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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서출판 벽암 원문보기 글쓴이: 벽암
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6
<태종의 가계도>
태종의 가족들
태종 이방원은 1367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다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늘어갔다. 16살이 되던 해 과거에 합격하였다. 부인은 정실부인 원경왕후(민제의 딸 원경왕후) 1명과 9명의 후궁을 두었고 자녀로는 12남 18녀가 있다.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령대군(세종), 성녕대군 4명의 아들과 정순, 경정(조준의 며느리), 경안, 정선(남이장군 할머니)공주 4명의 딸을 낳았다.
원경왕후 민씨(1365~1420) |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82년 방원에게 출가했다. 태종보다 2살 연상인 민씨는 조선건국부터 왕위에 오르기 까지 숨은 조력자로서 역할을 단단히 수행했다.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이 속내를 알아차리고 군사를 준비하여 싸우도록 만반의 조치를 했다. 왕비가 된 후 태종과 마찰이 심했고 마침내 태종이 처족들의 득세를 막기 위해 처남들을 죽이는 비운의 역사를 맞는다. 릉은 헌릉이며 태종과 같이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
양녕대군(1394~1462)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사냥과 풍류를 즐기다가 발각되었다. 정종의 애첩과 사통하였고 곽선의 첩인 기생 어리於里를 사랑하여 몰래 궁중에 들였다가 세자에서 쫓겨났다. |
효령대군(1392~1486)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이 폐위되자 혹시나 세자자리를 물려받을까 기대했으나 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절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했다. 1435년 세종에게 회암사 중수를 건의했고 반야바라밀다심경을 국문으로 번역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원만하여 9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
성녕대군(1405~1418)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홍역에 걸려 14세의 나이에 죽었다. 후사가 없어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을 양자로 세웠으나 세조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했다. |
경정공주(?~1455)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2녀로 태어났다. 개국공신인 조준의 아들 조대림과 혼인하여 1남 4녀를 낳았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소공동(小公洞)은 태종이 경정공주와 조대림에게 하사한 남별궁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은 '작은 공주골'이라 불렸으며 이후 선조가 의안군에게 하사하여 소공주동궁(小公主洞宮)으로 불렸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소공동이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
경안공주(1393~1415)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3녀로 태어났다. 경안공주는 권근의 아들 권규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나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의관 양홍달의 과실로 죽었다고 판단, 그의 신분을 폐하여 서인으로 강등했다. 정숙하고 총명한 공주를 태종은 끔찍이 사랑하여 그녀가 죽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다. |
정선공주(1401~1424)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 4녀로 태어났다. 남휘에게 시집가 1남1녀를 두었으나 21세에 요절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남이장군이 정선공주의 손자이다. |
*셋째 충녕대군은 세종 편 참고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처남일가를 말살하다.
1402년11월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집안사람이었다. 조사의는 1차 왕자의 난 때도 정도전 일당으로 몰려 투옥되었던 인물이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와 세자 방석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태상왕(태조)이 후원했고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인 강현도 가담했다. 가담세력도 점점 늘어났다. 이방원이 민심의 동요를 막고 태상왕(태조)을 회유하기 위해 박순을 파견했다. 박순은 함경도 도순무사 박만과 함께 이 지역의 수령들에게 ‘조사의의 반란군에 동조하지 말라’고 설득하다 조사의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태종의 회유책은 먹혀들지 않고 반란군은 평안도 덕천, 안주를 거쳐 한양으로 밀어올 기세였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관군의 선봉대로 이천우부대를 보냈지만 맹주지역에서 패했다. 조사의 군대는 점점 세력을 확대하여 1만 명에 이르렀다. 위기라고 판단한 이방원(태종)이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직접 출병해 김천우를 포로로 잡았다. 겁에 질린 김천우가 “4만 명이 넘는 관군에게 어떻게 맞서 싸우겠느냐”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조사의의 군대에 퍼져 겁을 먹은 병사들이 도망갔다. 1402년 11월 청천강에서 진압군과 일전을 했으나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조사의 군대는 무너졌다. 12월 조사의를 압송하여 참수형에 처했다.
태종이 집권 7년차인 1406년 8월 18일, 13살의 어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언했다. 민제, 하륜, 조영무, 이숙번 등이 태종의 양위를 반대했다. 성석린이 “한창의 나이에 아무런 변고도 없는 상황에서 양위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간언했다. 태종이 “내가 아직 늙지 않았고, 세자가 어린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이 결정되었으니 바꿀 수 없다. 내가 양위하려는 까닭은 이미 두 정승(하륜, 조영무)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태종의 양위 파동은 세자와 무관하지 않았다. 세자는 어린 시절에 외가에서 자라 외삼촌들과 친근했다. 양녕이 세자가 된 뒤, 민무구의 형제들이 세자의 안위를 위해 효령과 충녕 등의 대군 들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태종의 귀에 들렸다. 태종이 위기의식을 느꼈다. 한편, 민씨 형제들은 태종의 양위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태종은 그 점을 빌미 삼아 민씨 형제에게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울 요령이었다.
양위 파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409년 8월 11일, 1410년 10월 19일에도 소동을 일으켰다. 세 번의 양위 파동으로 신하들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민씨 형제 등 눈에 거슬리는 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태종은 곧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제거하는 일에 나섰다. 죄목은 어린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이른바 협유집권挾幼執權이었다. 그들을 탄핵한 것은 태조의 이복형제 의안군 이화였다. 태종은 상소문을 받아 두고 겉으로는 민씨 형제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면서 서서히 민씨 형제들의 목을 조였다. 결국 11월 21일에 민무구를 여흥에, 민무질을 대구에 유배 조치했다. 하지만 민무구를 탄핵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만약 민무구 형제가 살아남은 가운데 세자 이제가 즉위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륜, 이숙번 등은 지속적으로 그들 형제를 극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다. 그런 가운데 여흥 부원군 민제가 죽었다. 민씨를 편들던 이무, 조희민, 강사덕 등은 자위책을 강구하기 위해 은밀히 민씨 형제와 연락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정사공신 이무가 죽임을 당했고, 민씨 형제는 제주도로 유배시켰다가 1410년 민무구와 민부질에게 사약을 내렸다. 1416년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하고 병석에 누었던 장모마저 죽자 처가는 몰락했다. 원경왕후는 유폐나 다름없는 교태전으로 보내져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다
피를 좋아했던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공신과 외척세력을 제거했고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6조의 기능을 강화해 재상의 권한을 축소했다. 정도전이 주장하는 재상중심의 정치를 왕권중심으로 개편한 것이다. 이런 조치로 신하들의 사전私田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1401년 별사전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고 과전법을 개정하여 지금까지 세금을 내지 않던 사원과 공신전에 세금을 매김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했다. 유랑민을 막기 위해 호적을 정비하고 양인을 노비로 만들지 못하도록 통제를 강화했다. 1400년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으나 1405년 한양으로 천도했다. 새로운 수도건설로 창덕궁을 건설했으며 수로관리를 위해 청계천 수로개착공사를 완수했다. 이 때 공사용 자재가 부족하자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 있는 병풍석과 신장석을 광통교 다리공사에 투입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도록 했다. 철전지 원수를 값은 셈이다.
사병을 혁파하고 의흥부를 폐지하였다.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책사 하륜이 태종을 보필하다
아버지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다면 태종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의 아들이다. 정도전, 정몽주 등 신진 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6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했지만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이후 보문각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치다가 최영의 요동 정벌에 반대하면서 양주로 추방되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이성계 일파의 눈 밖에 나서 추방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이인임의 조카사위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이 고려 조정에서 대립하던 공양왕 시절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태조가 개성에서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자 풍수학설을 근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킨 후 무악 일대(지금의 신촌 근교)를 새 도읍지로 밀었으나 정도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다"며 하륜의 주장을 반대했다. 한양 천도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에서 정도전에게 모욕을 당해서인지 정도전에 대해 원망을 품었다. 정도전은 이색 휘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이었는데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스승과 동문들을 가혹하게 대우했으니 하륜 입장에서는 정도전을 좋게 보기가 힘들었다. 태조정권에서는 하륜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고 중앙정치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태종이 득세하자 그의 시대가 왔다. 하륜은 이방원(태종)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는데 민제를 통해서 이방원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어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륜이 이 과정에서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기도 했고 사병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이숙번의 병력을 1차 왕자의 난 때 동원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당시 이숙번은 지안산군사(안산 군수)였는데 정릉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어 사역군을 이끌고 상경했던 것이다. 결국 이숙번의 사역군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기동 호위 병력이 될 수 있었다. <민담집>에 의하면 하륜과 이방원을 떼어 놓기 위해 정도전이 하륜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 보냈다. 이방원이 하륜을 불러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은 취한 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화가 난 이방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륜은 사과한다는 명목으로 이방원을 쫓아가 독대하여 책략을 진언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륜이 올린 진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 이성계)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1416년> |
하륜이 이숙번을 추천하면서 그 병사를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있던 움직임을 피해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정종이 즉위했을 때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마침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즉위 후 그토록 바라던 재상의 반열에 오른 하륜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아래 태종의 개혁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데 앞장섰다. 6조 직계제의 도입이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는 등의 정치 개혁, 관제 개혁에 직접 관여했고 태종이 실시했던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 제도 정비 등에서도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신문고 설치에도 관여했는데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와 실효성이 있느냐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요지의 말로 반박했다.
조선 초기의 법률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조선 최초의 법전으로는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이 있었지만, 정도전의 조선 경국전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저작물이었고, 태조 6년 조준의 지휘로 경제육전을 새로 편찬하게 된다. 태종 7년 이두 혼용이었던 이 원육전을 논란이 되던 부분들을 다듬었다. 태종의 뜻에 따라 <태조실록>의 편찬을 주도했다. 왕자의 난 등 관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서 편찬시기가 이르다고 반박했지만 오히려 하륜은 "노성한 신하가 살아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된다"며 편찬을 실행했다.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일 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다. 일 처리 방식은 민제까지 화나게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인들이 스스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이후 민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다. 태종을 섬기며 정승 반열에도 올랐고 능력과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는 했으나 결국 무악 천도는 이루지 못했다. 태종이 점을 쳐서 한양을 궁궐터를 정했다.
1412년, 고려 시대 때 태안반도의 좁은 지협을 굴착해 만과 만 사이로 항로를 건설하려다 중지된 것을 완공하자고 주장했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에서 세금으로 걷혀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이 안면곶 앞바다를 지나 태안 반도를 돌아 올라가는 항로를 거쳐 갔는데 안면곶과 태안 안흥항 앞바다, 강화도 일대의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배 수십 척이 한꺼번에 침몰했으며 바닷물에 젖어 못쓰게 되는 곡식들의 피해량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륜은 5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강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1413년 한강과 면해 있는 용산 포구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재차 주장했지만 태종이 반대했다.
서얼금고법 제정에 관여했다.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하륜과 함께 무인정사에 가담한 이숙번도 재가녀의 아들이고 태종을 지지한 의안대군 이화, 완산부원군 이천우, 완원부원군 이양우도 첩의 자손인데 불이익을 주자고 했다. 의안대군, 완산부원군, 완원부원군이 하륜에게 눈총을 주었다. 태종은 왕족에게는 적용대상으로 보는게 언짢았는지 예외적으로 서출이라 해도 왕족 취급과 계승권은 주어졌다.
신생 국가 조선의 확립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행정을 처리하거나 정책을 입안하거나 정치적 판세를 짜는 부문에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권문세족 시절의 버릇을 못 고쳤는지 물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 일례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100보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을 차지했다. 친인척들과 함께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전답을 개척한 후 팔아먹었다가 탄핵당하기도 했고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었다.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자 일도 제대로 모르는 관리들을 추천했다가 태종에게 질책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친구 민제의 아들들이나 이숙번, 이거이 등과는 달리 공신으로서 부귀영화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부원군 작위를 받고 1416년 말에 함길도에 있는 조선 왕가 시조들의 무덤을 살피러 갔다가 객지에서 향년 70세로 죽었다.
공을 믿고 설치다 끝내 유배된 이숙번
1393년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이방원을 만났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하여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우부승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때 진압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특히 조사의의 난 때는 진압군의 주력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이방원이 왕이 되자 이숙번은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누렸다.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서대문) 안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오가고 우마 소리가 들리자 시끄럽다며 문을 틀어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색문가塞門家-성문을 막아버린 집-라며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성에 성문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 문으로 가는 길도 이숙번의 집 앞을 거치게 되자 이숙번은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쪽으로 문을 내게했다. 이 문이 서전문(西箭門)이다.
좌찬성으로 있을 때 태종이 상왕인 정종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배웅하러 갔는데 이숙번이 하륜과 함께 의정부 관리들과 풍악을 울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하자, 사간들은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이숙번과 하륜에게 벌을 주라 간청했다.
태종은 이숙번을 숙청하고 난 후 세종에게 절대 이숙번을 복귀시키지 말라고 했다.
맹인 승려가 사대부 가의 과부와 간통한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승려와 과부 모두 참수하자는 쪽으로 몰아갔지만, 이숙번은 법에 따라 곤장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론이 좋지 않아서 둘 다 참수형에 처했다. 이숙번은 판결에 불만을 품고 궁궐에 나오지 않고 태종의 부름조차 무시하였다. 이후 세자(양녕대군)를 찾아가서 "여론에 밀려서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으니 이런 미친 짓이 어디있느냐"며 비판했고 태종의 귀에 들어갔다. 한때 자기 밑에 있었던 박은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불만을 표시했고 이것 역시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수많은 행패와 패악질을 부린 이숙번이 처형에 반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간통사건으로 사람을 처형하기까지 하는 조선의 법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숙번이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정사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숙번은 승려와 간통한 과부를 보고 아들 2명 딸린 몸으로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를 떠올렸을 수도 있었다.
이숙번의 화려한 생활도 끝나고 말았다. 1417년에 세자(양녕대군)가 사고를 치고 근신하던 중에 선공감의 비리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구종수 형제가 후일을 도모하려고, 세자에게 주색을 제공하고 뇌물을 바친 사건이 일어났다. 구종수 형제는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형제는 유배를 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세자께 말과 활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가 발각되었다. 당시 조정의 상황은 가뭄을 걱정하고 날마다 재앙을 의논하며 분주했는데, 이숙번은 병을 이유로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간이 이숙번의 무례와 불충을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숙번을 감싸줬던 태종이 이숙번을 지방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함양으로 유배 보냈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승하했고 세종은 부왕의 말씀을 받들어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주지 않았다.
1438년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 이숙번이 태종의 최측근이라 태종의 예전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세종은 자료 수집 차 잠시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서 이숙번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모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숙번이기에 그보다 잘 알고 있는 이는 최소한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경연청으로 출근해서 당시 일을 구술하는 것이었다. 이숙번은 그 때도 예전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유배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안하무인으로 굴었다고 한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은근히 이숙번은 세종이 등용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자료 수집이 끝나자 이숙번의 함양 유배 조치를 풀어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해줬으나 정계로 복귀시지는 않았다. 2년 후인 1440년 사망했다.
위대한 건축가 박자청
궁궐 낭장이었던 박자청이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1393년 박자청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문을 지키던 박자청에게 의안군 이화(태조 이성계의 이복 동생)가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박자청은 왕명 없이는 통과할 수 없다며 길을 막자 의안군이 발길질을 했다. 이 사실이 태조 이성계에게 전해져 내상직에 임명했다.
박자청의 원리 원칙은 계속 이어졌고 근무 자세가 좋다고 평가하여 호익사대장군으로 발탁되어 이성계의 고향 동북면을 지키게 했다. 이후 태종 이방원에 눈에 띄어 토목 건축 분야에 능력을 발휘했다. 각종 건축물의 보수 공사를 시작으로, 제릉·건원릉 공사 감독, 도성 수축, 청계천 조성,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경복궁 경회루 건설을 완수했다. 특히 문묘는 4개월 만에 완공시켰으며, 연못과 3층 건물이 같이 있는 경회루도 8개월 만에 완공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1419년에 태종(상왕)이 박자청을 하옥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창덕궁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산세를 살리면서도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왕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측량을 게을리 했다는 명목으로 박자청을 하옥시키고 행각을 부수고, 그 곳에는 담만 쌓게 했다. 한 달 후에 박자청은 사면되어 계속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후에 창덕궁 역시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 그대로 행각이 지어졌다.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이다. 1422년 태종릉인 헌릉공사도 맡아 완성하고 1423년 67세로 눈을 감았다. 세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3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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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서출판 벽암 원문보기 글쓴이: 벽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