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음악 세계밀리언 셀러가 된 吐血의 노래「가수는 많되 스타는 없다」이 한마디로 표현돼오던 가요계의 스타부재현상을 깨뜨리고 마치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 神話를 창조하는 새로운 수퍼 스타가 80년 초반을 넘기며 태어났다.가요계가 입을 모아 수군대며 그 히트의 위력에 숨을 죽이는「창밖의 여자」「단발머리」의 주인공인 1m 65㎝, 55㎏ 단신의 (趙容弼 33)이 그 장본인이다.이 음반은 테이프 (카세트 및 카트리지를 포함 국내 공식적 판매집계 밀리언 셀러(1백만 장 판매)를 기록한 최초의 가요앨범이라는 점에서 음반가에서도 놀라고 있다.과연 조용필은 어떠한 가수며, 어떻게 노래해왔으며, 사생활은 어떠할까? 1981년에 본인의 입을 통해 들었던 고백적 기록을 발표한다.가요계의 히트는 흔히 음반 판매수자라는 수학적 계수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조군은 가수로서 자신의 노래의 히트를 어떤 형식으로 느끼고 확인하는지?- 「창밖의 여자」의 경우는 50일간의 미국 공연에서 실감했어요. 지난 80년 7월9일 뉴욕 카네기홀에선 3천 명의 팬들이 운집했는데 저는 창밖의 여자가 신곡인 관계로 레퍼터리에서 제외시키려 하기까지 했어요. 마음을 바꾸고 여러분이 잘모를 신곡을 불러보겠다며 곡명을 소개하자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오는 거였어요. 어느 사이 美國 교포들도 멜로디와 가사를 외우고 있었어요.국내에서의 히트는 귀국 후에 실감했지요. 지난 7월 31일 귀국하는 날 TBC 젊은이가요제가 열리는 장충체육관 무대에 섰는데 팬들의 열광이 마치 외국 영화에서 보던 것 같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지난 8월 12일 숭의음악당에서 있던 TBC FM 팝 콘서트에선 공연이 끝난 뒤에 공연장을 빠져나오기가 어려웠어요. 여대생 팬들이 차를 둘러싸고 놔주질 않는거예요.주말의 제 아파트 앞도 팬들이 몰려서 휴식하기가 어려워요. 가수로서 히트란 이렇게 행동의 제약을 받는거구나 라고 느겨집니다.美州공연으로 한국을 비운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히트가 되었다면 아이로니컬한데 그 히트의 원인을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 노래도 노래지만 가수란 자칫 인기의 와중에서 무대공연이다, 술집출연이다, 아니면 TV 방송이다 해서, 팬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질 정도로 1백% 開墾되다 못해 황폐해질 정도의 過剩 노출되기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출국 중 라디오, 레코드팬들이 사랑해 주었고 반면 브라운관을 통한 과잉개발활동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봅미다. TV 브라운관이 얼마나 많은 가수들을 친절하게 대해주다가 몰락을 가져다 주었는지 팬들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76년도의 히트곡「돌아와요 釜山港에」시절보다, 돌아온 조용필의 音幅 창법은 훨씬 넓어진 것 같아요. 假聲·高音에서 특히 低音의 濁聲이 인상적인데, 이같은 일련의 발전에 비결이 있다면?- 저는 노래보다 악기 연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어요. 어려서는 바이얼린, 트럼피트 등을 좋아하다 고교시절에 기타를 시작했죠. 벤춰즈, 비틀즈 등의 연주를 듣고는 혼자 코드를 만지며 독학을 한셈이죠. 노래는 69년부터 그룹에서 시작했고, 71년부터 비로소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노래다운 노래를 알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이 히트한 뒤 제 활동이 규제된 77년 5월부터였어요.많은 대마초 연예인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을 때 저는 지난 3년 7개월간 自省 속에 한가닥 희망에 인생을 걸고, 그야마로 피의 성대 연마를 포함한 음악공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피의 성대 연마란 구체적으로?- 和聲學, 작편곡 공부를 비롯해 성대연구에 가장 큰 심혈을 기울였어요. 이비인후과의 두부 단면도(頭部 斷面圖)를 구해다가 성대화 후두를 앨토 색소와 테너 색소의 마우드피스와 비교해가며, 목의 떨판과 음향의 구조를 연구했어요. 판소리 등 국악 레코드, 그리고 팝 싱어 로드 스튜어트의 레코드를 들으며 소리의 변화를 연구했죠. 특히 로드 스튜어트는 노래에선 진한 탁성이면서 인터뷰 중엔 고음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죠.양동이에 물과 소금을 준비하고, 피와 눈물, 그리고 기침과 가래를 토하며 목 떨판의 실험을 반복했어요. 몇 년 동안 이런 실험과 독학을 반복하는 가운데 이젠 가성과 진성, 탁성을 구사하게 되었죠. 따라서 목이 쉬어도 청음으로 노래하게 되었고 목이 쉬지 않고도 쉰 소리로 노래할 수 있게 되었죠. 한오백년 대전블루스의 탁성은 사실 이런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70년대 중반 대마초 연예인 규제의 시련을 딛고 재기한 가수 주의 하나로 최근 사랑과 平和의 구속으로 재연된 연예인의 환각제 흡연사범에 대한 솔직한 느낌은?- 한마디로 너무도 철없는 짓을 다시 저지른 그들에게 경악을 금할 수 없어요. 75년 12월 대마초 연예인 규제로 활동이 금지됐던 연예인들의 대부분은 환각제 흡연의 범죄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외래문화의 찌꺼기를 순전히 호기심에서 한 두 번 피워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에요.피나는 노력없이 음악을 마약의 힘으로 창조해야 한다면, 그 음악은 음악으로서의 진가를 잃는 거로 볼 수 밖에 없어요.사랑과 평화의 동료 연예인들이 하루빨리 새 사람이 돼서 돌아오기를 바랄뿐입니다.자신의 음악정 섭렵과정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고교(서울 京東高)를 졸업한 뒤 컨트리 & 웨스턴 음악을 전공하는 C & W 그룹 애트킨즈(Atkins)를 조직하여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했어요. 그러나 당시에 제임즈 브라운, 윌슨 페케트의 흑인 가수들과 포 시즌즈, 비틀즈 등 백인 그룹에 심취해 소울음악으로 전향했지요.이때가 70년이었는데 당시 어느 클럽에서 노래를 하던 중, 손님이 찾아왔어요. 한때 申重鉉씨의 그룹에서 드럼을 담당하던 金大煥씨죠. 김씨는 저의 노래인「나를 인도해 주세요」(Lead Me On)를 지나는 길에 듣고, 오리지널 음반으로 착각했다는 거였어요. 김씨는 저와 김씨 자신 그리고 이진(현KBS 제2라디오 DJ)등과 4인조를 조직하자고 약속하고 준비했지만 李眞씨의 사정으로 金트리오란 3인조로 출발했죠. 저는 기타와 베이스를 치며 본격적인 노래를 시작했어요. 애드 포의 서정길씨, 지금은 불교조각가로 연예계를 떠난 김대환씨, 25時의 조갑출씨 등은 모두 저를 도와준 잊을 수 없는 선배들이에요. 74년 그림자를 조직했고, 대마초가수 해금과 함께 그림자를 위대한 탄생으로 개명했어요. 현재는 그룹을 해산시키고 노래와 작 편곡에만 전념 중입니다.가장 친한 선배나 친구들은?- 제가 연예활동을 중단하고 있을 때 후원해 준 축구선수 李會澤씨는 의형이나 다름없고, 친구는 TV탤런트 柳將鉉, 후배론 복서 朴贊希 등을 꼽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