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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도마복음 1
들어가는 말
금세기 성서고고학 분야의 최대 성과는, 쿰란 공동체가 동굴에 보관해 묻혀 있던 사해사본을 발굴한 일이다. 이 사해사본은 쿰란(사해의 북서쪽 해변에 있는 고대 키르벳 쿰란 근처) 주변과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쿰란 문서라고도 하는 사해 문서는 히브리 성서를 포함한 900여 편의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로 되어 있다. 1946년 11월 베두인 목동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후 본격적인 발굴이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진행된다. 이들의 연대는 기원전 2세기로 올라가기 때문에 종교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존하는 구약 사본으로서는 최고(最古, 가장 오래된)의 사본으로 평가받는다.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1년 전,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 마을에서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발견되는데, 이는 다량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문헌들이다. 12권의 가죽 장정 된 파피루스 코덱스가 밀봉된 항아리에 들어있었다. 이를 모함마드 알리라는 농부가 발견하였다. 여기서 코덱스(codex)란 고전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필사하여 만든 책을 칭하는 용어다.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영어 번역판을 발간한 제임스 로빈슨은 그 책의 서문에서 이 코덱스들은 마을 근처에 있었던 파코미아 수도원(Pachomian monastery)에 속해 있었는데 대주교 아타나시우스가 기원후 367년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문서에 대해 이단 정죄를 시작하자, 이를 피하여 항아리에 담아 밀봉한 후 땅속에 묻어 놓은 것으로 추정했다.
문서들은 모두 콥트어로 작성되었는데, 그리스어로 된 원본의 콥트어 번역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의 어록만을 담고 있는 영지 복음서인 『도마복음』은 크게 훼손되지 않고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동시에 1898년 남부 나일강 상류 지역에 있는 이집트 옥시링쿠스(Oxyrhynchus)에서 막대한 양의 고대 헬라어 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일부 예수의 어록을 기록한 파피루스 조각 본들이(AD 80년경 저작된 것으로 추정) 원본 헬라어 『도마복음』의 일부라는 것이 판명될 수 있었다. 도마복음의 아주 일부분만 발견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고대 사본들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학자들의 본문비평을 거친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새로운 연구 발표 또한 꾸준할 것이다.
쿰란 문헌은 80% 이상이 히브리어로 작성된 문서들이고(일부 아람어와 코이네 그리스어 문서 포함), 나그함마디 문서는 콥트어로 기록된 문헌들이다. 옥시링쿠스에서 발굴된 문헌들은 헬라어(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와 관련한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3개의 언어로 기록된 고대 문헌들은 중근동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역으로 각각 발굴된 장소는 다르지만, 다른 언어의 문헌이라는 것이 경이롭다.
나그함마디 문서 중 도마복음은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던 해에 땅속에서 벗어났으니, 해방 80년 맞이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학계와 종교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도마복음 연구가 지속되어 왔다. 우리나라에도 다수의 번역본과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으나, 주류 기독교는 도마복음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경원시하거나 소외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정경복음 외에는 경전이 될 수 없다는 도그마에 갇혀 텍스트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도마복음 서론에서부터 말씀 1-28번까지에 대한 해설서다. 글을 쓰다 보니 한 권의 분량이 되어 우선 묶어서 출간하기로 하고 나머지 로기온의 풀이도 계속 진행할 것이다. 순차에 따라 로기온 114까지 풀이를 해볼 요량이다.
국내의 여러 해설서는 저자들께는 송구하나 일부러 참고하지 않고 콥트어 본문과 성서의 여러 이야기에만 집중하였다.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S.J. Gathercole의 주석서를 주로 참고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석서에 나오는 관련 자료와 연관 성구를 중심으로 하였고 그의 주석과 해석은 만족할 수 없었다. 하여 콥트어 본문과 성서의 텍스트와 온전히 씨름하며 글을 쓰려고 하였다.1)
주 1) S.J. Gathercole, The Gospel of Thomas Introduction and Commentary,(Brill, Leiden) 2014.
콥트어 텍스트를 놓고 각종 번역본과 비교하며 원문에 대한 이해를 모색했다. 그러면서 다소 매끄럽지 않고 어색하더라도 의역보다는 직역을 시도했다. 가능하면 원문의 분위기를 탐색해 보려는 의도 때문이다. 필자가 콥트어에 능숙하거나 익숙해서가 아니다. 도마복음은 헬라어를 콥트어로 음역한 어휘가 많다. 예컨대 헬라어 코스모스(κόσμος)를 소리 나는(발음) 대로 콥트어 문자 코스모스(ⲕⲟⲥⲙⲟⲥ)라 표기한다. 그런 식의 어휘가 다수라는 것과 이미 연구자들에 의해 제공된 자료를 활용하여 콥트어 본문에 접근하였다. 2)
주2) Martijn Linssen, The true words of Thomas, Interactive Coptic-English translation. MA Version 1.9.5. 2020. 여기 사용된 번역은 콥트어 단어가 하나의 영어 단어로 번역하고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달아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자책과 온라인 콥트어 사전과 하이퍼링크로 연결해놔서 언제든 콥트어 사전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 괴팅겐 대학의 주도로 만들어진 KELLIA의 콥트어 사전 온라인(CDO)판에 있는 콥트어 단어로 하이퍼링크를 사용하여 검증할 수 있었다. 이 책은 Coptic-English concordance와 English-Coptic concordance를 부록으로 담고 있어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 콥트어 본문 연구의 또 다른 자료는 Michael W . Grondin. Grondin`s Interlinear Coptic/English Translation of The Gospel of Thomas, Revised November 22, 2002.를 참고했다.
동시에 콥트어 문자는 그 기반이 헬라어다. 24개 헬라어 알파벳을 그대로 빌리고, 고대 이집트의 민중 문자 6개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신약성서의 헬라어 문장에 친숙한 이들은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긴다. 콥트어에 문외한인 필자가 콥트어 본문을 직역하면서 해설서를 쓰게 된 계기는 그런 정도의 관심에 이끌려 시도한 것이다.
정경복음과 도마복음은 어록의 약 50%가 일치하고 나머지는 정경복음에 없으니 불일치 하는 것일까. 도마가 기록한 예수의 어록 일부가 왜 사복음서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Q자료(복음)와 도마복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들이 다양한 견해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문체와 서술방식과 이야기하는 내용이 전혀 다른데 왜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을까. 둘은 같은 책인가 다른 책인가. 서로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문서일까 아니면 서로를 보충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는 그 나름대로 문서의 완결성을 지닌다. 전혀 다른 성격의 문서이나 비평가에 의해서 수많은 비평이 이뤄질 수도 있지만, 독자에 의해서 둘은 서로를 증거로 제시하고 서로를 보충하는 문서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독자에 의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매우 이질적인 문서가 하나의 책에 담겨 있는 불편하고 이상한 책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물음과 토론을 봉쇄하기 위해 서구의 신학자들이 묘책을 세운 것이 있으니 성서 영감설(靈感說)이다. 유기적 영감론(Organic Inspi -ration)으로 다수의 질문과 토론을 원천 차단하려 한다. 질문이 시작되면, 그 같은 장치로 과연 질문을 봉쇄할 수 있을 것인가.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의 차이와 같음에 대해 나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같음과 다름 정도로 이해한다. 나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은 서로를 너무나 잘 보완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렇게 읽고 해설한다. 도마복음의 난해한 로기온은 성서의 찬란한 빛에 의해 해석되고, 성서의 난해한 구절 또한 도마복음의 아름다운 로기온이 되비쳐 주어 성서 이해의 깊이를 더 해준다. 도마복음이 어록의 모음집이라는 특성이 있지만, 모름지기 어떤 말씀이 말씀으로 드러나려면 그것의 전후 맥락과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같은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형이 같은 다른 이야기에서 어록을 유추할 수 있다. 성서는 이야기 모음집이고, 성서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된다. 도마복음은 서사와 이야기가 없이 어록만을 모아놨다. 그렇다고 도마복음이 서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어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서사 속에서 어록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하여 독자에 의해 어록의 이면에 있는 서사가 읽혀야 한다. 그때 수많은 서사가 담겨 있는 성서는 매우 훌륭하고도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성서는 도마복음을 밝혀주는 보물 창고(寶庫)다. 동시에 도마복음의 어록은 수많은 서사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하는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도마복음 풀이 글을 쓰면서 더욱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도마복음과 성서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는 서로를 너무도 충분하게 보완하고 보충해준다. 물론 성서가 완결성이 부족해서 보완해준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문서도 그 자체로 나름의 완결성을 갖는다. 독자가 질문하고 의문을 갖게 될 때 그 물음에 답해주는 텍스트로서 서로는 서로를 보충해준다는 의미다. 물론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견해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비판은 기꺼이 감수한다.
나는 성서를 사랑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텍스트로 기록된 그들 텍스트와 수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보내고 있다. 나는 도마복음이 경이롭다. 그것이 낯선 콥트어와 씨름하며 그 의미와 뜻을 탐색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고 거기서 얻은 이해를 기록하여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이렇게 책을 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도마복음 속의 성서와 성서 속의 도마복음으로 읽히기를 희망한다. 둘의 차이와 다름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에 의해서 논구되고 발표될 것이다. 이 책은 둘(정경복음과 도마복음)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조화 속에서 근원과 궁극을 탐색해 나간다.
아테네 델피 신전에 기록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여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 γνῶθι σεαυτόν)’는 명제가 도마복음에서는 ‘너 자신을 아는 것이 왕국이 찾아오는 것이고, 왕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곳곳에서 역설(?)한다. 도마복음의 주제는 ‘나 자신이고, 또 너 자신’이다. 그리고 단지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 명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14개의 주옥같고 번득이는 어록에 담아 우리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고 또 높은 곳으로 안내한다.
탈종교 시대는 벌써 와 있고 또 오고 있다. 그때는 교회가 필요했고 사원이 필요했다.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정신의 결핍으로 헐벗고 주려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의 유통기한은 다했다. 남아 있다 해도 한시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순례자는 이제 그곳을 지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사원 밖에서도 넉넉히 존재 자아(εὶναι Ἐγώ 에이나이 에고)로 세워져야 하고 서 있어야 한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떠나 각자 흩어져 제 홀로 서서 존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더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을 멈춰야 한다. 그들의 답이 언제나 오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종교지도자, 그가 ‘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답은 그에게 옳은 것이지, 내게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그의 말이지 ‘내’가 아니다. 힌트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정답은 아니다. 그에게 더는 의존할 수 없다. 내 삶에 대해서는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흩어져 제 홀로 남겨져 정신이 직립보행하여야 할 ‘디아스포라’에게 이 책이 길라잡이가 되길 희망한다. 1700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다가 얼굴을 드러낸 고대의 문서가 인공지능 시대에 길을 묻는 이들에게 답을 찾게 해줄 수 있을까. 때로 AI에게 묻게 되더라도 내 삶은 내가 살아야 한다. 스스로 그 물음에 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여기 숨겨져 있던 문서 ‘도마복음’에서 힌트를 얻어보면 어떻겠는가 제안하고 싶다.
2024년 8월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서
첫댓글 뜨겁고 한결같은 열정과 수고에 박수를 보내며 기도로 함께 합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