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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천민
1.밀라노 축구의 시작
1899년 12월 16일 밀란 풋볼-크리켓 클럽(Milan Foot-Ball and Cricket Club)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지만 밀란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처음 알린건 12월 18일 월요일 가제타 델로 스포츠 신문의 기사에서였다. 첫번째 본부는 밀란시 베르셰가의 Fiaschetteria Toscana에 있었고 단장인 Alfred Ormonde Edwards가 이탈리아 축구협회에 팀을 등록했다. 이렇게 A.C.밀란은 탄생했다. 이탈리아 축구는 당시 제노아와 토리노 지역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A.C.밀란이 생겨나며 축구 중심의 한 축을 롬바르디아 지역의 밀라노로 옮겨오게 된다.
2.팀의 분열과 반역자들(Revels)
- "인테르, 1908년부터 너넨 진짜 코미디야"라는 카드섹션 -
AC밀란은 영국인 에드워드에 의해서 창설되었으며 영국인 선수 허버트 킬핀이 이끄는 팀인 만큼 영국색이 짙었다. 현재의 AC밀란의 엠블럼에 들어가있는 빨간 십자가를 밀라노 시의 상징이 아닌 잉글랜드 국기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밀란 자체가 밀라노의 영국식 이름이다. 영국인 주장 허버트 킬핀은 팀을 8년동안 이끌며 세 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사상 최초의 리그 2연패에 성공한다. 그들은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클럽이 되엇다. 하지만 1908년, 구단주인 에드워즈가 이탈리아와 영국 출신 선수로만 팀을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에 분리주의자들과 스위스 등 타국 출신 구성원들이 팀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국제적인 팀을 만들 것을 천명하면서 인터나치오날레 밀라노(Internazionale Milano)를 창설한다. 현재의 인터 밀란이 탄생하는 시점이었다. 100년 라이벌의 시작이기도 했다.
창단 당시에 밀란 축구-크리켓 클럽은 구두 수선공, 여행사직원, 공장 인부들로 구성된 노동자 계급이었다. 즉 밀란 클럽의 서포터 층은 노동자 계층이었다. 반면 인터나치오날레 밀라노는 국제주의를 표방한 만큼 자본의 투입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곧 부르주아 계층의 클럽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실제로 인테르에는 우익 인사들이 많았다. 당시 부르조아 계층이 많았던 인테르는 밀라노 지방 방언으로 허풍선이를 뜻하는 "Bauscia"라는 별명을 가지게 됐으며 블루칼라(Blue collar) 계급과 이탈리아 남부출신 이민자들 등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받았던 AC밀란은 밀라노 지방 방언으로 드라이버공구를 의미하는 "Casciavit"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즉 우파에 좀 더 가깝던 팀이 인테르였으며 노동자 계급과 좌파 서포터들이 많았던 팀이 AC밀란이였다. 이는 1985년까지 이어지나 1986년에 이르러 큰 변화가 생긴다.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우파 보수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흔들리던 AC밀란을 맡게 되었고 중도 좌파인 마시모 모라티 회장이 인테르 구단주가 되면서 둘의 입장이 변하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A.C.밀란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매스컴 영향력을 이용해“가자 밀란! 전진하라 이탈리아! (Forza Milan! Forza Italia!)"이란 구호를 외치며 A.C.밀란을 홍보하고 많은 돈을 들여 선수들을 영입하며 이탈리아 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렇게 밀란 제너레이션이라는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팀을 지지하던 노동자 계급과 젊은 층이 대거 A.C밀란을 빠져나가 인터 밀란으로 가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밀란을 전성기로 이끌었지만 밀란의 진보세력층을 실망시켰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진보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은 베를루스코니의 A.C밀란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에게 A.C 밀란은 애증의 존재가 되었다.
3. 두 팀의 상징들
AC밀란의 유니폼이 확정된 것은 1900년 1월 15일이다. 허버트 킬핀은 열정과 강력함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적들에게 공포를 주는 검은색을 합쳐 지금의 'Rossoneri'(검정빨강) 유니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팀의 상징인 빨간 악마 Diavolo(Diablo)가 되었다. 인테르의 경우는 파란색과 검은색이 합쳐진 'Nerazzurri'(검정파랑)이고 그들의 상징은 큰 뱀이다.
- 밀란에서 창립된 자동차 회사 ALFA ROBEO 사의 엠블럼에 두 상징이 함께 들어가있다. -
밀란의 엠블렘에도 들어가 있는 빨간 십자가는 밀라노 시의 오랜 상징이다. 인테르의 상징인 뱀은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 중엽까지 밀라노공국을 이끌던 비스콘티 가문의 상징이였다. 이는 비스콘티가의 초대 선조가 용에게 잡아 먹힐 뻔했던 소년을 구해주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 실제 비스콘티가는 십자군 전쟁 당시 방패에 뱀을 문양으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인테르의 애칭은 Il Biscione(큰 풀뱀)이다.
양 팀은 서포터스들도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마주보며 열광적인 응원을 하는데 'Rossoneri'의 서포터조직인 Fassa del Leoni, Commandos Tigre, Brigate Rossonere는 산 시로 스타디움의 남쪽 골대 뒤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Curva Sud'라 불리며, 북쪽 골대 뒤에 위치하는 'Nerazzurri'의 서포터조직 Forever Ultras Inter, Irrudicibili 등은 'Curva Nord' 라 불린다
4. 양 팀의 시련
초반 밀라노를 축구 중심으로 만들며 성공했던 AC밀란은 인터밀란의 창단과 함께 주축선수들이 먼저 빠져나가며 먼저 시련을 겪게 된다. 리그 2연패이던 AC밀란은 바닥으로 추락한 반면 인테르는 1910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인테르가 4번의 리그 우승을 하는 동안 AC밀란은 암흑기였으며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까지는 무려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재기를 꿈꾸던 AC밀란과 승승장구하던 인테르 밀란에게 똑같은 시련이 찾아온다.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등장이였던 것이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정권아래 이탈리아 축구클럽들은 정권에게 이탈리아계 선수들만 기용할 것을 강요받았다. 선수보강에 힘쓰던 AC밀란에게는 다시 주저앉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제주의를 표방한 인테르 역시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이로 인해 AC밀란에서는 영국적인 색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팀 이름 역시 A.C.Milan에서 A.C. Milano(Associazione Calcio Milano)로 바뀐다. 인테르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했는데 인테르의 경우 "국제적인"이라는 의미가 파시즘과 정면으로 대치된다고 하여 강제로 암브로시아 밀라노(Ambrosiana Milano)로 클럽 이름이 바뀌게 된다. 게다가 팀의 상징이었던 네라주리 유니폼 역시 밀라노 시의 상징인 빨간 십자가가 들어간 유니폼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인테르의 팬들은 "Forza Inter", "Forza Nerazzuri"를 외치며 저항하였다. 1943년에 이르러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A.C. 밀라노는 현재의 명칭인 A.C. 밀란으로, 그리고 암브로시아나 밀라노 역시 현재의 명칭인 인터나치오날레 밀란(줄여서 인터 밀란)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결국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A.C.밀란이나 인터 밀란 모두에게 시련의 시기였으며 나아가 모든 이탈리아 클럽에게 시련이었다.
5. 한 지붕 두 가족
밀라노를 연고로 하는 두 팀은 한 경기장을 홈으로 나눠쓰고 있는데 바로 산 시로(쥬세페 메아차)경기장이다. 1926년 밀란의 구단주였던 피에로 피렐리에 의해 지어진 산 시로 구장은 원래 AC밀란만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경영, 정책상의 이유로 1935년 밀라노 시에 팔면서 시의 소유가 된다. 당시 인테르는 시립중앙경기장을 쓰고 있었으며 1947년이 되어서야 산 시로 구장을 함께 쓰게 됐다.
1980년이 되어 밀라노 시는 이 시립경기장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하는데 AC밀란과 인터밀란에서 뛰었던 쥬세페 메아차의 이름을 따서 쥬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으로 부르기로 결정한다. 사실 쥬세페 메아차는 인테르의 영웅이지 AC밀란의 영웅은 아니다. 쥬세페 메아차는 1927-1940까지 뛰며 348경기에서 247골을 넣었고 1934년, 1938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시킨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전설이지만 AC밀란에서는 1940-1942년까지 뛰며 37경기에서 9골을 넣었을 뿐이다. (오히려 이듬해 쥬세페 메아차는 유벤투스에서 27경기 10골을 넣었다.) 밀라노에서 출생하여 이탈리아를 월드컵에서 두 번이나 우승시킨 선수의 서거 1주년을 기념하려는 밀라노 시 당국의 입장으로 인해 산 시로 구장은 공식적으로 쥬세페 메아차 구장이 된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시로 경기장으로 부르고 있으며 밀란팬들 역시 결코 쥬세페 메아차 구장이라 하지 않는다.
6. 밀라노 더비 - Derby della Madonnina
밀란과 인테르가 벌이는 밀라노더비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더비중에 하나이며 오랜 역사가 있다. 일명 Derby della Madonnina라고 불리운다. 밀라노의 명물 중 하나인 밀라노대성당[Duomo di Milano]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상을 Madonnina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따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이고 100년간의 라이벌관계의 팀이지만 실제로 다른 더비들만큼 과격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평화롭다. 그 이유는 오랜 역사를 가진 팀들이고 한 뿌리에서 나온 팀인 만큼 양 팀을 모두 좋아하는 팬들이 많으며 한 가족이 서로 다른 밀란 팀을 응원하는 일도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AC밀란, 엄마는 인터 밀란, 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리적인 충돌이 없기로 유명하다. 또 두 팀이 서로 경쟁하고 지역 라이벌인 것은 맞지만 두 팀 팬이 가장 싫어하는 팀은 서로가 아니고 바로 유벤투스이다. 오랜 역사의 유벤투스는 A.C밀란과 인터밀란과 경쟁구도를 형성하며 그들에게 공통의 적이 되었다. 이렇게 그들은 미묘한 형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물리적인 충돌이 없고 폭력적이지 않던 두 팀 서포터스간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2005년 4월 13일에 펼쳐진 A.C. 밀란과 인테르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덧붙여 이 경기는 더비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한 말디니의 50번째 더비 경기이기도 햇다. 세브첸코의 선제골로 1:0으로 밀란이 앞서가던 후반,인테르의 성난 팬들이 병과 폭죽 등을 그라운드에 던졌으며 이를 경기장 밖으로 치우려면 A.C.밀란의 골키퍼 디다에게 다시 인테르의 팬들은 폭죽을 던졌고 이것이 어깨를 강타하여 쓰러졌고 경기장은 폭염으로 뒤덮힌다. 결국 경기는 후반 74분에 중단되어 30분간 지연되었으며 타박상과 1도 화상을 입은 디다는 경기를 계속 뛸 수 없었다. 결국 A.C밀란이 1,2차전 합계 5:0으로 승리하여 4강에 올랐지만 인테르는 유럽축구협회 역사상 가장 많은 ?200,000 (£132,000)의 벌금이 내려졌으며 아울러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첫 4게임을 무관중 경기로 치르게 되었다.
이렇게 큰 폭력사태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A.C밀란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번번히 인터밀란을 좌절시켰던 이유도 있지만 마시모 모라티 회장이 97/98 시즌 UEFA컵 우승 외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데 대한 인테르 팬들이 불만이 이 경기에서 폭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다 최근 이탈리아 축구계는 울트라(Ultra)라는 과격 축구 서포터스 단체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인테르 밀란 역시 이러한 조직이 확산되고 있다. 이 울트라라는 조직은 잉글랜드의 훌리건과 비슷하지만 훌리건에 비해 훨씬 더 심한 정치적인 성향을 띄고 있고 우파, 좌파로 나누어 격렬한 대립을 한다. 애초에 울트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생겨난 조직이었고 이런 단체가 경기장에서 반체제 시위와 함께응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울트라 문화가 자리잡은 것이다. 최초의 울트라는 A.C.밀란 서포터스인 Fassa del Leoni인데 이후 울트라들은 경기장밖에서도 파업과 시위를 주도하는 정치적 색깔을 강하게 보인다. 이러한 조직이 확산되면서 비교적 평화롭던 두 팀의 더비 매치가 과격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테르의 경우 울트라 조직이 급격히 세를 늘리면서 극성팬이 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포터스 간의 분쟁이나 폭력사태는 심하지 않은 편인데 대신 두 팀은 응원섹션으로 서로를 조롱하며 맞부딪힌다. 이 응원섹션 또한 하나의 볼거리라고 하겠다. 사실 예전의 양팀 응원섹션은 상대방에 대한 조롱보다는 자기 팀의 역사를 상징하는 문구나 밀라노, 이탈리아 국기가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따라서 인터밀란의 응원섹션에서도 밀라노의 상징이자 A.C.밀란 엠블럼에 들어가있는 빨간 십자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 울트라가 주축이 된 인테르 서포터스들은 팀의 상징인 뱀이 빨간 십자가를 잡아먹는 응원섹션이나 밀란을 원주민으로 표현해 점령하는 응원 섹션을 보여준다. 이에 A.C.밀란의 서포터스는 뭉크의 절규를 카드 섹션으로 패러디하면서 "인테르 너네는 미쳐간다"(Interista Diventi Pazzo!)라는 문구를 집어넣기도 하고 같은 제목의 응원가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팀의 상징인 디아블로가 인테르의 상징인 풀 뱀을 잡아죽이는 카드섹션을 보여주며 대응한다. 이야기했다시피 빨간 십자가나 뱀이나 모두 밀라노의 오랜 상징인데 두 팀이 각각의 밀라노 상징을 흠집내며 상대를 조롱하는 웃지못할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응원섹션의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해서 밀라노 더비에서 빠질 수 없는 구경거리 중에 하나이다.
또 최근 들어서 A.C 밀란과 인터밀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부분은 축구황제 호나우도의 A.C 밀란으로의 이적이었다. 인테르에서 전성기를 보낸 호나우도는 레알에서 A.C 밀란으로 2007년 이적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인테르의 많은 팬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당시 인테르 역시 호나우도를 이적시키려는 행보를 보였는데 결국 지역 라이벌팀으로 그가 이적하면서 팬들은 더 큰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큰 점수 차이가 났던 경기는 1918년 3월 3일 밀란이 인테르를 8-1로 꺾었던 경기였다. 그리고 근래 들어 인상 깊었던(AC밀란팬의 입장에서) 경기는 00/01시즌의 더비였는데 밀란은 리그 6위에 머물렀지만 인테르와의 밀라노 더비에서 무려 6:0이라는 스코어로 인테르를 꺾는다. 이 경기에서 세르징요(1골 3어시스트)는 점수 짜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언론들로부터 9.5의 평점을 받고 당시 인테르의 간판 스트라이커던 비에리는 참혹한 경기 결과에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만다. 가장 최근 경기로는 이적한 호나우지뉴가 결승골을 넣으며 1:0으로 승리한 2008년 9월 28일 경기이다. 이 경기의 승리로 A.C밀란은 더비 3연패를 끊었으며 통산 267번째로 열린 밀라노 더비서 A.C 밀란은 105승 72무 90패를 기록했다. 리그 상대 전적 역시 69승 61무 68패로 A.C 밀란이 근소하게 앞서게 되었지만 둘의 대결은 항상 큰 점수 차이가 나지 않을만큼 박진감이 넘치는 경기이다.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너무도 다른 두 팀, A.C.밀란과 인터 밀란. 정치적, 이념적인 갈등은 접어두고 축구계의 오랜 맞수로 서로 경쟁하며 세계적인 명문팀으로 계속 남아있어주었으면 좋겠다. 좌파 축구, 우파 축구가 어디 있겠는가. 옛말에 최고의 맞수는 친구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했다. 두 팀은 서로가 있었기에 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경쟁심으로 강팀의 길을 함께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처:http://blog.naver.com/monynu/50058965644
첫댓글 솁첸코 밀란으로 언제 복귀했나요???
예전에요 복귀햇는데 다시 갔음 이거 예전글
중립적으로 쓰셨다면 더 좋았을텐데
저 출처 블로그의 주인분이 밀란 광팬이세요
그래도 길열어주는모습은 훈훈하네
아 역사적인글 좋다 ㅋㅋ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정말 재밌게 정독했습니다~ 근데 두팀다 상징이 무섭고 그로테스크하네요 디아블로에 뱀에...유벤투스 당나귀는 참 귀여운데 ㅋㅋ인테르나찌오날레가 국제적이라는 의미인것도 첨 알았고 이렇게 정치적 색깔이 강하다는 점도 처음 알았네요 ㅋㅋ계속 사이가 좋았으면 참 좋았을텐데.
얼룩말아닌가요 유베는ㅋㅋ
포르자 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