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선생은 民을 씨로 번역했고 함석헌(信天)선생은 그 말을 官과 대립되는 민으로 해석하여 썼다. 군사정권 때에는 그런 용법이 타당한 듯이 보였으나 민주정치가 실현되어 민에서 관이 나오게 된 지금은 관민의 대립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시는 군사정권을 불의(不義)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그것을 방조 협력하면 그 민은 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민(民)도 둘로 나누인다. 될 수 있는 대로 대립의 소지를 제거해야 할 우리 형편이고 보면 씨이란 말과 개념은 이제 차츰 삭여서 소화해야 한다.
공명한 선거를 해서 민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그가 정부를 조직하는 민주사회에서는 관은 곧 민을 위한, 민에 의한, 민의 관이다. 관은 민에서 나와 잠시 봉사하기 위해 있다. 그러므로 대립은 이제 금물이며 씨이란 말 자체를 청산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본래 어디 속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시던 그가 사람들을 씨과 아닌 자들로 갈라놓게 되는 덫을 놓았으니 선생이라고 다 잘 할 수 없다. 일찍이 마하트마 간디도 그런 실수를 했다. 그는 불가촉천민을 “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들이 “신의 아들”이 되자 온 힌두교인들이 왜 그들만 “신의 아들”이냐 하고 나섰다. 우리도 신의 아들이다 하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호칭이 없어졌다. 용어와 이름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민을 위한 관’이라 들으면 “어디 현실이 그러냐?” “관이 되는 즉시 민을 수탈한다” 하고 적대시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개선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그 노력을 해야 한다. 신천의 압제자와 피압박 씨의 2분법은 구시대의 유물이다. 20대 청년으로서 국사를 공부할 때 그의 머리에는 집권자는 곧 약탈자라는 선입견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산(無産)피압박대중의 개념도 그에게 영향했다. 제자들은 선생에게 부족이 있으면 보충 해결해 드리는 것이 그들 몫이요 스승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 씨로 자처하는 집단에는 엘리트들에 의한 활성화가 필요한데 그 유입(流入)이 줄어 걱정이다. 무능 불평불만의 집단으로 고립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 그런 집단의 누구에게 어찌 장관 자리가 오겠는가? 맡기겠는가? 김모모선생을 구세주처럼 알던 사람들은 그를 씨이라 우러르고 희망을 걸었을 것이나 그가 정권을 잡자 저절로 멀어진 존재였다. 신천이 씨을 정의(定義)할 때 늘 평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존재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김모를 씨로 알았던 사람들은 실망했을지 모르나 씨이란 말에는 그런 뜻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씨은 대통령이 되는 순간 씨알로 남아 있을 수 없도록 말이 그렇게 되어 있다.
어제(3월 17일)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의 50주년 기념 겸 그것을 집필하셨던 함 선생님의 탄신 107주년 기념 강연회가 있었다.
------------------------------------------------------------------------------------
발행인 : 강병조 연락처 : 700-721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 2가 50 번지
편집인 : 장기홍(changkhong@hanmail.net) 경북대병원 정신과 강병조 박사
☎ (053) 420-5752 FAX: (053) 426-5361
E-mail : kuhpkbj@knu.ac.kr
먼저 신천의 종교관에 관해 김모 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김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저자요 개인적으로는 친한 사이이며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가 함석헌 전집에서 종교관에 관해 인용한 것은 김 교수의 공부가 심오함을 보여주었고 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김 교수의 소제목 제5는 나를 경악케 했다. 씨 집단의 정신상태가 확 드러났다. “5. 현학적인 엘리트 종교에서 씨종교에로”가 그것이다. 엘리트와 씨의 대립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함선생님은 끝까지 기독교인이었다”는 한 마디로 강연을 마쳤다. 나는 그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고 비평을 통해 우리가 서로 경종이 되자는 것뿐이다. 함선생님이 퀘이커 교도가 되신 것은 사실이다. 그는 퀘이커에 호감을 가졌으나, 본래 어디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신 분이라 그 교단에 등록을 하지 않고 느슨하게 함께 지나려 했다. 그러나 억지로 등록을 하고 공식적인 교인이 되었다고 나에게 실토하신 적이 있다. 그는 꼭 이름을 기입하고 공식으로 등록을 해야겠느냐고 버티었으나 ‘꼭 등록을 하셔야 합니다“ 하는 권고에 못 이겨 결국 등록을 하게 되었다고 내게 말씀했다.
함 선생님은 말년에 장기려 박사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하셨다 하는데 그것은 장박사가 “당신은 노자나 장자를 믿소? 예수를 믿소?” 하고 다그친데 대한 대답이었다. 신천(信天)은 그 말년에는 책이 팔리어 생업이 되었으나 그 전에는 친구들이 파트론(후원자)이었는데 그들은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신은 노자나 장자를 믿소? 예수를 믿소?” 하면 선생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높은 경지에 있는 분에게 그런 질문은 당치 않다. 그러나 그는 가족에게서도 (사위도 가족이라면) 그런 질문 공세를 받았다. 또 그런 질문은 애교가 있고 갸륵한 점도 있기 때문에 그가 탓하거나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선생의 ‘나는 예수를 믿는다’ 하는 말을 너무 경직하게 듣지 말라는 것이다. 큰 결론이나 얻은 듯이 기뻐하는 자체가 아직 미달임을 알아야 한다.
씨선생, 씨철학, 씨사상, 씨방법론, 씨종교 등으로 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씨이란 말이 갖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다간 사이비 종교집단의 위험마저 있다. “씨 여러분!” 하면 내가 과연 씨이냐 하고 주저하고 당황하고 거부감마저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을 막고 내쫓는 일이 없도록 하자. 그들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씨사상연구회’는 씨을 빼면 더 뚜렷하다. 유영모선생 씨사상과 차이를 말하려는 듯이 굳이 씨을 넣는 것은 타당치 않다. 씨을 빼버리면 된다. 말을 함부로 쓰지 말고 진리 이외에는 다른 목표를 만들지 말자. 엘리트를 숭상하자. 함선생 못지 않은 엘리트들이 나와서 민족과 세계를 바로 이끌기를 우리는 바라야 한다. 그것이 신천(信天) 자신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利他心과 보상중추(報償中樞)
강 병 조
이타심은 수양을 많이 쌓거나 종교적인 교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생후의 인격 성숙에 의해서만 생기는 행위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이타심에도 유전인자의 역할이 관여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 2007년 12월 7일자에 <구두쇠-기부자는 유전자 1개의 차이>란 제목의 기사로, 그리고 2007년 12월 9일(일)자【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이타심도 타고난 것>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연구 결과를 여기 요약하여 본다.
‘당신에게 일정액의 돈이 있을 경우, 당신은 그 돈을 모두 가질 수도 있고 돈의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에게 기부할 수도 있다. 당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이스라엘 히브루 대학 심리학과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위의 경우 인체에 AVPR1a라는 유전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기부 행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연구팀은 성인 실험 참가자 203명(남자 102명, 여자 101명)으로부터 DNA 샘플을 채취한 다음, 이들에게 각각 12달러(약 1만 1000원)씩을 제공했다. 그 후 온라인을 통해 위와 같은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게임을 실시했다.
누가 얼마의 액수를 다른 참가자에게 주는지 관찰한 결과, 일종의 단백질 유전자인 AVPR1a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50% 더 많은 돈을 다른 참가자에게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AVPR1' 유전자는 아르기닌-바소프레신(arginine vasopressin;AVP)이라는 호르몬이 뇌 세포에 작용하게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소프레신은 이를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구결과 프로모터(promoter)라는 유전자의 핵심 요소가 더 긴 사람들이 이타심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프로모터는 유전자가 얼마나 더 활성화 되는지를 결정하는 부위인데, 프로모터가 길수록 즉 'AVPR1' 유전자가 더욱 활성화되고 더욱 이타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AVPR1a' 유전자 변이는 들쥐에서도 발견되는 바 이들 또한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이타심이 매우 오랜 유전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책임자인 아리엘 크나포(Knafo) 연구원은 “이 실험 결과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가 DNA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첫 증거”라고 말했다. 이 실험 결과는 과학 저널인 ‘유전자, 두뇌, 행동’ 최신호에 공개됐다.
<이타주의는 단지 유전자의 이기성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1960년대 중반의 George Williams와 William Hamilton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혁명의 골자는 어떤 개체의 행동을 결정하는 일관된 기준은 그 소속 집단이나 가족의 이익이 아니며, 그 개체 자신의 이익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이타적 유전자>란 책을 집필한 Matt Ridley의 말을 빌려 이들 두 학자의 주장을 여기 요점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윌리엄스와 해밀턴은 둘 다 기성 학계와는 거리가 먼 학자였다. 미국인 윌리엄스는 해양생물학자 출신이고, 영국인 해밀턴은 군생곤충학자이다. 윌리엄스는 1950년대 말에, 그리고 해밀턴은 1960년대 초에 일반적으로 진화를, 특수하게는 사회적 행동을 해석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냈다. 윌리엄스의 이론에 따르면 개체의 입장에서 볼 때 늙고 죽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유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미 번식을 끝마친 개체에게 쇠퇴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생물은 그들이 속한 종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유전자를 위해 행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전적 이익과 개체적 이익은 대개의 경우 일치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연어는 산란을 하면서 죽어가고, 벌은 벌침을 쏘는 순간 죽는다). 생물은 대개 유전적 이익을 위해 그 자손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새는 먹이가 모자라면 새끼를 버리고, 어미 침팬지는 애원하는 젖먹이를 매정하게 젖꼭지에서 떼어낸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식이 아닌 다른 혈연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유전자의 이익이 되기도 한다(일개미나 암컷 늑대는 그 자매의 자손 번식을 돕는다). 때때로 그것은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행위로 나타난다(사향소는 어린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리 떼 앞에서 어깨를 맞대고 잡아먹힌다.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살 폭탄 행위도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군체 곤충은 자매(여왕벌, 여왕개미)의 번식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번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미의 경이로운 이타주의는 사실 이기주의이다.
이 새로운 이론은 지동설을 부르짖은 Nicolaus Copernicus와 진화론을 주장한 Charles Darwin이 그랬던 것처럼 윌리엄스와 해밀턴은 인류의 자부심에 치욕스런 일격을 가한 것이다. 같은 대열에 섰던 젊은 과학자 Richard Dawkins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생존의 기계 장치, 즉 유전자라는 이기적 분자들을 맹목적으로 보존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전달 로봇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깜짝 놀란다. 그것을 알게 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사실에 익숙해지지는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해밀턴의 저작을 읽은 사람에게 이 이론은 단순한 충격을 넘어선 비극이었다. George Price는 해밀턴의 삭막한 결론을 뒤집기 위해 독학으로 유전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해밀턴의 이론이 논박의 여지없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말았다. 이후 두 사람은 공동 연구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프라이스는 정신적 안정을 위해 종교에 귀의했다. 이윽고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 그는 런던 시내의 쓸쓸한 폐가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유품이라고는 해밀턴이 보내온 편지 몇 장뿐이었다 (Matt Ridley, 이타적 유전자. 2001년. 30-34쪽)
2007년 6월 26일자 <서울=연합뉴스>에서 <침팬지도 순수한 이타심이 있다>란 제목으로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였다. 여기 그 내용을 옮겨 본다.
침팬지들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때로는 자기 이익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타심이 인간만의 속성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고 독일학자들이 보고했다.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우간다의 응감바 섬에 있는 침팬지 보호구역에서 36마리의 야생 침팬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서로 간에, 또는 사람을 돕는 능력이 있는지를 관찰했다. 연구진은 이들에게 낯선 사람이 침팬지의 손에는 닿지만 자신에게는 손이 닿지 않는 막대기를 집으려고 애쓰는 장면을 연출해 보여줬다. 그러자 침팬지들은 종종 막대기를 집어 사람에게 주는 행동을 보여줬으며 때로는 가던 길에서 2.4 m를 벗어나는 귀찮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침팬지들의 이런 행동은 보상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생후 18개월 된 사람의 아기 36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와 비슷한 수준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미국 공공과학도서관 온라인 학술지인 플러스 바이올로지 최신호에 실린 연구보고서에서 "침팬지들과 어린 아기들은 모두 일정 수준의 이타심이 교육의 결과가 아닌 타고난 것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아기들이 원래는 이기적이지만 교육의 결과로 이타심을 갖게 된다'고 말하지만 이번 실험은 이타심의 근원이 오로지 문화에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먹이와 살 곳을 사람으로부터 제공받는 보호지역의 침팬지들이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이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 침팬지들이 자기들끼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른 실험을 실시했다.
이들은 방마다 바나나와 수박이 한 쪽씩 들어있는 닫힌 방들을 만들어 놓고 혈연관계가 없는 구경꾼 침팬지가 손에서 줄을 놓아야 문이 열려 실험대상 침팬지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했다. 이 실험에서도 구경꾼 침팬지들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데도 다른 침팬지들이 들어가 과일을 먹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행동을 종종 보였다.
연구진은 이타심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어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http"//blog.naver.com/hki405/30019168827).
울산의대 서울 아산병원 신경과 교수인 김종성 교수가 저술한 <춤추는 뇌> 속의 <이타적 뇌>란 제목의 글 속에 이타적 행동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여기 옮겨 본다.
<동물의 사회생활>이란 책을 쓴 진화 생물학자 Lee Dugatkin에 따르면, 떼지어 사는 땅다람쥐는 매가 날아오면 경고음을 내는데 이 때 경고음을 내는 녀석은 암컷이라고 한다. 땅다람쥐 사회에서 암컷은 태어난 후 줄곧 그 무리 속에 남지만 수컷은 어느 정도 자라면 집을 떠나 다른 무리에 합류한다. 이들 사회에서 암컷은 친족들과 함께 있고 수컷은 낯선 무리와 함께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경고음을 내는 자는 언제나 무리와 유전자가 비슷한 암컷인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라 반드시 친족이 아니더라도 유전자가 동일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즉 같은 고장 사람이나 같은 민족끼리 뭉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뇌가 발달한 인간은 유전자적 동질성이 사회생활을 통해 학습된 사회적 동질성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가장 좋은 예가 종교이다. 기독교 교인들은 친족관계가 아닌 데도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1984년 Wilkinson이 <네이처>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흡혈박쥐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무시무시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돈독한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다. 그들은 신진대사가 매우 활발해서 며칠만 먹이(피)를 먹지 않으면 죽고 만다. 먹이를 구하러 나간다 해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배를 곯은 채 동굴로 돌아와야 한다. 이때 굶은 동료에게 먹은 피를 토해 나누어 주는 이타적 행동이 관찰되는데, 위킨슨에 따르면 피를 나누어 받는 녀석은 예전에 공여자 박쥐에게 피를 준 적이 있는 녀석이라고 한다. 이러한 흡혈 박쥐가 여러 종의 박쥐 중 대뇌 신피질이 가장 발달한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호혜적 협동 행위를 관장하는 곳은 어느 부위인가? 최근 미국 에모리대학의 Rilling교수 팀은 36명의 여성에게 죄수 게임을 하게 하고 기능적 MRI를 촬영해 보았다. 그 결과 활성화되는 부분은 眼前頭葉, 미상핵, 앞쪽 대상회 그리고 측좌핵 등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Rogers 교수팀은 건강한 정상 남자들에게 컴퓨터 게임을 시켜 보았다. 이 게임에서 큰 보상을 받을 확률은 낮은데 작은 보상을 받을 확률은 크다. 이러한 선택의 게임을 하는 도중 PET를 사용해 뇌를 조사해 보니 활성화되는 부위는 바로 眼前頭葉이었다.
이런 사실은 안전두엽은 보상과 관련된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안전두엽은 계산적인 보상뿐 아니라 감정적 보상 작용에도 관계하는 것 같다. 이 안전두엽은 S. Freud가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이다. 남 몰래 좋은 일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이 부위가 감정의 중추와 연결된 때문이다.
안전두엽뿐 아니라 도파민 신경 전달 물질이 풍부한 미상핵도 인간의 만족, 욕구 및 보상 행위와 관련이 있다. 영국 런던 대학교의 Grasby 교수 팀은 정상인 8명에게 컴퓨터 비디오 게임을 시켜보았다. 적의 탱크 공격을 피해 자신의 탱크를 몰고 가서 적의 깃발을 뺏어 오는 게임인데 한 단계를 성공할 때마다 7파운드의 상금을 주었다. 이때 이들에게 PET검사를 해보니 양측 미상핵에서 도파민이 다량 분비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얼마나 이 게임을 잘 수행하는가와 비례했다.
안전두엽은 비록 신피질인 전두엽에 속하지만 감정의 회로인 변연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상핵 역시 변연계와 연결이 깊다. 앞에서 말한 무조건적 모성이 주로 변연계의 활동이라면, 호혜적 협동은 신피질과 변연계의 연결부위, 즉 안전두엽이 주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전두엽이 발달한 침팬지나 인간에서 복잡한 협동과정이 잘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아까운 돈을 선뜻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그런 행위가 스스로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협동할 때 활성화되는 안전두엽 혹은 미상핵이 변연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들에게 즐거운 감정을 선사하는 것이다(김종성, 춤추는 뇌, 2005년).
참고 문헌:
김종성: 춤추는 뇌. (주)사이언스북. 2005년. 150쪽-156쪽.
서울=메디컬 투데이/뉴시스 2007년 12월 9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이타심도 타고난 것.
조선일보 2007년 12월 7일: 구두쇠-기부자는 유전자 1개의 차이.
http://blog.naver.com/hki405/30019168827
Matt Ridley(신좌섭 역): 이타적 유전자. (주)사이언스북스. 2001년. 30-34쪽.
******************************************************
공 지 시 항 : 2008년 4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