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노예의 아들
교육받지 못한 자
스스로 깨친 자
동성을 향한 사랑 "자코모"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
그 앞에서는 누구나 다 작아진다. 다다를 수 없는 경지는 신의 영역처럼 보인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이탈리아, 1452년 4월 15일~1519년 5월 2일(67세) 화가, 음악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식물학자, 요리사, 의사, 해부학자, 음악가였다. 빈치 출신의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자였다. 르네상스형 만능인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Piero da Vinci)는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으로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집안의 딸로 아버지 집안의 종이 었다. 주인집 아들과 여종의 사랑은 오래 못 갔다. 둘은 결혼하지 않았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어머니는 수도원의 가마 공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여러 번 재혼해 이복동생들이 12명이나 되었다. 훗날 아버지의 유산 문제로 민사소송까지 했다.
레오나르도는 정식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서른살 이후의 공부가 진짜 공부이다. 피렌체의 인문주의 학자들로부터 무시가 이어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웠다. 공부가 그의 삶의 경계를 넓혔다. 레오나르도가 더 넓은 학문을 익히도록 하였다. 사생아의 한계에 부딪쳐 정식 교육도 어려웠지만 직업에도 한계가 있었다. 12살에 공방에 들어갔다. 사생아가 아니었다면 법률가로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천재를 낳은 어머니는 어떤 여자였는지는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다. 그의 생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꼬마 시절엔 어머니랑 살았지만 곧 헤어지게 된다.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좋은 스승을 찾아 주었다. 그의 스승은 곧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2019년에 피렌체의 고문서들을 조사하던 나폴리 대학의 카를로 바체 교수는 살펴보던 중 노예해방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1452년 11월 2일 자로 작성된 이 문서는 ‘모나 지네브라’라는 여주인을 대신하여 노예 ‘카테리나 디 레오 리피’라는 25세의 여성을 해방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서에는 카테리나가 중앙아시아의 코카서스 지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인신매매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문서 공증인은 피에로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버지였다. 다빈치 생후 6개월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노예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천재, 인류 역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180센티미터를 넘는 키에 근사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담비 같은 수염을 가진 미남자는 미술, 수학, 과학, 물리, 천문학을 넘어 요리까지 잘하는 소위 요쎅남(요리하는 쎅쉬한 남자)이었다. 검술에 고수였고 싸움의 달인이었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도 난 보따리 싸 들고 그를 따라다녔거나 몰래 숨어서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그와 시대가 달라서 관음증 환자가 되는 길을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그가 공연기획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해 소녀시대나 블랙 핑크 같은 걸그룹 기획사 대표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궁정 연예담당이었다. 잘할 수 있는 것 10가지를 써보라는 질문에 무기를 잘 만들고 건축에 능하며 조각과 미술을 그리고 악기를 잘 다룬다고 썼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잘생기고 지성적인 그가 한때 걸그룹 쇼를 총괄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큰 키에 미끌미끌한 중저음으로 여기저기 지휘했을 그의 모습은 완벽한 조각상을 닮은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화가 자코모가 다빈치를 찾아왔다. 그는 이 미남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 레오나르도는 도둑질을 일삼고 거짓말을 하는 그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가 되는 존재란 뜻의 술탄 살라딘’에서 딴 이름, ‘살라이’로 불렀다. 그는 남자 꽃뱀이었다. 거머리처럼 빌붙어 살았다. 개인적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레오나르도가"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이다."라고 기록했다.
천재도 사랑엔 익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밀스러운 경전 속 명언처럼 느껴진다. 지난한 사랑의 아픔! 그가 유일하게 잘하지 못한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라버려야 하는 사랑도 분명 있다. 1476년, 스물네 살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 혐의로 고소당했다. 평생을 돈 때문에 고민했고 이리저리 떠돌았고 사랑 앞에 좌절했다. 후원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했다. 너무 늦게 알았지만 천재에게도 행복한 삶이란 과업은 어려운 과제였다.
수백 년 전에 미 상 위를 걸어 다니다 사라진 아름다운 한 남자의 뒷걸음질을 쫓아간다는 것은 깨어진 비석과 퍼즐 맞추기처럼 늘 흥미롭다. 프랑스 왕실 결혼식 준비 위원장이었다.
앙부 아즈 생위베르 예배당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 세기의 천재는 그 흔한 무덤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지금은 그로 추정되는 인물의 묘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1519년 유언장을 작성하고 살라이와 하인에게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주고 제자인 프란체스코 멜지에게 그림과 메모를 상속하고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의 마지막에 신 앞에 해야 할 일을 예술행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마치 조선시대의 사관처럼 만장이 넘는 기록을 남겼다. 현재는 7천 쪽 정도만 남아있다. 평소에 그를 흠모하던 빌 게이츠가 경매에서 365억에 사들였다. 그는 실로 호기심의 천재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궁금했다. 작은 종이 조각부터 여기저기 천재는 가고 그렇게 이야기만 남아돌고 돈다. 뭔가를 꾸준하게 못하는 성격이지만 메모만큼은 진심을 담았다.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모르는 길이 있다.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 빛을 발하는 상상력이 심해의 길을 안내하는 물고기의 머리 위 불빛으로 변모한다. 헤라클레스가 찢어버린 독약 묻은 옷처럼 삶을 벗겨내고 스스로 장작 더미에 올라가고 싶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손톱으로 파서 요동치는 핏주머니를 터뜨려 버리고 싶다.
내 머리통을 깨면 석류처럼 알알이 붉은 핏톨이 구슬처럼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그냥 아프다. 삶을 향한 투쟁의 의지가 다 사라져 버린 날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내 슬픈 이야기가 폐허가 되어 사라진 유령마을 전설처럼 돌고 돌아 사람들의 시리고 아픈 삶을 보듬어 줄 수 있다면 그래도 잘 살았노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