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출시작 <스위티>
제인 캠피온은 <피아노>로 널리 알려진 뉴질랜드 감독이다. 캠피온은 뉴질랜드 사람이지만 영화인생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 그의 영화는 페미니즘 시각이 내포된 주제의식과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결합한, 서구 여성영화의 맨 앞줄에 선 수준을 보여준다.
54년 뉴질랜드 와이카내에서 태어난 캠피온은 대학에서 조형예술, 회화, 조각을 전공했으나 인류학으로 전과해 학위를 받고 인류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77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갔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시드니 국제영화제에 놀러갔다가 영화로 진로를 바꿨다. 83년에 캠피온은 단편영화 <과일 껍질 Peel>(1982)로 시드니영화제에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3년 후에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 단편영화부문 대상을 받았다. 기상천외하고 반짝이는 발상을 담은 단편영화들로 주목받은 캠피온은 곧이어 텔레비전 영화로 진출했으며 89년에 첫 장편영화 <스위티 Sweetie>(1989)를 연출했다. <내 책상 위의 천사 An Angel at My Table>(1990)에 이어 세번째로 만든 <피아노 The Piano>(1993)는 칸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며 니콜 키드먼을 출연시킨 할리우드 연출 데뷔작 <여인의 초상>은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는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 여성들은 사회의 무시와 냉대 속에 무능력하다고 손가락질받지만 결국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거나 현실의 돌파구를 찾는다. <스위티>의 주인공 케이는 겁많고 음침한데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미신을 철썩같이 믿는 여자지만 그러나 케이의 미신은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닌 나름의 인생관일 수 있음이 입증된다. <내 책상 위의 천사>의 주인공 자넷 프레임 역시 못생기고 맹하다는 이유로 구박받고 성장하며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고통을 겪기까지 하지만 나중에는 뛰어난 소설가의 자질을 세상에 내보인다. <피아노>의 에이다는 말 못하는 여성이지만 그 침묵은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고 피아노의 세계 속에만 칩거하기 위한 결단의 소산이다. 에이다는 오직 피아노만을 벗하는데 그것은 서구가부장제 사회를 사는 19세기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에이다는 남편의 친구이자 육체적인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베인즈와의 연애를 통해, 그리고 서구문명과 선을 그은 마오리족 원주민의 삶을 주변에서 접하면서 조금씩 사회 속에서 의사소통의 실마리를 찾아가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여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1997) 역시 거짓된 사랑의 환상에 속아 자신의 정체탐색을 포기했던 여인의 자아찾기에 관한 영화로 여성의 정체성 탐색에 관한 캠피온의 일관된 주제적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인 캠피온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여성들의 인생을 인류학적인 관심을 갖고 추적함으로써 희귀한 여성영화의 전통에 질긴 뿌리를 대고 있는 진지한 작품 행보를 밟고 있다. / 영화감독사전, 1999
씨네21 리뷰 12년만에 귀환한 제인 캠피언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
1993년 <피아노>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감독 제인 캠피언은 <피아노>는 물론 <스위티>(1989), <내 책상 위의 천사>(1990), <여인의 초상>(1996), <홀리 스모크>(1999), <인 더컷>(2003), <브라이트 스타>(2009) 등에서 다양한 시대, 다양한 여성들의 몸을 빌려 억압과 폭력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는 무려 12년 만에 장편영화 <파워 오브 도그>를 선보였는데,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파워 오브 도그> 역시 그간 감독이 천착해온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욕망과 정체성이라는 주제의 연장 선상에 놓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미국 작가 토머스 새비지가 1967년에 내놓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인 캠피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 몬태나주의 한 목장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복수극이자 세밀한 심리극이다. 남성성을 찬미하고 동성애를 혐오하며 여성을 하대하고 괴롭히는 카우보이들의 대장이자 동성애자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캠피언은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잔인하고 예리하게 펼쳐놓는다.
1925년 미국 몬태나, 목장을 경영하는 두 형제가 있다. 형인 필 버뱅(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의 리더다. 그는 씻거나 치장하지 않으며, 칼질 몇번으로 수송아지를 거세시키고 (물론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불태울지언정 인디언에게는 가죽을 팔지 않는다. 야만적이고 무례한 캐릭터다. 동생 조지 버뱅크(제시 플레먼스)는 교양이 있으며, 형의 거친 성격을 인내하는 목장의 실질적 경영주다. 필이 눈치를 보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조지다.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이들 형제의 관계에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가 끼어들면서 시작된다. 조지는 미망인 로즈와 결혼하는데, 필은 로즈는 물론이고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는 피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로즈를 향한 필의 괴롭힘은 멈추지 않고, 로즈는 필의 발소리만 들어도 고통받는 지경에 이른다. 방학을 맞아 엄마 집에서 머물게 된 피터는 알코올에 의존한 채 버티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엄마를 구할 계획을 세운다. 모욕을 당하거나 불안하면 휴대용 빗을 꺼내 만지거나 훌라후프를 돌리던 소년은 어느덧 덫을 놓아 토끼를 잡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토끼를 해부하는 소년이 된 것이다. 마침 필의 비밀과 정체성에 관한 필사적 위장을 목격한 뒤로는 필과 피터 사이 힘의 역학 관계도 조정된다. 게이라 놀림받는 피터에게 말 타는 법, 어른이 되는 법,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며 마음을 주기 시작한 필은, 먼 산을 바라보며 남들은 보지 못하는 위협을 제일 먼저 감지하던 남자에서 어느 순간 코앞의 위험을 놓치는 남자가 되고 만다.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라는 제목은 성경의 시편 22장 20절에 나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고 내 소중한 것을 개의 힘(세력)으로부터 구하소서.’ 영화에 등장하는 개의 형상을 한 산세, 그리고 사납고 위험한 동물적 본능 혹은 무리를 포괄하는 말로서, 피터는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소중한 어머니를 지키려 한다.
영화의 배경인 1920년대 서부 역시 흥미로운 방식으로 서사와 결부된다. 기차가 들어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기 시작하던 시대, 구시대 적인 가치와 새로운 시대의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필의 복잡한 캐릭터성은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지만, 시대의 변화와도 연결되어 있다. 카우보이 신발과 캔버스화, 가죽바지와 청바지, 밴조와 그랜드피아노의 간극을 영화는 세세하게 담고 있다. 마초이즘을 제대로 보여주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 <더 로드> <렛미인>의 아역 출신 배우 코디 스밋맥피가 보여주는 예상치 못한 섬뜩함이 인상적이며, 실제 연인 사이인 커스틴 던스트와 제시 플레먼스도 제인 캠피언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영화는 11월17일 극장 개봉 이후 12월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CHECK POINT
로케이션
영화의 배경은 미국 서부 몬태나지만, 실제 촬영은 뉴질랜드 사우스 아일랜드에서 진행됐다. 제인 캠피언은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촬영지를 물색할 생각이었지만, 1920년대를 표현 하기에는 감독의 고향인 뉴질랜드가 더 적합했다고 한다.
촬영감독 아리 웨그너
<파워 오브 도그>는 시시각각 다양한 느낌을 주는 자연 풍광과 그 속의 인물들을 힘 있게 담아내는 영화다. 제인 캠피언은 재능 있는 여성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하기를 바랐고, <레 이디 맥베스> <켈리 갱> <졸라> 등을 촬영한 아리 웨그너 촬영감독에게 카메라를 맡겼다.
음악감독 조니 그린우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이자 <팬텀 스레드> <마스터> <케빈에 대하여> 등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니 그린우드가 <파워 오브 도그>의 음악을 책임진다. 그는 첼로를 밴조처럼 연주해 독특한 음색을 만드는 등 소리로 영화에 입체감을 더했다. 글 이주현 2021-11-24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