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클래식
미적 경이의 절정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통해 지상에 내려앉은 천사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천사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천사의 상징이라 할 날개를 갑옷에 붙이려는 시도가 행해지는 등 제작팀의 여러 시행착오가 이어졌지만, 정작 화면에 포착된 것은 천상에서의 공기처럼 가벼운 날개가 지상에 이르러 인간을 꼭 빼닮은 형상으로 전환되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듯한 카메라는 감추어진 천사의 날개를 달고 도시의 곳곳을 부유한다.
트릭 효과를 사용한 이 장면은 카메라 앞에 거울을 설치하고 천사 역을 맡은 배우와 대역이 스튜디오의 다른 부분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서서 서로 거울에 반사되는 것을 촬영해야 한다. 대역은 날개를 달지만, 천사 역을 맡은 배우는 그렇지 않다. 조명의 사용으로 어둠 속에서 날개는 비춰졌다가 곧 사라지게 된다. 촬영감독 앙리 아르캉은 <미녀와 야수>(1946) 이래 여러 작품에서 이 방법을 행해왔다. 적잖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 방식이 첨단기술을 동원한 후반작업에서의 조작술보다 감정을 보다 깊이 전달한다는 건 일종의 경이다.
‘대본과 감독, 현장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스타일을 적절히 전환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촬영감독.’ 무성영화시대부터 빛과 그림자를 좇아온 아르캉의 촬영인생은 이러한 찬사를 무색게 한다. 처음 촬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만하지만 그의 삶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1909년 파리 태생의 그는 15살 되던 해 방학을 맡아 작은 해변으로 피서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영화 촬영 팀과 맞닥뜨린 그는, “조명이 터지는 그 순간 부두와 보트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불을 켰다. 마술과도 같은 광경에 사로잡힌 나는 그 순간 촬영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며 그때의 감동을 전한다. 고교 졸업 뒤 파리의 예술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지만,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생계를 위해 은행원이 된다. 그러나 고된 생활에도 야간에는 영화를 공부하는 열의를 잃지 않았으며, 그러한 인내로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현상하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해 무성영화로 촬영조감독으로 신고식을 치르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촬영감독으로의 첫 작품은 1936년 장 르누아르 감독의 <프랑스 사람들>인데,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2년간의 옥살이로 작품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듬해 도주를 한 그는 레지스탕스를 결성하여 많은 반나치 영화를 촬영한다. 전쟁 후기에 작업한 르네 클레망 감독의 <철로변 전투>(1946)는 일체의 조명을 배제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흑백영화로 네오리얼리즘의 전조를 예감케 하며, 사회참여의식이 투철한 젊은 시기의 아르캉을 잘 대변해준다. 같은 해 현란한 특수효과 대신, 정교하게 고안된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1946)를 통해 그는 동화 속의 초현실적인 세계와 예술을 접목시킨다.
이후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감독들과 조우하면서 영역을 넓혀나가던 그는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인 빔 벤더스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아르캉과의 작업을 가장 아름다운 영화강의로 회상하는 빔 벤더스의 표현처럼, 그의 화면 곳곳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미적 경이의 절정이다. <사물의 상태>(1982)에서 거대한 도시는 흑백의 몽롱한 이미지에 스며들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와 인간 사이의 간극은 블루톤의 단색화면과 칼라의 이미지를 오가며 메워진다.
1993년<마비된 정원>(Petrified Garden)으로 마지막 작업을 한 뒤, 지난해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 아르캉의 65년 촬영생활은 100여편에 이르는 극영화와 50여편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드라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색채와 소리가 없던 무성영화시대부터 한결같이 그가 탐구한 것은 빛과 그림자였으며, 이 둘의 소통으로 하나의 이미지는 스크린 위에 각인된다.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저서 <빛과 그림자>에서도 전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 시대의 대가가 우리를 위해 남겨준 유산을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의 진리이며 영화 또한 예외가 아니다. 박물관으로 가라. 그들이 어떻게 빛으로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왔는가를 살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아르캉의 가르침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필모그래피
<마비된 정원>(Le Jardin Petrifie, 1993) 아모스 기타이 감독
<이국의 망령>(Golem, l’Esprit de l’exil, 1992) 아모스 기타이 감독
<골렘의 탄생>(Naissance d’un Golem, 1991) 아모스 기타이 감독
<베를린 예루살렘>(Berlin-Yerushalaim, 1989) 아모스 기타이 감독
<나는 여백에 쓴다>(J’ecris dans l’Espace, 1989) 피에르 에타익 감독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1987) 빔 벤더스 감독
<에스더>(Esther, 1986) 아모스 기타이 감독
<우리의 나찌>(Notre Nazi, 1984) 로버트 크레머 감독
<이상한 애정관계>(A Strange Love Affair, 1984) 에릭 드 퀴페르 감독
<아름다운 죄수>(La Belle Captive, 1983) 알렝 로브 그리에 감독
<입술위의 돌>(Une Pierre Dans la Bouche, 1983) 장 루이즈 르콩드 감독
<고래 위에서>(Het Dak Van de Walvis, 1982) 라울 루이즈 감독
<사물의 상태>(Der Stand Der Dinge, 1982) 빔 벤더스 감독
<송어>(La Truite, 1982) 조셉 로시 감독
<영역>(The Territory, 1981) 라울 루이즈 감독
<몽테 카를로의 숫양>(La Dame de Monte Carlo, 1979) 도미니크 들로셰 감독
<레드 선>(Soleil Rouge, 1971) 테렌스 영 감독
(Figures In A Landscape, 1970) 조셉 로시 감독
<크리스마스 트리>(L’Arbre de Noel, 1969) 테렌스 영 감독
<비우>(Mayerling, 1968) 테렌스 영 감독
(La Fantastique Histoire Vraie d’Eddie Chapman, 1967) 테렌스 영 감독
<양귀비 또한 꽃이다>(Poppies Are Also Flowers, 1966) 테렌스 영 감독
<레이디 L>(Lady L, 1965) 피터 유스티노프 감독
<보석강탈 작전>(Topkapi, 1964) 줄스 다신 감독
<상처 속의 칼>(Le Couteau dans la Plaie, 1963) 아나톨 리박 감독
<파리 여성>(Les Parisiennes, 1962) 마크 알레그레 감독
<검은 스타킹>(Les Collants Noirs, 1960) 테렌스 영 감독
<클레브의 공주>(Princesse de Cleves, 1960) 장 들라노이 감독
<아우스트리츠의 영웅>(The Battle of Austerlitz, 1960) 아벨 강스 감독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1959) 장 메이어 감독
<기사 데온의 비밀>(Le Secret du Chevalier d’Eon, 1959) 자클린 오드리 감독
<시계의 12시간>(Douze Heures d’Horloge, 1959) 게쟈 봉 레드베니 감독
<연의 마술>(Cerf-Volant du Bout du Monde, 1958) 로저 피가우트 감독
<브루주아 젠틀맨>(Le Bourgeois Gentilhomme, 1958) 장 메이어 감독
<파리의 카지노>(Casino de Paris, 1957) 앙드레 윈느벨 감독
<닥터 로랑의 케이스>(Le Cas du Docteur Laurent, 1957) 장 폴 르 샤누아 감독
<나가사키의 태풍>(Typhon sur Nagasaki, 1957) 이브 시암피 감독
<최상의 부분>(La Meilleure Part, 1956) 이브 알레그레 감독
<장난감 부인>(Frou-Frou, 1955) 아우구스토 제니나 감독
<영웅과 죄인>(Les Heros sont Fatigues, 1955) 이브 시암피 감독
<욕망의 항구>(Le Port du Desir, 1955) 에드몽 그레비에 감독
<더러운 것>(Les Impures, 1955) 피에르 슈발리에 감독
<마고 왕비>(La Reine Margot, 1954) 장 드레비에 감독
<죠>(Zoe, 1954) 찰스 브라반트 감독
<쥴리엣트>(Julietta, 1953) 마크 알레그레 감독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Quand Tu Liras Cette Lettre, 1953) 장 피에르 멜빌 감독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윌리엄 와일러 감독
<세 여인>(Trois Femmes, 1952) 앙드레 미셸 감독
<금지된 과실>(Le Fruit Defendu, 1952) 앙리 베르누이 감독
<배회하는 낯선자>(Imbarco a Mezzanotte, 1951) 조셉 로시 감독
<파리는 항상 파리다>(Parigi e Sempre Parigi, 1951) 루치아노 에메르 감독
<미국으로의 여행>(Le Voyage en Amerique, 1951) 앙리 라보렐 감독
<줄리엣 또는 꿈의 열쇠>(Juliette ou la Cle des Songes, 1950) 마르셀 카르네 감독
<나의 사과>(Ma Pomme, 1950) 마크 길베르 소바용 감독
<포구의 마리>(La Marie du Port, 1949) 마르셀 카르네 감독
<베로나의 연인들>(Les Amants de Verone, 1949) 앙드레 케야 감독
<아름답고 작은 해변>(Une si Jolie Petite Plage, 1948) 이브 알레그레 감독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 1948)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Les Maudits, 1947) 르네 클레망 감독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ete, 1946) 장 콕토 감독
<철로변 전투>(La Bataille du Rail, 1946) 르네 클레망 감독
<낙오자 로이>(Echec au Roy, 1945) 장 폴 폴린 감독
<꽃이 있는 부두>(Les Petites du Quai aux Fleurs, 1944) 마크 알레그레 감독
<장님 비너스>(La Venus Aveugle, 1941) 아벨 강스 감독
<하늘의 뮤지션>(Les Musiciens du Ciel, 1940) 조르주 라콩브 감독
<이주자>(L'Emigrante, 1940) 레오 조아농 감독
<붉은 무희>(La Danseuse Rouge, 1937) 장 폴 폴린 감독
<프랑스 사람들>(La Vie est A Nous, 1936) 장 르누아르 감독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