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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사선악(不思善惡)
- 선도 악도 생각 말라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혜능 스님의 화두는 직설적
불성가리는 가면 제거 강조
선악은 권위에 강요되지만 좋고나쁨은 스스로의 판단
선악 치장한 가면 버리고 맨 얼굴 회복해야 부처님
혜능(慧能) 스님이 혜명(慧明) 상좌가 대유령(大庾嶺)에까지 추적하여 자기 앞에 이른 것을 보고 가사와 발우를 돌 위에 놓고 말했다.
“이것들은 불법을 물려받았다는 징표이니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대가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도록 하라!”
혜명은 그것을 들려고 했으나 산처럼 움직이지 않자 당황하며 두려워했다. 혜명은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지, 가사 때문은 아닙니다. 제발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주십시오.”
혜능 스님이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
혜명은 바로 크게 깨달았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혜명은 깨달았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혜능에게 절을 올리며 물었다.
“방금 하신 비밀스런 말과 뜻 이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으십니까?”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네. 그대가 스스로 자신의 맨얼굴을 비출 수만 있다면, 비밀은 바로 그대에게 있을 것이네.”
혜명은 말했다.
“제가 비록 홍인(弘忍) 대사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 자신의 맨얼굴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마치 사람이 직접 물을 먹으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부터 스님께서는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그대는 이제 홍인 대사를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사이가 된 셈이니, 스스로를 잘 지키시게.”
무문관 23칙 / 불사선악(不思善惡)
* 선과 악’의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가되지만, ‘좋음과 나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외적인 권위에는 종교적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선악이란 관념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기원을 두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고 적응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맨얼굴을 회복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삶의 주인공입니다.
1. 허영은 삶 긍정 못할 때 생겨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 것도, 엄청난 부를 욕망하는 것도, 그리고 학위를 취득하려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허영(虛榮)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주목받고 싶은 애절함일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과정이라면, 수행자는 당연히 허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권력, 지위, 부, 그리고 학위 등에 연연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찰이나 승가 조직에서도 허영을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허영에 빠져 있는 스님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사는 모양새는 사찰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1,400여 년 전 중국 황매산(黃梅山)에서도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났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치열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선종 내부에서 말입니다. 선종의 5조였던 홍인(弘忍, 601~674)이 달마(達磨)에서 시작된 깨달음의 등을 전하려고 할 때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 맙니다. 깨달음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를 홍인은 오랫동안 수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신수(神秀, ?~706)가 아니라 일자무식의 혜능(慧能, 638~713)에게 준 것입니다. 귀족 출신이었던 신수는 지성과 세련됨, 그리고 수제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따르던 스님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신수가 홍인 스님을 이어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이 되는 날, 그들의 지위와 신분도 그에 따라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력 구조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홍인 스님은 황매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땔나무나 나르고 있던 중국 남부 시골출신 혜능을 6조로 승인해버린 겁니다. 아마 대부분의 스님들은 “홍인 스님이 노망이 들었다”고 혀를 끌끌 찼을 겁니다. 이들 중 가장 분노한 것은 출가하기 전에 장군으로 있었던 혜명(慧明)이란 스님이었습니다. 뛰어난 신체를 갖춘 혜명이 신수의 지지자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달아나는 혜능을 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중국 남부에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관문 대유령(大庾嶺)에서 혜명은 혜능을 따라잡는 데 성공합니다. 기력이 딸려서인지 혜능도 더 이상 도망가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2. 선악은 연극배우 가면 같은 것
바로 이 순간 위기를 모면하려는 혜능의 기지가 번쩍입니다. 혜능은 홍인에게서 받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올려놓습니다. 어차피 혜명이 찾고자 하는 것은 6조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일 테니까 말입니다. 혜명은 혜능을 버려두고 가사와 발우를 집어 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가사와 발우는 천근의 무게를 가진 듯 들레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혜명은 황당한 상황에 당혹감과 아울러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홍인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다고 해도, 자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스스로 6조라는 권력을 포기하고 혜명은 혜능에게 가르침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혜능은 혜명에게 화두 하나를 던집니다. 그것이 바로 ‘무문관(無門關)’의 23번째 관문에서 우리가 뚫어야 할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그런지 혜능의 화두는 다른 화두들과는 달리 직설적이고 분명합니다.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 여기서 선종에서 유명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러니까 ‘원래 맨얼굴’이 바로 그것입니다. 맨얼굴이란 개념은 가면, 그러니까 ‘페르소나(persona)’란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 연극배우들이 연기할 때 사용하던 가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면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맨얼굴을 생각할 수도 혹은 이야기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혜능은 혜명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너의 맨얼굴을 직시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혜능은 별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 선종 특유의 가르침,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직지인심’은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뜻이고, ‘견성성불’은 ‘자신의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불성이란 어떤 페르소나도 착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불성도 자신의 마음도 모두 ‘본래면목’, 즉 맨얼굴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맨얼굴을 가리키거나 본다는 것은 페르소나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거나 ‘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직지(直指)’나 ‘견(見)’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두 말은 자신의 마음이나 불성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제거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삶의 주인공 될 때 부처도 가능
앞에서 혜능의 화두가 다른 선사들과 달리 직설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그것은 그가 바로 부처가 되기 위해 우리가 제거해야할 페르소나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페르소나는 바로 선악이란 관념에 다름 아니었던 겁니다. ‘무문관’의 23번째 관문의 이름이 ‘불사선악(不思善惡)’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은 바로 페르소나를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잠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라는 철학자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도 선악 관념이 페르소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지요.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주저 중 하나인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니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과 악’과 ‘좋음과 나쁨’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핵심은 ‘선과 악’의 기준과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가되지만, ‘좋음과 나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외적인 권위에는 종교적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선악이란 관념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기원을 두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고 적응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임에도 어른이라는 이유로 공손하게 혹은 존경한다는 듯이 인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하나 쓰는 셈이지요. 물론 이런 페르소나를 쓰는 것은 그것을 쓰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페르소나를 쓰는 사람은 삶의 당당한 주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권위나 가치평가를 내면화한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심판관처럼 선악 관념이 우리를 지배할 때, 삶의 차원에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우리의 맨얼굴은 가려지게 될 겁니다.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맨얼굴을 회복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삶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니체는 초인(Übermensch)이라고, 혜능은 부처라고 불렀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