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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지리산 대화엄사 이야기(智利山 大華嚴寺 逸話)〗– 진조(眞肇)스님
화엄사 전경
며칠 전에 화엄사 홍매화가 화사하게 피었다는 뉴스를 보았지만, 가 볼 생각은 못 했다. 핑계겠으나 부산서는 너무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갔을 때를 생각해 보면서 가 본 듯이 반가웠다. 지리산 화엄사는 홍매화 말고도 볼 것들이 아주 많다.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다. 창건주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석탑도, 조선시대 숙종의 막내딸이 노보살로 환생해 아버지를 위해 짓게 했다는 각황전(覺皇殿)도 있고, 석등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크고 웅장한 것이다.
화엄사 홍매화
홍매화, 삼층석탑, 각황전, 석등 이렇게 네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책의 저자인 진조 스님은 그런 이야기를 80가지나 들려준다. 진조 스님은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인 1975년 백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사미계를,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계하였고, 화엄사 포교사와 도광사 주지, 화엄사 교무·포교국장 등을 역임하고, 화엄사에 머물면서 “화엄사 출신 스님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인연 따라 다른 곳으로 가시고, 후배 스님들은 절에 관련된 일화에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워 화엄사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사장될 것이 걱정스러워 그 이야기들을 책으로 남기기로 결심했다.”고 서문에서 말씀했다.
80가지 이야기를 모두 옮기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몇 가지만이라도 적어보면서 책의 가치를 찾아볼까 한다. 화엄사는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많이 듣던 緣起(불교에서 인연이 생기고 소멸한다는 법칙)가 아니라 ‘鷰起’다. 설화에는 鷰起尊者는 天竺國(인도)에서 왔다고 하고, 이름도 스님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鷰’(제비연-거북)을 타고 오셨고 또 부처님의 최고 경전 화엄경을 두류산(지리산) 黃屯洞天(황둔동천-화엄 불국토라는 뜻)에서 전법을 시작(起)하였다 하여 마을 노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백제 성왕 22년(서기 544년)에 창건된 화엄사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부석사(676년, 문무왕16)보다도 유서가 깊다. 그러나 화엄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는 못했는데, 근대 이후 새로운 불사가 많이 이루어져 옛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리산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데 백두산 남단 끝자락에 우뚝 솟았다는 의미이며, 금강산처럼 철 따라 이름이 바뀌는 것도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봄에는 두류산, 여름에는 청량산(淸凉山), 가을에는 지리산(智利山) 겨울에는 방장산(方丈山)이 그것이다. 흔히 智異山이라 하지만, ‘智利山’이라고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존자가 당초 설법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곧 흘러 내려와서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그런데 빈도가 처음에 이 산에 닿아 삼매에 들었을 때 문수대성께서 일만 보살 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 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임에 틀림이 없소. 그런 만큼 산 이름도 ‘大智文殊師利菩薩’이름을 택해 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하여 《지리산 화엄사》가 된 것이다.
연기존자와 어머니는 중국을 거쳐오면서 이미 한자를 익힌 상태였다고 하고, 어머니도 비구니였는데 화엄불법을 동방에 전하고자 연을 타고 백제땅 丹華洞天(鷰谷洞天)에 이르러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인도에서 하던 버릇대로 동천에서 목욕을 하다가 무언가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움막으로 돌아왔다.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연기존자가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물었다.
“어머니 어디 아프십니까?”
“아닙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존자가 어디 다쳤는지 물으면서 답하기를 재촉했지만, 어머니는 창피해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아들에게 못 할 말이 무엇입니까? 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존자의 다그침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그날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 데 뭔가가 몸 아래 거시기를 물어서 붓고 아프다고 말하며 부끄러워하셨다. 존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어머니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 다음날 존자는 계곡으로 가서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가재들을 발견했다.
“이것들이 어머니를 물었구나. 괘씸한 것들.”
존자는 당장 수중 세계를 관장하는 용왕을 불렀다. 그리고 앞뒤 사정을 이야기했다. 용왕님은 존자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였고, 집게를 가지고 있는 게 종류는 단화동천 계곡물에서 살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 뒤부터 연곡사(鷰谷寺) 계곡에는 가제 종류가 없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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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 책은 스님이 쓴 것이다 보니, 화엄사도 화엄사지만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이제 연기존자가 지리산으로 오면서 친견했다고 하는 문수보살 이야기다. 문수보살의 생일은 음력 4월 4일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여러 절에서 길상대법회(吉祥大法會)를 열어 봉축한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의 좌보처(左補處)이며, 교화를 도우는 지혜의 화신으로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청련화를 들고 있다. 위엄과 용맹을 시현하기 위해 사자를 타고 계시기도 하고, 환희장마니보적여래(歡喜藏摩尼寶積如來)라고도 한다. 일찍이 성불하시어 용존상불(龍尊上佛), 대신불(大身佛), 신설불(神仙佛)이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미래에 성불한다 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라고도 부른다. 문수보살은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보현보살과 함께 화엄삼성(華嚴三聖) 중 한 분으로 실천적 구도를 행하는 지혜의 상징이다. 그 문수보살이 십대원을 하셨다고 하는데 이렇다.
〈문수보살 십대원(文殊菩薩 十大願)〉
1)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게 하고 갖가지 방편으로 불도
에 들게 한다.
2) 문수를 비방하고 미워하고 죽음을 주는 중생이라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3) 문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깨끗한 행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4) 문수를 속이거나 업신여기거나 삼보를 비방하며 교만한 자들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5) 문수를 천대하고 방해하며 구하지 않는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6) 살생을 업으로 하는 자나 재물에 욕심이 많은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7) 모든 복덕을 부처님의 보리도에 회향하고 중생이 모두 복을 받게 하며 모든 수행자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다.
8)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하늘)의 중생과 함께 나서 중생을 교화하며 그들이 보리심을 내게 한다.
9) 삼보를 비방하고 억압을 일삼는 중생들이 모두 보리심을 내어 위 없는 도를 구하게 한다.
10) 자비희사(慈悲喜捨)와 허공같이 넓은 마음으로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하여 보리를 깨닫고 정각을 이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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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대에는 ‘고로쇠’라고 하는 나무수액이 많이 나온다. 이것을 당초에는 ‘신리수’라고 했다고 하는데, 여기도 연기존자 관련 설화가 전한다. 존자는 화엄사 근처 산에서 약초를 캐고 열매를 따다가 어머니께 올려 건강을 챙겨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을 타고 연소(鷰沼)에 내려앉다가 그만 나뭇가지를 쳐서 부러뜨리고 말았다. 연이 다치지 않았는지 살피던 중에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갈증을 느낀 존자가 그것을 받아 마셨고 그 맛에 홀렸다. 그것을 받아서 어머니께 갖다 드렸는데, 어머니가 흡족해하면서 “신비로운 명약이구나. 아프던 무릎이 다 나은 것 같다. 앞으로 그 나무액을 신리수(身利樹)라고 불러야겠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천상에 감로수(甘露水)가 있다면 지상에는 신로수(身露水), 즉 신리수가 있다는 말이 그래서 퍼졌다.
그런데 이 신리수가 고로쇠로 바뀐 데는 신라말 도선국가와 연결된다. 도선국사가 한 자리에 앉아서 오랫동안 좌선을 하여, 도를 깨닫고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마침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자 그만 나뭇가지가 부러져 스님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허망하게 앉아 위를 올려다보다가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갈증을 느낀 참이라 그것으로 목을 축였는데,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무릎이 펴지는 것이었다. 스님은 가뿐히 일어나 걸으면서 “이 나무가 뼈를 이롭게 하는구나”하고 중얼거렸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골리수(骨利水)’라고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고로쇠’가 되었다는 것이다. 골리수나 신리수나 의미는 같지만, 결국 백제시대 화엄사 역사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진조 스님은 말한다.
화엄사는 창건주 연기존자와 관련한 전설 이야기가 아주 많다. 하지만, 진흥왕 이후 백제 땅이던 여기가 신라로 넘어오면서 신라 관련 이야기로 이어지기 시작했고, 신라의 고승 자장과 원효, 의상의 행적이 화엄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장법사는 김씨로 진골 출신 소판무림(蘇判茂林)의 아들이다. 그는 부처님과 같은 음력 4월 8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선종(善宗)이었고, 일찍이 보모를 여의자 전 재산을 희사하여 원령사(元寧寺)라는 절을 지은 뒤,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 정진했다. 친척인 선덕여왕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40세에 당나라로 유학해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깨달음을 얻고는 643년(선덕여왕 12년)에 귀국하여 신라로 귀속된 화엄사를 찾고 창건주 연기존자를 기리기 위해 4사자 3층 석탑을 세우고는 중국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73과를 봉안했다. 4사자 3층 석탑은 일제때 일본으로 반출이 기도되다 실패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겪기도 했으나 그 내용은 생략한다.
흔히 慈藏은 律師, 元曉와 義湘은 大師로 부르지만, 저자는 法師, 聖師, 祖師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서 자장법사, 원효성사, 의상조사라고 하였다. 천축국에서 전래 된 화엄학이 연기존자에 의해 뿌리내리고 자장법사에게 이어졌고, 원효성사에 의해 많은 사서(士庶)와 사부대중을 일깨웠으며 그것이 의상조사에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원효와 의상은 같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토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던 밤중에 원효가 목이 말라 곁에 있던 그릇의 물을 마셨는데 그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해골바가지였고, 이에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의 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은 화엄학에 통달했음을 자랑하고 싶어 선배이자 도반인 원효를 만나 “사형님 소승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학을 전수받고 인가(認可)까지 받았으므로 스스로 해동 화엄학의 시조로 여깁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원효가 “지금으로부터 132년 전에 백제국 구차례(구례) 두류산에서 연기존자께서 천축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은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라고 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지금은 신라에 귀속되었지요. 소승은 화개동천에 화랑소(花郞所)를 설치하고 화랑들을 훈련시킵니다. 또 해화당에서 화엄사상을 교육하고 노고단에 올라서는 삼세 불보살과 천지신명께 삼한통일의 대과업과 화랑들의 무운을 기원하고 있으니 이 화엄사와 노고단은 화랑들의 중요한 귀의처이고 성지지요.”하며 화엄학을 실천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이에 의상이 부끄러워했다.
의상은 연기존자에 의해 화엄학 꽃을 피운 곳이 화엄사라는 것을 알고 자장법사가 조성했다는 사리탑에 올라 연기존자상에 삼배를 드리고, 7일 밤낮으로 기도해 화엄사를 위해 황금장육불 입상과 화엄석판을 만들 것을 서원했다. 그리고 사부대중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리고, 바로 경주로 가 문무왕을 뵙고는 불사에 동참해 줄 것을 간청했고 왕이 윤허했다. 장육(丈六)은 부처님의 전신을 일컬으며 높이가 16자에 이른다.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황금불상을 만든데 이어, 2층 4면 7칸 사방의 벽에 화엄경을 새긴 화엄석경이 완성되었는데, 자그마치 10조 9만 5천 48자를 옥돌에 새긴 이 화엄석경은 화엄사상을 총망라했다고 할 수 있다. 화엄석경은 지금 1만 4천여 조각으로만 남아 있으나 그것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파편으로 남은 전남 구례 대화엄사 ‘화엄석경’을 복원하기 위한 첫걸음이 시작됐습니다. 화엄사는 보물 1040호인 ‘화엄석경'을 본격 복원 할 예정입니다. ‘화엄석경’은 8세기 중엽 연기조사가 장륙전(현 각황전) 내부 사방 벽에 부처님의 말씀인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판을 설치한 것으로 영원불멸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과 정유재란(1597년) 그리고 풍화로 현재 1만 4천여 파편으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파편마다 작은 것은 5~10자, 큰 것은 100자 안팎의 해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2023.5.4. 광주kbc)”
화엄석경 조각
우리나라의 석등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화엄석등(높이 6.36m)은 장식도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우아한 꽃잎은 ‘우담바라’로 3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신비의 꽃이며, 꽃잎이 8잎은 것은 팔정도를 상징하고, 4개의 화창은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와 부처님의 광명을 나타낸다. 몸통이 복고형인 것은 진리의 소리가 퍼지게 한다는 것이고, 화엄석등은 팔정도를 수행하여 사성제 진리와 이치를 깨닫고 자비광명과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의 등불인 ‘자명등 법명등’세계를 밝혀 부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의상이 자신이 화엄종주라고 하다가 ‘큰 코 다친 이야기’가 있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앵림산(鶯林山) 원효봉에서 원효가, 의상봉에서는 의상이 기거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의상은 천공(天供)을, 원효는 사람이 해주는 밥을 먹고 있었다. 법력이 없는 사람이 천공을 받으면 죽어 축생이 되지만 경지에 오른 의상은 그렇지 않았다. 의상은 자부심이 생겨, 사형인 원효를 초대해서 천공을 대접하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때가 지나도 밥을 내놓지 않자 원효가 말했다. “나는 때를 놓치면 공양을 하지 않습니다.”의상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천녀가 천공을 가져올 것입니다.”고 대답했으나, 한참이 지나도록 공양이 오지 않자 원효는 일어나 떠나버렸다. 그러자 헐레벌떡 천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타났다. 의상이 “이제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에 천녀가 말했다. “오기는 늦지 않게 왔사오나 원효 스님을 호위하는 신장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도저히 그 틈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이 말에 놀란 의상은 원효가 떠나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원효 스님 뒤에는 호법 신장들이 구름처럼 몰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친 의상은 이후에 하늘에서 내려주는 음식을 사양하고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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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는 인연을 가진 4분 스님이 계시는데, 앞서 살핀 연기존자, 의상조사, 도선국사, 연기법사가 그들인데 그들은 모두 연기란 이름을 가졌다. 연기존자는 멀리 천축국에서 와서 두륜산을 대지문수사리보살이 거처한다고 하여 지리산이라 이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한 창건주이고, 의상조사는 문무왕 17년(677) 화엄사에서 화엄사상을 선양하고 장육전을 창건했으며, 그 안 4면 7칸에 화엄석경과 황금장육 입상을 모셔 화엄사를 중흥했다. 그래서 의상의 별호가 연기조사(緣起祖師)다. 도선국사는 속성이 김씨로 흥덕왕 원년(826) 영암에서 태어나 15살에 출가하여, 20살 때 곡성 동리산 태안사 혜철선사(惠哲禪師) 문하로 들어가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청학동 석굴에서 이인을 만나 풍수를 익힌 뒤, 화엄사로 와서 화엄사를 확장하고 도량의 기틀을 다졌다. 도선은 광양의 옥룡사에서 72세로 입적하였으며 그도 연기조사(烟起祖師)로 불린다. 마지막 연기법사는 황룡사로 출가하였으나 연기존자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엄사에 와서 정진수행하였는데, 의상조사의 제자로 효심이 지극했던 진정(眞定)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경덕왕 13년(754)에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기도 했다. 화엄사에는 이렇게 鷰起尊者(창건주), 緣起祖師(의상), 烟起祖師(도선), 緣起法師 등에 의해 대가람으로 번창할 수 있었다.
사리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로 연곡사 동·북부도가 가장? 화려하고, 귀엽고,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크기로는 울주 청량 망해사 동·서 부도가 위엄을 자랑한다. 화엄사 사리탑은 조금 특별하다. 흔히 절 뒤편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경내에 있을 뿐 아니라, 4마리 사자가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 4사자 3층 석탑은 의상보다 일찍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스님이 문수보살 상주처로 소문이 퍼진 화엄사에 와서는 연기존자의 천축 화엄학에 심취하였고, 연기존자를 기리기 위해 석탑을 세우고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73과를 봉안한 곳이다. 그런 자장스님도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자장이 꿈을 꾸는데 기이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자.”고 하여 그곳으로 갔으나, 기이한 스님은 보이지 않고 언뜻 문수보살이 모습을 보이더니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사라졌다. 이에 자장스님은 그곳을 문수보살을 친견한 인연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석남원(石南院) 이라는 도량을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 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어쩐 일인지 세우면 쓰러지고 세우면 쓰러지곤 했다. 스님이 백일기도를 끝낸 날 밤, 눈 덮인 산에서 칡 세 줄기가 뻗어 내려와 법당 자리에 멈추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도 탑을 세우는 등 불사에 진력하면서 문수보살을 기다렸다. 어느 날 다 떨어진 방포(方袍-네모진 가사)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절에 와서 자장 스님 뵙기를 청했다. 시봉이 “배가 고프니 정신이 왔다 갔다 하나 벼”하고는 일언지하에 “우리 스님이 어떤 분인데…”라며 거절했다. 늙은 거사는 물러서지 않고 “왠 말이 그리 많으냐? 어서 가서 내가 만나러 왔다고 일러라.”고 했다.
시봉은 늙은 거사가 하도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스님에게 말씀드리러 갔다. 이야기를 들은 자장이 대수롭지 않게 “잘 타일러 보내도록 해라.”고 했고, 시봉은 거사를 큰소리로 나무라며 내쫓았다. 이에 거사는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느냐?”고 혼자 중얼거리며 삼태기를 거꾸로 쏟았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죽은 강아지가 사자로 변했고, 거사는 사자를 타고 빛을 발하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시봉이 놀라 자초지종을 스님께 아뢰었다. 자장스님은 크게 탄식하며 “참으로 나의 아상이 문수보살 친견을 막았구나. 나의 수행이 헛것이라니…‧.”하고 거사가 사라진 남쪽 산으로 올라가 보았으나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자장스님이 입적할 때 제자들에게 말했다. “육신으로는 문수보살님을 만날 수 없어 내 이곳에서 입정에 들어 만나 뵙고 참회할 것이니, 3개월 동안 내 몸을 잘 보관토록 해라.”스님은 조용히 입정에 들어갔고 3개월이 지나도 안색이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 깨어나지는 않았다. 대중들은 그만 다비식을 하자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100일이 지나고 다비식을 가졌다. 식이 끝나자 공중에서 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몸은 이미 티끌이 되었으니 의탁할 곳이 없구나. 너희는 계에 의존하여 생사의 고해를 건너도록 해라.”
불자라면 다 잘 아는 〈신묘장구 대다라니〉라는 범어로 된 경이 있다. 이것은 능히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의 삶을 크게 이익되게 하고, 원하는 바를 얻게 한다는 주술이다. 다 옮기지는 못해도 일부를 보면 이렇다.
나무 라트나 트라야야
(삼보님에게 귀명합니다)
나맣 아리야 바로기테 스바라야 보디사트바야 마하보디사트바야 마하카루 니카야
(거룩하신 관세음보살님, 대자대비하신 대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옴 사르바 바예수 트라나 카라야 타스마이 나맣 스크르트바 이맘 아리야 바로기테 스바라 트야
(일체의 두려움 속에서 보호해주시고 고난 속에서 구호해 주심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신 관세음보살님의 위력에게 원합니다)
나무 티라칸타
(청색 머리를 하신 분에게 귀명합니다)
……
나무 라트나 트라야야
(삼보님에게 귀명합니다)
나맣 아리야 바로기테 스바라야
(거룩하신 관세음보살님에게 귀의합니다)
옴 시단투 반트라 파다야
(원력을 성취토록 진언구(眞言句)합니다)
보디 스바하
(깨달음을 성취복지(成就福智)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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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이라고 전남 구례에 있다. 관광명소이기도, 화엄사 말사이기도 하다. 이름에 의미가 있어 소개한다. 화엄사를 창건하기 전 연기존자는 가끔 길상대 묘향석에 앉아서 지리산과 화엄동천을 환희심으로 바라보며 문수보살을 염송하고 좌선하여 수행했다. 화엄사를 찾아오는 사부대중을 위해 화엄사상을 선양할 때도 제자들과 여기로 와서 수행하기도 했는데, 스님들은 그곳 석벽굴을 연기굴이라고도 불렀지만, 지금은 도선굴이라고 한다. 그 도선굴이 있는 길상대는 오산사(鰲山寺), 오산암(鰲山庵), 또는 선석암(禪石庵) 이라고 하는데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등 성승(聖僧) 4명이 수도한 곳이라 하여 사성암(四聖庵)이라고 한다.
세 분은 앞서 보았으나 진각국사(眞覺國師)는 누구인가? 속성은 최씨고, 화순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신종 4년(1201) 조계산 수선사 지눌에게 출가했다. 한때 오선사 묘향석에서 밤낮으로 선경을 익히기도 했고,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를 물려주려 사양해 지리산으로 피해, 연기존자가 정진하던 묘향대에서 용맹정진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결국 수선사로 들어가 조계종 2대 교주가 되었다. 1236년 문인 마곡에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는 말을 남기고 가부좌한 채로 앉아서 입적했다. 법명이 혜심인 그에게 고려 고종이 진각국사 시호를 내렸고, 문하에 몽여, 진훈, 각운, 마곡 등이 있어 법맥을 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화엄사 승려들도 서산대사, 사명대사처럼 승병을 일으켰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또 그로 인해 화엄사 8원 81암자가 잿더미가 되었고 웅장하던 장육전과 그 안에 보관되었던 화엄석경 등 귀한 보물들이 파괴되었다. 이것을 보수하고 중건한 이가 벽암선사(1575∼1660년)로, 속명은 김씨, 보은에서 태어나 10살 때 출가하여 19살이던 1593년 승병에 가담해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인조 8년(1630) 사부대중과 힘을 모아서 4사자 3층 사리탑, 화엄석등, 4사자 감로탑, 동서 5층석탑을 보수하였고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덕장전, 만월당 해우소, 보제류, 적묵당 화엄문, 요사채, 감로각, 대웅전, 명부전, 삼전, 영전, 나한전 등을 중창했다. 하지만 장육전만은 중창하지 못했는데 ‘숭유억불’로 제한된 조선시대에 오로지 스님들의 공력으로 이룬 과업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믿지만 - 저자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 태조 이성계 일당은 건국하면서 고려의 문벌 귀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 등 공헌한 바가 커서 그래도 견제가 덜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한양 외곽 70개 사찰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국 사찰의 재산과 노비를 몰수하고, 11개 종단이던 불종을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개로 축소했다. 세종은 이를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묶었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했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억불정책이 다소 약해졌지만, 성종은 엄격히 불교를 탄압했다. 그것은 《경국대전》에 잘 나타나 있다. 양반자제가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첩제(度牒制)를 시행했고 부녀자는 원칙적으로 출가를 금지했다. 만약 양반가에서 출가하려면 100필의 포(布)를 내야 했다. 일반백성도 가혹하게 150∼200필을 내야 했다. 성종 23년(1492)에는 이 도첩제마저 폐지해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연산군은 흥천사와 흥덕사를 공해(公廨-관아)로 삼았고 승려들을 노비로 만들었으며, 토지와 노비는 관부에서 몰수했다. 명종 5년(1550)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선교 양종을 부활하고, 보우(普愚)가 ‘판선종사도대선사’에 취임해 선종은 봉은사(奉恩寺), 교종은 봉선사(奉先寺)를 본사로 삼았다. 그러나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은 뒤 선교양종제를 폐지하고,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죽었다. 승려에게 환속이 강요되었으므로 깊은 산속에 숨어 겨우 명맥만 유지한 것이 조선시대 불교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8)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화엄사에 침입해 모든 전각을 불태우고 간 뒤, 벽암선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조정에서는 현판을 내리면서 불교계를 회유하려고 했다. 화엄사 대웅전 현판은 인조의 숙부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의창군의 글씨다. 왕족이 현판을 내리면 유생들이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이점이 있었다고 하기는 해도 현판은 오히려 불교를 무시하고 억불에 복종하라는 의미가 엿보인다고 한다. 청도 운문사도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에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 의아했지만, 화엄사에도 마찬가지란다. 벽암선사가 중창하며 대웅상적광전을 복원하여 삼신불을 모셨는데, 비로자나불이 본존불이니 현판을 ‘대웅상적광전’으로 써야 하는데,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신 곳에 사용하는 ‘대웅전’이란 현판을 내린 것이다.
화엄사 대웅전 현판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와 ‘대웅전(大雄殿)’이 두 개의 현판에는 「皇明崇禎 9年 歲舍丙子中秋 義昌君光」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로 인조 14년에 해당한다. 의창군은 이름이 光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서 본 지리산 명칭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智利山이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신라 때 地理山이라 불렀으며, 고려시대에 智異山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저자인 진조스님은 화엄사 창건주 뜻을 받들어 「智利山 華嚴寺」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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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가 얼마나 대단했던지는 사적기를 보면 알 수 있다. 1630년부터 6년 동안 중수한 뒤에 해안스님이 “이곳 화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몇몇 스님과 함께 토론하며 사직기를 준비했다. 8원 81암자에 대한 기억들이 희미해져 전체적인 기록은 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상적광전 21칸, 응향각 3칸, 칠층탑 1좌, 석련지 1마, 광명대 1쌍, 노주 1쌍”등 이라고 기록한 것인데, 그 내용이 자그마치 1페이지는 족히 넘을 정도다. 봉천원, 안지원, 홍교원, 서유원, 미타전, 선림원, 중림원 등 8원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가람의 위치까지 기록했다. 이렇게 기록한 60년 후 숙종 22년(1690) 이것을 목판본으로 간행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사적기에 기록하지 못한 암자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 용문암(龍門庵) 인조 14년 벽암선사가 화엄사를 중창 후 해안스님이 중수기를 기록한 곳으로 해안의 수도처다.
- 심원암(深源庵) 도선스님의 수도처다.
- 백련사(白蓮社) 고려 원묘국사(圓妙國師)가 창건했다.
요즘 화엄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이 각황전이라고 할텐데 여기에는 그 이름만큼 유명한 이야기가 전한다. 주지 계파선사가 취임하고 장육전 중건 불사를 서원으로 삼아 ‘가히 몸과 마음을 다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자.’고 하고는 먼저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회향하던 날 공양을 마치고는 스님들에게 꿈에 한 신인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큰 불사를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승(化主僧)을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항아리를 준비했으며 그 항아리에는 밀가루가 담겨 있다. 거기에 손을 넣어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중창 불사 화주승이 될 것이다.”고 하고는 곧바로 시행했다. 1천여 대주 스님들이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었으나 밀기루가 묻지 않은 스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공양주(절에서 밥짓고 일하는 여자)스님이 손을 넣자 밀가루가 묻어나지 않았다.
계파선사는 공양주에게 말했다. “스님이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이 천여 대중스님 중에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이곳 지리산 주인인 문수보살께서 꿈에서 지시한 대로 시행한 것이니 문수대성께서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양주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 걱정하다가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 내일 아침 화주를 찾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이에 용기를 얻어 부처님께 큰절을 올렸다.
날이 밝자 바로 일주문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화주승은 노파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식도 없이 혼자 움막에 사는 노파는 절에 자주 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둘은 친근하게 지내 온 사이로 어떻게 이 노파에게 장육전을 지어 달라고 한단 말인가? 그러나 간밤의 계시를 생각하고 공양주 스님은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외쳤다.
“오, 대시주시여!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노파는 익히 아는 사이라 농담하는 줄로 여겼다. 그러나 계속 절을 하는 공양주의 진지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공양주는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노파도 그녀의 정성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난을 한탄했다. 그리고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는 서원을 말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가호를 내리소서.”노파는 원력을 이루려고 수십 번 절을 했다. 그런 뒤 돌연 화엄골 아래 소(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공양주 스님은 대경실색했으나 노파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길로 돌아가지 않고 멀리 도망쳤다. 이일이 있고 5년 후 화창한 어느 봄날 공양주 스님 화주승이 창덕궁 앞에서 서성거리다 유모와 함께 궁궐 밖에 나와 놀던 어린 공주와 마주쳤다. 공주는 숙종과 인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로, 어머니인 인경왕후는 천연두를 앓다가 20살에 죽었으므로 어머니를 잃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데, 유모와 같이 궁밖에 나온 것이었다. 공주는 화주승을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꽉 쥔 채 펴지 못했다는데 화주승이 공주의 손을 붙잡고 매만지자 손이 펴졌고 손바닥에는 ‘장육전(丈六殿)’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소식을 들은 숙종이 화주승을 궁궐로 불러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게 했다. “오,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이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내 이루어 줘야 하고 말고”화주승이 공주의 방으로 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했다. “며칠 동안 죽은 노파가 꿈에 나타나 저는 노파가 천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자꾸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궁궐 앞에서 공주님을 뵌 것입니다. 이 일을 화엄사 사대부중에게 알리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주는 장육전 불사를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화주승은 공주를 위해 49재를 지낸 후 화엄사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말했다. 숙종은 공주를 위해 장육전 중창 비용 10만 냥을 희사했다. 그 돈으로 백두산에서 목재를 운반하는데 몇 년, 그것을 바닷물에 담그기를 몇 년, 말리기를 몇 년, 10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도 불사에 동참했다. 숙종 25년(1699년) 본격적인 중수가 시작되었고 3년 만에 완공되었다. 2층 48칸으로 장엄함이 비할 데 없을 정도다. 이를 영조의 원당으로 삼고, 1703년 삼존불과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7일간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다. 화엄사는 당연히 ‘장육전’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임금을 일깨워 중건했다’고 하여 조정에서는 각황전(覺皇殿)이라고 사액을 내리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이라고 칭하게 했다. 물론 각황이란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라는 의미로 쓰기도 한다. 각황전 상량문에는 영조 때 병조참판·의금부사·부제학 등을 지낸 채평윤(蔡彭胤)이 썼는데, ‘願堂大施主 延礽君 親王子 甲戌生 李氏 壽命長 成造大施主 親王子母 戊戌生 崔氏 壽命長’이라고 쓰여 있다. 연잉군(영조)의 수명장수를 발원하는 원당으로 삼은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대시주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크게 시주를 하면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니 어떻게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각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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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보았던 화엄사 홍매화 이야기다. 장육전 건립을 서원하고 100일 기도에 들어갔던 계파스님은 관음보살 계시로 거지 할매 환생으로 숙종의 시주를 받아 각황전을 건립한 다음에 준공을 기념해 붉디붉은 홍매화를 각황전 앞에 심고는 중생이 아름다운 자태로 환희심을 발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라고 기도했다. 홍매화는 장육매, 각황매 또는 화엄매라 부르기도 하고, 각황전의 상존불로 인해 삼불목(三佛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각황전 안에는 홍매화만큼 특별한 목탁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인산인해를 이룬 각황전 낙성식은 연기존자의 기일인 2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시작을 알리자 노전 스님이 큰 목탁 채를 들고 다섯 번을 쳤다. 그런데 그 목탁을 보고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들고 치지도 못할 만큼 큰 목탁을 왜 만드셨나요?”
노전(爐殿-법요의식을 맡은 스님)이 말했다. “큰 목탁을 보고 불자님과 시주님이 놀라셨을 듯합니다. 이 큰 목탁은 지리산에서 자란 나무로 조성한 것이며 화엄사를 찾아오는 불자님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염원목탁, 탐원목탁, 복탁입니다. 장육전 경탁 위에 놓인 이 큰 목탁 앞에서 합장하고 반배한 뒤 목탁을 천천히 세 번 치고 다시 반배하시면 됩니다.”그리고는 목탁을 세 번 치는 이유를 설명했다.
“첫 번째는 혼침(昏沈)과 산란을 깨우는 一心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능히 나도 살고 남도 살리고, 나도 깨닫고 남도 깨달을 수 있게 합니다.
두 번째는 목탁에서 울리는 空心이며 佛音입니다. 貪瞋痴 삼독이 비어 있으므로 공한 마음입니다. 불음이 우러나올 때 모든 중생의 업장을 녹고 청정과 해탈을 심어 줍니다.
세 번째는 귀중한 사찰의 佛具를 접하고 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목탁을 치는 것은 佛緣을 맺어주는 것이며 공덕을 쌓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福鐸인 것입니다.”낙성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목탁을 세 번씩치고 어루만지며 합장하고는 장육전 법당을 나왔다. 행운과 소원을 비는 소원탁이자 길상탁이 바로 이 목탁이겠다. 언제 다시 가게 되면 꼭 보고 만져보고 와야겠다.
부산 범어사에도 천왕문 뒤에 보제루(보제루-널리 어리석음을 구함)가 있지만, 이곳 화엄사 보제루의 현판은 ‘화장(華藏)’이라고 쓰여 있는데, 추사 김정희 글씨다. 이를 통해 당시 주지를 지낸 벽파선사와 추사와의 관계를 볼 수 있다. 벽파선사는 1767년(영조43)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고 벽파는 법호, 법명은 긍선(亘璇)이다. 부친 이종환은 선조의 부친인 덕흥부원군 10세손이며, 모친은 김해김씨다. 12세에 출가하여 24세 때 지리산 영원암에서 설파성언의 수계를 받았다. 설파의 법손이라 하여 벽파라는 당호를 받은 것이다. 많은 저술과 편력을 남기고 1852년(철종3) 입적했다. 법랍 75년, 세속 86세였다. 벽파의 법맥을 보면 설파성언 – 호암체정 – 환성지안 – 월담실제 – 풍담의심 – 편안언기 – 청허휴정으로 올라간다.
추사 김정희는 뛰어난 글씨체와 금석학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개발한 학자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불교학이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 화엄사라는 원찰을 두고 스님들과 교유하면서 불전을 섭렵하였고, 특히 초우선사와 벽파선사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청나라 유학자들은 그를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지칭했는데, 이런 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다. 벽파선사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해동의 달마’라고 할 만큼 교분도 두터웠다. 추사가 귀양에서 돌아온 얼마 뒤 벽파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엄사에 차려진 빈소를 찾았다. 주지 국운스님이 추사를 맞이했다.
“멀리 화엄사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귀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큰스님 빈소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벽파스님과 저의 인연은 달마상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 달마상 그리기를 즐겼는데 달마상을 그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벽파 상을 그렸다.’라고 했지요. 벽파스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저 보리달마를 그린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궁금한 마음에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구암사로 찾아간 저는 크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린 달마가 그림 속에서 뛰쳐나와 실제의 모습으로 현존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부터 저는 벽사스님을 ‘해동의 달마’라고 부르며 각별한 교유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벽파스님을 조문한 것을 기념하여 ‘화장’이란 글씨를 써 국운스님에게 드렸고 이를 편액으로 만들어 보제루에 걸었다.
추사보다 34살 연하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추사로부터 그림을 사사 받았다. 난초 그림뿐 아니라 글씨도 이어받아 명실공히 추사의 후계자라 할 수 있다. 추사도 석파(石坡-이하응의 호) 난초 그림이 자기보다 낫다고 찬사를 보냈다. 석파가 화엄사에 왔을 때 경내를 둘러본 뒤 보제루에서 쉬고 있는데 어간문 위 편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 자신의 서체와 똑같은 글씨체로 ‘華藏’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석파는 “저 글씨는 누가 썼는지요?”하고 주지스님에게 물었고, 스님은 벽파와 추사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고 추사가 벽파스님 다비식에 왔다가 기념으로 쓴 것이라고 하자, 그는 스승이 자신의 글씨체로 편액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는 스승의 글씨체인 추사체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라고 썼다. 이 편액은 견성당에 걸려 있다가 2015년 신축된 화엄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세존사리탑 -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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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가보면 ‘하느님을 믿습니까?’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특히 강조하고, 절에 가도 믿음을 강조한다.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인데, 화엄사 흥주스님은 수행인이라면 다음 열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했다. “첫째, 정토삼부경은 석존의 진실한 말씀이요, 결코 허광(虛誑-텅비거나 속임)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 “열째, 염불인은 이 명(命)이 다할 때 저 부처님이 반드시 와서 접인하여 극락국에 왕생케 하시고 다시는 육도 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줄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고 “의심은 도(道)에 장애가 된다. 원(願)과 행(行)이 생기(生起)할 수 있게 하면 자연히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게 되고,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법을 의지하여 행(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화엄사의 풍수지리는 섬진강 태극 형태가 화엄사 각황전 안으로 들어오는 태극의 기와 길상봉 백두의 기가 들어오는 곳에 있다고 한다. 고려 우왕 때(1385년 무렵)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을 때 광양만과 다사강(섬진강)에 왜구가 자주 출몰했다. 이때 왜구들이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려 하는데 진상면 섬거에 살던 수만 마리의 두꺼비가 지금의 다압면 섬진 나루터에 몰려서 진을 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고 하는데 이에 섬거마을 사람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 섬진강(蟾津江)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전설에 따라 화엄사에서도 돌두꺼비를 조성하여 4사자 감로탑 옆에 그것이 있었으나 2008년 이 역시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화엄사 돌두꺼비
경봉(鏡峰, 1892∼1982)스님 하면 일화들을 많이 남긴 이분을 생각하기 쉽지만, 1847년 현종 때 경봉(景峰) 스님이라고 있었다. 그는 보적암에서 수 많은 대중들에게 지리산 문수대(文殊臺)라는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을 말씀하고 계셨다. 원효가 수행한 곳이기도 한 이곳에 젊은 스님 두 분이 초암을 짓고 원효처럼 용맹정진하자고 약속했다. 스님들은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지고 산길을 올랐다. 산에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에 겨울이면 산길이 끊어지기 십상이었다. 식사만 빼고 하루종일 참선 정진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산발하고 눈물 콧물을 흘린 자국으로 얼굴이 산만한 한 노인이 스님들과 같이 수행할 것을 간청했다. 스님들은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겨울 수행이 끝낼 때까지 먹을 양식이 두 사람분뿐이었기 때문인데다 수행처가 비좁기도 했다. 그러나 노인은 재차 간절하게 부탁을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생각해 보면 이 겨울에 노인을 내쫓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먹을 것은 세 끼에서 두 끼로 죽이기로 하고 노인을 받아들인 뒤 함께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스님들이 졸면 노인이 죽비를 때리고, 노인이 졸면 스님들이 죽비를 때렸다.
그렇게 한겨울이 지날 무렵 노인은 두 스님에게 “그럼 수행 잘하시오”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는 옷 속에서 짧은 지팡이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지팡이는 곧 푸른 사자로 변했고 노인은 사자 등에 올라 탄 뒤 남쪽으로 사라졌다. 강설하던 경봉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 노인은 문수보살이 두 스님의 정진을 돕기 위해 화현하신 것이다. 보살은 법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뜻이 간절한 사람 앞에 나타나 도우신다. 문수보살은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보다 조금 낫거나 천한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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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2년 전인 1948년 10월 28일 공산 반란군은 구례에서 우익지도자 13명을 총살하고 쌀 100가마 현금 35만원 그리고 경찰서를 습격하여 탄약 수천 발을 훔쳐서 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이들 400여 명은 화엄사 근처에서 국군과 대치해 11월 1일 노고단 일대에서 소탕전이 전개되어, 200여 명은 포로로 잡고 나머지는 사살됐다. 6.25 직후 화엄사 주지 동월병선 스님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박병삼이란 아이를 애지중지했는데, 그가 지리산에서 내려오다 경찰에 잡혔고 어린 박병삼을 스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내원암과 보적암이 파괴되었고, 화엄사 만월당에는 사고처럼 많은 경전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인민군들은 이 경전을 찢어 불쏘시개로 쓰고, 뒤를 본 뒤 휴지로 사용했다. 스님들은 땅굴을 파고 숨어지냈다. 1951년 2월 11일 한밤중에 탱크 소리, 포 소리, 비행기 소리, 종소리가 쉼 없이 화엄사 경내에 울려 퍼졌다. 인민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노고단으로 도망갔다. 스님들은 국군이 진격한 줄 알았으나, 동이 트고 보니 탱크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 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으나 주민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 소리는 화엄사 스님들과 인민군에게만 들렸던 것이다. 스님들은 신기해했다. “사천왕께서 신통력으로 인민군을 쫓아내신 거로구나. 불법을 수호하신 거야.”라고 했다고 전한다.
크거나 전통이 있거나, 고찰이라고 하는 절에는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사천문과 사천왕이다. 그는 매우 험상궂게 표현되어 있어서 무섭다. 왜 그렇게 무섭게 그리거나 만들었을까?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사대천왕을 말한다. 그 방위에 따라서 각기 담당이 다르고 정법을 수호하고 마귀의 습격을 방지한다고 한다.
(東) 지국천왕(持國天王) :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南) 중장천왕(重藏天王) : 칼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들을 관찰하며 넓게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西) 광목천왕(廣目天王) :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北) 다문천왕(多聞天王) : 보천(보탑)과 삼차극 또는 창을 들고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 부귀를 담당하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한다.
화엄사 사천왕
미신적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다가오는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이다. 이날은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 등으로 불리는데,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그래서 이날은 기운을 다스리고자 소금 단지를 묻거나 지붕 아래 올려놓기도 한다. 화엄사에서는 금정암 뒤 비로봉에서 지난해 묻은 소금단지를 꺼내고, 그 자리에 다시 새 단지를 묻는다. 이는 화기를 눌러 화마로부터 산림과 사찰을 지킨다는 염원을 담은 화재 액막이다. 또 삼재팔란(三災八難)을 퇴치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삼재란 화재, 수재, 풍재를 말하고 팔란은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란(兵亂) 등 여덟 가지를 말한다. 삼재에는 들삼재, 눌삼재, 날삼재라는 것이 있는데, 믿지는 않아도 알아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본다. ‘입삼재’인 들삼재는 첫해에 가족이나 주변인이 화를 당하며, 두 번째 해인 ‘침삼재(枕三災-눌삼재)’는 머무는 해라고 해서 매사에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많이 생기는 것을 말하고, 마지막 해인 ‘날삼재(출삼재)’는 재물이나 명예가 훼손되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재앙을 말한다.
삼재라는 것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도둑 떼가 생기고 전쟁이 나고, 전염병으로 죽은 것을 소삼재(小三災)라 하고, 홍수나 화재, 태풍 등은 대삼재라고 한다. 이렇게 세상과 세월이 변하여 사람의 마음이 나빠지면 그것을 말세라고 하고 이 말세가 되면 나타나는 것이 재앙인 것이다. 삼재를 소멸하려면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수행하여 복을 받는 착한 일을 해야 한다. 부처님은 “삼재를 생각하지 말며 어리석은 마음을 깨달아 진리에 대한 밝은 눈을 떠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찰에서는 불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거북 형상을 만들어 두기도 하고(불영사) 소금단지를 묻기도(화엄사) 하지만, 전각 지붕에 치미(鴟尾-망새)를 올려서 재앙을 물리치려고 하기도 한다. 치미는 화재 예방의 기원을 담아 용마루 양쪽 끝에 세우는 용의 형상으로 용마루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또 처마 끝에는 풍경을 매달아 흔들리는 물고기르 달기도 하는데 물고리를 보면 광대한 푸른 하늘이 마치 물고기가 노니는 바닷물에 물고기가 노니는 것 같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물고기를 다니 허공 전체가 거대한 바닷물로 변하고 화재가 예방된다고 보아 처마 끝에 물고기 풍경을 다는 것이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말이 있다. ‘소경인 거북이 나무판자를 만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수명이 아주 긴 거북이지만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을 헤엄치다가 숨을 쉬기 위해 백 년에 한 번 물 위로 올라오는데 그때 우연히라도 그곳을 떠다니는 나무판자를 만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우리 인간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날 때 인간의 몸을 받을 확률은 그런 거북이와 같이 어렵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인신난득(人身難得)이며 참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수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는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는 구절이 있다. 백천만겁이 지나도 부처님 법을 만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4난’이란 것을 말했다.
① 인신난득 사람의 몸을 받기 어렵고,
② 설법난(說法難) 기연(機緣)이 닿지 않으면 부처님 설법 듣기 어렵고,
③ 문법난(聞法難) 부처님 법을 듣기 어려우며,
④ 신수난(信受難) 부처님 믿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토끼처럼 잘난 채도 빠르지도 말며, 거북이처럼 느리지도 우둔하지도 말고 중용(中庸)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그것을 위해 ‘4만’ 즉, 4가지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라고 한다.
① 증상만(增上慢) 최상의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은 것처럼 교만하게 우쭐대는 일
② 비하만(卑下慢) 남보다 훨씬 못함에도 자기는 조금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
③ 아만(我慢) 자신을 높여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
④ 사만(邪慢) 덕이 없으면서 있다고 생각하는 일 -《법화경》이는 하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최인호의 ‘길없는 길’에서 기행 스님으로 그려지기도 한 경허스님은 어머니 앞에서 바지를 홀라당 벗어서 어머니를 놀라게 하면서 내가 어릴 때는 그렇게도 안아주고 빨아주더니 왜 그러느냐고 했다고 해 쓴 웃음을 짓게 한 그 경허스님이 서산 천장암에 머물다가 설법을 위해 동학사로 와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법회가 열었다. 먼저 동학사 강백 진암스님이 설법을 했다. “나무는 비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아니하고 반듯해야 쓸모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도 마음이 불량하지 않고 착하고 정직해야 합니다.”고 했다. 이어서 경허선사 차례가 되자, “비뚤어진 나무는 비뚤어진대로 쓰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쓰면 됩니다. 불량하고 성실치 못한 사람도 그 나름의 착함과 성실함이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귀한 것, 모두가 부처님이요, 관세음보살입니다.”고 했다. 대중들은 누구 설법에 더 감동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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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구층암은 1936년 8월 27일 태풍 3693호로 법당과 요사채 모두 훼철되고 말았다. 당시 서남해로 올라온 태풍으로 사망·실종자가 무려 1,232명이나 되었는데 근대 이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이듬해 3월까지 구층암은 일현스님 주선으로 중건되었다. 그런데 태풍으로 구층암 마당에 있던 모과나무 세 그루가 모두 쓰러졌고 일현스님은 살아서 향을 주던 모과나무를 버릴 수 없다며 암자복원에 사용하기로 하고 기둥으로 삼되 대패질조차 하지 않고, 2개는 본체요사에 하나는 대중요사체에 사용했다. 모과나무는 살아서 부처님께 향공양을, 죽어서는 등신불처럼 등신목이 되어 상주하고 있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
책 맨 끝에는 화엄사 여러 전각의 기둥에 붙여져 있는 주련을 소개하고 있다. 모두 여기에다 옮겨보아도 좋겠지만 한자로 되어 있어서 대웅전과 각황전에 있는 주련만 옮겨 본다.
〈대웅전 주련〉
사오백주수유항(四五百株垂柳巷) 사오백 그루 수양버들 마을(거리항)
이삼천척관현루(二三千尺管絃樓) 이삼천 척 누각의 관현소리 그윽하고
자라장리산진주(紫羅帳裏撒眞珠) 자주비단 장막에 진주를 뿌리나니
누각중중화장계(樓閣重重華藏界) 누각은 겹겹이 연화장 세계로구나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법비 내려 중생의 이익이 허공가득하고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 그릇따라 이익을 얻는구나
→ 1∼4연을 선문염송집에서, 5∼6연은 의상조사 법성계 중 21,22句
〈각황전 주련〉
위론웅경망불통(偉論雄經罔不通) 기신론 화엄경 통달 못함이 없고
일생홍호유심공(一生弘護有深功) 일생동안 널리펴고 지키신 공덕 깊다
삼천의학분등후(三千義學分燈後) 삼천 의학에게 법등을 나눠 주신 후
원교종풍만해동(圓敎宗風滿海東) 원교의 종풍 해동에 가득하네
→ 대각국사 의천이 의상조사를 흠모한 讚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