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배우를 기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앤서니 퀸 (1915년~2001)이 2001년 6월 3일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화인생은 파란만장했고 한편의 기이한 인생드라마이기도 했다.
1915년 멕시코 북부지역 치와와에서 태어난 퀸은 어린 날 로스엔젤리스로 이민 왔다.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졸지에 어린 가장이 된 퀸은 구두닦이와 심부름꾼을 거쳐 내기 권투선수가 된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온 가족이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가난 때문에 뛰어든 세상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겨웠다.
그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 건축설계가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발음이 불확실한 걸 아는 선생은 그에게 혀 수술을 하도록 권유했다. 선생인 스텔라는 그의 혀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퀸은 수술을 했지만 여전히 발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는 왕년의 배우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연기수업을 하며 대신 잡다한 일을 해주게 된다.
그가 힘에 부치는 연기수업을 접고 마도로스가 되어 바다를 떠돌다가 항구에 발을 디딘 후, 어느 신문에 파라마운트사에서 단역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모를 한다. 그가 배우로 입문하게 되는 동기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21살 때다.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숱한 영화를 제작한 세실 비 드밀은 할리우드 최고의 실력자였고 이 영화에 출연한 퀸은 드밀의 딸 캐서린과 열애 끝에 결혼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고 퀸은 그때부터 쟁쟁한 여배우들인 오드리 헵번, 잉그리드 버그만과 딸 이자벨라 로셀리니, 리타 헤이워즈, 모린 오하라 등과 숱한 염문을 뿌린다.
이런 퀸의 이면에는 일종의 가난에 대한 보상과 또 하난 천민인 자신의 친척들을 호화로운 결혼식장에 초청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그가 연기력을 인정 밭은 것은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 이를 계기로 1952년 엘리아 카잔 감독의 '혁망아 사바타'에서 말론 브랜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앤서니 퀸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들을 착취한 지주들에게 항의방문을 한 농부들과 지주의 만남은 천당과 지옥을 연상케 한다.
혁명아 자바타
호사스런 생활을 하면서도 농민들을 착취하는 지주들에 분노해서 혁명을 하게 되는 농민들과 사바타의 동생 유페미오 역을 강인하게 보여주는 앤서니 퀸은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그의 개성이 한껏 드러나 보이는 건 연극에서 닦은 절제된 연기의 힘이다.
1932년 에이젠슈테인에 의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비바 멕시코'가 기동줄거리지만 엘리아 카잔은 자신이 좌파를 지적했던 전력을 벗어 던진 시험무대이기도 한 이 작품은 어쨌거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퀸에게 배우로서의 입지를 마련해주었다.
길
이어 1954년 페데리코 펠리니가 '길'을 제작할 때 그의 영화 '아틸라'에 출연 중이던 퀸은 디노 데 로렌티스에게 사정을 한다. 펠리니의 영화에 출연하게 해주고 제작비도 대라고. 그 '길'이 20세기 영화사를 장식할 줄은 제작자인 로렌티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길'의 잠파노는 영원히 사람들의 뇌리에 살아있다. 그건 퀸의 연기에 대한 강한 의지와 욕망이 내재해 있었겠지만 페데리코 펠리니의 연출에 힘 입은바 크다.
물론 부인인 줄리에타 마시나와 퀸의 연기가 멋진 하모니를 이뤄준 결과지만 어쨌거나 두 배우의 연기는 세월을 뛰어넘어 깊은 애상을 남겨주었다. 퀸에게 두 번째 영광이 찾아온 건 1957년 고갱 역으로 아카데미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러스트 포 라이프'다.
한 해 전 퀸은 '노틀담의 꼽추'를 연기한다. 꼽추인 콰지모도 역은 만은 팬들의 사랑을 받지만 영화사적으론 '노틀담의 꼽추'는 형편없는 오락영화일 뿐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년 데이비드 린이 연출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또 다른 영화지평을 열어준다. 족장 아부 타이 역을 강인하게 소화해내는 그의 카리스마는 사막 다음으로 강렬하다. 63년 '헤비급 권투선수를 위한 진혼곡'으로 그의 연기는 변신을 거듭한다. 그가 인생과 연기의 절정을 맛보는 것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의 각본을 들고 감독 마이클 카고야니스가 퀸을 찾아오면서다.
1964년이다. 이 시기가 바로 그리스 영화의 전성기라고 해야겠다(두 감독 테오 앙겔로풀루스와 마이클 카고야니스, 그들이 있어 영화는 예술로 승화된다).
희랍인 조르바
어쨌거나 퀸은 '희랍인 조르바'에서 그의 영화인생 중 가장 빛나는 연기를 펼친다. 제도교육권에서 멀리 떨어진 이 배우는 독서를 통해 세상사를 배운다. 이 독서가 조르바를 연기하는데 큰 힘이 되고 나아가 그의 연기인생의 새로운 틀을 다진다.
'희랍인 조르바' 역은 퀸이 아니면 어떤 배우도 소화해내지 못할 가장 그리스 인적인 연기를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앤서니 퀸은 자기 개성에 딱 맞는 가장 그리스 인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빛나는 또 한사람의 배우는 러시아출생의 여우 라일라 케드로바다. 늙고 추한 창녀 호르텐스로 분한 이 노배우는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한 어떤 고통이나 죽음도 불사하겠다며 조르바를 유혹하는데 퀸과 케드로바의 앙상볼은 일품이다.
마키엘 카고야니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를 냉철하게 해석해낸다. 영화의 참 맛을 느끼게 하는 연출의 힘은 감독의 진지한 그리스의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특히 음악을 담당한 미키스 데오도라키스를 기억해야 한다. 그가 만든 음악들은 영화음악의 한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오묘한 선율 속에 묻어나는 그의 음악적 힘은 영혼의 울림이고 깊은 한을 담아낸다. 어떤 작가가 데오도라키스의 '기차는 8시에 떠난다'를 '기차는 7시에 떠난다'로 시간만 바꿔 제목을 붙인 책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함을 지우지 못했는데 그만큼 데오도라키스의 음악은 호소력과 감정의 진폭을 강하게 울려준다.
이어 1949년에 만든 영화 '25시'는 루마니아 태생의 작가 게오르규의 원작소설을 앙리 베르뉴이 감독이 연출해서 앤소니 퀸을 또 한번 대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가 예쁜 부인을 얻은 죄로 유태인으로 조작되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고 다시 헝가리인으로 강요되고 전시효과를 위해 독일인으로 개조되는 주인공 요한 모리츠를 기가 막히게 연기한 퀸은 배우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가 '25시'에서 약소국인 루마니인의 비애를 가슴 절이도록 보여주는 이면에는 바로 미국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퀸의 한이 배어있다.
1968년 스탠리 크레이머가 연출한 '산타비토리아의 비밀'이 상영된다. 사화문제를 심도있게 다루는 크레이머와 우직하고 강인한 농부를 멋지게 연기하는 두 사람이 만들어낸 이 영화는 즐겁고 유쾌하다. 후퇴하는 독일군들이 이 고장의 명물인 포도주를 약탈하려고 하자 마을사람들과 읍장인 퀸이 나서서 산 속에 있는 동굴로 포도주를 옮긴다. 릴레이식으로 병을 옮기는 과정은 장관이다.
산타비토리아의 비밀
더구나 퀸의 극성스런 부인으로 나오는 안나 마냐니를 본다는 즐거움 또한 크다. 전형적인 이태리배우인 그녀의 연기도 일품이고 함께 나오는 하디 크루거, '25시'에서 부인으로 나왔던 비르나 리지도 멋진 연기를 펼친다.
퀸이 숱하게 출연한 영화들과 그의 인생을 새삼 되돌아보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란 걸 새삼 느낀다.
그가 출연했던 몇 편의 작품들을 적어본다. '황야의 산세바스찬', '라스 페기', '검은 초상', 서부영화의 고전인 '건힐의 결투', '바렌', '마르세이유 탈출', '페세이지', '라스트 찬스' 그리고 그리스의 선박 왕을 그린 '그릭 타이쿤' 등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앤서니 퀸도 갔고 낭만이란 단어도 조금씩 퇴색해지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좋은 영화들은 만들어지고 있다. 먼저 간 퀸에게 명복을 빈다.
건힐의 결투
한가지 더 추신을 쓴다. 2001년 6월 '뜨거운 것이 좋아' 에서 몬로와 열연했던 잭 레몬이 76세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뜨더운 것이 좋아 : 오른쪽부터 토니 커티스, 마릴린 먼로, 잭 레먼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을 적어본다.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줍니다', '술과 장미의 나날', '실종', '차이나 신드롬', '더 프런트 페이지' 등이 있다. 웃음 속에 슬픔을 표현해내는 가장 서민적인 배우인 레몬, 그가 없는 세상의 삭막함을 슬퍼하며 애도를 표한다.
사진출처 씨네 21
글: 지난 여름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