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원제 : Daddy Long Legs
1955년 미국영화
감독 : 진 네굴레스코
원작 : 진 웹스터
출연 : 프레드 아스테어, 레슬리 캐론, 테리 무어
델마 리터, 프레드 클락, 샬롯 오스틴
래리 키팅, 켈리 브라운
'키다리 아저씨'는 1912년 진 웹스터 라는 작가가 발표한 소설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주디 라는 소녀가 익명의 독지가에게 후원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여 4년을 마치며 사랑을 이루는 그야말로 판타지 동화같은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아동소설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특징은 전체가 서간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드러나는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정체, 그것도 일종의 반전이랄 수 있습니다. 익명의 후원자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디는 그의 모습을 못 봤지만, 얼핏 후원 때문에 찾아온 날 얼핏 보게 된 그의 실루엣의 긴 다리 때문입니다. 대학생활 4년 내내 단 한번도 만날 수 없었고 편지만 보냈던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끝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남모르게 후원하거나 도움을 주는 자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이후 작가가 속편인 '키다리 아저씨 그 후 이야기'도 펴냈는데 속편은 주디가 아닌 주디의 친구 샐리가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속편도 우리나라에 출판되었지만 저는 속편은 읽지 못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1919년 메리 픽포드 주연의 무성영화가 최초였고, 1931년 자넷 게이너 주연으로도 나왔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는 1955년 진 네굴레스코 감독의 프레드 아스테어, 레슬리 캐론 주연의 뮤지컬 버전 영화입니다. 오래전 이 영화를 처음 접할 때 보기도 전에 상당한 실망을 하였습니다.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지요. 주디 역의 레슬리 캐론이야 뭐 특별히 불만이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프레드 아스테어입니다. 그는 30-40년대 상당한 명배우였지만 일단 키다리가 아닙니다. 170대 중반 정도의 키를 가진 그가 키다리라뇨? 물론 우리나라에서 '키다리 아저씨'로 번역한 것이지 실제 'Daddy Long Legs' 는 장님 거미를 뜻하는 것으로 장님 거미는 몸통에 비해서 유난히 다리가 긴 거미입니다. 즉 '다리긴 아저씨'라는 의미지요. 키가 크지 않은 프레드 아스테어에 대한 실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더 큰 문제로 생각된것은 그의 나이입니다. 1931년생으로 당시 24세였던 레슬리 캐론에 비해서 1899년생 프레드 아스테어는 무려 56세, 둘의 실제 나이 차이만 32살입니다. 소설에 묘사된 저비스 팬들튼이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이었는데 키가 작고 늙수그레한 프레드 아스테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었어도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 처럼 미중년의 배우라면야 가능하겠지만 프레드 아스테어는 30대 시절에도 비교적 노안배우였습니다. 도저히 소설에서 느꼈던 알콩달콩한 느낌의 로맨스가 프레드 아스테어 라는 배우로는 연상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면 왜 레슬리 캐론과 프레드 아스테어를 캐스팅했는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두 배우의 캐스팅 때문에 스토리를 많이 바꾼 부분도 있지만 이 영화는 거창한 '안무영화'입니다. 영화내내 스토리보다는 거대하고 화려한 세트에서 펼쳐지는 무용이 주된 특징이고, 그런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스토리와 연관이 없는 상상속 장면이 아주 길게 펼쳐집니다. 특히 후반부 대사없이 진행되는 세트안무는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로 발레로 다져진 레슬리 캐론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파리의 아메리카인'과 마찬가지로 레슬리 캐론을 위한 거대한 무대가 여러 세트 제작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메인 스토리와 관계없이 이런 낭비를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프레드 아스테어의 탭댄스, 레슬리 캐론의 다채로운 안무, 영화는 수시로 두 사람의 춤 장면을 이곳저곳에 삽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후반부 거대한 세트속에서 상상속의 춤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메인 스토리는 크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소설의 내용을 다 관객들이 알고 있을거라는 가정하에 만들었고, 이미 두 차레나 영화화 된 작품이니 만큼 반복이라는 느낌 보다는 거대한 뮤지컬로서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1953년 시네마스코프 시대가 열리고 2년뒤에 만들어진 영화로 새롭게 시작된 2.35 : 1 비율의 대형화면을 십분 활용하며 마치 '이제 우리 시대가 열렸다'라는 선언처럼 폭넓게 늘어난 화면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넓어진 무대는 레슬리 캐론과 프레드 아스테어의 화려한 안무가 펼쳐지기 최적화된 공간이었지요. 즉 원작보다는 그 두 배우의 맞춤형 영화입니다.
레슬리 캐론이 프랑스 출신이다 보니 설정도 소설과 다르게 바꾸었습니다. 수십개 회사의 대주주인 대재벌 저비스 팬들튼(프레드 아스테어)이 프랑스에 갔다가 전화를 쓰기 위해서 들른 보육원, 거기서 아이들을 매우 영리하게 지도하는 줄리 앙드레(레슬리 캐론)를 보게 되고 즉흥적인 마음으로 그녀를 후원하게 됩니다. 부모도 친척도 없이 자란 줄리는 하루아침에 미국 대학에 보내지고 저비스가 보내준 용돈과 옷으로 신나는 대학생활을 합니다. 즉 소설과 달리 프랑스 소녀를 데려온 것이고 마지막 편지까지 후원자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저비스라는 사업가가 한 소녀를 몰래 후원한다는 것을 관객에게 밝히고 시작합니다. 학교 친구의 삼촌이라는 설정은 소설과 동일한데 그건 줄리와 저비스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죠.
저비스와 줄리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합니다. 파티에서 만나 소개받고 춤 추고 대화를 하고, 그리고 고급 호텔로 초대되어 뉴욕의 밤을 즐기는...이 부분에서도 로맨스의 전개 보다는 화려한 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영화는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두 배우의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판을 깔고 있습니다. 유명한 춤꾼 프레드 아스테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이지요.
주연급 배우인 테리 무어가 저비스의 조카인 린다로 출연하는데 배우의 지명도에 비해서 너무 단역에 가까운 것이 아쉬웠습니다. '유인원 조 영' '사랑하는 시바여 돌아오라' '페이톤 플레이스' '카이바 결사대' 등에서의 깜찍한 모습을 감안하면 테리 무어가 주인공 소녀를 연기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너무 비중이 약했습니다. 레슬리 캐론은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처럼 스크린을 누비고 있고, 발레로 다져진 솜씨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드 차리스를 대신해서 '파리의 아메리카인'에 캐스팅된 행운으로 인하여 떠오른 레슬리 캐론은 이후 이렇게 안무 뮤지컬의 대표적인 배우로 확실히 자리잡은 것입니다. 프레드 아스테어는 탭댄스의 대가로서, 30년대 진저 로저스와 콤비를 이룬 댄스 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다만 전형적인 계란형의 얼굴인 그는 50대 중년이면서도 여전히 호리호리한 몸을 잘 유지하긴 했지만 외모는 족히 65세는 되어 보이는, 오히려 나이보다 훨씬 늙수그레한 모습이었습니다. 막내딸처럼 보이는 여배우와의 로맨스가 요즘 시선으로 볼때는 매우 어색해 보입니다.
춤은 화려했고, 그 춤을 추기 위한 배경 무대는 제작비를 아까지 않고 쏟아부어 엄청 화려했지만 내용의 설정이나 원작과의 연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노력으로 인한 성취라기 보다 어느날 즉흥적인 떼부자 독지가를 만나서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어 부와 사랑을 이룬다는 단순한 설정이 그리 감동적이지도 않고요. 책에서 저비스와 벌이는 줄다리기 같은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으니 원작의 묘미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입니다. 다만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맞이하여 칼라 대형화면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 뮤지컬 영화입니다. 볼거리는 풍부, 내용은 평범, 그래서 이 영화는 동시대 다른 유명 뮤지컬들에 비해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춤의 달인 두 배우의 멋진 무대를 감상하기는 좋은 영화입니다.
ps1 : 소설에서는 주디와 저비스의 나이차이가 14살로 설정되었습니다.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진 순간은 23세 처녀와 37세 청년의 결합이었지요. 영화에서는 실제 나이 기준으로 14살 차이에서 32살 차이가 된 것이죠. 18세 소녀가 어느날 하루아침에 모든 걸 다 가진 행운의 신데렐라가 되는데 남자까지 젊고 멋지다면 더욱 불공평할 수 있지요.
ps2 : 뮤지컬 버전이 아니었다면 당시 시대에 저비스 역으로 적절했을 배우는 그레고리 펙이나 제임스 스튜어트였을 것입니다. 둘 다 훤칠한 키에 상냥한 신사로 어울리지요. 제임스 스튜어트는 조금 나이가 많았지만 프레드 아스테어 정도는 아니니까요.
ps3 : 작기 진 웹스터는 7년이나 기다려서 이루어낸 사랑에도 불구하고 예쁜 딸을 낳고 1년만에 불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삶을 살았습니다. 진 웹스터는 마크 트웨인의 출판 동업자의 딸이었는데 어머니는 마크 트웨인의 조카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문학과 연관된 집안이었지요.
[출처] 키다리 아저씨(Daddy Long Legs, 55년) 유명 소설의 뮤지컬 버전|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