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말하지 않은 걸까, 못한 걸까?
현역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어려운 후배 목회자들을 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는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 오지랖 하시는 선배분으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의 인사를 드렸더니,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한 창세기 22장을 언급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렇게도 어렵게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모리아땅으로 부자간에 떠나면서도 아브라함은 부인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21장과 23장에는 사라가 등장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22장에는 사라 이야기가 빠져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가정을 향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말씀하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쩌면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이해 불가이겠지만, 이 당시의 시대적 특수성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정의 대표성을 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표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는 시간입니다. 성경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세기 22:3 上)
일찍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보케르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는“아침, 해뜨기 전,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이삭과 두 종들을 동트기 전에 데리고 떠났을까요?
어떤분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잠들어 있었을 때 모리아 땅으로 가려고 새벽에 출발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합니다.
창세기 22:4절을 보면 이들은 하루 종일 여행을 했음을 알 수 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제 삼 일에 지시하신 땅을 바라보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난 정확한 이유는 성경에 더 이상 나오지 않기에 알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지역과 모리아 땅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었던 거리는 아니었던 것은 명확합니다.
또 한가지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보인 자세는 조건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과 경외만 할 뿐이지 내가 ~~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지는 오류중 하나가 하나님과의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고르반은 글자 그대로 드림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혹자는 기도하면서 이 예물 받으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이의 바람직한 자세는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 드렸으면 그로써 자족해야 함을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100세에 얻은 보물같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맏아들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을 때
큰 바람이 몰아쳐 집이 붕괴됨으로 자녀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자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1:21)의 말씀이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전적 순종과 경외는 내게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위탁과 위임받은 것임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고백할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바른 신앙의 출발점은 삶의 전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적확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별칭을 붙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순종하기 벅찬 말씀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며 나아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11:17)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