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고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증거입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그렇게 가려고 했던 이유가 복음 증거 아니었습니까?
은혜 받았습니까? 전합시다. 전합시다. 바울처럼 복음 전하게 위해 공부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일하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전도합시다. 이것이 성도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정 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 일행이 멜리데로 간 것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멜리데 섬으로 간 것, 그리고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여세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세요. 사는 목적이 바뀔 수 있습니다. 돈버는 것, 명예 얻는 것, 권력 얻는 것 - 이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것 - 은혜 속에 아름답게 사는 것 자체가 전도 아니겠습니까?
은혜받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 /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침내 로마로
행 28:1-16, 30-31 / 서명성 목사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 때 나온 구호입니다. 한국 대표팀은 예상을 뒤엎고 4강까지 오르는 동안 강호로 알려진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팀들을 하나하나 물리치며 꿈을 현실로 이루었습니다. 그때 장면은 지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까?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기분이 어떠하던가요? 교회적으로도 교회당 마련의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2004년부터 기도하며 준비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칼스배드에 구입한 땅에서는 교회당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적지 않은 부담이던 땅을 팔았고 그 대금을 종잣돈으로 하여 건물을 구입하려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제 에스크로를 오픈하고 산마르코스 시청에서 business zone을 religious zone으로 바꾸는 Conditional Use Permit을 얻어야 합니다. remodeling 설계와 시공을 해야 합니다. 건물 입주는 빨라야 내년 창립주일 때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여 봅니다. 교회당 건물 마련하는 것이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입니다. 교회가 모든 면에서 upgrade 되는 기회입니다.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기도로 물질로 시간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죄수의 몸으로 호송됩니다. 그냥 로마로 끌려가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바울이 탄 배가 심한 풍랑에 시달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좌초하니까, 로마 군병들은 죄수들이 도망칠 까하여 그들을 죽이려하는데 백부장이 막아 바울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간신히 섬에 상륙하여 젖은 몸을 말리려고 불을 쬐다가 바울이 독사에 물립니다. 시련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바울을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고 마침에 로마로 가게 하십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분들이라면 하나님은 그저 고통만을 위한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손길로 인도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건지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낙심치 않고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로의 여정은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기초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각자에게 부담으로 주시는 그 꿈을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멜리데 섬에 상륙합니다(28:1-10)
바울이 탄 배가 율라굴로 광풍 속에서 표류하였습니다. 풍랑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기진맥진한 무리들에게 바울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서 배에 탄 사람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다며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들을 인도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전합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을 때 배가 모래톱에 걸려 좌초합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헤엄을 치거나 나뭇조각을 붙잡든지 하여 섬에 올라왔습니다. 배에 탄 276명이 바울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상륙한 곳은 시실리 남쪽에 있는 멜리데라는 섬으로 오늘날 몰타(Malta)라고 불립니다. 누가는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경멸하는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멜리데의 원주민들은 재난을 당한 바울 일행을 불쌍히 여겨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니까 그들을 위해 불을 피워줍니다. 바울은 어디서나 섬기는 데 적극적입니다. 바울이 직접 나뭇단을 거두어다가 불에 넣는데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우니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뭅니다. 그 장면을 본 원주민들은 바울이 틀림없이 살인자일 것이라고 수군거립니다. 그가 바다에서는 운 좋게 살아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4절에 언급된 ‘공의’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정의와 복수의 여신’ 디케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여신이 독사를 보내어 바울을 심판한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며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때문입니까”(9:2) 이들이 던지는 질문을 보면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소경된 것이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경된 것도 억울한데 죄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가난이나 질병이나 현재의 고난이 다 과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인과응보의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 예배를 자꾸 빠지든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무엇이라 수군댑니까? ‘엉터리로 신앙생활 하더니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된 이유를 과거에서 찾으신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찾으셨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것도 그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독사에 물린 바울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그것을 불 속에 떨어 버립니다. 독사의 독이 쫘악 퍼져 몸이 부어오르거나 열이 오르면서 곧 죽을 것으로 기대하고 바울을 계속 지켜보는데 시간이 흘러도 바울은 멀쩡합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살인자’라고 부르던 섬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제는 바울을“신”이라 부릅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이적이 우상에 물든 그들의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16:18) 하였는데 그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집에 가서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인지 알아본다고 뱀을 집어올리고 독을 마시는 흉내를 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친히 보호하여 주십니다.
독사에게 물렸는데 바울이 무사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멜리데 섬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 섬의 최고 관리인 보블리오(Publius)가 바울 일행을 영접하고 친절하게 대접하였습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알고 바울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다른 병자들도 몰려왔는데 바울이 그들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병만 고쳤겠습니까?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바울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땅의 것에만 소망을 두고 살던 자들, 쓸데없는 것을 신으로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을 인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보블리오는 멜리데 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파선을 당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섬사람들은 바울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3개월 동안 일행을 정성껏 대접하고 떠날 때는 필요한 물건까지 배에 실어 주었습니다. 복음을 들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전도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나야 합니다.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28:11-31)
다시 바닷길이 열리는 2월 중순이 되자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뱃머리에는 디오스구로(Dioscuroi)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디아스구로는 제우스(Zeus)와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당시 뱃사람들의 수호신으로 널리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누가가 디오스구로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험난한 항해 길에서 누가 진정한 보호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풍랑 가운데서 바울을 포함한 276명을 지킨 것은 디오스구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둔 밤이 지나면 상쾌한 아침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멜리데에 도착할 때까지 바울 일행은 엄청난 풍랑에 시달렸으나 멜리데를 떠나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순조로운 여정이 이어집니다. 시실리 동쪽 항구인 시라큐스(Syracuse)에 배를 대고 거기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의 항구인 레기온(Regium)으로 가서 하루를 지낸 후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에 힘입어 이틀 만에 약 230마일을 항해하여 알렉산드리아 곡물 수송선단의 최종 기착지로서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Puteoli)에 이르면서 길고도 험난했던 항해를 마치게 됩니다. 보디올에서 바울 일행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초대를 받고 일주일을 함께 지냈는데 이는 백부장이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보디올에서 로마까지는 125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가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교인들이 로마에서 약 12마일쯤 떨어진 압비오 광장(Appii Forum)과 약 8,9마일쯤 떨어진 큰 여관의 일종인 트레스 타베르네(Three Taverns)까지 마중을 나옵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거기까지 마중 나온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압비오 광장은 원래 동방제국을 정복한 장군들이 개선행진을 하는 압비오 대로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교회의 대표격인 로마 교회의 환영을 받은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걷는 바울을 격려하고자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바울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적으로 큰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압비오 대로를 통하여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 말로만 듣던 로마에 처음 발을 디디는 순간 바울이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그가 겪었던 수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와서 어디에 머뭅니까? 로마 정부가 제공한 집에 머뭅니까? 아니지요. 바울이 비용을 내어 머물 곳을 구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바울이 재판을 기다리고 받는 과정 가운데 적지 않은 돈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경비병 한 사람과 함께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택 연금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대담을 가집니다. 자기는 회당을 찾아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죽을 고비를 당하고 이렇게 로마까지 죄수의 몸으로 잡혀 온 것도 동족의 시기 때문이지만 동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소망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호송된 이유를 말합니다.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재판이나 청문의 자리에서 역설하던 바를 이곳에서도 다시금 강조합니다. 자신은 유대의 신앙적 전통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도 없고 로마의 실정법도 어긴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은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소망에 충실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바와 달리 유대인 지도자들은 본토로부터 바울에 대해 아무런 전갈도 받은 것이 없었고,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일단 들어보기로 결정합니다. 약속한 날에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청중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임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이번에도 두 가지로 나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사야의 예언(6:9-10)과 같이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복음에 대해 보였던 것과 같은 열정을 보이지 않고 흩어지고 맙니다. 바울은 그들의 닫힌 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그 결과 구원의 소식은 이방인에게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로마에 입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상황에서 바로 깨닫기 보다는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아는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때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백성들도 고난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탄 배를 풍랑 가운데 멜리데 섬으로 인도하신 것은 헛된 신들만 붙들고 있던 멜리데 사람들에게 누가 참 신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사에 물렸으나 바울을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보블리오의 부친이나 다른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주자 섬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몰타 섬에도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셨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참을 수가 있고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비록 현실은 암담하였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가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나 때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많이 준비하고 계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2)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항상 위험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언제나 자기 곁에 계시고 고난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끌어내리는 '무거운 짐과 얽어매는 불신앙의 죄'를 벗어버리지 않고는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미련, 집착, 욕심 때문에 벗어버릴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무겁게 지고 신앙의 경주를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시며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이 귀한 사명은 뒤로 한 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나를 알아주느니 않느니 섭섭해 하며 네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명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도 없으나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일함을 벗어버리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께 대한 헌신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이 귀합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험도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마칠 때 누가 환영합니까?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나님은 히브리서 1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마라톤 경주를 할 때 코스를 따라 그리고 finish line이 있는 스타디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달리는 선수들을 환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달리는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베드로 등등. 그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코스를 충실하게 달리고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가리켜 단지 관객이라 하지 않고 ‘증인’들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가 경주하는 것을 단순히 보기만 하는 관중들이 아니라 그들이 본 것을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증인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성실하게 일을 잘한 종들에게 주인은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라고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데 많은 것으로 맡긴다고 하였으니 종의 노력에 비하여 주인의 보상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주님 앞에 섰을 때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스럽게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3) 영혼 구원은 계속되어야 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1절). 로마에서 바울 사역의 요약입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던 2년의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갈 수는 없었지만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바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재판을 기다리며 미래가 불확실한 처지에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데 전력하였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풀려난 후 마게도니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체포된 후 로마에서 재수감되었고, 로마 외곽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마치면서 바울의 죽음이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사도행전은 바울의 전기가 아니라 “땅 끝을 향한 복음의 거침없는 전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역사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은 모든 역경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여 죽이는 권세자들도 복음의 앞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증거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신실한 일꾼을 통해 여전히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교회를 통하여 복음은 여전히 전파되어야 합니다. 교회당 마련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가 더 훈련받고 준비되어 영혼 구원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귀한 역사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주신 사명에 충실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분들이 믿음을 가진 사명자, 목표가 분명한 사명자, 인내하는 사명자, 열정을 가진 사명자들이 되셔서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주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