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강록간보’ 등 조선후기 유교책판 61점 美서 환수
호계서원 간행 인쇄목판 처음 찾아
상은집-유정일집 목판도 함께 발견
“세계유산 등재될 만큼 중요한 가치”
한국국학진흥원이 최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국내로 들여와 21일 공개한 조선 후기 인쇄목판 61점. 이 중 59점은 국내에 책으로만 전해져 오다 이번 문화재 환수로 목판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주서(朱書·주희의 서간문)를 읽는 데 도움 되는 것이 마치 길을 인도하며 횃불을 밝혀 준 것처럼 편리하다.”
조선시대 서책 ‘주서강록간보’에 실린,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1130∼1200)의 편지를 해석한 퇴계 이황(1501∼1570)의 주석에 대해 그의 제자들이 내놓은 평가다. 주서강록간보는 이황의 학술적 연구를 제자들이 정리한 ‘주자서절요강록’을 경북 안동 출신 학자인 이재(1687∼1730)가 다시 한번 수정, 증보한 서책이다. 안동에 있는 호계서원에서 6권 3책으로 간행됐다.
18세기 조선 후기 지성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 주서강록간보의 인쇄목판 일부가 최근 고국으로 돌아왔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주서강록간보를 포함해 조선 후기 안동 등 영남지역에서 판각됐던 ‘유교책판’ 61점을 미국에서 환수했다”고 21일 밝혔다. 주서강록간보는 지금까지 책으로만 전해져 내려왔고, 현존하는 인쇄목판을 찾은 건 처음이다.
이번에 되찾은 인쇄목판엔 구체적 제작연도도 남아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목판에는 이재의 외손자인 문신 이상정(李象靖)이 남긴 “교정하는 일이 먼지를 쓰는 것과 같아 보면 볼수록 생겨나지만 대체로 우리 힘을 다했다”는 글 뒤에 ‘을사년 7월 안동 호계서원 간행’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을사년 7월은 정조 9년인 1785년을 일컫는다.
이번에 고국으로 돌아온 책판은 주서강록간보 27점을 포함해 모두 4종. 1916년 발간된 박사규(1826∼1899)의 시문집인 ‘상은집’ 책판 20점과 임진왜란 의병장 최응사(1520∼1612)의 시문집인 ‘유정일집’(1915년) 책판 12점, 강헌규(1797∼1860)의 시문집인 ‘농려집’(1895년) 책판 2점이다.
주서강록간보 외에 상은집과 유정일집의 인쇄목판이 발견된 것도 처음이다. 농려집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6만4226점)에 포함돼 있는 중요한 사료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기획처장은 “문집 간행은 목판 제작 등 막대한 물력이 소모돼 명망 있는 가문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설명했다.
환수 과정에서 자문을 맡아 해당 목판들의 학술적 가치를 살펴본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교수는 “유교책판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며 “기록을 통해 후대에 학문적 성과를 전하려 했던 조선 특유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 인쇄목판들은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미국인 프랭크 윌리엄 존슨 씨가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근무했던 그는 자주 한국을 방문해 해당 목판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재를 수집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10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존슨 씨 자택에 가서 직접 목판의 상태를 점검한 이남옥 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팀장은 “유물의 출처와 가치를 몰랐던 유족들이 8월에 처분하려고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렸다”며 “미 클리블랜드미술관의 임수아 큐레이터가 이를 발견한 뒤 알려줘 환수를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환수한 유교책판 61점은 목판 전용 수장고인 ‘장판각’에서 보존 관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훈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