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정신적 파탄의 출발이다. 죽는 순간까지 부동산 같은 것은 소유하지 말자, 이런 개똥철학을 십여 년 이상 만지작거려온 내가 결국은 집을 한 채 사기로 했다. 도시생활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와 비어 있는 집을 하나 빌려 수리해서 육 년여를 살았는데, 그 비었던 집의 주인이 이제 비어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한 까닭이다.
빈 집을 수리하는 데 육백여만원이 들었는데, 그 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도 무던히 들었다. 시골에서 육백 만원이면 <내 집>을 사고도 남는데 <남의 집>에다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그렇게 "처발랐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으레 말하곤 한다. 집이면 그냥 집이지 내 집 남의 집 구별이 뭐 필요하겠느냐. 집은 집으로서의 용도가치가 있고 무엇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니겠느냐.
사람들은 나의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순진하다기보다 바보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팔십년대 이후 불어닥친 부동산열풍 즉 집을 실용가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증식의 방편으로 파악하는 데서 오는 삶과 재산의 관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깔려 있다. 사람이 살기 위해 재산이 필요한 건지, 재산을 늘리기 위해 사람이 살아가는 건지 경계가 불분명해져 버리는 지점.
아무렇든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내가 바보인 것만은 분명하다. 기껏 돈 들여서 수리를 했는데 비워주었면 하니, 나도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집을 하나 사기로 했다. 선운사의 거북바위가 멀리 아슴하게 바라보이는 전경이 제법 맛깔스런 곳에 행운처럼 빈 집이 하나 있었다. 대지가 칠백 평에 건평은 열댓평이나 될라나. 가격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천만원. 단돈 십원만 깍자 해도 안 팔 테니 그리 알라는 엄포가 있고, 나도 뭐 깍을 생각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적도를 보니 칠백 평이 아니라 오백 평이다. 오백이거나 칠백이거나 중요한 것은 나의 오감을 얼마나 만족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가격에 대한 별도의 흥정 없이 그냥 매입하기로 했다. 나는 여기에 흙과 나무로 이십여 평쯤의 공간을 새로 조성해서 문화스런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면단위 촌구석에 문화센터 비스무레한 것을 앉혀볼 생각인데 글쎄,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런데 서울에서 오신 친척 한 분이 구경을 하고는 대뜸 이러신다.
"이거 싹 밀어버리고 새로 하나 근사하게 지어넣고 풀장도 만들고 응? 사냥이나 다니고 하면 널널하니 좋겠다. 아이고 나도 인제는 서울 지긋지긋해. 인생 말년에는 나도 내려와서 한가롭게 살아볼 거야."
그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좀 맹랑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단순한 시골에서 한가롭게 생활하고 싶다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시골이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서울로 표상되는 대도시가 정말로 복잡한 것일까. 복잡해서 떠나고 싶다는 그 말이 진실일까.
조금만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조금만 뒤집어서 바라보면, 도시는 복잡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단조롭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또 오늘 같은 것, 그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숨막힐 듯한 폐쇄감, 지리멸렬한 일상, 다만 하나 실질적으로 복잡한 게 있다면 교통문제다. 교통문제라 해봐야 그것도 역시 오늘이 어제 같은 것이지만, 그것은 그나마 복잡하다는 가시적인 현상이라도 있기에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외에는 단조롭기 짝이없는 게 도시의 풍경이다.
서울로 표상되는 도시에서는 보이는 것이 모두 죽어 있다. 심지어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꽃집의 풍경들, 어항 속의 물고기, 새장 속의 새, 그것들은 대부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견고한 철망이나 유리에 갇혀 있고, 혹은 꺾여 있다. 그것은 착착 진행되는 죽음의 과정이고, 우리는 그것을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기는 하지만 선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저것들이 지금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죽어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에 시골에서는 발에 밟히는 거의 모든 것이, 손에 잡히는 거의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생명을 갖고 있다. 생명의 현상은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하며, 변화를 꾀하며, 스스로를 키워나간다.
채송화 한 포기, 감나무, 송아지 한 마리, 어느 것 하나도 오늘이 어제와 같은 것은 없다. 채송화는 아침 해가 떠오르면 꽃잎을 열고, 오후 두 시쯤이면 서서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면 문을 닫은 꽃송이 아래쪽으로 새로운 꽃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게 어디 채송화뿐이랴. 눈 밝고 귀 맑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혼을 삼투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도무지 단순할래야 단순할 수가 없는 삶이다.
창공을 나는 새들, 물속을 헤엄치는 송사리며 붕어들, 그들도 물론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는 하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새장 속의 새들처럼, 어항 속의 금붕어들처럼 당연하게 언제인가는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새장 속의 새들은 죽음 뒤의 모습을 남기지만 창공을 나는 새들은 자기 죽음을 남기지 않는다.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도 자기 죽검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기꺼이 후배들의 먹이가 되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과 동물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도 있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남긴다. 인간만이 자기의 육체를 세상에 먹이로 내주지 않고 죽음 뒤로까지 끌고 간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간이 자기의 주검을 태우거나 매장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은, 그렇게도 죽어서까지 자연에게 자신을 내줄 생각은 안 하고 임의로 처분하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빠졌다. 하다 만 얘기를 마저 하자면, 도시의 생활이란 오직 소비중심으로 짜여 있고, 생산이 있다 해도 2차 아니면 3차 생산인 까닭으로 살아 있는 것들의 숨결을, 영혼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인데,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들을 느낄 수가 없으니 나 자신의 삶마저 의심스럽다. 늙어가고 있다는, 죽어가고 있다는 인식만 차곡차곡 치우지 못한 쓰레기처럼 쌓여간다.
결론을 짓자. 도시에 질렸다고, 신물이 난다고 채머리 흔들며 시골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자리잡은 것은 복잡한 것에 대한 기피는 결코 아니다. 생명을 가까이하고 싶다는, 생명과 더불어 그 생명 속으로 나를 끼어넣고 싶다는 간절한 회귀본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도시에 물들은, 도시식 사고방식을 견지하는 도시인들은 대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단조롭고 한가로운 생활 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도시의 살아 있는 것들은 죽으면 그대로 쓰레기가 되지만, 시골의 살아 있는 것들은 죽으면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의 영양소가 되어 부활한다. 도시인들은 이 엄중한 차이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애써 외면버리는 것 같다.
도시가 복잡해서 "단조로운 시골에 집을 짓고 한가로이 널널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은 대개 으리뻑적지근한 집을 지어놓고 골프를 한다거나 사냥을 하는 식의 위화감조성에나 열심을 바친다.
그런 사냥꾼들의 총탄에 어이없이 희생된 할머니 할아버지가 몇인지, 과문해서 정확한 통계는 제시하지 못하겠으나 한둘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생명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명 속으로 들어왔으니 생명을 살해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단조로운 시골생활이 되어버리는 것이나 아닌지,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첫댓글 정착하신 모습이 높게만 보이십니다.. 부러워요 . 늘 마음뿐이고
님요~ 기대됩니더. 문화센터 비스무레한 거 꼭 이루어서 지도 구경시켜 주이소~~~ 구구절절 동감입니더.
시골스런 생각-절대 아니시네요.선운사.......예전모습이 그리운 곳 입니다,좋은 곳에 계시네요.뜻하신 바 그대로 되리라 믿습니다.
좋은생각*^^*
아, 쬐금이라도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기쁩니다. 이렇게 즐거울 수가, 히~~~~~~~~괜히 신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