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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마태복음13:1-23
사람은 누구나 신앙이 자라나서 변화되고 성숙해지고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은지 오래되어도 성질이 변화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듣는 마음이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분들은 천국의 비밀이 잘 깨달아집니다. 반면에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이 안깨달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 신앙이 잘 자라나는 비결은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에게 신앙이 잘 자라날까요? 오늘 말씀통해 듣는 마음이 되어서 신앙이 자라고 구원의 열매, 성품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백배나 거두어서 행복하고 열매가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우리의 신앙이 잘 자라나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19)
예수님께서 무더운 더위를 피하여 집에서 나가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닷가에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어디서 몰려왔는지 큰 무리가 떼를 지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모든 인생 문제가 시원스럽게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하는 비결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천국은 말씀을 잘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중에서 먼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각각 길가, 돌 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 등 네 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밭은 네 종류이지만 실제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과 열매를 맺는 밭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고, 밭은 우리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그의 신앙이 자라나지 않는 원인은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이 불행하고 괴로운 원인을 외부에서 주로 찾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 돈이 없기 때문에 나는 괴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내가 행복하지 못하고 괴로운 것은 그 마음에 깨달아진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말씀이 없는 것은 말씀에 대한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배우는데도 어떤 사람은 말씀을 인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가 반면,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자기에게 관심이 많고, 늘 세상 염려와 신경질과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말씀에 대한 마음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9). 1)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들을 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렘 6:10).“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2) 심판과 경고의 말씀은 임박한 재앙을 피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위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롯의 사위들은 들을 귀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다가 소돔 고모라 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창 19:14). 귀는 달려 있다고 해서 다 귀가 아닙니다. 들을 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1)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2) 또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사모하듯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3) 무엇보다 오늘 말씀이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여기고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인하여 이렇게 감사하였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그러면 말씀이 깨달아지게 되고 신앙이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기뻐하시고 천국의 비밀은 알고자 하는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영적인 소원을 갖고 찾아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 2:4,5절은 말합니다.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할 때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8:17)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램29:13)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모든 인생 문제를 극복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명력이 없고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결코 이해력이 부족해서, 지식의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마음중심에 말씀을 알고자하는 소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말씀은 격언적 진리로서 말씀을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있는 자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되어 넉넉하게 되고 말씀을 알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있던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음이 있는 자는 힘을 얻고 나날이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늘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깨달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점점 심정이 메말라 곤고하고 완악하게 됩니다.
13-15절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마음이 완악, 즉 마음이 딱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마음이 됩니까“ 말씀을 알고자 하는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관심합니다. 말씀시간에 딴생각합니다. 멍때립니다. 관심사가 자기입니다. 반발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하고 감동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상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되면 하나님말씀이 부담스럽고 하나님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싫어집니다.
이런 사람은 왜 고의적으로 회개치 않을까요? 이는 회개하면 순종해야 하고 순종하게 되면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에 둔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히 3:12-15).
우리는 우리 마음안에 반발하는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16절에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은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눈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귀로 많은 것들을 듣습니다.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너무나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지치게 합니다. 현대인들은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못보고, 정말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영혼은 곤고하고 메마르고 지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신음합니다. 사람들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때만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유클리드 수학을 섭렵하였고, 열여섯 살 때에는 원추 곡선론을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확률 이론은 세계 수학사에 새 장을 열었습니다. 이 천재 앞에서 온 유럽이 경탄하였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유럽의 사교계에서 파스칼과 대화를 해 본 것이 귀부인들 사이에 화제가 될 정도였고, 또 공주나 왕자들조차도 파스칼과 악수를 해 보는 것이 관심거리가 될 정도로 온 유럽의 총애를 받는 천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교 파티의 주빈으로 참석했다가 술에 취해 마차를 타고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퀴 하나가 세느 강 다리에 부딪혀서 부러지게 되었습니다. 마차는 크게 부서졌고 마차 밑에 깔렸던 파스칼은 겨우 몸을 빼내어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세느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고 그는 그렇게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서 영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아, 도대체 죽음 앞에서 너는 무엇이냐? 죽음 앞에서 네가 천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죽음 앞에서 네가 가진 젊음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죽음 앞에서 세상의 부와 권세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는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음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괴로워서 술에 취하면 낫겠거니 하고 술을 마셨지만 과거처럼 술에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의 옆에 다가와서 미소를 보냈지만 그의 마음은 위로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파스칼이 고통스러워하며 수척해진다는 소식을 수녀원에 있던 그의 누나가 듣고 사랑하는 동생을 만나러 먼 길을 찾아왔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오랜 방황을 그치고 마음에 참된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공허가 있습니다. 그 공허는 주님께서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그 이후 하나님 없이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변증설을 쓰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생각날 때마다 계속 메모를 했는데 결국 그 메모들을 연결시키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생애를 정리하기 위해 그 메모를 모아 책으로 냈는데 그것이 바로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죽은 후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왼쪽 외투깃에 구겨진 종이쪽지가 있어서 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179X년 X월 X일. 불! 불! 불! 오, 기쁨이여, 넘쳐흐르는 기쁨이여,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오, 예수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는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오, 기쁨이여! 넘쳐흐르는 기쁨이여!” 파스칼은 말씀을 통해 영적 눈을 뜨고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음으로 심령에 불과 같은 기쁨이 넘쳐흐르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길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들으나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말씀을 듣지만 마음이 둔하여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길처럼 딱딱하게 굳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악한 자, 곧 마귀가 와서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회의에 빠지게 하여 천국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멘하면 살게 되지만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내려놓지 않으면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열매없이 죽게 됩니다.
둘째, 인내심이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20,21).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감정적입니다. 뜨거운 것 같다가 곧 이내 식습니다. 어떤 때는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심지가 약합니다. 소신이 없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얇게 내려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자라는 삼나무는 뿌리가 지하 200m까지 내려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돌밭의 사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 곧 넘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하면 반드시 환난이나 반대가 있습니다. 이때 중심이 없고 심지가 없으면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중심이 분명하여 어떤 환란이나 반대가 생겨도 잘 인내하면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인내심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잘 안되더라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누가 반대하고 마귀가 훼방하더라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교사들도 인내하시고 성도들도 인내하시고 깊이 인내하심으로 결국 열매를 맺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가시를 뽑아내야 합니다. (22). 가시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밭은 괜챦은데 마음 깊은 곳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끊지 못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고 변화되지 못하고 결국은 버려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현재 먹고 살면서 장차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염려합니다.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카드 빚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 막연한 염려 등 각종 염려에 시달립니다. 염려의 가시에 찔리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힘이 없어지고 기쁨이 상실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기쁨이 없고 힘이 없고 변화가 없는 것은 세상염려와 세상재미라는 가시에 찔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램과 육체의 소욕간에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시는 우리 의지로는 뽑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으로 뽑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성도님들은 중심으로 주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함으로서 이 가시나무를 뽑아내심으로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밭이란 잘 알아듣고 잘 깨닫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듣는 마음이요 지혜로운 마음이요 부드러운 마음이요 정성된 마음입니다. 순수한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신앙은 교만해지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해 갈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배우고자 하지않고 듣고않고자 하는 마음이 됩니다.
15절에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지식을 쌓을 것이 아니라 말씀의 뜻을 깨닫고 돌이켜 나의 마음의 병을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마음이 병들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면 나의 병든 모습이 보여집니다. 말씀은 내가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고 세리와 같이 이기적이고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세상에 목말라하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면 주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나를 용납해 주시고 그 크신 능력으로 치료해 주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기 전에는 착하고 괜챦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해 보니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거짓되고 위선적이고 정욕적이고 의존적이고 이기적이고 병든 병아리 같이 연약한 자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가 변화되지 못하고 기쁨도 힘도 없는 원인은 말씀을 알고자 하는 소원이 없었기 때문이요, 그러다보니 깨달아서 고침을 받고자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사랑의 교회는 말씀을 알고자 간절히 사모하고 깨닫고 고침을 받고자 하심으로 많은 변화와 성숙의 열매, 축복의 열매를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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