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여인들을 다룬 여느 사극과 마찬가지로 MBC에서 방영 되었던 드라마 <동이> 역시, 다분히 지배층 혹은 상전의 관점에서 궁녀들의 삶을 조명했다. 중전이나 후궁에게 전적으로 충성하고 그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궁녀들의 모습만 주로 보여준 것이다. 하급 궁녀의 시각에서 궁궐의 삶을 보여주는 장치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사극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궁녀의 삶, 아니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性)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궁녀들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궁녀들의 삶 중에서도 동성애 문제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궁녀는 공노비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얽매인 신분인 데다가 임금의 그늘 아래 있는 있다는 이유로, 임금 이외의 남자와는 성관계를 가질 수 없는 법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 궁녀가 성관계를 가질 경우에는 극형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점은 전직 궁녀는 물론이고 궁녀 밑의 무수리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그 같은 법규가 궁녀의 성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법이 될 수는 없었다. 단 몇 년간이라면 모를까, 아예 평생 동안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금령이 제대로 지켜질 리는 만무했다. 이 점은, 일부 궁녀들이 궐 밖으로 몰래 나가 고관대작들과 성관계를 맺거나 일부 궁녀들끼리 궐 안에서 동성애를 가진 사실 등에서 확인된다.
사실, 궁녀들 입장에서는 궐 밖에서 이성 상대방을 찾기보다는 궐 안에서 동성 상대방을 찾는 쪽이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래서 궁녀들의 동성애는 국가의 공식 역사서인 실록에도 자주 기록될 정도로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영조 3년 7월 18일자(1727.9.3) <영조실록>에서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사헌부(감사원 혹은 검찰청)의 정5품 관원인 조현명이 올린 상소문에 궁녀들의 동성애 실태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궁녀들이 어떤 경우에는 친척이라고 하면서 여염집의 아이들을 궁궐에 유숙시키고, 어떤 경우에는 대식(對食)한다고 하면서 요사한 비구니나 천한 과부들과 더불어 (궁궐) 안팎에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궁녀들이 비구니나 과부와 더불어 ’대식(對食)’이라는 관계를 맺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물론 꼭 비구니나 과부와만 ’대식’을 했던 것은 아니다. 뒤에 소개될 <연산군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궁녀들 상호간에도 ’대식’이라는 행위가 벌어졌다.
’대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서로 마주보고 식사를 하다’ 혹은 ’함께 밥 먹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 단어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말은 동성애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잠자리를 같이하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잠만 함께 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듯이, ’식사를 같이하다’는 의미의 ’대식’도 단순히 밥만 함께 먹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의미했다.
’대식’의 구체적 의미는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 권97하(下)에 딸린 주석에 나타난다. 여기서는 ’대식’을 두고 "궁녀들이 서로 부부가 되는 것을 대식이라고 하며, 서로 간에 질투가 대단했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대식’이란 것은 남녀의 성 역할을 각각 분담하는 두 궁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동성애를 의미했다. 중국에서는 이 단어가 나중에는 궁녀와 환관(내시)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발전했지만, <영조실록>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이 단어가 오래도록 궁녀 간의 동성애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런 동성애가 상당한 규모의 궁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영조실록>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연산군일기>에서도 궁녀들의 동성애가 상당히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거론된 데에서 그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또 궁녀들 사이에서 일종의 동성애 문화가 형성된 데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포착할 수 있다. 연산군 10년 11월 8일자(1504.12.13)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궁녀들 사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붕(朋)자를 팔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동성애 쌍방의 의리를 유지하기 위해 팔에 문신을 새겼던 것이다. 이는 이런 커플 문화가 형성될 정도로 동성애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실록에 따르면, 이런 현상이 비단 동성애에서 그치지 않고 궁녀들 간의 파벌 형성으로 연결되어 궐내 비밀이 외부로 누설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해 왕궁에서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중 한 가지로서, 해당 궁녀들의 몸에 낙인을 찍는 장치를 예로 들 수 있다. 연산군 11년 7월 13일자(1505.8.12) <연산군일기>에 아주 짤막한 기사 하나가 있다. "두 궁녀를 밀위청(의금부 당직청)에 보내 ’위법교붕’(違法交朋) 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두 궁녀의 가슴에 ’위법교붕’ 즉 ’법을 어겨 벗을 사귀었다’는 글자를 새기도록 한 것이다. <연산군일기>의 전체 맥락을 볼 때, 두 궁녀가 그런 처벌을 받은 데에는, ’동성애를 했다는 점’과 함께 ’파벌을 형성해 궐내 비밀을 외부에 누설했다는 점’이 복합적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성애를 막기 위한 또 다른 장치가, 궁중생활사 연구자인 고 김용숙의 저서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소개되어 있다.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수록한 이 책에 따르면, 세수간(洗手間) 나인에서 고종의 후궁이 된 삼축당 김씨는 궁녀 시절에 소주방 나인인 한희순 상궁과 한 방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 세수간이란 왕·왕후 등이 세수 혹은 목욕하는 데에 필요한 물을 준비하는 곳이고, 소주방이란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왜 같은 처소의 궁녀들끼리 한 방을 쓰지 않고 세수간 나인과 소주방 나인이 한 방을 썼느냐 하는 것이다. 김용숙은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같은 작업장에 근무하는 궁녀들끼리 한 방을 쓸 경우에는 이들이 더욱 더 친밀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궁녀들의 동성애가 꼭 이성애의 제약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이성교제를 금지했기 때문에 동성애가 나타난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점이다. 신체적 혹은 심리적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이성애보다는 동성애가 더 자연스러운 궁녀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전이나 후궁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궁녀들의 모습. 보스가 누구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궁녀들의 모습. 이제까지 우리가 사극에서 주로 관찰한 궁녀들의 모습은 대개 다 그러했다. 궁녀들의 삶이 주로 지배층 혹은 상전과의 관계 속에서만 조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하급 궁녀들의 관점에서 제작된 사극이 나온다면, 다시 말해 자신에게 부과된 성관계 금지 같은 봉건적 제약 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인간의 삶을 찾으려고 고뇌하고 투쟁하는 하급 궁녀들을 소재로 한 사극이 나온다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한층 더 구체적이고 생생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논문심사 중).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역사 관련 저서로는 <철의 제국 가야>, <최숙빈>, <한국사 인물통찰>, <조선사 클리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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