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골담길의 좁은 경사진 골목을 단발머리 소녀가 손에 찌그러진 양은 사발을 들고 폴짝거리며 올라오고 있다. 사발에는 소녀의 아버지가 마실 한 잔에 50원 짜리 막소주가 담겨 있는데, 소녀가 폴짝이며 뛰어오는 통에 이미 반 정도는 흘러내리고 없었다.
소녀는, 틀림없이 아버지에게 가게 할머니가 그것 밖에 주지않더라고 거짓말 할터이고, 아버지는 그런 소녀를 속인 가겟집 노파를 향해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소녀는, 나중에 커서 돈을 벌어서 아버지를 위해 대병 소주를 사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해 가을, 아버지는 바다에 나갔다가 로프에 발이 걸려 빠져 죽고 말았다.
소녀의 아버지는, 북에도 자식들을 남겨 둔채, 그 자식들도 영영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해, 백혈병을 앓고 있던 바로 위 오빠가 죽었다.
그녀는, 오빠의 피 묻은 옷을 물을 아끼기 위해 바닷물로 빨면서 지독한 피냄새를 경험했다.
그리고 집안에서 머리가 제일 좋았던 항만청에 다니던 큰 오빠가 화물선 꼭대기에서 떨어져 원인도 모르게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 마저........
집안에 세 남자가 죽고, 어머니를 비롯하여 온가족은 각자가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는, 사춘기에 막 접어 들어, 부산으로 내려가 신발 공장에 다니며,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녀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내가 그녀의 술집에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으면, 슬며시 그녀가 다가왔다.
나는 아무 말이 없다. 단발머리 소녀가 술집 마담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다.
아내는 딸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고 홀로 남은 나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 처럼 엉터리로 장사를 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어판장을 마치 헤엄쳐 다니는 듯 허우적 거리며 돌아다녔다.
"필라델피아래요.....'
"필라델피아가 뭐야?"
"림프구성 백혈병 중에 예후가 제일 좋지 않데요. 사망율도 높고...."
"휴 ............“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몇 번을 되뇌이다가 문득 빡빡 머리로 무균실에서 나와 헤어지면서 손을 흔들던 딸아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연출과를 졸업하고 집에서 한 달만 쉬고 간다던 아이가 별안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런데, 내가 벌여놓았던 대게 장사는 기가 막히게 잘 되었다.
그러다가 백혈병이라니.....게다가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는 미국 동부의 유서 깊은 도시인 줄 알고 있었는데, 왜 하필 딸아이의 백혈병에 나타나 나에게 절망감을 주었던 걸까?
낮에 어판장을 술에 취해 어떻게 장사했는지도 모르게 들개처럼 돌아다니다가, 내 방에 들어서 술에 취해 잠이 들다가 문득 잠이 깨면 그녀의 천곡동 술집에 오곤 했었다.
어판장 말고는 달리 갈 곳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던 내가, 황량한 내 방을 나와서 갈 곳은 그녀의 술집 말고는 없었다.
술이 취하면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고 그러다 잠이 깨면 아이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내 앞에 그녀가 앉아 있었고 나는 딸 아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 또한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했다.
작은 오빠도 백혈병에 걸렸다고,
그런데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하고 죽었다고,
묵호항 산동네는 물이 귀해 겨우 바닷물로 피 묻은 오빠 옷을 빨았다고 피 냄새가 그렇게 지독한지 처음 알았다고,
그게 백혈병이었다는 것도 오빠가 죽고나서 나중에 알았다고.
“우리 아버지 625 때 북에 자식과 부인 남겨 두고 피난 왔다가 우리 엄마 만나서 어쩔 수 없이 묵호에 눌러 앉아 배 타다 돌아 가셨지요.
우리 아버지 참 불쌍한 양반이예요. 술은 엄청 좋아했는데 돈이 없어 술도 많이 드시지 못하고, 내가 돈 벌어 아버지 댓병 소주를 사드릴려 했는데.......”
그녀는, 대꾸도 없이 앉아 있는 내 앞에서 주절 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묵호에는 625 때 피난 내려 온 사람들이 제법 있는 편이다.
주로 북한 동해안 지역에서 살다가 배를 타고 남하했거나 육로로 이동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꼭 625 때만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북에서의 탈출 행열은 많지는 않았지만 제법 있었다.
625 이후 보다 이전에 배를 타고 탈출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간신히 딸 아이의 병세는 좋아져서 이제는 완치를 바라 볼 정도가 되었다.
아내와 아이도 서울에서 내려오고 나는 다시 정상적인 상태에서 어판장에서 장사를 했고 그렇게 마셔대던 술도 어느 정도 절제가 되었고, 자연스레 그녀의 술집에는 가지 않게 되었다.
바람결 소문으로 잘 않되던 술집을 권리금도 없이 팔아 넘기고 잠시 식당을 하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동해 제 1 함대 준위로 제대한 착한 사람과 재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전라도 어딘가로 떠났다는 것이다.
올해 늦은 봄 해맞이길에는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그녀의 전화가 딱 한 번 있었다.
“딸아이 어때요?”
“아주 좋아요. 어떻게 살아요?”
“저..... 잘 살아요.”
“행복하세요”
그녀와의 통화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끔 집에 가기 위해 논골 비탈길을 오르다가 살짝 논골담길 골목길이 보이면, 단발머리 소녀가 생각났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소주가 담긴 양은 사발 들고 폴짝포짝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