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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경 (典 經)
【행록 1장 1절】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 「수벌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隋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 오니라.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에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 · 우창(愚昌) · 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 곳에 살았도다.
【행록 1장 2절】이곳은 예로부터 봉래산(蓬萊山) · 영주산(瀛州山) · 일명 신선봉(一名神仙峰) 방장산(方丈山)의 세 산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워 오던 곳이로다.
【행록 1장 3절】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에 망제봉(望帝峰)과 영주산(瀛州山)이 우뚝 솟으니 그 뒷기슭과 함께 선인포전(仙人布氈)을 이룩하고 있도다. 망제봉(望帝峰)의 산줄기가 기복연면하여 시루산을 이룩하였도다.
【행록 1장 4절】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 · 강동(講洞) · 배장골(拜將谷) · 시목동(柿木洞) · 유왕골(留王谷) · 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 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사거리(德川四街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로다.
【행록 1장 5절】객망리에 강씨 종가인 진창 어른부터 六대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탄강하셨으니, 상제의 성은 강(姜)씨이오. 존휘는 일순(一淳)이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고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니라. 때는 신미(辛未)년 九월 十九일인 즉 이조 고종(李朝高宗) 八년이며 단기로서는 四千二百四년이고 서기로는 一千八百七十一년 十一월 一일이로다.
【행록 1장 6절】그리고 그 탄강하신 마을을 손바래기라고 부르며 당시에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北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라고 부르더니 지금은 정읍군덕천면신월리(井邑郡德川面新月里) 새터로 고쳐 부르도다.
【행록 1장 7절】객망리는 상제께서 탄강하시기 이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더니 후에는 객망리(客望里)라 하고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로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도다.
【행록 1장 8절】부친의 성함은 문회(文會)이며 자는 흥주(興周)이고 그는 범상에 우렁찬 음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의 위엄은 인근 사람만이 아니라 동학의 의병들에게 까지 떨쳤도다.
【행록 1장 9절】모친은 권(權)씨이며 성함은 양덕(良德)이니 이평면(梨坪面) 서산리(西山里)에 근친가서 계시던 어느날 꿈에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으면서 천지가 밝아지는도다. 그 뒤에 태기가 있더니 열 석달만에 상제(上帝)께서 탄강 하셨도다.
【행록 1장 10절】상제께서 탄강하실 때에, 유달리 밝아지는 산실(産室)에 하늘로부터 두 선녀가 내려와서 아기 상제를 모시니 방안은 이상한 향기로 가득 차고 밝은 기운이 온 집을 둘러싸고 하늘에 뻗쳐 있었도다.
【행록 1장 11절】상제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고 관후하시며 남달리 총명하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꺽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시지 않을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도다.
【행록 1장 12절】상제께서 일곱살 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훈장(訓長)으로부터 놀랄 경(驚)의 운자를 받고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遠步恐地坼大呼恐天驚)」이라고 지으셨도다.
【행록 1장 13절】상제께서 글방에 다니실 때 훈장으로부터 들으신 것은 그 자리에서 깨우치시고 언제나 장원하셨도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노라. 훈장이 서동(書童)들의 부모에 미안함을 느껴 속으로 다음 서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시험을 뵈었으나 역시 상제께서 장원하셨던 바 이것은 상제께서 훈장의 속셈을 꿰뚫고 그로 하여금 문체와 글자를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하도다.
【행록 1장 14절】상제께서 열 세살 되시던 어느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사람 유 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장에 가셨도다. 그는 볼 일이 있어 가고 상제께서는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유 덕안이 곧 돌아와서 상제와 함께 온 장판을 찾아 헤매었으나 날이 저물어 찾지를 못한지라. 상제께서 덕안의 귀가 권유를 물리치고 덕안에게 일러 돌려보내고 그 길로 다음 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침 잃으신 모시베를 팔러 나온 자가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
【행록 1장 15절】상제께서는 어렸을 때 남달리 장난을 즐기셨도다. 강 연회(姜然會)와 강 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상제님과 힘자랑을 하였느니라. 상제께서는 돌로 만든 맷돌 밑짝의 가운에 중쇠를 잇빨에 물고 올리시니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더라. 때로는 마당에 서서 발로 지붕 처마 끝을 차기도 하고 때로는 한손으로 용마름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발뒤꿈치와 두 팔을 땅에 대고 떠 있는 몸으로 장정 십여인으로 하여금 허리를 땅에 닿게 하였으나 장정들은 힘만 빠지고 상제의 허리는 흔들리지도 아니하니라. 어느날 여럿이 상제와 장낭을 하는데 상제께서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를 돌리듯이 하시더라고 김 광문은 전하도다.
【행록 1장 16절】상제께서 여러 글방으로 자주 드나드실 때 글씨의 청을 받으시면 반드시 글줄 끝마다 한 두 자쯤 쓸만한 빈 곳을 남기고 써 주셨도다.
【행록 1장 17절】상제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오십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이때 훈장이 학동에게 시를 짓게 하니 상제께서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그 시격의 절묘에 훈장과 서동들이 크게 놀라니라. 박 부자도 심히 기이하게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들과 함께 글읽기를 청하는지라. 상제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머물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그는 이에 감동되어 증서를 불사르고 채권을 탕감하였도다.
【행록 1장 18절】상제께서 정해(丁亥)년 어느날 외가에 행하셨도다. 어떤 술 주정꾼이 까닭없이 상제께 욕설을 퍼붓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아니하시니 난데없이 큰 돌 절구통이 떠 와서 그의 머리 위를 덮어씌우니 그는 절구통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니 상제께서 몸을 돌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도다.
【행록 1장 19절】상제께서 송광사(松廣寺)에 계실 때 중들이 상제를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께서 꾸짖으시기를 「산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하시고 법당 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 사죄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대로 회복하려고 여러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도다.
【행록 1장 20절】상제께서 갑오(甲午)년에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이 비범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도다. 글방은 처남의 집이고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金溝郡草處面內住洞)에 있었도다.
【행록 1장 21절】이 해에 고부인(古阜人) 전 봉준(全琫準)이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時政)에 반항하니 세상이 흉동되는지라. 이 때에 금구인 김 형렬(金亨烈)이 상제의 성예를 듣고 찾아 뵈인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하므로 글방을 폐지하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全州郡雨林面東谷) 뒷산에 있는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 곳도 번잡하기에 다른 곳으로 떠나셨던 바 그 곳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도다.
【행록 1장 22절】갑오년 오월 어느날 밤 상제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중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고 아뢰는도다.
【행록 1장 23절】전 봉준(全琫準)이 학정(虐政)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 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알으시고 여름 어느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
【행록 1장 24절】고부지방의 유생들이 을미(乙未)년 봄에 세상의 평정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열었을 때 상제께서 이에 참여하시니라. 이때 한 노인이 상제를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모셔가더니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그 책을 통독하셨도다.
【행록 1장 25절】유생들은 세상이 평온하다고 하나 세도는 날로 어지러워졌도다. 상제께서 이때 비로소 광구 천하하실 뜻을 두셨도다.
【행록 1장 26절】오월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그리하여 매우 염려하는 상제의 부친을 보고 유 덕안(兪德安)은 대신하여 상제를 찾으려고 의관을 갖추고 객망리를 떠났도다. 그가 태인(泰仁) 강심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은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고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 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나에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지라. 관군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아 덕안이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어 있었도다. 무서움에 쫓겨 그는 먼 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어가니 날이 새기 시작하니라. 등불은 간데 온데 없는 산중이었도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그는 이 재생의 인도를 호랑이가 불빛을 비쳐 준 것으로 믿었도다. 얼마후 상제께서 객망리에 홀연히 돌아오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을 보시고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말씀하며 위로 하시니 그는 더욱 자신의 재생을 상제의 덕화라고 굳게 믿으며 재생의 감격을 되새기니라. 당시는 가릴사이 없이 마구 죽이는 판국이었도다.
【행록 1장 27절】상제께서 임인년 어느날 김 형렬과 함께 금산사(金山社) 부근의 마을에 가서 계셨도다. 이 부근의 오동정(梧桐亭)에 살고 있던 김 경안(金京安)이란 사람이 기독교의 신약전서를 가지고 있었던 바 상제께서 어느날 김 형렬에게 신약전서 한권을 구하게 하시니라. 그는 이르신대로 그로부터 책을 빌려다 상제께 드렸더니 상제께서 그것을 불사르셨도다.
【행록 1장 28절】그 후 어느날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오동정을 찾아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이 자리에 경안이 찾아와서 빌려준 신약전서를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형렬이 우물쭈물하면서 딱한 표정만 짓고 앉아있노라니 상제께서 가름하시면서 「곧 돌려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마침 이 때에 그 곳을 한 붓 장수가 지나가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불러들이고 음식을 권한 다음에 그 붓 상자를 열어보이라고 청하시니 그가 분부에 좇으니라. 상제께서 「그대는 예수를 믿지 아니하니 이 책은 소용이 없을 터이므로 나에게 줄 수 없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음식 대접을 받은 터이어서 기꺼이 응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책을 경안에게 돌려주시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하였도다.
【행록 1장 29절】상제의 신성하심이 하운동(夏雲洞)에도 알려졌도다. 이 곳에 이 선경(李善慶)이란 자의 빙모가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인을 찾고 「그대의 아내가 四十九일 동안 정성을 드릴 수 있느냐를 잘 상의하라」분부하시니라. 주인은 명을 받은 대로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도 일찍부터 상제의 신성하심을 들은 바가 있어 굳게 결심하고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다시 주인에게 어김없는 다짐을 받게 하신 뒤에 공사를 보셨도다. 그 여인은 날마다 머리를 빗고 목욕재계한 뒤에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에 준비하니라. 이렇게 여러날을 거듭하니 아내가 심히 괴로와하여 불평을 품었도다. 이날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아 아내가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노라니 상제께서 주인을 불러 「그대 아내는 성심이 풀려서 떡이 익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사과하게 하라.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도다」고 이르시니라. 주인이 아내에게 이 분부를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방에 나와 상제께 사과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시루를 열어보니 떡이 잘 익어 있었도다. 부인은 이로부터 한결같이 정성을 드려 四十九일을 마치니 상제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 정성을 치하하시므로 부인은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니 상제께서 부인을 위로하고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있는 그 증거를 보라고 하셨도다.
【행록 1장 30절】상제께서 정읍으로부터 진펄이나 논이나 가리지 않고 질러오셨도다. 이것을 보고 류 연회(柳然會)란 동리 사람이 「길을 버려두고 그렇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하니 상제께서「나는 일을 하느라고 바쁘건만」하시며 그대로 가시니라. 이 일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측량기사가 되어 신작로를 측정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이 바로 상제께서 함부로 걸어가신 선이 되니라. 지금 덕천(德川) 사거리에서 정읍을 잇는 신작로가 바로 그 길이로다.
【행록 1장 31절】김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있던 어느날 상제께 진묵(震黙)의 옛 일을 아뢰었도다. 「전주부중(全州府中)에 한 가난한 아전이 진묵과 친한 사이로서 하루는 진묵에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물으니 진묵이 사옥소리(司獄小吏)가 되라고 일러주니 아전은 이는 적은 직책이라 얻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후에 아전은 옥리가 되어 당시에 갇힌 관내의 부호들을 극력으로 보살펴주었나이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여 출옥한 후에 옥리에게 물자로써 보답하였다 하나이다. 그리고 진묵은 밤마다 북두칠성을 하나씩 그 빛을 가두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여 칠일만에 모두 숨겨버렸다 하나이다. 태사관(太史官)이 이 변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심이니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시어 옥문을 열고 천의에 순종하사이다하고 조정에 아뢰오니 조정은 그것이 옳음을 알고 대사령을 내렸다 하나이다.」 이 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진실로 그러하였으리라. 내가 이를 본받아 한달 동안 칠성을 숨겨서 세상 사람들의 발견을 시험하리라」하시고 그 날 밤부터 한달 동안 칠성을 다 숨기시니 세상에서 칠성을 발견하는 자가 없었도다.
【행록 1장 32절】상제께 김 형렬이「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율곡(栗谷)이 이 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 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 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1장 33절】상제께서 일진회가 발족되던 때부터 관을 버리시고 삿갓을 쓰고 다니시며 속옷을 검은 것으로 외의를 흰것으로 지어 입으셨도다. 「저 일진회가 검은 옷을 입었으니 나도 검은 옷을 입노라」말씀하시고 문 밖에 나오셔서 하늘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구름의 안이 검고 밖이 흰 것은 나를 모형한 것이니라」하셨도다.
【행록 1장 34절】상제께서 구릿골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시고 그 곳에서 월여를 보내시다가 다시 회선동(會仙洞)에 이르시니라. 이 곳에 김 보경(金甫京)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집 외당에 상제께서 계셨도다. 이 때 그는 모친의 위독함을 상제께 아뢰니라. 이를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오늘 밤은 명부사자(冥府使者)가 병실에 침입하여 나의 사자의 빈틈을 타서 환자를 해할 것이니 병실을 비우지 말고 꼭 한 사람이 방을 지키면서 밤을 새우라」하시니라. 보경이 이르심을 좇아 가족 한 사람씩 교대로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기로 하고 가족들을 단속하였느니라. 여러날이 계속되매 식구들이 졸음에 못 이겨 상제의 이르심을 잊어 갔도다. 이날 밤 보경이 깨어 방을 지키다가 깜박 잠에 빠졌던 바 이 때 상제께서 외당에서 급히 소리쳐 부르시니라. 그가 놀라 깨어 보니 벌써 모친은 운명하여 있었도다. 상제께서 말씀하신 나의 사자는 바로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로되 식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도다.
【행록 1장 35절】이날 밤에 객망리 앞 달천리에 별안간 우뢰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자 오 동팔(吳東八)의 집이 무너졌도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니라. 그후 얼마 지나 그가 무너진 집의 재목을 모아가지고 집을 세우기를 여러번 되풀이 하였으되 그때마다 집이 무너지는도다. 그는 부득히 술집을 거두고 움막을 치고 농사로 업을 바꿨느니라. 농사로 살아오던 어느날에 면이 없는 사람이 와서 움막살이의 참상을 보고 손수 집을 한나절만에 세우고 흔적없이 그대로 돌아가는지라. 사람들은 수십일 걸릴 일을 하루도 못 되게 완성한 것에 크게 놀랐도다. 사람들은 이것이 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사 신장을 보내신 덕이라 믿고 더욱 상제를 좇는도다.
【행록 1장 36절】김 형렬은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상제를 모시고 있었도다. 그런던 어느날 형렬이 상제의 말씀 끝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송 시렬(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라고 아뢰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그러하랴. 이제 나 있는 지붕을 살펴보라」하시니라. 형렬이 밖에 나가 살펴보니 일기가 차고 백설이 쌓였는 데도 오직 계시는 그 지붕에 한 점의 눈도 없을 뿐아니라 맑은 기운이 하늘에 뻗쳐 구름이 가리지 못하고 푸른 하늘에까지 통하니라. 그후에도 살펴보면 언제나 상제께서 머무시는 곳에 구름이 가리지 못하는도다.
【행록 1장 37절】금산사 청련암(靑蓮庵)의 중 김 현찬(金玄贊)이 전부터 상제의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상제를 만나게 되어 명당을 원하니 상제께서 그에게 「믿고 있으라」고 이르셨도다. 그후 그는 환속하여 화촉을 밝히고 아들을 얻었느니라. 그리고 김 병욱(金秉旭)이 또한 명당을 바라므로 상제께서 역시 「믿고 있으라」고 말씀하셨도다. 그후 그도 바라던 아들을 얻었느니라. 수년이 지나도록 명당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기에 병욱은 「주시려던 명당은 언제 주시나이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니 이미 그 명당을 방았느니라」고 이르시고 「선천에서는 매백골이장지(埋白骨而葬之)로되 후천에서는 불매백골이장지(不埋白骨而葬之)니라」고 말씀을 하셨도다. 그후 얼마 지나 현찬이 상제를 뵈옵고 명당을 주시기를 바라므로 상제께서 「명당을 써서 이미 발음되었나니라」고 말씀이 계셨도다.
【행록 1장 38절】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으나 상제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때가 있느니라. 「고부에 나보다 항렬이 높은 친족들이 계시는도다. 내가 그들을 대할 때에 반드시 항렬을 좇아 말하게 되느니라. 이것은 윤리상 전통이라.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만 모든 신명은 그들의 불경한 언사를 옳지 않게 여기고 반드시 죄로 인정하느니라.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친족과의 왕래를 적게 하느니라」하셨도다.
【행록 2장 1절】상제께서 정유(丁酉)년에 다시 정 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형렬(亨烈)의 아들 찬문(贊文)과 그 이웃 서동들을 가르치셨도다. 이때에 유불선 음양참위(儒佛仙陰陽讖緯)를 통독하시고 이것이 천하를 광구함에 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시고 얼마동안 글방을 계속하시다가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의 길을 떠나셨도다.
【행록 2장 2절】금구 내주동을 떠나신 상제께서는 익산군 이리(裡里)를 거쳐 다음날 김 일부(金一夫)를 만나셨도다. 그는 당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문도에게 펼치고 있던 중 어느날 일부가 꿈을 꾸었도다. 한 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일부에게 강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오르라는 천존(天尊)의 명하심을 전달하는도다. 그는 사자를 따라 사옥과 함께 옥경에 올라가니라.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금궐 요운전(曜雲殿)에 그들을 안내하고 천존을 배알하게 하는도다. 천존이 상제께 광구천하의 뜻을 상찬하고 극진히 우대하는도다. 일부는 이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돌연히 상제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도다. 일부는 상제께 요운(曜雲)이란 호를 드리고 공경하였도다.
【행록 2장 3절】상제께서 이 곳에 며칠 머물고 다시 계속하시여 경기(京畿) · 황해(黃海) · 평안(平安) · 함경(咸鏡) · 경상(慶尙)도의 각지에로 두루 유력하셨느니라. 어느날 상제께서 전주부에 이르시니 부중 사람들이 상제를 신인으로 우러러 모시니라.
【행록 2장 4절】주유하시다가 상제께서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 함열(萬人咸悅)」이라 기뻐하셨도다.
【행록 2장 5절】상제께서 어느 때 내장산(內藏山)에 가셨을 때에
세계유이차산출(世界有而此山出) 기운금천장물화(紀運金天藏物華)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 도인하사다불가(道人何事多佛歌)
라고 읊으셨도다.
【행록 2장 6절】또 어느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보습금강경(步拾金剛景) 청산개골여(靑山皆骨餘)
기후기려객(其後騎驢客) 무흥단주저(無興但躊躇)
를 외워 주시니라.
【행록 2장 7절】상제께서 삼년 동안 주유하신 끝에 경자(庚子)년에 고향인 객망리에 돌아오셔서 시루산 조모님의 묘를 면례하시니 이 때 류 서구(柳瑞九)가 지사(地師)로서 상제를 보좌하였도다. 이후에 상제께서 항상 시루산 상봉에서 머리를 푸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던 어느날 호둔하고 앉아 계셨을 때 마침 나뭇군들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기겁하여 상제의 부친께 아뢰는지라. 부친께서도 당황하여 시루봉에 오르니 범은 보이지 않고 상제께서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공부하고 계시는 것만이 보였도다.
【행록 2장 8절】상제께서 객망리 시루봉에서 공부하시다가 밤이 되면 간간이 유 덕안의 집에 내려가셔서 쥐눈이콩 한 줌을 얻어 냉수와 함께 잡수시곤 하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의 아들 칠룡(七龍)을 바라보시고 「네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구나」고 말씀하셨느니라. 상제께서 시루봉에 오르시면 산천이 크게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셨도다. 이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두려워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도다.
【행록 2장 9절】상제께서 시루산에서 공부하시다가 이따금 산밑에 있는 샘터 너머에서 우시기도 하셨는데 한번은 부친께서 밥을 가지고 시루봉에 오르다가 그 광경을 보았도다.
【행록 2장 10절】그러시다가도 다시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어느날 시루봉에서 진법주(眞法呪)를 외우시고 오방신장(五方神將)과 四十八장과 二十八장 공사(公事)를 보셨도다. 이후에 상제께서 목에 붉은 수건을 걸고 쌍정리(雙丁里)에 있는 김 기진(金基鎭)의 집에 가셔서 그에게 공사에 관해서 말씀하셨도다. 이 집에 동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곤 하였도다.
【행록 2장 11절】상제께서 공부하시는 소문이 그 지방에 전해지자 고부(古阜) 경무청은 상제께서 요술공부를 한다하여 붙잡으려고 순검들을 보내오니 상제께서는 순검이 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삿갓을 쓰고 길가에 나가서 안개를 짓고 앉아 계셔도 순검들이 몰라보고 지나가곤 하였도다.
【행록 2장 12절】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 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日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七월 五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으시고 방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 잠시 후에 상제께서 밖으로 나오시니 그 입으신 옷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남루한지라. 주지승 금곡이 곧 상제의 본댁에 사람을 보내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부인 정씨(鄭氏)는 의복을 내여놓으며 불경한 말을 하니라. 이것은 평소에 상제께서 가사를 돌보시지 않았던 불만에서 나온 소치였도다. 금곡이 그 의복을 상제께 올리니 가라사대 「이 옷에 요망스러운 계집의 방정이 붙었으니 속히 버리라」하시고 입지 않으셨도다. 이 일을 금곡이 다시 사람을 시켜 부인에게 전하니 그제야 비로소 부인 정씨가 뉘우치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다시 새옷을 올렸도다.
【행록 2장 13절】그후 어느날 금곡이 상제를 정중하게 시좌하더니 상제께 저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였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 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九十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하시니라.
【행록 2장 14절】하루는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범 판안에 있는 법을 써서 일하면 세상 사람의 이목의 저해가 있을 터이니 판밖에서 일하는 것이 완전하리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2장 15절】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 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 무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함인가」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도다. 상제께서 「알았으니 물러들 가있거라」고 타이르시니 수 많은 금수들이 그 이르심을 좇는도다.
【행록 2장 16절】그리고 상제께서 어느날에 가라사대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社)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상제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白豪珠)가 있고 왼 손바닥에 임(壬)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戊)자가 있음을 종도들이 보았도다.
【행록 2장 17절】김 형렬이 어느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정(鄭) 집전이라 하는 사람은 지식이 신기한 사람이외다. 저의 증조가 계실 때에 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었나이다. 동리 사람들이 보리고개를 앞에 두고 걱정하였는데 이 걱정을 알고 금광을 가리켜주어서 공생을 면케 하였으며 많은 영삼(靈蔘)을 캐여 병든 사람을 구제하였고 지난 임술(壬戌)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미리 말하였나이다. 저의 증조께서 그의 지식을 빌어 명당 하나라도 얻어서 그 여음을 후세에 끼치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저의 한이 되는 일이로소이다」고 여쭈는지라. 듣고만 계시던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런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남인 너의 집의 밥을 헛되게 먹으리오.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하셨도다.
【행록 2장 18절】상제께서 어느날 형렬에게
부용병지요재숭례이중록(夫用兵之要在崇禮而重祿)
예숭즉의사지 녹중즉지사경사(禮崇則義士至祿重則志士輕死)
고녹현불애재상공(故祿賢不愛財賞功) 불유시즉사졸병적국삭(不逾時則士卒並敵國削)
을 외워 주시고 기억하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2장 19절】김 도일(金道一)이 앓고난 뒤에 어느날 지팡이를 짚고 상제를 뵈오러 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그 지팡이를 빼앗아 꺾어 버리시니 그는 할 수 없이 서있게 되었도다. 이후부터 그는 요통이 쾌차하였느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도일에게 가라사대 「문밖에 나가서 서쪽 하늘에 붉은 구름이 떠 있나 보라」고 하시니 그가 나가보고 들어와서 그러함을 아뢰였도다. 다시 상제께서 가라사대 「금산(金山) 도득(圖得)하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하셨도다.
【행록 2장 20절】상제께서 계묘년에 객망리에 계셨도다. 삼월 어느날에 형렬에게 「신명에게 요금을 줄터이니 여산 윤 공삼(礪山尹公三)에게 가서 돈을 얻어오라」하시니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김 병욱이 전주 거부인 백 남신(白南信)을 천거하는도다.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고 위정 술을 많이 드신 후에 신발을 벗으신 채 대삿갓을 쓰시고 병욱을 앞세우고 그의 집에 가시니라. 이 때 장 흥해(張興海)가 와 있었으며 마침 남신이 병욱의 집에 들어서는지라. 병욱이 상제께 손님이 온 것을 아뢰이니 누워 계시던 상제께서 몸을 일으켜 앉으시나 처음 대하는 예를 베풀지 않으시고 다짜고짜 그에게 「그대가 나의 상을 평하라」말씀 하시니 그가 「상리를 알지 못하나이다」하거늘 상제께서 「상리는 참되지 못하나니 속평을 하라」하시니 그가 「속평에 얼굴이 방정하고 풍후하면 부하고 미간 인당에 백호주가 있으니 가히 부귀 쌍전하리로 소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웃으시며 「그대의 상을 평하면 입가로 침이 부글부글 나오니 이는 소가 마구 삭이는 격이라. 가히 부호가 되리라. 내가 쓸 곳이 있으니 돈 십만냥을 가져오라」이르시니라. 남신이 묵묵히 말이 없다가 「칠만냥을 드리겠나이다. 어떠 하나이까」여쭈니라. 상제께서 응락하지 않으시니 남신이 다시 여쭈니라. 「십만냥을 채우려면 서울에 있는 집까지 팔아야 하겠나이다.」그는 드디어 십만냥을 만들어 드릴 것을 응락하는도다. 병욱이 증인이 되어서 증서를 써서 상제께 올리니 상제께서 그 증서를 받으셔서 병욱에게 맡기시니 병욱과 흥해가 세상에 드문 도량이심을 탄복하였도다. 그후 증서를 상제께서 불사르셨도다. 이로 인하여 백 남신이 상제를 좇기 시작하였도다.
【행록 2장 21절】계묘년 가을에 가뭄이 동곡(銅谷)에 계속되었도다. 김 성천(金成天)은 동곡에서 밭을 부쳐 업으로 삼으니라. 그 나물밭에 가뭄 때문에 뜨물이 생겨 채소가 전멸케 되었는지라. 상제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죽을 사람에게 기운을 붙여 회생케 하는 것이 이 채소를 소생케 하는 것과 같으니라」하시고 곧 비를 내리게 하셨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출타하셨다가 얼마 후에 돌아오셔서 자현에게 「김 성천의 나물밭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니라. 자현이 「지난 비로 소생되어 이 부근에서는 제일 잘 되었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아서 병든 자와 죽는 자에게 기운만 붙이면 일어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2장 22절】계묘년도 저물어 가고 추수가 끝나 농부들이 벼를 들에서 말리기에 바쁜지라. 상제의 부친도 벼를 말리기 바쁘고 새와 닭을 쫓기에 애를 쓰느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 마땅히 여기니 사람을 먹일 수 있겠나이까」고 말씀하시면서 만류하셨도다.
【행록 2장 23절】상제께서는 일진회가 일어난 후부터 관을 버리시고 대삿갓을 쓰시더니 정읍에 가신 후부터 의관을 갖추셨도다.
【행록 2장 24절】안 필성(安弼成)이 못자리를 하려고 볍씨를 지고 집을 나서려는데 상제를 뵈였도다. 상제께서 「쉬었다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말씀하셨으되 필성이 사양하는지라. 「못자리를 내기에 바쁜 모양이니 내가 대신 못자리를 부어주리라」하시고 지게 위에 있는 시나락 서너말을 망개장이 밭에 다 부으셨도다.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못하고 앉아서 주시는 술을 마시면서도 근심하였도다. 주모가 들어와서 씨나락은 가지고 온 그릇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알리는도다. 필성은 이상히 여겨 바깥에 나가 뿌려서 흩어졌던 씨나락이 한 알도 땅에 없고 그대로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전보다 한층 더 상제를 경대하는도다.
【행록 3장 1절】해는 바뀌어 갑진(甲辰)년이 되었도다. 상제께서 정월 보름에 곤히 주무시는데 갑자기 장 흥해(張興海)의 부친이 상제를 찾아 손자의 빈사를 아뢰고 살려 주기를 애원하는지라. 상제께서 혼몽중에 「냉수나 먹여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집에 돌아가서 앓는 손자에게 냉수를 먹였느니라. 얼마 있지 않아 그 아이가 숨을 거두었도다.
【행록 3장 2절】흥해의 부친은 본래 성질이 사나와서 부중 사람들로부터 천둥의 별명을 가졌느니라. 그는 손자의 죽음에 분통이 나서 상제를 원망하니라. 「이것은 고의로 손자를 죽인 것이 분명하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아무리 위독한 병이라도 말 한 마디로 고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도다. 내 손자를 고의로 죽이지 않았다면 물은 고사하고 흙을 먹였을 지라도 그 신통한 도술로 능히 낫게 하였으리라.」 그는 분노에 못 이겨 몽둥이를 들고 와서 상제를 난타하니 상제께서 유혈이 낭자하니라. 그제서야 상제께서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일어나시려고 하시니라. 이때 그는 살인범이라고 소리치며 상제를 결박하여 장방(長房)으로 끌고 가다가 갑자기 결박을 풀면서 「이것이 다 나의 잘못이니다. 어린애가 급병으로 죽은 것을 어찌 선생님을 원망하리오.」 뉘우치 듯이 말하고 옛 정으로 돌아가시기를 원하며 자기 집으로 동행하시자고 권하는지라. 상제께서 들으시지 않고 서 원규(徐元奎)의 집에 가셔서 그날 밤을 지내시고 이튿날에 전주(全州) 이동면(伊東面) 이 직부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 3장 3절】흥해의 부친이 상제를 장방으로 끌고 가다가 돌려보낸 것은 상제께서 백 남신으로부터 받으신 돈 증서를 가지고 계심을 알고 돈을 청구하려는 속심에서였도다. 상제께서 그 속심을 간파하시고 흥해의 집으로 따라가시지 않으셨도다.
【행록 3장 4절】다음 날에 흥해의 부친은 상제를 서 원규의 집에서 찾았으되 헛탕을 치니라. 그는 또 화가 치밀어 상제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고 마구 지껄이면서 상제가 계실만한 곳을 여기 저기 찾으니라. 그는 상제를 찾다 못 찾으니 상제의 식구들을 전주군 화전면 화정일에서 찾고 행패를 부렸도다. 이때 상제의 가족은 이곳에 있는 이 경오(李京五)의 좁은 방에 이사하여 살고 있었도다.
【행록 3장 5절】김 형렬은 흥해의 부친의 행패를 전혀 모르고 상제의 소식을 듣고자 화정리에 왔도다. 그를 흥해의 가족들이 결박하여 서 원규의 집에 끌고 가서 상제가 계신 곳을 대라고 족치는지라. 서 원규 · 김 형렬은 상제께서 가신 곳을 몰라 그 가족들로부터 구타만 당하였도다.
【행록 3장 6절】이로 인하여 상제의 가족은 화를 피하여 태인 굴치로 가고 형렬은 밤중에 피하고 원규는 매일 그들의 행패에 견디다 못 견디어 약국을 폐쇄하고 가족과 함께 익산(益山)으로 피하였도다.
【행록 3장 7절】상제께서는 장 흥해의 변에 제하여 부친의 소실인 천원 장씨(川原張氏)에게 「술을 빚으라」이르시고 「누구든지 술을 먼저 맛보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어느날 상제의 부친이 오시자 장씨는 상제께서 하신 말씀을 잊고 웃 술을 먼저 떠서 드리니라. 얼마 후에 상제께서 돌아오셔서 술에 먼저 손댄 것을 꾸짖으시고 「가족들이 급히 피하여야 화를 면하리라」말씀하시고 나가셨도다. 흥해 가족들이 달려와 장씨에게 「상제의 모친이냐」고 추궁하자 장씨가 당황하여 「내가 바로 모친이라」하니 흥해 가족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강제로 모친을 앞세우고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수없이 구타하니 이때에 낯 모르는 백발 노인이 옆에 서 있다가 말하는도다. 「자식의 잘못으로 부모에게 폭행한다는 것은 사람으로 할 짓이냐」고 꾸짖자 그제야 흥해 부자가 물러가니라. 그들이 떠나간 후 겨우 장씨는 정신을 되찾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얼마간 지나서 상제께서 장씨에게 들러 그 시말 이야기를 들으시고 「생지황(生地黃)의 즙을 내어 상처에 바르라」고 말씀하시니 장씨가 그대로 행하니 그날로 몸이 회복되었도다.
【행록 3장 8절】어느날 종도들이 상제를 뵈옵고 「상제의 권능으로 어찌 장 효순의 난을 당하였나이까」고 물으니라. 상제께서 「교중(敎中)이나 가중(家中)에 분쟁이 일어나면 신정(神政)이 문란하여지나니 그것을 그대로 두면 세상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기운을 받아서 재앙을 해소하였노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3장 9절】상제께서 갑진년 정월에 장 효순 화난을 겪으시고 직부의 집에 가셔서 월여를 머무시다가 다시 형렬의 안내로 원평(院坪) 김 성보(金成甫)의 집에 머무시게 되었도다. 그 때 정 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고 하되 베어도 베어지지 않으니 상제께서 친히 한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10절】화적(불한당)이 갑진(甲辰)년에 대낮에도 횡행하였도다. 이해 二월에 상제께서 갑칠(甲七)을 데리시고 부안(扶安) 고부(古阜) 거문바위 주막에 이르시니 그 주막에 화적을 잡기 위해 변복한 순검 한 사람이 야순하다가 쉬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모에게 「저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니 주식을 주지말라. 주식을 주었다가 죽으면 대금을 받지 못하니 손해가 아니냐」고 일러주시니라. 이 말씀을 그 순검이 듣고 몹시 분격하여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면서 상제를 구타하니라. 그래도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죽을 사람으로부터 맞았다 하여 무엇이 아프리오」말씀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셨도다. 주모가 그에게 「저 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인이시니 따라가서 사과하고 연고를 물어보시라」고 말하는지라. 순검이 곧 상제의 뒤를 따라가서 사과하고 연고를 여쭈어 물으니라. 가라사대 「오늘밤에 순시를 피하고 다른 곳으로 빨리 가라」하시니 순검은 명을 좇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니라. 얼마 후에 화적 여럿이 몰려 와서 주모를 난타하며 순검의 거처를 대라고 졸랐도다. 화적들은 순검을 죽이려고 미리 작정하고 습격한 것이어서 이튿날 그 순검이 상제께 배알하고 재생의 은혜에 흐느껴 울었도다.
【행록 3장 11절】이달에 상제께서 볼일이 계셔서 태인(泰仁) 신배(新培)의 동리에 들어서시니 불이 나는도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점점 강해져 온 동리를 삼킬듯 하니라. 도저히 끌 수 없으리라 판단하시고 상제께서 「불을 피워 동리를 구하리라.」 말씀하시고 형렬을 시켜 섶나무로 불을 마주 피우게 하시니 불이 곧 꺼졌도다.
【행록 3장 12절】이 해 五월에 백 남신을 체포하라는 공문이 서울로부터 전주부에 전달되니 남신이 당황하자 김 병욱이 남신에게 작년 겨울에 자기가 화난을 당하였을 때 상제의 도움으로 화난을 면하였음을 알리니 그는 병욱을 통해 상제의 도움을 청하였도다. 상제께서 「부자는 돈을 써야하나니 돈 십만냥의 증서를 가져오라」하시니라. 병욱이 곧 남신으로부터 십만냥의 증서를 받아 가지고 이것을 상제께 올렸도다. 그 후에 남신은 화난에서 풀리면서 남(南) 삼도(三道)의 세무관이 되어 몇 만냥의 돈을 모았고 상제께서는 그 후에 증서를 불사르셨도다.
【행록 3장 13절】상제께서 이해 유월에 김 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그는 상제의 말씀을 좇아 전주로 가서 김 병욱을 만나고 상제와 만날 날짜를 정하고 돌아오니라. 그가 돌아오는 길에 장 흥해의 부친 장 효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라. 형렬은 모든 것을 상제께 아뢰면서 「장 효순은 진작 우리의 손에 죽었어야 마땅하거늘 저절로 죽었으니 어찌 천도가 공정하다 하오리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들으시고 「이 무슨 말이냐 죽은 자는 불쌍하니라」고 꾸짖으셨도다. 그 이튿날 상제께서 병욱과의 약속이 있으심에도 전주부로 가시지 않고 형렬을 이끌고 고부로 향하시는지라. 형렬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상제께서 병욱과의 약속을 어기시는 이유를 여쭈었으나 상제께서 웃으시며 대답을 하시지 않았도다.
【행록 3장 14절】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七월에 있었도다. 최 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군 각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상제께서 화정리의 이 경오(李京五)를 찾아 돈 칠십냥을 청구하시니 그가 돈이 없다고 거절하였도다. 부득히 다른 곳에서 돈 일곱냥을 구하여 가지시고 「이 돈이 능히 칠십냥을 대신하리라」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형렬을 대동하시고 용머리 주막에 돌아오셔서 많은 사람을 청하여 술을 권하여 나누시고 난 후에 종이에 글을 쓰고 그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그 주막의 문 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두시니라. 그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니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입성하니라. 이 일에 상제께서 소비하신 돈이 엿냥이었도다. 가라사대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백만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엿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하셨도다.
【행록 3장 15절】이후에도 얼마간 상제께서 그 주막에 머무르셨도다. 밤마다 부내의 순검들이 순회하면서 사람들을 조사하여 일진회원을 색출하는지라. 상제께서 일진회원에게 「그대들이 이 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 무슨 일을 하느뇨.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관부의 조사를 면케 하리라」말씀하시니 이로부터 그렇게 엄격하던 취체가 풀렸도다.
【행록 3장 16절】이와 같이 범사가 풀린 후에 상제께서 경오에게 「내가 그대들에게 돈 칠십냥이 있음을 알고 청구한 것인 바 왜 그렇게 속이느뇨」고 말씀하시니 그가 정색하여 「참으로 없었나이다」고 여쭈니라. 그 이튿날 경오의 집에 화적이 들어 그 돈을 모두 잃었도다. 그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 돈에 척신이 범함을 알고 창생을 건지려고 청한 것이어늘 그가 듣지 아니하였도다.」
【행록 3장 17절】어느날 상제께서 문 공신(文公信)에게 돈 서른냥을 지니게 하시고 피노리를 떠나 태인 행단(杏亶) 앞에 이르셨도다. 주막에 들러 술을 찾으시니 주모가 술이 없다고 대답하시기에 상제께서 「이런 주막에 어찌 술이 없으리요」라고 하시니 주모가 「물을 붓지 아니한 새 독의 술이 있나이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술은 새 독의 술이 좋으니라. 술에 안주가 있어야 하리니 돼지 한 마리를 잡으라」분부하시고 글을 써서 주모에게 주어 돼지 막 앞에서 불 사르라고 이르시니 주모가 그대로 행한 바 돼지가 스스로 죽으니라. 또 상제께서 주모에게 「돼지를 삶아 먼저 맛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죽으리라」분부하셨도다. 상제께서 삶은 돼지를 그릇에 담아 뜰 가운데 술을 전주로 걸러서 마루위에 놓게 하시고 글을 써서 주인을 시켜 뜰 한가운데서 불사르게 하신 후에 공신과 주인과 참관한 마을 사람과 행인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잡수셨도다. 이 때 상제께서 큰 소리로 「무엇을 더 구하느뇨. 글자 한자에 하나씩만 찾아가면 족하리라」고 외치셨도다.
【행록 3장 18절】그 이튿날 아침에 공신이 술과 고기 값으로 서른 석냥을 몽땅 갚은 뒤에 상제께서 공신을 데리시고 행단을 떠나 솔밭 속으로 지나시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이놈이 여기에 있도다」하시는도다. 공신이 놀라서 옆을 보니 동자석(童子石) 만이 서 있도다. 그곳에서 원평으로 행하시는 도중에 공신에게 「훗날 보라. 일본 군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러 천명을 상하게 할 곳이니라. 그러나 글자 한자에 하나씩 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요」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그후에 일진회원 수천명이 떼를 지어 그곳을 지나다가 일본 군사가 의병인 줄 알고 총을 쏘니 스물 한명이 죽었도다.
【행록 3장 19절】금구 수류면 평목점(金溝水流面坪木店)에서 정 괴산(丁槐山)이라는 자가 집안이 가난하여 주막의 술장사로 겨우 호구하면서 매양 상제를 지성껏 공양하더니 상제께서 어느날 우연히 주막에 들렀을 때 괴산이 상제께 올리려고 개장국을 질솥에 끓이다가 질솥이 깨어지므로 그의 아내가 낙담하여 울고 섰거늘 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셔서 쇠솥 하나를 갖다 주었더니 이로부터 그의 가세가 날로 늘어났도다. 그 후에 그가 태인 방교(泰仁方橋)에로 이사하게 되자 그 쇠솥을 수류면 환평리(環坪里) 정 동조(鄭東朝)에게 팔았더니 이로부터 괴산은 다시 가난하게 되고 정 동조는 도리어 살림이 일어나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솥을 복솥이라 불렀도다.
【행록 3장 20절】상제께서 부안을 거쳐서 고부 입석리 박 창국(朴昌國)의 집에 이르러 수둥다릿병으로 며칠동안 신고하셨도다. 이때 상제의 누이가 되는 창국의 부인이 맨발로 풀 밭에 다니는 것을 보시고 「이 근처에 독사가 있으니 독사가 발을 물면 어찌하느냐」고 걱정하시고 상제께서 길게 휘파람을 부시니 큰 독사 한 마리가 담장 밖의 풀 밭에서 뜰 아래로 들어와 머리를 드니라. 이 때에 창국이 바깥에서 들어오다가 독사를 보고 크게 놀라서 짚고 있던 상장으로 뱀을 쳐 죽였도다. 이것을 보시고 「독사혜(毒蛇兮) 독사혜(毒蛇兮) 상인견지(喪人見之) 상장타살(喪杖打殺) 도승견지(道僧見之) 선장타살(禪杖打殺). 누이는 상장도 선장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독사를 제거하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누이가 맨발로 땅에 묻어있는 피를 밟으면 해를 볼까 봐 손수 그것을 밟아서 독기를 제거하셨도다.
【행록 3장 21절】八월에 김 형렬이 입석리(立石里)에 계시는 상제를 배알하고자 찾았도다. 상제께서 수둥다릿병이 다소 회복되었으므로 형렬의 안내로 하루 이삼십리씩 걸어서 함열 회선동의 김 보경의 집에 이르셨도다.
【행록 3장 22절】상제께서 언제나 돈 한 두냥을 몸에 지니고 다니셨도다.
【행록 3장 23절】상제께서 김 형렬을 앞세우고 익산군 만중리(益山郡萬中里) 황 사성(黃士成)의 집에 이르러 머무실 때 어떤 사람이 얼굴에 노기를 띄고 문을 홱 닫는 바람에 벽이 무너졌도다. 이것을 보시고 곧 상제께서 같은 동리의 정 춘심(鄭春心)의 집에 옮기시니라. 황 사성의 부친 숙경이 황 참봉(黃參奉)으로부터 돈을 얻어 썼으나 그는 죽고 그 아들이 사람을 시켜 숙경에게 갚을 것을 독촉하려 온 것인데 그 자가 빚을 갚지 않으면 경무청에 고발하여 옥에서 신세를 썩게 하리라고 위협하고 가는 마당에 상제께 들린 것이외다.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벽을 무너뜨렸으니 그 일은 풀리리라. 삿갓 한 닢과 필목 한 필을 사 오라」고 숙경에게 이르시고 「이것은 양자 사이의 길을 닦는 것이니라」고 이르셨도다. 연말에 순검이 채무관계로 숙경을 잡으므로 숙경이 순검에게 채권자의 집에 들러 주시기를 간청하니 순검이 그 채권자의 집에 데리고 가니 참봉의 아들이 숙경이 잡혀온 것을 보고 힐난하거늘 그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저 어른은 너의 부친의 친구이신데 네가 차마 그 분을 옥에 가두게 하다니 금수와 같은 행위를 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하면서 아들로부터 증서를 빼앗아 불살랐도다.
【행록 3장 24절】갑진(甲辰)년에 도적이 함열에서 성 하였도다.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거니와 김 보경도 자기 집이 부자라는 헛소문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느니라. 이해 구월 중순 경에 상제께서 함열 회선동 김 보경의 집에 오셨도다. 보경이 「도적의 해를 입을까 염려되오니 어찌 하오리까」고 근심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며 보경의 집 문앞에 침을 뱉으시니라. 상제께서 떠나신 후로 도적이 들지 않았도다.
【행록 3장 25절】갑진년 十一월에 전주에 민요가 일어나서 인심이 흉흉하니라. 이 소란 중에 상제께서 전주에 이르셨도다. 김 보경이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김 병욱이 국가의 중진에 있으니 민심의 동요를 진무하여 그 천직을 다하여야 할 일이거늘 그 방책이 어떤 것인지」하시고 궁금히 여기시니 보경이 병욱에게 이것을 전하였느니라. 병욱은 「나의 힘으로 물 끓듯 하는 민요를 진무할 수 없으니 상제의 처분만을 바라옵니다」고 말씀드렸도다. 상제께서 보경으로부터 사정을 알아차리시고 웃으시기만 하시니라. 이날 밤에 눈비가 내리고 몹시 추워져 노영(露營)에 모였던 민중은 눈비와 추위에 견디지 못해 해산하고 사흘동안 추위와 눈비가 계속 내리므로 민중이 다시 모이지 못하니 민요는 스스로 가라앉았도다.
【행록 3장 26절】상제께서 섣달에 원평에 와 계셨을 때에 박 제빈(朴齊斌)이 전라도 전주에 출두하고 군수 권 직상(權稷相)이 파직될 것이란 소문이 떠돌므로 김 병욱도 전주 군 장교에 있는 신분으로서 일이 어찌 될까 염려하여 상제를 찾아뵈옵고 걱정하니 상제께서 「근심하지 말라 무사하리라」고 일러 주셨도다. 며칠 후에 박어사가 전주부에 들어섰으나 그의 면관비훈이 전주부에 내려오므로 상제의 말씀대로 일은 무사하였도다.
【행록 3장 27절】상제께서 을사년 김 보경의 집에서 종도들에게 소시에 지은 글을 외워 주셨도다.
운래중석하산원(運來重石何山遠) 장득척추고목추(粧得尺椎古木秋)
상심현포청한국(霜心玄圃淸寒菊) 석골청산수락추(石骨靑山瘦落秋)
천리호정고도원(千里湖程孤棹遠) 만방춘기일광원(萬方春氣一筐圓)
시절화명삼월우(時節花明三月雨) 풍류주세백년진(風流酒洗百年塵)
풍상열력수지기(風霜閱歷誰知己) 호해부유아득안(湖海浮遊我得顔)
구정만리산하우(驅情萬里山河友) 공덕천문일월처(供德千門日月妻)
또 하나를 외우셨도다.
사오세무현관선령 생유학사학생(四五世無顯官先靈生儒學死學生)
이삼십불공명자손 입서방출석사(二三十不功名子孫入書房出碩士)
【행록 3장 28절】상제께서 을사(乙巳)년 봄 어느날 문 공신에게 「강 태공(姜太公)은 七十二둔을 하고 음양둔을 못 하였으나 나는 음양둔까지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29절】상제께서 금산사 용화동(金山寺龍華洞)의 주막에 들르셔서 술을 잡수시려고 하였으나 술이 없었기에 술을 빚었던 항아리에 물을 부으시고 손으로 저으신 후에 마시고 또 종도들에게도 나눠 주시니 그 맛이 꼭 본래의 술 맛과 다름이 없었느니라. 이 일은 병오년 정월에 있었도다.
【행록 3장 30절】김 갑칠이 친산을 면례하려고 모든 기구를 준비하였더니 상제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면례하여 주리라」하시고 준비한 모든 물품을 불사르시고 난 뒤에 「그 재를 앞 내에 버리고 하늘을 쳐다보라」하시니 갑칠은 이상한 기운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뻐치는 것을 보았도다.
【행록 3장 31절】상제께서 어느날 류 찬명(柳贊明)과 김 자현(金自賢) 두 종도를 앞세우고 각각 십만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오십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명씩 포덕하라」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 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 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32절】상제의 부친께서 이해 七월 초에 동곡에 가서 상제를 찾으니라. 부친은 형렬의 안내로 임파군 둔리(屯里) 김 성화(金性化)의 집에 인도되었으나 며칠 전에 군항(群港)으로 떠나 상제께서 계시지 않았으므로 다시 뒤를 쫓아 군항에서 상제를 뵈옵게 되었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군항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오니 속히 돌아가심이 좋을까 하나이다」고 말씀하시니 그 이튿날에 집으로 되돌아가고 상제께서는 군항에 월여를 머무시다가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 3장 33절】상제께서 병오(丙午)년 十월 어느날 예수교당에 가셔서 모든 의식과 교의를 문견하시고 「족히 취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34절】상제께 김 형렬이 「많은 사람이 상제를 광인이라 하나이다」고 고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거짓으로 행세한 지난날에 세상 사람이 나를 신인이라 하더니 참으로 행하는 오늘날에는 도리어 광인이라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35절】상제께서 정미(丁未)년에 원일에게 「내가 四월 五일에 태인으로 갈 터이니 네가 먼저 가서 사관을 정하고 기다리라」고 이르시고 원일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이튿날 고부 객망리의 주막에 이르러 형렬에게 「나는 이 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태인에 가서 원일이 정한 사관에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태인 하마가(下馬街)에서 나를 기다리라」하셨도다. 형렬이 원일을 만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곳에 이르니 마침 장날이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였도다.
【행록 3장 36절】상제께서 이 곳에서 형렬을 만나 그를 데리시고 한산(韓山) 객주집에 좌정하시고 원일을 부르셨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술을 가져오라. 내가 오늘 벽력을 쓰리라」하시니 그는 말씀에 좇아 술을 올렸더니 상제께서 잔을 받으시고 한참 동안 계시다가 술을 드시니 여태까지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음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인에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이 일에 대하여 형렬과 원일에게 설명하시기를 「내가 이제 아침에 객망리 주막 앞을 지날 때에 한 소부가 길가의 풀에 내린 이슬을 떨며 지나가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소부가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가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 뒤를 한 노구가 지팡이를 짚고 가며 소부의 자취를 묻는도다. 내가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 노구가 앞에 간 소부는 나의 며느리이다 가운이 불행하여 어제 밤에 자식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장사를 치루기 전에 오늘 새벽에 도망 갔나이다. 며느리는 저희끼리 좋아서 정한 작배이니이다고 대답하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에게 「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오.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어찌 천노를 받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오늘 내가 벽력으로써 응징하였노라」고 하셨도다. 그 며느리는 벽력에 죽었노라고 전하는도다.
【행록 3장 37절】정읍(井邑) 사람 차 경석(車京石)이 정미년 오월에 처음으로 상제를 배알하였느니라. 이 때 상제께서는 용암리(龍岩里) 수침막(水砧幕)에 머물고 계셨도다. 그는 원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낸 사람이라. 그는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 때 상제께서도 김 자현(金自賢)과 몇 종도를 데리고 이 주막에 들르셨도다. 경석은 상제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하심을 알고 예를 갖추어 말씀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태연히 대하시니 그는 여쭈어 말하기를 「무슨 업을 행하시나이까」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의술을 행하노라」고 말씀을 건너시고 술을 마셨도다. 그러시다가 상제께서 계탕 한 그릇을 그에게 권하시니 그가 받은 뒤에 그릇에 벌 한 마리가 빠져 죽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망서리고 있는 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벌은 규모있는 벌레니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속으로 감복하는도다. 그는 상제께 서류를 꺼내어 보이면서 그 곡절을 여쭙고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이 송사를 처결한다 하온데 선생님께서 판단하여 주소서.」하고 상제를 시험코자 답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 지언정 어찌 살기를 띄리요」하시니 경석은 더욱 위대하심에 경복하여 곧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기를 청하면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묻는도다. 이에 상제께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고 하시니라. 경석은 머물고 계시는 곳을 모르고 헤어지면 다시 배알할 기회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날이 저물어 상제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좇으니라. 닿은 곳이 용암리(龍岩里) 물방앗집이니라. 경석은 그 식사와 범절이 너무 조촐하여 한시도 견디기 어려워 하였도다.
【행록 3장 38절】경석이 그 물방앗집에서 열흘 동안 묵으면서 상제께 정읍으로 가시기를 간청하였으되 상제께서 응하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노하시고 때로는 능욕하시기도 하고 구축도 하여 보셨느니라. 그래도 경석은 끝끝내 떠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서 「그럼 네가 나를 꼭 따르려거든 모든 일을 전폐하고 내가 하라는 일에만 전력하여야 할지니 너의 집에 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유월 초하루에 다시 이곳으로 오라. 그러면 함께 가리라」고 이르시니 그는 곧 돌아가서 가사를 대략 정리하고 그 날짜에 용암리에 다시 와서 상제께 배알하고 정읍으로 가시기를 또 청하는도다. 상제께서 불응하시다가 사흘 후에 허락하여 말씀하시를 「내가 목이 잠기는 깊은 물에 빠져서 허위적거리다 헤엄쳐서 겨우 발목이 닿는 물에 이르렀는데 이제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려 하는도다」고 하셨도다.
【행록 3장 39절】훗날에 상제께서 경석을 보고 「너는 강령을 받아야 하리라」하시고 「원황정기 내합아신(元皇正氣來合我身)」의 글귀를 읽게 하신 후에 문을 조금 열으시니 경석이 그 글을 따라 읽다가 갑자기 방성 대곡하는지라. 상제께서 일각쯤 지나서 울음을 그치게 하셨도다.
【행록 3장 40절】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에게
명월천강심공조(明月千江心共照) 장풍팔우기동구(長風八隅氣同驅)
라고 하셨도다.
【행록 3장 41절】상제께서 그 후 경석에게 「너의 선묘인 구월산(九月山) 금반사치(金盤死雉) 혈음(穴蔭)을 옮겨와야 되리라」고 명하시고 공우에게 북을 치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 혈음은 반드시 장풍(長風)을 받아야 발하리라」하셨도다. 이 때 이 도삼(李道三)의 아우 장풍(長豊)이 문득 들어오거늘 공우가 북채를 잠간 멈추고 「장풍이 오느냐」고 인사를 하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이제 그만 그치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42절】상제께서 어느날 이 도삼에게 글 석 자를 부르게 하시니 그가 천 · 지 · 인(天地人) 석자를 불렀더니 상제께서
천상무지천(天上無知天) 지하무지지(地下無知地)
인중무지인(人中無知人) 하처귀(何處歸)
라고 그에게 읊어 주시니라.
【행록 3장 43절】어느때 고양이를 보시고
취력미온전신모(嘴力未穩全信母) 난심상재불경인(卵心常在不驚人)
신래성국삼천리(身來城國三千里) 안변서천십이시(眼辨西天十二時)
라고 지으셨도다.
【행록 3장 44절】유월 어느날 신 경원(辛敬元)이 태인에서 사람을 급히 보내어 순검이 날마다 저의 집에 와서 상제의 계신 곳을 묻는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그 사람을 보고 「급한 일로 오는 사람이 도중에서 지체하다가 늦어진 것은 무슨 일이뇨」꾸짖으시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오는 길에 당화주역으로 운명을 비판하는 자가 있으므로 잠깐 지체되었아오니 용서하소서」하니 상제께서 곧 글을 써 주시며 「이 글을 경원에게 주고 보고 난 후에 곧 불사르라」이르시니 그 글은 이러하니라.
천용우로지박즉 필유만방지원(天用雨露之薄則必有萬方之怨)
지용수토지박즉 필유만물지원(地用水土之薄則必有萬物之怨)
인용덕화지박즉 필유만사지원(人用德化之薄則必有萬事之怨)
천용지용인용통재어심(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
심야자귀신지 추기야문호야도로야(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개폐추기출입문호 왕래도로신(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혹유선혹유악(惑有善惑有惡)
선자사지악자개지(善者師之惡者改之)
오심지추기문호도로 대어천지(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행록 3장 45절】상제께서 태인 김 경현(金京玄)의 집에 여러 날 머무르시다가 평상시와 달리 좁은 길로 그 곳을 떠나셨도다. 읍내 무뢰한들이 모여서 강 증산(姜甑山)은 요술로써 사람을 속이니 우리가 혼을 내어주자고 음모하고 상제께서 떠나실 때를 기다려 습격하려고 길가에 매복하였으나 상제께서는 미리 아시고 다른 좁은 길을 택하신 것이로다.
【행록 3장 46절】김 덕찬(金德贊)의 누이동생 집에서 묘제가 있었던 바 덕찬이 상제께 매가에 가셔서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상제께서 「나의 술을 먼저 마시라」하시니 그가 「무슨 술이옵나이까」고 여쭈니 「좀 기다려 보라」하시니라. 얼마 후에 공우가 삶은 닭과 술을 가져와서 상제께 드리니 이에 덕찬이 감복하여 술을 마셨도다.
【행록 3장 47절】상제께서 정미년 시월 어느날 경석에게 돈 삼십냥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하시면서 어떤 법을 베푸시고
계분수사파(溪分洙泗波) 봉수무이산(峰秀武夷山) 금회개제월(襟懷開霽月) 담소지광란(談笑止狂瀾) 활계경천권(活計經千卷) 행장옥수간(行裝屋數間) 소신구문도(小臣求聞道) 비투반일한(非偸半日閑)
이라는 시를 읽어 주셨도다.
【행록 3장 48절】상제께서 김 형렬을 보고
폐의다구승금갑(弊衣多垢勝金甲) 퇴옥무원사철성(頹屋無垣似鐵城)
을 외워주셨도다.
【행록 3장 49절】또 상제께서 이 해 겨울에 그에게 잘 기억해 두라고 이르시면서 시를 외우셨도다.
처세유위귀(處世柔爲貴) 강강시화기(剛强是禍基) 발언상욕눌(發言常欲訥) 임사당여치(臨事當如癡) 급지상사완(急地尙思緩) 안시불망위(安時不忘危) 일생종차계(一生從此計) 진개호남아(眞皆好男兒)
【행록 3장 50절】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맹자(孟子) 한 절을 일러주시면서 그 책에 더 볼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천장강대임어사인야(天將降大任於斯人也) 필선노기심지(必先勞其心志) 고기근골(苦其筋骨) 아기체부(餓其體膚) 궁핍기신행(窮乏其贐行) 불란기소위(拂亂其所爲) 시고(是故) 동심인성(動心忍性) 증익기소불능(增益其所不能)
【행록 3장 51절】상제께서 이해 섣달에 고부 와룡리에 계시면서 문 공신과 신 경수의 두 집에 왕래하셨도다. 하순에 형렬이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입고 계시던 의복을 내어 주시면서 집에 돌아가 빨아서 자현과 함께 다시 오라고 이르셨도다. 그는 말씀대로 행하여 상제를 배알하고 의복을 올렸도다.
【행록 3장 52절】상제께서 형렬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자현과 함께 문 공신의 집에 있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 나는 신 경수에게 가 있으리니 관리가 나의 거처를 묻거던 숨기지 말고 실토하라.」 좌중의 종도들이 영문을 모르고 이상히 여기는도다. 이것을 아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관리를 두려워하면 제각기 흩어져서 마음대로 돌아가라」하시니 저희들이 더욱 의심하는도다.
【행록 3장 53절】이 때가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를 보시는 때이었도다. 때마침 면장과 이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면장에게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나요.」이 말을 듣고 놀라 두말없이 돌아가서 관부에 고발하였느니라. 이 때 상제께서 고운 일광단(日光緞)으로 옷을 지어 새로 갈아입으셨도다.
【행록 3장 54절】상제께서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에 따라 화난이 닥칠 것을 종도들에게 알리셨도다. 「정미년 십 이월 이십 사일 밤 새벽에 백 순검이 오리라」고 종도들에게 알리시니 저희들은 순검 백명이 닥치리라 생각하고 흩어지는 종도들이 있었으나 태인 새울 백 낙규(白樂圭)의 형인 백순검이 새벽녘에 다녀갔도다.
【행록 3장 55절】이십 오일 밤중에 무장한 순검 수십명이 갑자기 공신의 집을 포위하고 좌중에 있던 사람을 결박하고 상제의 거처를 묻기에 신 경수의 집에 계시는 것을 말하니 순검들이 곧 달려갔도다. 그들은 방문에 총대로 구멍을 뚫고 위협하느니라. 상제께서 방안에서 총대를 잡으시고 호령하시니 저희들이 겁을 먹고 총대를 빼려고 잡아당겨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도다. 잠시 있다가 상제께서 들어오라고 허락하시니 비로소 저희들이 방에 들어오더니 상제를 비롯하여 종도 이십여명을 포박하였도다. 이튿날 상제와 종도들은 고부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나니 이것은 의병의 혐의를 받은 것이로되 백의장군 공사에 따른 화난이라고 훗날에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56절】상제와 종도들은 정우면 와룡리(淨雨面臥龍里)에서 포박되어 상제를 선두로 하여 덕천면 용두 마을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돝 한 마리를 잡게 하고 종도들이나 순검들과 함께 잡수시고 고부로 행하셨도다.
【행록 3장 57절】이 일이 나기 전날 상제께서 광찬을 정읍에 있는 경석에게 보내고 원일을 태인에 있는 경원에게 가게 하고 공우를 또 다른 곳으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피하게 하신 것은 광찬과 원일의 성질을 알고 계시는 터이고 공우는 여러번 관재를 당하였던 까닭이었도다.
【행록 3장 58절】이튿날부터 고부 경무청은 심문을 시작하였느니라. 상제께 경무관이 「네가 의병이냐」는 물음에 가라사대 「나는 의병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 이 말씀에 경무관이 놀라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에 상제께서 「사람마다 도략(韜略)이 부족하므로 천하를 도모치 못하노니 만일 웅재대략이 있으면 어찌 가만히 있으랴.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하노라」고 이르시니라. 경무관은 상제의 머리를 풀어 헤쳐 보기도 하고 달아매는 등 심한 고문을 가한 뒤에 옥중에 가두고 다른 사람은 문초도 받지 않고 옥에 갇혔도다. 여러 사람들이 상제를 원망하기 그지없었도다. 때마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병과 충돌하였도다. 의병을 가장하여 노략질하는 비도도 있었으므로 의병의 혐의로 체포된 자는 시비를 불문하고 총살되었으니 모든 종도들이 의병의 혐의에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떨고 있었도다.
【행록 3장 59절】문 공신은 순검들에게 옆구리를 발로 채여 심한 오한을 일으켜 식음을 전폐하여 위독하게 되었는지라. 상제께서 「급한 병이니 인곽을 써야하리라」하시고 여러 종도들을 관처럼 둘러 세우시고 상제께서 소변 찌끼를 받아 먼저조금 잡수시고 공신으로 하여금 먹게 하시니라. 공신은 자기를 위하여 상제께서 잡수심을 황공히 생각하여 받아 마시니 조금 후에 그는 숨을 돌리기 시작하여 평상대로 회복하였도다.
【행록 3장 60절】간수 중에 형렬 · 자현과 친한 사람이 있어 그들은 다른 조용한 감방으로 옮겨주거늘 형렬이 간수에게 부탁하여 상제께서도 같은 방으로 옮기시게 하였도다.
【행록 3장 61절】상제께서 감방을 옮기신 후에 형렬 · 자현에게 가라사대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공사를 처결하나니 우리 셋이면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리라.」하시고 또 자현에게 가만히 가라사대 「비록 몇 십만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 지라도 일호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말라」하시니라. 그믐날 밤에 우뢰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이것은 서양에서 신명이 넘어옴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옥중에서 과세하셨느니라.
【행록 3장 62절】무신년 원조에 경무관이 죄수에게 주식을 한 상씩 나누어 주기에 모든 종도는 「주식을 나누어 주니 이제 죽이려는 것이로다. 우리는 상제를 따르다가 결국 죽게 되는도다」고 한층 상제를 원망하였도다.
【행록 3장 63절】이 날에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냉혹하였도다. 「이것은 대공사를 처결한 까닭이노라」하시니라. 경무관이 여러 사람을 최조하여도 아무 증거가 없으므로 상제를 광인으로 취급하여 옥중에 남기고 정월 십일에 옥문을 열어 여러 사람을 석방하였도다.
【행록 3장 64절】출옥한 종도들은 제각기 집에 돌아갔으나 경석은 고부에 와서 상제의 출옥을 二월 四일 경칩일(驚蟄日)까지 기다려 상제를 맞이하여 객망리 본댁으로 모시고 형렬은 상제께서 출옥하심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고 동곡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3장 65절】화난이 있은 후 어느날 상제께서 문 공신의 집에 가시니 공신이 불쾌한 어조로 불평을 털어놓으니라. 「일전에 고부 음식점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외상으로 달린 주식대를 갚으라는 독촉을 하였는데 생각컨대 고부 화액때 가지고 갔던 백목과 돈을 흩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 음식값을 갚지 아니하셨나이까.」상제께서 묵묵히 들으시고 가라사대 「네 말을 들으니 그러하리로다. 순창 농암에 사흘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 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 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돈을 따 보지도 못하고 제 돈만 잃고 바닥이 난 후에야 개평을 뜯어가지고 새벽녘에 본전을 회복하는 수가 있음을 말함이니라. 고부에서 음식 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그때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면 달리 주선이라도 하여 주었으리라」하시니 공신이 잠잠히 듣고만 있다가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 진대 그만 두사이다」하니라. 상제께서는 동곡으로 돌아 가셨도다.
【행록 3장 66절】고부 화액 때 체포되었던 이십여명의 종도 중에 김 형렬 · 김 자현 두 사람 밖에 남지 않고 다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4장 1절】경석(京石)의 아우 윤경(輪京)이 구릿골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와서 배알하는도다. 상제께서 「천지에서 현무가사를 부르니 네 형의 기운을 써야할지니 네 형에게 구설인후(口舌咽喉)를 움직이지 말고 동학의 시천주(侍天呪)를 암송하되 기거동작에 잠시도 쉬지 말게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행록 4장 2절】안 필성이 상제를 모시기를 기뻐하여 종종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어느날 그가 동곡(銅谷) 앞 팥거리에서 상제를 만나 대접하려고 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뜻을 알아차리시고 「내가 반찬을 마련하리라」하시고 못을 휘어서 낚시를 만들어 팥거리 근처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던지시니 잉어와 가물치가 걸렸도다. 이것으로써 반찬을 만들어 잡수시면서 필성과 함께 한 때를 보내셨도다.
【행록 4장 3절】상제께서 장 성원(張成遠)에게 글을 써서 봉하여 주시면서 훗날에 보라고 이르셨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도다.
장교자패(將驕者敗) 견기이작(見機而作)
【행록 4장 4절】하루는 김 송환(金松煥)이 상제께 여쭈기를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나이까.」상제께서 「있느니라」고 대답하시니라. 또 그가 묻기를 「그 위에 또 있나이까.」 상제께서 「또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도다. 이와 같이 아홉 번을 대답하시고 「그만 알아두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후일에 그를 만사불성(萬事不成)이라 평하셨나니라.
【행록 4장 5절】상제께서 김 송환에게 시 한 수를 외워 주셨도다.
소년재기발천마(少年才氣拔天摩) 수파용천기세마(手把龍泉幾歲磨)
석상오동지발향(石上梧桐知發響) 음중율여유여화(音中律呂有餘和)
구전삼대시서교(口傳三代詩書敎) 문기춘추도덕파(文起春秋道德波)
피폐이성현사가(皮幣已成賢士價) 매생하사원장사(賣生何事怨長沙)
【행록 4장 6절】상제께서 무신년 초에 본댁에서 태인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머물고 계신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기 때문이었나니라. 그곳에 신 경원(辛敬元) · 최 내경(崔乃敬) · 최 창조(崔昌祚) · 김 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고 있었도다.
【행록 4장 7절】어느날 상제께서 식사시간이 지나서 최 창조의 집에 이르셨도다. 그의 아내는 상제께서 드나드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노라. 이날도 밥상 차리기를 싫어하는지라. 상제께서 창조에게 가라사대 「도가에서는 반드시 아내의 마음을 잘 돌려 모든 일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순종하여야 복되나니라」하시니라. 이 말씀을 아내가 문밖에서 엿듣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 마음을 보신 듯이 살피심에 놀라 마음을 바로 잡으니라.
【행록 4장 8절】상제께서 최 창조의 집에서 종도 수십명을 둘러 앉히고 각기 세 글자씩을 부르게 하시니라. 종도들은 천자문의 첫 글자부터 불러오다가 최 덕겸(崔德兼)이 일(日)자를 부를 때 상제께서 말씀하시니라. 「덕겸은 일본왕(日本王)도 좋아 보이는가보다.」하시며 「남을 따라 부르지 말고 각기 제 생각대로 부르라」이르시니라. 이튿날 밤에 상제께서 덕겸으로 하여금 담뱃대의 진을 쑤셔 내되 한번 잡아 놓치지 말고 뽑아서 문밖으로 버리게 하시니 그는 말씀하신대로 진을 바깥에 버리자 온 마을의 개가 일시에 짖는도다. 덕겸이 신기하게 느껴 「어찌 개가 일제히 짖나이까」라고 여쭈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신명(大神明)이 오는 까닭이니라.」 그가 「무슨 신명이니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시두 손님이니 천자국(天子國)이라야 이 신명이 들어오나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행록 4장 9절】상제께서 어느날 공우를 데리시고 태인 보림면 장자동을 지나는 길가에서 묘(墓)를 보시고 공우에게 이르시니라. 「이 혈(穴)은 와우형(臥牛形)이나 금혈형(琴穴形)이라고 불리우니라. 그것은 혈명을 잘못 지어서 발음(發蔭)이 잘못 되었느니라. 어디든지 혈명을 모르거든 용미(龍尾)없이 조분(造墳)하였다가 명사에게 혈명을 지은 뒤에 용미를 달면 발음이 되나니라」하셨도다.
【행록 4장 10절】종도들이 이월의 따뜻한 어느날 상제와 함께 보리밭 길을 지날 때 「이 세상에 빈부의 차별이 있는지라. 곡식 중에 보리가 있어 그것을 먹을 때마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니 보리를 없애야 먹는데에나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리라」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니라. 상제께서 이야기를 수긍하시는 태도를 취하셨도다.
【행록 4장 11절】상제께서 전주 김 준찬(金俊贊)의 집에 가셔서 김 덕찬(金德贊) · 김 준찬(金俊贊) · 김 낙범(金落範)들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고 알리셨도다.
【행록 4장 12절】덕찬은 백지 한장에 칠성경을 쓰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에 그 글과 모양의 크고 작음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의 뜻대로 쓰라」하시므로 덕찬이 양지 한장에 칠성경을 가득차게 쓰고 나니 끝에 가서 석자 쓸만한 곳이 남으니라. 상제께서 그 여백에 칠성경(七星經)이라고 석자를 쓰신 후 불사르셨도다.
【행록 4장 13절】상제께서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에 이르시니라. 도중에서 상제와 그는 한 장군이 갑주 차림에 칼을 짚고 제비산 중턱에 서 있는 것을 보았도다. 상제께서 구릿골에 이르셔서 김 준상(金俊相)의 집에 머무시니라. 어떤 사람이 김 준상을 잡으려고 이 밤에 구릿골에 온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전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태연히 계시다가 저녁 무렵에 형렬의 집으로 가시니라. 여러 종도들이 준상의 집에서 잠자는데 공우는 뒷산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던 터에 원평(院坪) 쪽으로부터 등불을 가진 사람 대여섯이 구릿골을 향하여 오다가 선문(旋門)에 이르렀을 때 등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되돌아가 종도들을 깨워서 함께 피신하려고 하나 곤히 잠든 사람들이 좀처럼 깨지 않았도다. 그러나 한시경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으므로 안심하고 그는 잠에 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그에게 「대장은 도적을 잘 지켜야 하나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14절】상제께서 공우에게 가라사대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나의 말을 믿을 지어다. 너는 광인이 되지 못하였으니 농판으로 행세함이 가하니라」하시니라.
【행록 4장 15절】四월에 들어 심한 가뭄으로 보리가 타니 농민들의 근심이 극심하여지는도다. 종도들도 굶을 걱정을 서로 나누니 상제께서 「전일에 너희들이 보리를 없애버림이 옳다 하고 이제 다시 보리 흉년을 걱정하느냐. 내가 하는 일은 농담 한 마디라도 도수에 박혀 천지에 울려 퍼지니 이후부터 범사에 실없이 말하지 말라」고 꾸짖으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전주 용두리 고개 김 낙범에게 들러 거친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보고 「빈민의 음식이 이러하니라」고 하시면서 다 잡수셨도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큰 비가 내리니 말라죽던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도다.
【행록 4장 16절】상제께서 四월 어느날 정 괴산의 주막에서 상을 받고 계셨는데 전에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된 정(鄭) 순검이 나타나 돈 열냥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시자 그는 무례하게 상제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돈 열냥을 빼앗아 갔도다. 이 방약무인을 탄식하시고 상제께서 그를 한탄하셨도다. 그러나 그는 그후에 다시 전주에서 서신으로 돈을 청하여 오니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돈 열냥을 구하여 보내시니라. 며칠 지낸 뒤에 정 순검이 고부로 돌아가던 중 정읍의 어느 다리에서 도적들에게 맞아 죽으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상제께서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이리요」하시고 다시 한탄하셨도다.
【행록 4장 17절】무신년 四월 어느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 · 풍신(風身) · 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하셨도다.
【행록 4장 18절】상제께서 전주 불가지(佛可止) 김 성국(金成國)의 집에 가 계실 때의 어느날 김 덕찬을 불러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 말씀을 귓가로 들었도다. 이것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이제 용소리 김 의관(金議官)의 집에 가서 자고 오너라」고 이르시니 그는 명을 좇아 용소리로 떠나느니라. 그가 김 의관의 집 근처에서 취한으로부터 심한 곤욕을 당하고 불가지로 돌아오니라. 상제께서 문 바깥에 나와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왜 자지 않고 되돌아오느냐」고 물으시니라. 덕찬이 공연히 보내어 봉변만 당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도다. 상제께서 덕찬과 함께 방안에 들어오셔서 술을 권하며 가라사대 「사람과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하시니 그는 상제를 두려워하니라. 그후부터 덕찬은 지극히 적은 일에도 언행을 삼가하였도다. 상제께서 두달동안 용소리 시목정(龍巢里柿木亭)에 계시면서 이곳 저곳의 종도들의 집에 다니셨도다.
【행록 4장 19절】손 병욱(孫秉旭)은 고부 사람인데 상제를 지성껏 모셨으나 그의 아내는 상제의 왕래를 불쾌히 여기고 남편의 믿음을 방해하였도다. 어느날 병욱의 아내가 골절이 쑤시고 입맛을 잃어 식음을 전폐하여 사경에 헤매이게 되었느니라. 공우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제께 아뢰면 고쳐주시리라고 믿었도다.
【행록 4장 20절】그후 어느날 공우가 정읍에 가서 상제를 모시고 와룡리(臥龍里) 네 거리에 이르렀도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회룡리(回龍里)가 있고 이곳에 신 경수(申京洙)가 살고 서북쪽 교동에 황 응종(黃應鐘)이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네거리 복판에서 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니 공우가 「자기 집으로 가시옵소서」하고 청하니 상제께서 세번이나 되물으시므로 공우도 세번 한결같이 대답하니라. 그러나 상제께서 먼저 응종의 집에 들르셨다가 곧 공우를 데리시고 병욱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돈 서돈을 청하시기에 그가 올리니 그것을 공우에게 간수하게 하시고 또 두냥을 병욱으로부터 받아서 다시 그에게 그것을 갈무리하게 하신 후에 병욱의 아내를 불러 앞에 앉히고 「왜 그리하였느냐」고 세번 되풀이 꾸짖고 외면하시면서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니라. 병욱이 상제께 공양할 술을 준비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이르시니라. 병욱의 장모가 상제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술을 드셨도다. 응종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에 구릿골로 행차하셨도다. 가시는 도중에 공우에게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는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과연 그후부터 그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였도다.
【행록 4장 21절】김 병계(金炳啓)가 열 여섯살 때 손바래기 앞에 있는 초강(楚江)의 들판 길로 오다가 진창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상제께서 손바래기로 오시던 길에 이것을 보고 뛰어들어 그 아이를 팔에 꼭 끼고 쏜살같이 들을 건너 손바래기에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병계를 데리고 본댁에까지 가셔서 모친을 뵈었도다. 새 버선으로 갈아 신으려는데 그것이 쭉 찢어지기에 다른 새것을 한손으로 신으셨도다. 그리고 부엌에 걸려 있던 쇠고기를 모두 회로 만들어 잡수신 후에 병계를 보고 그놈 쓸만한 줄 알았더니 하시고 돌려보내시니 그제서야 그 아이는 허둥지둥 돌아가니 이 아이가 나중에 덕천 면장이 되었도다.
【행록 4장 22절】훗날에 윤경이 상제를 찾아 뵈옵고 고부인(高夫人)과 희남(熙南)의 병세를 알리니라. 소식을 듣고 상제께서 「내일 살포정에 가서 나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윤경은 이튿날 살포정으로 갔으나 상제를 뵈옵지 못하여 바로 태인 소퇴원 주막으로 가니라. 주막 주인이 윤경의 물음에 「선생님께서 윤경을 새울로 보내라」고 전하니 그는 새울로 떠나가니라. 그는 도중에서 일병 수백명을 만나 검문을 받았으나 가환으로 의사를 모시러 가는 길이라고 알리니 저희들이 모두 물러가는도다. 윤경이 새울에 가서 상제께 배알하니 상제께서 「오늘은 병세가 어떠냐」고 물으시니라. 윤경이 「집에서 일찌기 떠났음으로 잘 모르나이다」고 아뢰인즉 상제께서 「네가 무엇하러 왔느냐」고 꾸짖으시니 윤경은 몸 둘 바를 모르더라. 이날 밤에 상제께서 윤경으로 하여금 밤이 새도록 문밖을 돌게 하셨도다. 윤경이 졸음을 달래면서 돌고 있는 중에 첫 닭이 울더니 상제께서 문밖으로 나오셔서 「네가 졸리지 않느냐」고 물으시기에 윤경이 「졸리지 아니하나이다.」고 여쭈니 「그럼 나와 함께 백암리(白岩里)로 가자」하시고 길을 떠나시니라. 김 자현도 따라 백암리 김 경학의 집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다시 정읍으로 갔도다. 상제께서 일행을 앞세우기도 하고 뒤에 따르게도 하시면서 얼마 동안 가시다가 「일본 사람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하시고 반시간쯤 쉬시니라. 일행은 노송정의 모퉁이에 있는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일본 기병이 이곳으로 오다가 이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간 많은 말 발자국을 보았도다. 이때 상제께서 「대인의 앞 길에 저희들이 어찌 감히 몰려오리오」라고 외치셨도다. 옆에 있던 윤경이 행인으로부터 수십명의 일본 기병이 이곳에 달려왔다가 딴 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라. 상제께서 대흥리에 이르셔서 고부인과 희남의 병을 돌보시니라. 그들은 병에서 건강한 몸을 되찾았도다.
【행록 4장 23절】상제께서 무신년 어느날 고부인에게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였도다.
【행록 4장 24절】이 대답을 듣고 상제께서 글 한수를 지으셨도다.
무어별시정약월(無語別時情若月) 유기래처신통조(有期來處信通潮)
【행록 4장 25절】그리고 고부인에게 다시 가라사대 「내가 없으면 여덟가지 병으로 어떻게 고통하리오. 그중에 단독이 크리니 이제 그 독기를 제거하리라」하시고 부인의 손등에 침을 바르셨도다.
【행록 4장 26절】다시 「크나큰 살림을 어찌 홀로 맡아서 처리하리오」라고 말씀을 하시니 고부인은 상제께서 멀리 외방으로 출행하시려는 것으로 알았도다.
【행록 4장 27절】유월에 이르러서도 가뭄이 계속되어 곡식이 타 죽게 됨에 김 병욱이 김 윤근(金允根)으로 하여금 상제께 이 사정을 전하게 하니라. 사정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그의 집에서 기르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고 종도들과 함께 그것을 잡수셨도다.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윤근은 「선생이 곧 만인을 살리는 상제시니라」고 고백하였도다.
【행록 4장 28절】유월 어느날 밤에 도적이 백 남신(白南信)의 친묘를 파고 두골을 훔쳐갔도다. 김 병욱이 사람을 보내어 상제께 이 소식을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촛불을 밝히시고 밤을 새우기를 초상난 집과 같이 사흘을 지내시고 난 후 남신에게 가서 두골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한적한 곳에 거처하되 다른 사람의 왕래를 끊고 기다리면 처서절에 그 도적이 두골을 가져오리라」고 전하게 하시니라. 남신은 백운정(白雲亭)에 거처하면서 명을 좇으니라. 七월에 접어들면서 친산의 아랫 동리의 어른이 마을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친산밑에 사는 사람으로서 굴총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나을 사람들이 두루 찾고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묘주의 상을 후하게 주기로 결의하였느니라. 마을 사람들이 각방으로 찾는 도중에 두골을 가지고 마을 어른을 찾는 동리 한 사람이 나타난지라. 그 어른이 이 사람을 데리고 백운정에 있는 묘주를 찾으니라. 그날이 곧 처서절이었도다. 그런데 두골을 찾았다는 자가 도적의 누명도 벗고 상도 탈 욕심으로 동리의 어른을 찾았도다.
【행록 4장 29절】병욱이 용두리(龍頭里) 주막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 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그 도적을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으시므로 병욱이 「이미 경무청에 보냈나이다」고 여쭈니 가라사대 「사람을 잘 타일러서 돌려 보낼 일이어늘 어찌 그렇게 하였느뇨. 속히 푸른 의복 한 벌을 지여오라」병욱이 명하심을 남신에게 전하니 남신은 푸른 의복 한 벌을 상제께 올렸도다. 상제께서 그 옷을 불사르시고 「이것으로써 그 사람을 징역에나 처하게 하리라」말씀하시니라. 훗날에 종도들이 처서날에 찾게 된 연유를 여쭈어보았더니 「모든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두면 도수에 따라서 공사가 다 풀리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30절】차 경석이 상제를 섬긴 후부터 집안 일을 돌보지 않아 집안 형편이 차츰 기울어져 가니라. 그의 아우 윤칠이 「선생을 따르면 복을 받는다더니 가운이 기울기만 하니 허망하기 짝이 없소이다. 직접 제가 선생을 뵈옵고 항의하리이다」고 불평을 털어놓고 선생을 만나러 가는 중로에서 큰 비를 만나 옷을 푹 적시고 동곡에 이르러 상제를 뵈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시고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이 부근에 의병이 자주 출몰하기에 관군이 사방을 수색하고 있는 중인데 너의 비를 맞은 행색을 보면 의병으로 오인하고 너에게 큰 화난이 닥치리니 어서 다른 곳에 가서 숨었다가 부르거던 나오라」이르고 그를 다른 곳에 숨게 하셨도다. 그리고 형렬에게 윤칠을 오게 하고 그를 만나 돈 석냥을 그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수일 후에 정읍으로 갈 터이니 네가 빨리 가사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라」하시니라. 윤칠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니라. 수일 후에 상제께서 고부 와룡리레 가셔서 경석에게 사람을 보내어 고부 학동(學洞)으로 오라고 전하게 하셨도다. 경석이 전하여 듣고 이튿날 황망히 학동에서 상제를 뵈오니 가라사대 「내가 윤칠이 두려워서 너의 집으로 가기 어려우니 이 일극(一極)을 가져 가라」하시고 돈 열 닷냥을 주시니 경석이 돈을 받아들고 여쭈기를 「무슨 일로 그렇게 엄절하신 말씀을 하시나이까」하니 상제께서 「일전에 윤칠이 동곡에 온것을 보니 살기를 띄었는데 돈이 아니면 풀기가 어려움으로 돈 석냥을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느니라」고 알려주셨도다.
【행록 4장 31절】상제께서 인사를 드리는 김 갑칠(金甲七)에게 농사 형편을 물으시니 그가 「가뭄이 심하여 아직까지 모를 심지 못하여 민심이 매우 소란스럽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네가 비를 빌러 왔도다. 우사(雨師)를 너에게 붙여 보내리니 곧 돌아가되 도중에서 비가 내려도 몸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시니라. 갑칠은 발병 때문에 과히 좋아하지 아니하니라. 상제께서 눈치를 차리시고 「사람을 구제함에 있어서 어찌 일각을 지체하리오」하시고 가기를 독촉하시니라. 갑칠이 서둘러 돌아가는 길에 원평에 이르러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도다. 잠깐사이에 하천이 창일하여 나무다리가 떠내려 가게 되니라. 행인들은 모두 단비라 일컬으면서 기뻐하는도다. 흡족한 비에 모두들 단숨에 모를 심었도다.
【행록 4장 32절】상제께서 무신년 七월에 구릿골 약방에 계실 때 양지에 글을 쓰시더니 전 간재(田艮齋)의 문도(門徒) 五 · 六명이 대립(大笠)을 쓰고 행의를 입고 나와서 「선생님 뵈옵겠읍니다」하며 절을 하기에 상제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선생이 아니로다」하시며 절을 받지 아니하시니 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섰다가 물러갔도다.
【행록 4장 33절】또 한번은 음양(陰陽) 두 글자를 써서 약방 윗 벽에 붙이고 그 위에 백지를 덧붙이고 「누가 걸리는가 보라」하시니라. 한참 후에 「나약한 자가 걸렸다」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4장 34절】또 어느날 낙양의 들 근방을 지나실 때 황소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시고 가까이 다가가서 뿔을 두 손으로 하나 씩 잡고 소 귀에 무슨 말씀을 이르시니 소들이 흩어져 가는도다.
【행록 4장 35절】상제께서 여러 종도를 데리고 익산리를 거쳐 나룻터에 이르시니 사공은 없고 빈 배만 있는지라. 상제께서 친히 노를 저어 건너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시니라. 종도들이 우러러보니 이상한 서운이 노를 저어 하늘을 건너가는 모양을 이루웠도다.
【행록 4장 36절】무더운 여름 어느날 상제께서 김 병욱의 집에 들르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도다. 병욱이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일렀으되 아내는 무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괴로와 하면서 혼자 불평을 하든 차에 갑자기 와사증에 쓰러지는지라. 이 사정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하시고 글을 써서 병욱에게 주시면서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게 하셨도다.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행하니 바로 와사증이 사라졌도다.
【행록 4장 37절】무신년 여름에 문 공신이 동곡에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라. 그 자리에서 상제께서 그를 보고 「네가 허물을 뉘우치고 습성을 고치지 아니하면 앞날에 난경이 닥쳐오리라」고 꾸짖고 타이르셨도다.
【행록 4장 38절】상제께서 어느날 공신에게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있고 가지는 열 두가지 잎은 삼백 육십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日月)이 희도다. 九 · 十월 세단풍(細丹楓) 바람잡아 탄금(彈琴)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를 일삼드라.」는 시조 한수를 외워주셨도다.
【행록 4장 39절】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머물고 계시다가 동곡에 이르셨도다. 한 공숙(韓公淑)이 어느날 상제를 배알하려 온지라. 상제께서 그와 술을 나누시다가 「일을 많이 하였도다」고 말씀을 건너시면서 친히 술을 따르셨도다. 그는 황송하여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제가 무슨 일을 하였다고 하시나이까. 하여 드린 바가 없아옵니다」고 여쭈면서 받은 잔을 마셨도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지난 밤 꿈을 꾸었나이다」고 여쭈는지라. 그 말을 상제께서 받으시고 「일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하노라」고 가르치시니라.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이 모두 공숙의 꿈을 궁금하게 여기는지라. 공숙이 「상제께서 저의 집에 오셔서 천하 호구(戶口)를 성책(成冊)하여 오라 명하시기에 오방신장을 불러서 성책하여 상제께 올렸나이다」고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도다.
【행록 4장 40절】상제께서 하루는 공우(公又)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공우에게 우산을 사서 들게 하셨도다. 공우는 상제께서는 원래 우산을 받는 일이 없었고 비록 비오는 날 길을 가실지라도 비가 몸에 범하는 일이 없었던 일을 생각하여 이상히 여기더니 뜻밖에 비가 오는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우산을 받으라 하시니 공우는 상제께 받으시길 청하여 서로 사양하다가 함께 비를 맞아 옷이 흠뻑 젖으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뒤로는 우산을 들지 말라 의뢰심과 두 마음을 품으면 신명의 음호를 받지 못하나니라」고 하셨도다.
【행록 4장 41절】상제께서 어느날 차 경석 · 김 광찬 · 황 응종을 앞에 세우고 공우에게 몽치를 들게 하고 윤경에게 칼을 들리고 「너희가 이 이후에도 지금의 스승을 모시고 있듯이 변함이 없겠느냐. 변함이 있으면 이 몽치로 더수구니를 칠 것이오. 이 칼로 배를 가를 것이니라」고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시기도 하셨도다.
【행록 4장 42절】또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옛적에 한 농부가 농한기인 이른 봄에 쉬지 않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 논에 수원지의 물이 잘 들어오도록 봇돌을 깊이 파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고 공연한 노력이라고 비소하더니 이해 여름에 날이 무척 가물어 그 들판이 적지가 되었으나 봇돌을 파 놓은 그 농부는 아무 근심없이 물을 대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으니 이런 일을 명심해 두라」하셨도다.
【행록 4장 43절】상제께서 종도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초목 중에 일년에 자라는 것에 무엇이 제일 많이 자라느뇨」물으시니 종도들이 「대(竹)」라고 아뢰니 말씀 하시기를 「그 기운이 만물에 특장하니 감하여 쓰리라」하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이해의 대는 잘 자라지 않았도다.
【행록 4장 44절】이해 가을 어느날 상제께서 안 내성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라. 안으론 선령의 향화와 봉친 육영을 독실히 하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하시도다.
【행록 4장 45절】상제를 뵈옵고 인사(人事)를 묻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그런 사람을 대하실 때 마다 당사자와 심부름으로 온 사람과의 관계를 물으시니라. 일가나 친척이 되지 않으면 그 부형과의 관계를 물으시고 아무 관계가 없으면 「관계없는 사람이 어찌 왔느뇨」하시면서 돌려 보내시곤 하셨도다.
【행록 4장 46절】상제께서 섣달 어느날 공신을 대동하고 고부로 가시다가 행로에 「아는 벗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운산리(雲山里)에 신 경수가 있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공신의 인도로 경수의 집에 들르셔서 마루에 앉아 글을 써서 불 사르고 공신에게 집에 다녀오게 하셨도다. 공신이 집에 가니 일진회의 간부 송 대화(宋大和)가 와 있도다. 공신은 대화를 치송하고 운산리에 되돌아오니 상제께서 「있더냐」고 물으시기에 그는 「예 그가 있어서 치송하였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행록 4장 47절】이후에 백암리에서 상제를 박 공우와 신 원일이 모시고 있었도다. 이 때 종도 김 경학의 천거로 김 영학(金永學)이 상제를 배알하였을 뿐 상제께서 이렛동안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도다. 영학이 매우 불만을 품기에 공우와 원일이 그에게 「그대가 상제께 삼가 사사하기를 청하면 빨리 가르쳐 주시리라」고 일러주니 그 때야 그는 사사하기를 청하니 상제로부터 승락을 얻었느니라. 그런데 상제께서 갑자기 그를 꾸중하시는도다. 영학은 두렵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문밖으로 나가니라. 상제께서 영학을 불러들여 「너를 꾸짖는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척신을 물리쳐 내려하는 것이니 과히 불만을 사지 말라」고 타이르셨도다. 영학이 「무슨 척이니까. 깨닫지 못하겠나이다」고 되물은 즉 「너는 열 여덟살 때 살인하고 금년에 또 살인하였나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회상을 촉구하시니 그는 옛일을 더듬었도다. 「그 나이 때에 제가 남원(南原)에서 전주 아전과 말다툼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분격하여 그에게 화로를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것으로써 신음하다가 그 이듬해 삼월에 죽었도다. 또 금년 봄에 장성(長城) 다동(多洞)에서 사는 외숙인 김 요선(金堯善)이 의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하여 의병대장 김 영백(金永白)을 장성 백양사(長城白羊寺)로 찾아가서 그 비행을 꾸짖으니 그 대장은 외숙에게 사과하고 그 의병을 찾아 총살하였도다.」영학이 이 두 일을 아뢰었도다.
【행록 4장 48절】종도들이 때때로 부자를 종도로 천거하면 상제께서 이것을 제일 괴로와하시니라. 종도들이 천거한 부자가 상제를 찾아오면 상제께서 먼저 그 사람이 오는 길가의 주막에 가셔서 그르 만나 횡설 수설하셔서 그가 스스로 물러가게 하셨도다. 종도들이 이 일을 항상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참에 그 연고를 여쭈니 가라사대 「부자는 자신이 가진 재산만큼 그자에게 살기가 붙어있느니라. 만일 그런 자를 문하에 둔다면 먼저 그 살기를 제거하여 그 앞길을 맑게 해주어야 할터이니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공사에 막대한 지장이 오느니라. 그런 자 중에도 나를 알아보고 굳이 따르겠다는 지혜로운 자에게는 할 수 없이 허락할 뿐이니라」하셨도다.
【행록 4장 49절】상제께서 김 자현의 집에 계실 때 상제께서 자현을 불러 가라사대 「네가 공신의 집에서 여러 날을 숙식하였으니 공신을 네 집에 데려다가 잘 대접하라」하시니라. 자현이 깜박 잊고 대접할 기회를 놓치니라. 상제께서 그에게 「잘못된 일이라. 이 뒤로는 대접하려고 하여도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그후 그들 두 사람은 과연 서로 만나지 못하였도다.
【행록 4장 50절】공우가 항상 술을 과음하여 주정이 심하거늘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를 불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술을 비교하리라.」하시고, 상제께서 술을 많이 권하시다가 갑자기 「너는 한 잔 술밖에 못된다」하시니 그 뒤로는 공우가 한 잔만 마셔도 바로 취하여 더 마시지못하였도다.
【행록 4장 51절】경석이 손수 가물치를 잡아 회를 쳐서 상제께 올리니 잡수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께서 문밖을 걸으시면서 하늘을 향하여 「생선의 기운이 발하는도다」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도다. 가물치 모양의 구름이 동쪽으로 움직였도다.
【행록 4장 52절】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 그러나 고한 뒤에 다시 걱정하면 상제께서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고 종도들을 위로하셨도다.
【행록 4장 53절】상제께서 태인 새울에 계셨도다. 어느날 상제께서 박 공우를 경석에게 보내여 그를 오게 하시니 경석이 와서 뵙느니라. 상제께서 그에게 돈을 주시며 「돌아가서 쌀을 팔아놓아라」명하시니라. 그는 그 돈을 사사로 써 버렸도다. 그 뒤에 상제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부인에게 「쌀을 많이 팔았느냐」고 물으시니 그 부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경석을 불러 물으시니 경석은 그 돈을 부인에게 드리지 않았음을 고백하였도다. 이후로부터 상제께서 모든 일을 경석에게 부탁하지 아니하고 바로 고부인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셨도다.
【행록 4장 54절】상제께서 하루는 경석에게 검은 색 두루마기 한 벌을 가져오라 하시고 내의를 다 벗고 두루마기만 입으신 후에 긴 수건으로 허리를 매고 여러 사람에게 「일본 사람과 같으냐」고 물으시니 모두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 사람과 꼭 같사옵나이다」하노라. 상제께서 그 의복을 다시 벗고 「내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이웃 아이와 먹으로 장난을 하다가 그 아이가 나에게 지고 울며 돌아가서는 다시 그 서당에 오지 않고 다른 서당에 가서 글을 읽다가 얼마 후 병들어 죽었도다. 그 신이 원한을 품었다가 이제 나에게 해원을 구함으로 그럼 어찌 하여야 하겠느냐 물은 즉 그 신명이 나에게 왜복을 입으라 하므로 내가 그 신명을 위로 하고자 입은 것이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55절】김 광찬(金光贊)이 어느날 개벽 공사가 속히 결정되지 않음으로 모든 일에 불평을 털어놓고 「나는 자살하겠노라」고 말하여 좌석을 흐리게 하니라. 상제께서 좌중을 보시고 「모든 일에 때가 있나니 마음을 돌려 어리석음을 벗으라. 너희는 죽는 일을 장차 나에게서 보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56절】상제께서 광찬이 불만을 품은 것을 심히 괴롭게 여기셔서 형렬에게 이르시니라. 「광찬이 자살하려는 것은 제가 죽으려는 것이 아니오. 나를 죽으라는 것이니라. 내가 내가 정읍으로 가리니 이 길이 길행이라. 뒷 일은 네게 통지하리라.」二十八일에 상제께서 공우(公又)를 데리시고 동곡을 떠나 정읍 경석의 집에 가셨도다.
【행록 4장 57절】상제께서 경석에게 이르시니라. 「네가 모든 일에 귀찮고 뜻에 맞지 아니하니 내가 이 세상을 버릴 수 밖에 없다. 세상을 떠나기는 극히 쉬운 일이라. 몸에 있는 정기를 흩으면 불티가 사라지듯 되나니라.」 그리고 바로 베개를 베고 누우시니 경석이 놀라면서 말하되 「어찌 하시는 일이오니까. 비록 불초하오나 모든 일을 명하심을 좇아 수화라도 피치 아니 하겠나이다. 걱정을 푸시옵소서」하고 맹서하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능히 내 명을 좇을 수 있느냐」하시며 재삼 다짐을 받으시고 일어나셨도다.
【행록 5장 1절】차 문경(車文京)이 기유년 정월 二일에 술을 마시고 상제를 「역적질을 한다」고 고함을 치며 비방하니라. 이 비방이 천원 병참에 전해져서 군병들이 출동하려 하니라. 이 일을 미리 상제께서 아시고 경석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고 바로 비룡촌(飛龍村) 차 윤경의 집으로 떠나셨도다.
【행록 5장 2절】이 일이 있기 전에 상제께서 경석에게 三일 새벽에 고사를 지내도록 하셨는데 마침 이 일이 일어났으므로 다시 경석에게 「내일 자정에 문틈을 봉하고 고기를 굽고 술병의 마개만 열고 심고하라. 이것이 곧 고사니라」고 이르시니라. 경석이 三일 새벽에 명하신 대로 고사를 끝내니 날이 밝아지는도다. 이 때 총을 멘 군병 수십명이 몰려와서 상제를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도다.
【행록 5장 3절】상제께서 초닷새에 동곡으로 돌아오셨도다. 수일 후에 태인으로부터 사건이 무사히 된 전말을 들으시고 가라사대 「정읍 일은 하루 공사인데 경석에게 맡겼더니 하루 아침에 안정되고 태인일은 하루 아침 공사인데 경학에게 맡겼더니 하루에 안정되니 경석이 경학보다 훌륭하도다. 그리고 경석은 병조판서의 자격이며 경학은 위인이 직장(直腸)이라. 돌이키기 어려우나 돌이키기만 하면 선인이 되리라」고 하셨도다.
【행록 5장 4절】상제께서 기유년 어느날 원평 시장 김 경집(金京執)의 음식점에 사관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왕래하셨도다. 그는 상제의 말씀이라 하여 주식을 청하는 사람에게 대금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고 음식을 제공하였도다. 이즈음에 청석골에 살고 있는 강 팔문(姜八文)이란 자가 술과 밥을 먹고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금을 내지 않고 상제께 미루고 가니라. 팔문은 그 음식을 먹고 난 뒤부터 배가 붓기 시작하더니 사경을 헤매느니라. 이 사실을 안 신 경수가 상제께 아뢰이니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니라. 병세가 더 위급하여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라사대 「몹쓸 일을 하여 신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으니 할 수 없노라」하시더니 그후 곧 그의 사망이 전하여졌도다.
【행록 5장 5절】상제께서 하루는 대흥리에 계셨는데 안 내성으로 하여금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라 하시며 가라사대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하셨는데 그 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할빈역에서 안 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암살되었도다.
【행록 5장 6절】기유년 二월 九일에 김 자현을 데리고 김제(金堤) 내주평(內住坪) 정 남기의 집에 이르시니라. 그 곳에서 상제 가라사대 「이 길은 나의 마지막 길이니 처족을 찾아 보리라.」 상제께서 등불을 밝히시고 새벽까지 여러 집을 다니시고 이튿날 새벽에 수각리(水閣里) 임 상옥(林相玉)의 집에 가시니라. 이 곳에서 글을 쓰고 그 종이를 가늘게 잘라 잇고 집의 뒷담에서 앞 대문까지 펼치니 그 종이 길이와 대문까지의 거리가 꼭 맞는도다. 이 공사를 보시고 상제께서 그 동리에서 사는 김 문거(金文巨)에게 가셨다가 다시 만경(萬頃) 삼거리(三巨里) 주막집에 쉬고 계시는데 한 중이 앞을 지나가는지라. 상제께서 그 중을 불러 돈 세푼을 주시는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자현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오후에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리니 재가 잊을지라도 네가 꼭 살펴보도록 하라」하시더니 오후에 그렇게 되었도다. 그리고 다음 날에 형렬이 전주로 동행하니라. 이에 앞서 상제께서 「오늘 너희가 다투면 내가 죽으리라」이르셨도다.
【행록 5장 7절】하루는 형렬이 상제의 명을 좇아 광찬과 갑칠에게 태을주를 여러번 읽게 하시고 광찬의 조차 김 병선(金炳善)에게 도리원서(桃李園序)를 외우게 하고 차 경석 · 안 내성에게 동학 시천 주문을 입술과 이빨을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 여러번 외우게 하셨도다.
【행록 5장 8절】三월에 부산 청일(淸日) 사람 이 치화(李致化)가 와서 상제를 섬기고 그후 이 공삼(李公三)이 와서 추종하니라. 상제께서 이 치화에게 「빨리 돌아가라」하시되 치화가 종일토록 가지 아니하니 상제께서 다시 기일을 정하여 주시며 가라사대 「빨리 돌아가서 돈 칠십냥을 가지고 기일내에 오라」하시니 치화가 그제야 돌아가서 그 기일에 돈 칠십냥을 허리에 차고 와서 상제께 올렸더니 상제께서 명하사 그 돈을 방안에 두었다가 다시 문 밖에 두고 또 싸리문 밖에 두어 일주야를 지낸 후에 들여다가 간수하시더니 그후에 공삼을 시켜 그 돈 칠십냥을 차 경석의 집에 보내셨도다.
【행록 5장 9절】경석이 삼월 어느날에 공우와 윤경을 백암리 김 경학의 집에 보내어 상제께 일이 무사함을 아뢰게 하였도다. 그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공사를 본 후에 경석을 시험하고자 하였으되 일을 무사히 처결하였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이로다」고 하셨도다.
【행록 5장 10절】이 때에 경학의 형이 아우를 오라고 사람을 보내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낸 후에 발을 당기고 가라사대 「속담에 발복이라 하나니 모르고 가는 길에 잘 가면 행이오. 잘못가면 곤란이라」하시고 곧 그곳을 떠나 최 창조의 집에 독행하셨도다. 그곳에 머무시다가 다시 혼자 그 앞 솔밭을 지나서 최 창겸에게 이르러 잠시 몸을 두시니 상제께서 계시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도다.
【행록 5장 11절】원래 경학의 형은 이상한 술객이 경학을 속여 가산을 탕패케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편으로 경학을 만류하고자 또 한편으로 그 술객을 관부에 고발하려는 심사에서 사람을 보낸 것이니라. 그리하여 경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중도에서 순검을 만나 함께 집에 오니라. 그리고 순검은 상제를 못 찾고 최 창조의 집에 가서도 역시 찾지 못하고 있는 중에 상제께 세배하려고 최 창조의 집에 들어선 황 응종과 문 공신을 구타하였도다.
【행록 5장 12절】상제께서 또 三월 어느날 「학질로도 사람이 상하느냐」고 자현의 지혜를 떠 보시니라. 자현이 「학질은 세 축째에 거적을 갖고 달려든다 하나니 이 말이 상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나이다」고 대답하니 상제께서 「진실로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5장 13절】팔순인 자현의 모친이 삼월 어느날에 학질을 세축 앓다가 갑자기 죽었도다. 이 소식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학질로 사람이 상한다는 말이 옳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상제께서 자현의 노모를 모실 관속에 누어보셨도다.
【행록 5장 14절】상제께서 하루는 자현에게 「박 춘경(朴春京)의 집에 가서 관재중 잘 맞는 것을 골라오라. 내가 장차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자현이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시나이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자현이 나의 죽음을 믿지 않는도다」고 탓하셨도다.
【행록 5장 15절】四월 어느날 김 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는데 백지 넉 장을 펼치시고 종이 귀마다 「천곡(泉谷)」이라 쓰시기에 그 뜻을 치복이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옛날에 절사한 원의 이름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치복과 성환으로 하여금 글을 쓴 종이를 마주 잡게 하고 「그 모양이 상여의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갑칠은 상제의 말씀이 계셔서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서 서편 하는에 한점의 구름이 있는 것을 아뢰니 다시 명하시기에 또 나가서 하늘을 보고 들어와서 한점의 구름이 온 하늘을 덮은 것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四明堂)이라 쓰시고 치복에게 가라사대 「궁을가에 있는 사명당 갱생이란 말은 중 사명당이 아니라 밝을 명자를 쓴 사명당이니 조화는 불법(佛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이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 옷을 입히리니 六月 十五日 신농씨(神農氏)의 제사를 지내고 공사를 행하리라. 금년이 천지의 한문(桿門)이라.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리라.」하셨도다.
【행록 5장 16절】상제께서 고래의 사제지간의 예를 폐지하시고 종도들에게 평좌와 흡연을 허락하셨도다.
【행록 5장 17절】수운(水雲) 가사에 「발동말고 수도하소. 때 있으면 다시 오리라」하였으니 잘 알아 두라 하셨도다.
【행록 5장 18절】어느날 상제께서 김 성국의 집에 오셔서 「용둔(龍遁)을 하리라」하시고 양지 二十장을 각기 길이로 여덟번 접고 넓이로 네 번 접어서 칼로 자르신 다음 책을 매여 보시기에 실로 「米」와 같이 둘러매고 오색으로 그 실오리에 물을 들이고 보시기 변두리에 푸른 물을 발라 책장마다 찍어 돌리신 뒤에 그 책장을 다 떼어 풀로 붙여 이어서 네번 꺾어 접어서 시렁에 걸어 놓으시니 오색 찬란한 문채가 용형과 같으니라. 이에 그 종이를 걷어서 불사르셨도다.
【행록 5장 19절】김 자현은 六월 어느날 상제께서 「네가 나를 믿느냐」고 다짐하시기에 「지성으로 믿사오며 고부화액 때에도 상제를 따랐나이다」고 믿음을 표명하였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이 말씀을 듣고 자현은 「제가 모시고 따라가겠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다시 「어느 누구도 능히 따르지 못할지니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지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5장 20절】상제께서 六월 열흘께는 심기가 불편하셔서 동곡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청도원 김 송환의 집에 들러서 유숙하시니라. 마침 신 경원이 상제를 배알하기에 상제께서 그에게 「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하시고 양지 한 장을 주어 유(儒) · 불(佛) · 선(仙) 석 자를 쓰게 하시니라. 상제께서 유자 곁에 이구(泥丘), 불자 곁에 서역(西域), 선자 곁에 고현(古縣)이라 쓰시고 그 양지를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동곡 약방에 가셔서 모든 종도들에게 六月 二十일에 모이라고 통지하셨도다.
【행록 5장 21절】二十일에 모든 종도들이 속속 동곡에 모이니 김 형렬 · 김 갑칠 · 김 자현 · 김 덕유 · 류 찬명 · 박 공우 · 신 원일 · 이 치화 · 이 공삼 · 최 덕겸 등이오. 채 사윤(蔡士允)은 처음으로 동곡에서 시좌하니라. 상제께서 류 찬명에게 천문지리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天文地理風雲造化 八門遁甲六丁六甲智慧勇力)과 회문산 오선위기혈 무안 승달산 호승례불혈 장성 손룡 선녀직금형 태인 배례전 군신봉조혈(回文山五仙圍碁穴 務安僧達山胡僧禮佛穴 長城巽龍仙女織錦穴 泰仁拜禮田群臣奉詔穴)을 쓰게 하고 불사르셨도다.
【행록 5장 22절】상제께서 모든 종도를 꿇어앉히고 「나를 믿느냐」고 다짐하시는지라. 종도들이 믿는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내가 죽어도 나를 따르겠느냐」고 물으시는지라. 종도들이 그래도 따르겠나이다고 맹세하니 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궁벽한 곳에 숨으면 너희들이 반드시 나를 찾겠느냐」고 다구치시니 역시 종도들이 찾겠다고 말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리 못하나니라. 내가 너희를 찾을 것이오.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5장 23절】또 상제께서 「내가 어느 곳에 숨으면 좋을까」고 물으시니 신 원일이 「부안에 궁벽한 곳이 많이 있아오니 그 곳으로 가사이다」고 원하니라. 이에 상제께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도다.
【행록 5장 24절】상제께서 벽을 향하여 누우시더니 갑자기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제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하시고 크게 슬퍼하셨도다.
【행록 5장 25절】그리고 다시 말씀하시니라. 「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아두라. 후일 내가 출세할 때에 눈이 부셔 바라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신선을 말로만 전하고 본 사람이 없느니라. 오직 너희들은 신선을 보리라. 내가 장차 열석자의 몸으로 오리라」하셨도다.
【행록 5장 26절】二十一일에 신 원일이 이 치화와 채 사윤과 그의 처남으로부터 얼마의 돈을 가져왔느니라. 상제께서 신 원일에게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의 이름을 써서 불사르게 하고 형렬에게 있는 돈 중에서 일부를 궤속에 넣으라 하고 남은 것으로는 여러 사람의 양식을 충당케 하셨도다.
【행록 5장 27절】상제께서 식사를 전폐하시다가 이레만에 형렬에게 명하사 보리밥을 지어 오라 하시므로 곧 보리밥을 지어 올리니 상제께서 그 밥을 보시고 「가져다 두라」하시니라. 한나절이 지나서 다시 그 보리밥을 청하시는지라. 형렬이 다시 가져다 올리니 벌써 그 보리밥이 쉬었느니라. 상제께서 「절록(絶祿)이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5장 28절】상제께서 「너희들이 내 생각나면 내가 없더라도 이 방에 와서 놀라」하셨도다.
【행록 5장 29절】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셨도다.
【행록 5장 30절】상제께서 속담에 「이제 보니 수원 나그네라 하나니 누구인 줄 모르고 대하다가 다시 보고 낯이 익고 아는 사람이드라는 뜻이니 나를 잘 익혀두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5장 31절】상제께서 二十三일 오전에 여러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제 때가 바쁘니라. 너희들 가운데 임술생(壬戌生)으로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首婦)로 내세우라.」 형렬이 「수부로서 저의 딸을 세우겠나이다」고 아뢰이니 말씀하시기를 「세수 시키고 빤 옷으로 갈아입혀서 데려 오라」하시니라.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여 딸을 상제 앞에 데려오니라. 상제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약장을 방 한가운데 옮겨 놓게 하시고 그의 딸에게 약장을 세번 돌고 그 옆에 서게 하고 경석에게 「대시 태조 출세 제왕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大時太祖出世帝王將相 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를 쓰라 이르시니라. 경석이 받아 쓸제 비(妃)를 비(妣)로 잘못 쓴지라. 상제께서 그 종이를 불사르고 다시 쓰게 하여 그것을 약장에 붙이게 하고 「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니라」고 말씀을 끝내고 그의 딸을 돌려보내시니라. 상제께서 경석에게 그 글을 거둬 불사르게 하셨도다.
【행록 5장 32절】상제께서 이 날에 약방 마루, 뜰, 싸리문 밖에 번갈아 눕고 형렬에게 업혀 그의 집에 가서 누우셨다가 다시 약방으로 돌아오시기를 네 다섯번 반복하시니라. 형렬이 아주 지치면 경석이 대신하여 상제를 업고 두번 왕복하고 그리고 다섯사람이 머리 팔 다리를 각각 붙잡고 상제를 메고 약방에 모시니라. 상제께서 누워 가라사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쉬우니라. 몸에 있는 정기만 흩으면 죽고 다시 합하면 사나니라」고 하셨도다.
【행록 5장 33절】경석으로 하여금 양지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 일순 호남 서신 사명(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 姜一淳湖南西神司命)」이라 쓰게 하고 그것을 불사르게 하시니라. 이 때에 신 원일이 상제께 「천하를 속히 평정하시기 바라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하노라」하셨도다.
【행록 5장 34절】二十四일 이른 아침에 경석을 불러 흘겨보시면서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이냐」고 나무라셨도다.
【행록 5장 35절】상제께서 수박에 소주를 넣어서 우물에 담구었다가 가져오게 하셨도다. 그 수박을 앞에 놓고 가라사대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곧 죽으리라.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하셨도다. 상제께서 약방 대청에 앉아 형렬에게 꿀물 한 그릇을 청하여 마시고 형렬에게 기대어 가는 소리로 태을주를 읽고 누우시니라. 이날 몹시 무더워 형렬과 종도들이 모두 뒤 대밭가에 나가 있었도다. 응종이 상제께서 계신 방이 너무 조용하기에 이상한 마음이 들어 방을 들여다보니 상제께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데 가까이 가서 자기의 뺨을 상제의 용안에 대어보니 이미 싸늘히 화천(化天)하신지라. 응종이 놀라서 급히 화천하심을 소리치니 나갔던 종도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하리오 하며 탄식하니라. 갑자기 뭉게 구름이 사방을 덮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는도다. 때는 단기 四천 二백 四십 二년 이조 순종 융희 三년 기유 六월 二十四일 신축 사시이고 서기로는 一九〇九년 八월 九일이었도다.
【행록 5장 36절】이 때에 여러 종도가 떠나고 김 형렬 · 차 경석 · 박 공우 · 김 자현 · 김 갑칠 · 김 덕찬 등 여섯 사람만이 상제를 지켜보니라. 부친이 고부 객망리 본댁으로부터 동곡에 오시고 형렬은 뜻밖의 변을 당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 종도들이 궤속에 간수하였던 돈으로 치상을 끝내고 남은 돈을 본댁으로 보냈도다.
【행록 5장 37절】치상 후에 형렬과 경석은 상제의 부친을 모시고 객망리에 가서 모친을 조문하고 다시 정읍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玄武經)을 옮겨 썼도다.
【행록 5장 38절】상제께서 거처하시던 방에서 물이 들어있는 흰병과 작은 칼이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에 발견되었는데 병마개로 쓰인 종이에
길화개길실(吉花開吉實) 흉화개흉실(凶花開凶實)
의 글귀와 다음과 같은 글들이 씌어 있었도다.
병유대세(病有大勢)
병유소세(病有小勢)
대병무약(大病無藥) 소병혹유약(小病或有藥)
연이대병지약(然而大病之藥) 안심안신(安心安身)
소병지약(小病之藥) 사물탕팔십첩(四物湯八十貼)
기도(祈禱)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대병출어무도(大病出於無道)
소병출어무도(小病出於無道)
득기유도(得其有道) 즉대병물약자효(則大病勿藥自效) 소병물약자효(小病勿藥自效)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 예장(禮章)
의통(醫統)
망기부자무도(忘其父者無道)
망기군자무도(忘其君者無道)
망기사자무도(忘其師者無道)
세무충(世無忠) 세무효(世無孝) 세무열(世無烈) 시고천하개병(是故天下皆病)
병세(病勢)
유천하지병자(有天下之病者) 용천하지약(用天下之藥) 궐병내유(厥病乃愈)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身)
원형이정봉천지도술약국(元亨利貞奉天地道術藥局) 재전주동곡생사판단(在全州銅谷生死辦斷)
대인대의무병(大仁大義無病)
삼계복마대제신위(三界伏魔大帝神位) 원진천존관성제군(遠鎭天尊關聖帝君)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 유천하지생기(有天下之生氣)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 유천하지사기(有天下之死氣)
공자노지대사구(孔子魯之大司寇)
맹자선설제량지군(孟子善說齊梁之君)
서유대성인왈서학(西有大聖人曰西學)
동유대성인왈동학(東有大聖人曰東學) 도시교민화민(都是敎民化民)
근일일본문신무신(近日日本文神武神)
병무도통(幷務道通)
조선국(朝鮮國) 상계신(上計神) 중계신(中計神) 하계신(下計神) 무의무탁(無依無托) 불가불문자계어인(不可不文字戒於人)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성인내작(聖人乃作) 선천하지직(先天下之職) 선천하지업(先天下之業) 직자의야(職者醫也) 업자통야(業者統也) 성지직성지업(聖之職聖之業)
첫댓글 제 종교는 대순진리회(이문 1방면, 정리)입니다. 카페 개설 초기에 저는 이 점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저는 카페활동에 종교를 결부시킬 의도는 없습니다. 2011년도에 교통사고(사망사고)를 내고, 저는 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처음 4개월 동안은 매일 천태종 절에 다니며 거의 온종일 "관세음보살" 염불을 외웠습니다. 이후 1988-1995년까지 믿었던 대순진리회를 다시 제 종교로 삼았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전경"을 타이핑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그 파일을 발견했기에, 카페 검색유입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게시글로 올립니다. 용량초과로 부득이 여러개 게시글로 나누어 올립니다.
<행록>은 1871-1909년까지 이 땅에서 사셨던 <강증산>이라는 분의 일대기입니다. 대순진리회는 <다신론적 유일신> 사상을 가진 종교인데, 이 분을 신앙의 대상(구천상제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촛불 비온의 O개념 때문에
우리나라 민족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