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78
9월12일[연중 제2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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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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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6SFj93odvU
[서울대교구 정민하 율리오(사회교정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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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상적 사랑, 참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
너무나 억울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들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피정 센터를 찾은 분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분들이 그런 사연 한 보따리를 안고 오십니다.
그를 떠나 보낸 이후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그분들 바라보며 너무 환하게 웃고 다녀도 안 되겠구나, 너무 행복한 표정 지어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분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를 불시에 떠나보내고 난 후 사는게 사는게 아닌 분들, 차라리 내가 그를 대신해서 먼저 갔으면 하는 마음에, 밥숫가락 뜨는 것조차 송구스런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게 한 그 웬수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요?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복음의 가르침,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을 접할 때 마다 화딱지가 하늘 끝까지 솟구치니 참으로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 국어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 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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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lPU6t_Qb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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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환경이 만듭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이킹은 먹을 것이 없는 춥고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이 더는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약탈자가 된 예입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할까요? 척박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람은 어째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주님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착할 수밖에 없고, 서로 자주 싸우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은 집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머무느냐에 의해 내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을 탈출시킨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원 예물을 받아 성막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전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치하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부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판사는 그 전 해 12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며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2010-8-3, 조선일보 기사 참조]
모 부장판사는 왜 판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그리 비관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심판을 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 환경 안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피오렐로 라 과르디아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제99대 뉴욕시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법률 경력을 쌓았으며 뉴욕에서 판사로도 재직했습니다.
라 과르디아가 뉴욕시의 판사였을 때 한 남자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그 앞에 끌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법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했지만, 상황은 비극적이며 사회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즉시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법정으로 향하여 그에 대한 책임은 뉴욕 모든 시민에게도 있다고 하며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던 그 사람에게 돈을 모아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은 돈은 피고인과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달되었습니다.
왜 같은 위치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심판관의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성전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 사람이 믿고 사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해 창조가 진행되는 때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지만, 재판정은 이제 사랑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에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재판관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예수님만이 성전 중앙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 옆에 세웠습니다. 신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심판관이 아닌 엄마처럼 보이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서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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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금주를 하신 건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79년입니다. 형제 중에 술을 잘못 배운 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금주가 형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저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자식이 사제가 된다는데 아버지로서 성서를 가까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제가 사제서품 받았을 때, 아버지는 저의 서품 성구를 족자에 써 주었습니다. 제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사제인 제가 책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 아버지는 늘 책을 읽으셨습니다. 제게도 책을 가까이 하면 좋겠다는 걸,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헌팅턴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그토록 원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장례미사 강론 중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면서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형을 대하였습니다. 형이 집을 나가면 어머니는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남겨 놓았습니다. 먼 길에 지친 형이, 혹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형이 오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늘 기다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기일을 꼭 챙겼습니다.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연도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본인의 건강보다는 자식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음력이라 생일을 기억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식구들의 생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 못했지만, 어머니는 저의 생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인사이동이 되면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시골 성당의 본당 신부로 갔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부탁을 받고, 3년 동안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사제관 일도 하였고, 예비자 교리도 하였고, 환자 방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영정 사진은 복자회 재속회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미사는 갈 수 없었지만, 추기경님께서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낌없는 사랑을 남겨 주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천상에서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받는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 길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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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와 자비의 실천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갚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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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스스로 복음을 재단할 수는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고, 나쁘게 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와 같은 동물도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인간답지 않습니다.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대로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카 6,35)는 다시 이것도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려면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여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 살아 있다면, 분명 그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과는 삶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전원을 켜면 기계가 돌아가고 끄면 멈추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힘으로만 살고 있는지는 그 행위를 보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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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란,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입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36)
1)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다.”라는 생각을, 또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고정관념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계명들을 주신 분이 아니라,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계명들을 주신 분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셨다면, 신앙생활은 아주 적은 수의 성인 성녀들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소수의 정예 요원들만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루카 10,30)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쪽이었고, 박해를 받는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일입니다.
3)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은 원수 같은 유대인이고,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가 아니었는데도, 또 자기에게 잘해 준 이가 아니었는데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대가’나 보상금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닙니다. 치료를 하느라고 사용한 돈을 돌려 달라고, 또는 갚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돌려받는 것 자체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당장 목숨이 위험하니까 응급조치를 한 것이고, 치료와 간호가 필요하니까 그것을 한 것입니다. 그 일에 무슨 이유나 욕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랑 실천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4) 31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도 있는 ‘황금률’입니다.(마태 7,12) 이 ‘황금률’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일입니다. <“만일에 내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일들을 ‘착한 사마리아인’이 나에게 해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원수 같은 사람인데,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그가 베풀어 준 일들을 보답하거나 보상할 능력이 나에게는 전혀 없는데, 그런데도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응급조치를 해 주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시간과 자기 돈을 들여서 밤새워 나를 간호하고, 나의 치료비와 숙박비를 대신 내주고……. 사랑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기. 내 입장과 내 기준으로 판단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일.>
5)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원수란, 원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같은 계명’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한 일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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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어렵다고,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깊은 신앙심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하겠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복음 말씀의 실천이 어렵다고 합니다. 성급히 단정 지어 말하자면, 원수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이가 내뱉는 몇 마디로 원수라 규정하고, 이웃의 불편한 행동 몇 가지로 ‘웬수’를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옹졸함이 상상의 원수를 매일같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막바지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결기는, 우리가 때로는 타인을 너무나 차갑게 심판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뜻이 다른 것을 두고 ‘틀렸다’ 말하고, 비판이라는 미명 아래 비난을 일삼고서, 그럼에도 나는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낯 뜨거운 언행을 밥 먹듯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위한 것이지 타인의 잘잘못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는 것, 나의 용서로 나의 삶이 사랑으로 풍요로워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애당초 원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원수는 내 마음이 만든 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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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무지렁이의 신앙>
시골 본당 어디나 고령화가 심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일자리가 없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처음 시골 본당에 부임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신자들이 주보도 가져가지 않고 성가책도 없이 멍하니 서서 입당하는 사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글을 모르거나 노쇠하시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소공동체 모임에 가 보아도 성경을 읽을 줄 아시는 분이 열에 한두 분도 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두 번 세 번 읽어드려도 어떤 구절도 다시 되뇌이질 못하십니다. 그래서 올 초부터 소공동체 모임 때에 예화를 들려주고 그와 비슷한 경험들을 나누게 하였더니 훨씬 말문이 쉽게 열렸습니다.
성경도 읽을 줄 모르고 금방 들은 말씀도 기억하기 어려워하지만,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서 기꺼이 희생하고 그러고도 자신을 내세울 줄 전혀 모르는 삶의 모습들이 펼쳐집니다.
한여름 뙤약볕이라도 제초작업 한다고 하면 모자 쓰고 손에 호미 쥐고 성당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일하시다가 일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운 것과 사는 것의 차이를 다시 생각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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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수도 생활을 살아오면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마음에 조금씩 겹겹이 쌓여가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을 말하자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에서 자慈는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고, 비悲는 다른 이의 슬픔을 덜어준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합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부처의 마음을 가리키는 불교의 핵심 덕목입니다. 성경에도 자비라는 표현은 신구약에선 무려 245번이 나올 만큼 빈번하게 나옵니다. 새로운 번역에서는 ‘자애慈愛’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는데 하느님의 사랑, 호의, 인자 등 복합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자비란 어원은 어머니 자궁을 의미하는 라하밈 rahamim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는 곧 자궁을 의미하며, 자궁은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자비는 단지 측은히 여기는 마음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존재의 조건, 상황에 온전히 잠김이며 함께함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고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자비로운 존재가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大慈大悲하시며 同體大悲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같은 자비를 강조하지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자비(=사랑)는 구원을 위한 최고의 실천 윤리이며, 구원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은 두 종교 모두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이 “원수를 사랑하고,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속옷도 벗어주며, 달라는 사람에게 줄 수 있도록”(6,27~30) 자비로워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에게 이처럼 자비를 베푸셨고, 자비를 체험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하고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야 할까요?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리고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속옷도 벗어주어야 합니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내 것을 훔쳐 간 사람에게서 되찾으려 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모든 것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납득할 수도 없거니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한없이 크신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께서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단순하게 “너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비를 실천할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6,35)라고 축복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비 실천은 계산적인 주고받음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비를 베풀어 주셨듯이 우리 또한 아빠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으로 자비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사도 바오로는 일깨워 주시며, 이런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의 효성이며 효도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자비의 실천은 아빠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우리의 자비 실천은 우리의 힘이나 소유를 나누는 것이 아닌 단지 아버지의 자비를 퍼서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닮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살려는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1콜3,12)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자비하신 아빠 하느님처럼 우리 또한 자비로운 존재와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자비로우신 당신을 닮아 저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자비를 살고 싶으니 힘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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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가수 패티킴의 히트곡 ‘그대 없이는 못살아’의 가사 일부입니다. 어렸을 때 그냥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였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너무 부담되고 무서운 내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없어. 나와 함께할 거지? 그러면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일 것 같습니다.
깊이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행복을 책임져 달라는 정말로 대책 없는 말이 아닐까요? 종종 데이트 폭력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까?’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착은 죄가 됩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집착은 추합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은 입으로 사랑을 말할 뿐 집착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헤어지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사랑에 집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짜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랑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를 뛰어넘습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잘못된 사랑인 ‘집착’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은 집착의 모습도, 욕심과 이기심이 담긴 모습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전혀 받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사랑하라고, 혹시 반대의 마음이 들 때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사랑에 가까워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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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드는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사랑을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 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으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갈라2,20)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연장입니다. 해도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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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사랑하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내어주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보듬으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용서하렵니다
사람이기에
쉽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니
하느님처럼
자비로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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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내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그들이 한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 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하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상책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해줍니다. 곧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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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의 평생공부-
“주님,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시편 139,1-2)
교황님의 동향으로 시작하는 요즘 강론이 신납니다. 피곤하거나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88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불가사의 신비입니다. “위대한 마음의 사람(a man of great heart)”이라 격찬을 받은 교황님에게 저는 “사랑의 거인(巨人;Giant)”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주 4개국, 제45차 사목여정에 오른 교황님은 어제 9월11일 마지막 방문국인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홈페이지 소개된 동티모르에서의 기사 내용도 반가웠습니다.
“꿈은 현실화되었다(dream come true)!”
“자유는 타인들을 존경할 선택을 의미한다.”
“나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견한 웃음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은 ‘생명, 희망 그리고 미래’를 생각나게 한다.”
“교황님의 동티모르 방문은 ‘믿음의 축제’였다.”
말그대로 “사랑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문득 떠오른 제목이었습니다. 저절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도 배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2000년도 MBC의 인기드라마 제목이었고 노래도 있습니다. 이때 드라마의 인기 커플 배우는 결혼에 골인하여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평생 사랑 공부는 평생 하느님 공부입니다. 사랑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이요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는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 사랑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끼리끼리 나누는 유유상종의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진짜 사랑은 인간 누구나에게 한결같은 존중과 배려, 연민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설명이 필요없는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사랑의 복음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속마음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표현되는 느낌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솟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은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사랑의 적극적 저항입니다. 악순환을 끊어버림으로 악을 무력화하는 길은 이런 하느님 다운 적극적 사랑뿐이겠습니다. 우리의 원수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 학대하는 자들은 상처받은 사랑, 결핍된 사랑의 불행한 이들일 수도 있고 또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나름대로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할 뿐이며 주님은 이런 힘을 주십니다.
새삼 결코 값싼 사랑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주님 “사랑의 전사”가 되어 온힘을 다해 용감히 실천할 사랑이요, 이렇게 불가능하다 싶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받을 상이 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계속 구체적 사랑의 실천을 명령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몰라서 심판이요 단죄지, 우리가 정말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면 알수록 심판과 단죄는 멈출것이요 끊임없는 사랑의 용서와 나눔이 뒤를 이을 것입니다. 새삼 이런 사랑의 실천에 앞서,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기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은 우리에게 샘솟은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열정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이 더욱 사랑의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는 한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이며 존재이유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이유인 하느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온힘으로 온마음으로 온정신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샘솟는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선물하실 것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저의 길이 굽었는지 살펴보시고, 영원의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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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원수 탓, 불행 탓>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면 정당방위 차원에서 제가 그를 실제로 죽일까? 아니 죽일 수 있을까?
지금 생각은 피하거나 방어는 하겠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 그를 죽이지는 못할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경우 제게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저를 죽이려고 하면 제가 살기 위해 그 아들을 제가 죽일 수 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데 제가 제 아들을?
아들을 살인자 만들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막을지라도 나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고 칼로 찌른 아들 보며 경찰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가라고 현장에서 피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저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인다면 저는 아버지도 아니고 저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들도 원수가 되고 사랑이 있으면 원수도 원수가 아니고 아들이 됩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옛날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지요. 여의도 광장이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차를 광장으로 몰아 그곳에 놀러 왔던 여러 사람을 죽게 했는데 손녀를 잃은 할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그 젊은이를 찾아가 용서해주고, 세례도 주고 마침내 아들로 삼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본래 원수가 있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사랑이 없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고, 사랑이 없으면 없을수록 내게는 원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고,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과 연결하면 사랑 없는 사람이 불행하고 원수도 많은 법입니다.
왜냐면 원수란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에 원수인데 앞서 봤듯이 내게 사랑이 없을 때 그는 원수가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넘치면 원수는 없고 행복합니다. 왼뺨 맞을 때 오른뺨도 맞아줄 수 있는 사람이 뺨 한 대로 원수가 되고 불행해지겠습니까?
한 대도 안 맞으려는 사람 그래서 말 한마디에 존재가 휘청일 정도로 타격이 큰사람이 말 한마디에도 불행해지고 때린 그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 탓, 불행 탓, 너에게 돌리지 않고 나에게 돌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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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하느님의 자비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6,27-38)은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판단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실행하기가 어렵고 힘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너무도 힘듭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빰을 내밀고, 내 겉옷을 가져가는 자에게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내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6,3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실행하기 불가능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절대명령'이기 때문에 꼭 실행해야 합니다. 이제와 영원히 살고 싶으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실행한 모습들, 몸소 삶으로 보여주신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자비'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비가 되셨습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시면서 그들을 품어 안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 매단 죄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가 됩시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자비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누구나 부족합니다. 자주 죄를 짓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돌아가서 이렇게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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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 38)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이다.
감사의
맑은
가을이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소중한
사람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너를 용서하는
것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마음의 되질은
서로가 같다.
미움은 미움으로
증오는 증오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마음을
달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마음을
아는 것이
삶을 아는
것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의 실천
사랑과 용서이다.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요즈음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서 우리
마음은
되살아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님의
마음
용서가 있다.
몸과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주님의
마음뿐이다.
마음을
새롭게
빚어내시는
주님께
단죄와
판단의
되질을
내려놓는다.
사랑과 존중
용서와 감사를
다시 배운다.
외롭고도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있다.
마음의 실천이
용서의 가을이며
사랑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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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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