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79
9월13일[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2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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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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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U_rHOW0aKQ
[서울대교구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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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 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을 기억합니다.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는 원래 은수자의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으로 광야로 들어가서 6년간의 금욕과 수덕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요한은 얼마나 깊이 성경을 묵상했던지 신구약 전체 내용을 통째로 외울 정도였답니다. 광야에서 깊은 내공을 닦고 성덕의 정상으로 올라간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다시 도시로 돌아옵니다.
요한의 출중함을 눈여겨 본 안티오키아 주교는 그에게 사제품을 수여하고 주교좌 대성당 주임 설교가로 임명합니다. 그 시점을 계기로 요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사목자이자 명강론가로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의 설교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으며 강렬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요한의 강론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사람들은 혹시 사도 바오로가 다시 태어나신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지닐 정도였습니다.
그의 강론을 듣는 청중들은 큰 감동을 받아 울고 흐느꼈으며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강의가 너무 은혜로워 기쁨에 찬 나머지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많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오늘 내 강론은 어떠한가? 말씀이 살아 있는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교우들이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
오히려 반대로 내 강론이 청중들을 분심으로 몰고가며, 분노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한의 말년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초대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영입되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수난과 십자가 길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강직한 성격상 대도시 신자들의 나태함과 문란함을 간과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시대의 열렬한 신앙과 소박한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단이 성행했고, 악습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엄격한 수도생활이 몸에 밴 요한은 탄식을 거듭하며 악폐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교관을 건립하는 대신 병원과 순례자 숙소를 지었습니다. 훈계할 일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하게 훈계를 했습니다.
요한의 꼬장꼬장한 모습은 즉시 악습에 젖어 사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동료 주교, 사제들조차도 요한을 향해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며 반감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과격함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황제와 황후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주교좌 자리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이리로 유배되었다가, 또 저리로 유배되고, 마침내 흑해 해안가 폰투스 코마나에 도착한 그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주교좌 성당에서 쫓겨날 때 남긴 말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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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2MxSuS4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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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뽑을 때 유일하게 보아야 하는 한 가지>
오늘 복음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리더’가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먼 인도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인도자는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횡포에 서민들이 들고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정치할 때 더 무서웠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그 공포정치(1793-1794) 동안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급진적인 자코뱅 같은 지도자들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적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혁명적 이상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화국에 위협이 되며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공안전위원회는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 의견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잔인했습니다.
그들의 통치 중 가장 악명 높은 도구 중 하나는 단두대였습니다. 그것은 종종 반혁명 활동에 대한 의심이나 모호한 비난을 바탕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처형하는 데 사용되는 테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약 16,000명이 공식 처형되었으며, 역사가들은 약 40,000명이 즉결 처형이나 기타 형태의 폭력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희생자 중에는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성직자, 심지어 한때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웠지만 온건한 접근을 제안한 자와 같은 전 혁명 동맹자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이러한 무지의 비극적인 예는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 중에 일어났습니다. 혁명가들은 폭군에게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자신들의 행동에서 점점 커지는 폭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눈에 있는 ‘티’를 제거했지만, 그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공포정치를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권변호사였고 사형폐지 운동을 벌였으나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자, 그가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 횟수는 11차례에 이르렀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직접 처형 명령서를 작성했고, 사형 집행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루이 16세가 사형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맙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게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들보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타인의 잘못을 감싸주는 인도자를 원하십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지만 회개하고 변화한 사람의 심오한 성경적 예입니다. 처음에 젊은 왕이었던 다윗은 믿음과 의로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투에서 죽게 함으로써 그의 능력은 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다윗의 죄는 예언자 나탄에 의해 그에게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 죄는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의 기도에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5)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지정한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 때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부터입니다.
그는 닭이 울 때마다 자신도 배신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눈에서 들보가 빠져나가면 눈물이 납니다. 사람을 뽑을 때 유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끊임없이 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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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밖이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안을 소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고, 갈등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 중에 ‘시기, 질투, 분노, 원망, 탐욕, 나태, 식탐’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소금은 등잔을 밝히는 기름과 같습니다. 먼저 소금이 되지 않으면 빛이 되기 어렵습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고,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소금이 녹아 형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는 빛은 참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제 집무실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집무실은 부주임 신부님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 화장실, 샤워실, 싱크대가 있습니다. 10명 이상이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지만, 조금 넓고 큰 편입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작은 방으로 집무실을 옮기면 20명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작은 방으로 옮겼습니다. 옮기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청년들과 모임을 가지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찾아오는 교우가 있으면 부주임 신부님도 불편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 자리를 옮기면서 3가지 좋은 점이 생겼습니다. 교우들은 편하게 모일 수 있는 다목적 모임방이 생겨서 좋습니다. 사제들은 아늑한 집무실이 생겨서 좋습니다. 방을 옮기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행동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존심, 권위, 귀찮음’과 같은 것들이 마음에 있으면 합리적이고, 합당한 선택이 어렵습니다.
집무실을 옮기면서 예전에 만났던 구청장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한 달에 한번 구청에서 근무하는 교우들을 위한 미사엘 갔습니다. 구청장이 새로 바뀌면서 구청장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전임 구청장은 집무실이 무척 컸습니다. 구청의 현안과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이 있었고, 널찍한 회의실이 있었고, 구청장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집무실이 있었습니다. 신임 구청장은 집무실을 확 줄였습니다. 거의 사용하지 않던 ‘전시 공간, 회의실’을 개방하여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에는 두 개의 방을 지나야 구청장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바뀌면서 문 하나만 지나면 구청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청장은 구민들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직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였습니다. 구청에는 시설관리 공단이 있었습니다. 구청에서 관리하는 공원, 운동장, 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본당의 날을 맞이해서 교우들이 체육대회를 하고, 야외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청에서 운영하는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구청에서는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고, 본당의 날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늘 환한 웃음으로 구민들을 만났던 구청장이 생각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서 흘릴 나의 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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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9-42: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제자들은 정확하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무지의 어둠에 묻혀있는 자가 똑같이 어둠에 묻혀있는 자를 진리로 이끌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잘못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에서 먼저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어느 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비판하며, 그 비판이 도를 지나서 냉혹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접하고 생활한다고 자부하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도 남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과 색안경을 통해서 남을 쳐다보고 비판함으로써 남의 결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몰아세우는 일들이 있다. 내가 그보다 무엇이 잘났기 때문에 충고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처지가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한 위선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개개인은 모두 사회 스승의 표양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표양은 예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 들킨 여인(요한 8,1-11)을 용서하신 것, 또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마태 18,21-22) 하신 말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모범들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이래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우리가 사회에 표양을 보여야 할 본분이 있으므로 관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대하고 엄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듯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을 대함으로써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삶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기쁘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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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1코린 9,17)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삯을 요구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의무라고 말합니다. 직무가 맡겨졌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직무’로 옮긴 단어는 『공동 번역 성서』에서도 ‘직무’로 되어 있고, 『200주년 신약 성서』에서는 ‘직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말 단어는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서양의 여러 언어에서 ‘경제’(economy)라는 단어의 근원이 되고, 신학에서는 자주 ‘경륜’으로 옮겨지기도 하지요. 어원상으로는 집안을, 또는 집안의 일들을 관리하는 것을 뜻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맡아 돌보는 일을 일컬어 자주 쓰이며 루카 복음서 16장 2-4절에서는 집사의 임무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안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에 주로 ‘경륜’이라고 옮기고, 특히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획을 일컬어 많이 씁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 선포를 자신의 ‘직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집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몫으로 지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뜻대로, 스스로 무슨 업적을 이루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집주인 아래 있는 집사로서, 주인의 계획에 따라 자신에게 정하여진 몫을 하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리며 자신을 단련한다 하여도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자신의 몫을 조용히 채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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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ㄴ-42)
1)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 23,16-17)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아주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루카 17,1-3)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다가 흔히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갑니다.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지식을 전해 주는 일이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이는 일입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묵상하고, 온 삶으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직무를 받지 않았더라도, 모든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고(마태 5,13-16),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어떤 신앙인이, 또는 교회 전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그것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일이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뒤의 12장에 이런 경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2)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든 신앙인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만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는 제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예수님보다 위에 설 수 없고, 예수님보다 앞에서 갈 수도 없습니다. 신학이나 성서학 박사 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더라도...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3)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마태 18,15-16ㄱ)
죄를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를 때,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 형제의 죄는 ‘티’이고, 그 형제를 타이르고 있는 나의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의인’인 내가 ‘죄인’인 그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나의 눈 속에 티는 있어도 들보는 결코 없다.”라고 아주 자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퍼센트 ‘교만한 위선자’입니다.
4)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는 말씀은, 남의 죄를 꾸짖고 타이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삶부터 회개하고 바로잡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자기반성과 회개만 하면서 남을 타이르는 일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잘못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멸망을 당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고, 나에게는 내가 구원받는 일만이 중요할 뿐이다.”라는 ‘사랑 없는 이기적인’ 생각도 역시 죄입니다.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형제의 티를 빼내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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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만들 때, 삼나무나 돌무화과나무로 만든 대들보를 올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얹은 다음 거기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옥상은 작은 방을 만들거나 작물을 널어 말리는 장소였고, 지붕 위에 누가 올라가면 천장의 대들보 사이에서 바싹 마른 나뭇가지 부스러기나 티가 떨어져 집 안에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군중에게 친숙한 소재인 들보와 티를 예로 들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37) 하신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고, 잘못된 스승이 자신을 넘어서는 제자를 키워 낼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정작 자신이 눈먼 이요 부족한 스승임을 외면한 채,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지식과 소유를 내세워 형제와 이웃을 단죄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이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눈이 먼 줄 알면서 눈을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 나태함도, 앞이 보이는 척하며 자신을 과시하는 위선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오래 머무르지 못합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스승임을 자처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고도 스스로 실격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신을 단련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기억합니다(제1독서 참조).
내 눈 속의 들보는 빼내고 가족과 형제의 눈에 든 티를 사랑으로 발견하여 조심히 꺼내 줄 수 있는 혜안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태오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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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삶을 성찰합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 복음 6장 39-42절)
<성찰>
사제로 살면서 거의 매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고해실에서 죄 고백을 듣는 일입니다. 성사 준비를 잘 하여 눈물로 통회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 준비 없이 고해실에 들어오는 분들도 종종 만납니다. 그럴 때면 짜증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옹졸한 마음이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구현되는 신비를 방해하지 않도록 인내의 은총을 청하며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도 듣기가 참 어렵고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고해실에 들어와서 내 죄는 고백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죄만을 고백하는 경우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성찰’이란 좋은 기도 관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찰하려고 앉았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내 죄가 아니라 남의 죄가 먼저 떠오릅니다. 내 죄는 성찰하기 힘든데 반해 남의 죄는 참 쉽게 발견합니다.
우리의 눈은 어둡습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참된 것을 볼 수 있을까요?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밖으로 향해 있는 시선을 돌려 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참된 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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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6,39)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는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장편 소설의 제목입니다. 사라마구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6,39)의 말씀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나 봅니다. 그러기에 서문에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주시하라. 만약 당신이 주시할 수 있다면, 관찰하라.” 그러기에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었고, 오직 당신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책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부분을 인용합니다. 『난 우리가 눈이 먼 게 아니라, 이미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눈이 멀었지만, 보고 있는. 볼 수 있는 눈이 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39)라는 구절을 들어, “인도하는 사람은 눈이 멀어서는 안 되며, 앞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현명하게 이끌기 위해 지혜가 필요한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될 위험이 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믿고 따르는 이들, 곧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무지와 편협의 어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한 질책이며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자각으로 초대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이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란 소설의 후속 편의 제목을 「눈뜬 자들의 도시」라고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을 다른 시선에서 파악하기 위해,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극배우인 마르틴 발트샤이트(Martin Baltscheit)가 발표한 「다섯 명의 과학자와 코끼리」라는 어린이 창작동화를 소개합니다. 이 동화책은 진실 앞에서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꼬집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볕 좋은 날, 눈먼 다섯 명의 과학자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코끼리 한 마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생겨 당황한 과학자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먼저 코끼리 코를 만진 한 과학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것은 소방차 호스"라고 말했습니다. 발을 만진 과학자는 “떡갈나무”라고 주장했습니다. 꼬리를 만진 과학자는 “화장실 솔”이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과학자들도 각각 코끼리의 등과 귀를 만지더니 “산 같다”, “양탄자 같다”하며 서로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코끼리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때 서커스 단장이 숨을 헐떡이며 과학자들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혹시 덩치는 산만하고 귀는 양탄자 같고, 다리는 나무줄기 같고, 꼬리는 화장실 솔 같고, 코는 소방차 호스같이 생긴, 코끼리가 지나갔나요?” 과학자들은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모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코끼리는 이리로 지나가지 않았소.”』
그들은 모두 여전히,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섯 명의 눈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무엇이냐, 는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판단했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서커스 단장이 자신들이 찾고 있던 진실 즉 코끼리라는 정답을 알려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바를 제대로 알아들으셨는지요. 이 두 말씀에서 눈먼 이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부저소정저釜底笑鼎底 가마솥이 노구솥을 보고 검다고 비웃는다.’는 속담처럼, 자신의 허물이 큰 것은 모르고 남의 작은 결점을 들춰내어 비웃는 사람이 널렸습니다. 눈먼 이는 단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종교인 중에도, 정치인 중에도 많고 많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허물이나 무지의 어둠, 눈멂을 아는 게 깨달음의 시작이며 진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지 말고 “주님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시다.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6,40)라고 말씀하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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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곤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머리, 가슴, 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세 부분을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정답은 ‘죽-는-다’라고 하네요. 사람은 곤충과 달리 몸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곤충은 몸통이 분절되어 있어서 나뉘어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곤충과 분명히 다릅니다. 종종 사람을 곤충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은 같을까요? 역시 다릅니다. 특히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과 사람은 같을까요? 이 역시 답은 ‘다르다’ 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 이 점만 봐도 사람 역시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이 좋아서 글 쓸 때는 만년필을 이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년필에 관심이 많습니다. 종종 스페셜 에디션 만년필이 나옵니다. 그 가격은 어떨까요?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왜냐하면 한정판 만년필은 많이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딱 한 자루만 만든다면 어떨까요?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스페셜 에디션입니다. 그것도 딱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로 우리 각자를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고유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남들처럼만 살려고 합니다. 고유함은 떨어지고 자기 값어치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고유함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에서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고 남들처럼 자기 욕심만 채워나간다면 나의 가치는 떨어질 뿐입니다.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랑으로 나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가치를 더 높여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모범을 보였으니, 우리도 따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고귀함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갖췄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을 살았지, 결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위선적이고, 그러면서 자기들만 옳다는 것을 힘주어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 곧 단점을 찾으려는 사람은 남의 고귀함과 고유함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으로 가치를 올려주시는 예수님과 정반대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고유함과 고귀함을 서로 올릴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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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른 사람의 추한 모습을 말하러 다니는 큰 험담꾼은 악마”라고 하시며 “험담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나쁜 전염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6,42).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하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나 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삶의 모범보다 더 큰 말은 없습니다.
어미게와 아기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그러자 아기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남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나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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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비로소>
루카 6,39-42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너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나의
눈동자에
비친
너를
볼 수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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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 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 곧 자신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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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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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5)
화답송 시편이 좋아 인용합니다. 어제 저를 온종일 행복하게 했던 "꽃"이란 깨달음의 짧은 자작 지혜시도 나눕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시대의 현자, 참으로 지혜로운 지도자 교황님의 어제 싱가포르에서의 일정도 감동적입니다. 오늘은 주로 지혜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교황 홈페이지 전부를 채우고 있는 싱가포르에서의 소식이요 몇 기사 제목을 나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양한 믿음의 사람들을 한가족처럼 느끼게 만든다.”
“교황은 ‘싱가포르는 인간의 성취할 수 모든 것의 반짝이는 빛이다.’말했다.”
“교황은 ‘지도자들은 모든 백성과 나라들의 공동선을 촉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미사시, ‘사랑은 복음의 중심이다.’라 말했다.”
교황님의 지혜가 반짝이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지혜를 상기시킵니다.
“어제를 돌아본다고 해서 지식이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깨달을 수 있다.”<다산>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 일을 본다면 풀지 못할 어려운 일이 없다.”<명심보감>
회개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요,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롭게 살고 싶다면 하느님의 지혜인 주님과 친교를 깊이하면 됩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요, 오늘 기념하는 교회학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입니다. 성 요한 금구는 349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밑에서 자라나며 독실한 신앙을 물려 받습니다. 주교학자 기념일 마다 큰 소리로 되뇌는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도 참 좋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과 깊은 친교로 참으로 지혜로웠던 교회학자들이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성 아타나시오, 성 대 바실리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의 4대교부에 속하며 뛰어난 설교로 황금의 입이라 하여 한자로 금구라 불리는 성인은 연설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설교와 저술에서 구약을 약7천번, 신약을 1만1천번 인용했다니 얼마나 성경에 정통한 주님을 사랑한 주교학자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뛰어난 주교학자에 정의의 목자로 소박한 민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으며 숱한 박해로 파란만장한 순교적 삶을 살다가, 유배중 흑해 동쪽 해안에 있는 피티우스 인근의 코마나에서 407년 9월14일 향년 60세에 선종하며 그 장면이 감동적입니다.
‘코마나 경당에 도착하자 요한은 하얀 의복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조용히 벗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신발만 빼고 모두 바꿔 입었다. 그런 다음 요한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성체를 모시고(여행중에 성체를 가지고 다님), 그의 삶을 요약하는 마지막 기도를 바치니 임종어가 되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이어 “아멘”이라고 말하며 성호를 그었다.’
얼마전 읽은 잠언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9.10). 그대로 성 요한의 삶이 이를 입증하며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전서의 바오로 사도의 다음 고백도 그의 지혜를 입증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모든 사람의 종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끊임없는 자기훈련과 절제, 끈기, 지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역시 값싼 은총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교회의 눈 밝은 지도자, 성 요한 금구와 바오로 사도가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눈먼이가 눈먼이를 인도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주님입니다.
나라든 교회든 가정이든, 무지에 눈먼 인도자!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이것은 작금의 우리가 겪는 현실입니다. 눈먼 지도자들뿐 아니라 눈먼 무지의 국민들도 참 많습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은 이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침된 자존심은 자기고집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참나를 아는 것이 지혜와 겸손입니다. 매일 미사의 은총이 참 나를 아는 지혜와 겸손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 하느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시편84,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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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기 눈을 보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생각에 형제 눈의 티는 보고 내 눈의 들보를 못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것은 보고 큰 것은 못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남의 눈은 보고 내 눈은 안 보는 겁니다.
어제 자기 행복을 점검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만 자기 눈을 점검치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안경을 자주 부서트리고, 잃어버리고, 안 쓰고 다니고 닦지 않은 채로 다닙니다.
그래서 가끔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집을 나서 불편하고, 안경에 먼지나 기름이 껴서 불편한데도 그냥 다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육신의 눈을 점검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그저 불편함일 뿐입니다.
진짜 큰 문제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내가 어떤 식으로 남이나 세상을 보는지 그것입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겠지요. 색안경을 쓰고 보면 다 그 색깔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밖에도 욕심의 눈으로 보는 것, 교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고, 호감과 비호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지요.
욕심의 눈으로 보면 욕심내는 것밖에는 보지 못하고, 교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이 없어 아예 못 보고, 호감의 눈으로 보면 그의 모든 것을 좋게만 보고 비호감의 눈으로 보면 그의 모든 것을 나쁘게 보지요.
어쨌거나 진짜 문제는 내 눈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과 의사가 남의 눈은 보고 고쳐주면서 자기 눈은 보지 않아 못 보게 되는 것과 같지요.
이런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인데, 돌아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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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6,41)
<또 하나의 금구!>
오늘 복음(루카6,39-42)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는 비유를 들어 '남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확고히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고 고칠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고쳐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만 비판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바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눈먼 위선자였습니다. 아는 바를 실행하지 않은 위선자,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은 위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그런 위선자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태 23,1-36 참조)
뜨끔합니다. 저도 나 자신은 잘 살지 못하면서 신자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를 심판하는 것은 '내가 너보다 낫고, 내가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 8,1-2)
그렇습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금구(金口.황금입)라는 뜻인데, 그래서 '요한 금구'고도 합니다. 설교를 너무나 잘하셔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으로만이 금구가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또 하나의 금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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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 39)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떠날 것인지를
기도하게 됩니다.
참된 인도자는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주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참되고
참된 사랑을
맛보았기에
참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눈먼 우리들을
치유하는 것은
주님과의
참된 관계뿐입니다.
참된 관계가
참된 인도자를
만들어냅니다.
참된 인도자는
자신을 알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말씀을
듣습니다.
눈먼 이로
눈먼 이들을
이끌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존재를
알게하시는
주님 사랑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인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발자국을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라는
사랑의 발자국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스승과
참된 인도자는
섬김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섬기는 섬김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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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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