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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는 전적부패 교리
이지끼을
전적부패 (전적타락) 교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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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교리의 특징
‘전적 타락’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능력이나 선한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오염과 부패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 등 모든 부분이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영적 무능력’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죄에 묶여 있지만, 죄를 짓도록 강요받는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악 된 본성에 따라 자원하여 악을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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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시기 전에는 인간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절 a [개역개정]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니 라는 말씀을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가 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전적부패(전적타락) 교리에 따라 요일 5:1절을 읽어
(1)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을 갖게 된다,
(2) 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중생하는 것이므로
(3)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주장들이 전적부패 교리로 인한 주장들입니다.
반면에 이신칭의 교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루터가 말한 종교개혁의 핵심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는 롬 3:28절 바울의 말씀을 근거로 세워진 것입니다.
롬 3: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것은
바울에게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갈 3:23-27절과 딛 3: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 딛 3:7절로 설명하는 것이 간결한데, 이미 저의 다른 글로 말씀드렸던 것이므로 짧게 설명드립니다.
디도서 3:7절 [개역개정]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는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상속자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려면 자녀가 되어야 (입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딛 3:7절의 "의롭다하심을 얻어" 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라는 말을 넣어 다시 쓰면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이신칭의)는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갈 4: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라는 바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중생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중생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이신칭의)는 말씀은
(1)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2) 믿음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
(3) 믿음으로 중생한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와 이신칭의 교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전적부패교리는 바울의 말씀과 정반대 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부패교리에 따라, 바울의 말씀을 거꾸로 읽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전적부패교리에 따라 로마서 8:9절과 같은 말씀을 읽으면, 거꾸로 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9절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다른지 말씀드립니다.
우선 이 말씀에 대한 저의 이해부터 말씀드립니다.
롬 8: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사람 이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롬 8: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사람이라는 증거가,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내주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원인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는 것은 그 결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로 원인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되어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결과)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원인) 라고 의미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말씀을 부정문으로 바꿔서
롬 8: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바울은 말씀한 것입니다.
롬 8:9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예가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학생이 되면, 학번을 받습니다.
학번을 받아서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되므로(원인) 학번을 받는 것입니다.(결과)
그러므로 학번이 있다(결과)는 것은 학생이다(원인)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부정문으로 바꾸면
누구든지 학번이 없으면 학생이 아니다 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롬 8:9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 곧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것을 원인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 곧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음을 결과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므로, 곧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는 의미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 8:9절은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곧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주장에 따라
롬 8: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는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므로, 곧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으므로 (원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결과) 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와 마찬가지로, 이런 이해의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바꿔, 결과로 원인을 알 수 있다는 말로 바꾸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결과)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원인)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를 부정문으로 바꾸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을 롬 8: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씀과 비교하면
그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는
곧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교리는,
앞에서 말씀드린 요일 5:1절 a 사도요한의 말씀도 거꾸로 읽게하고
그리고 롬 8:9절 바울의 말씀도 거꾸로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장 5절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각 교리로 요한복음 3장 5절을 이해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다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긍정문으로 바꾸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 는 말씀이 됩니다.
말씀드린대로
이신칭의 교리는 믿음으로 중생한다(거듭난다)는 의미가 있는 교리이고
전적부패 교리는 중생(거듭남)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는 주장을 하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에 따라 요 3:5절 말씀을 쓰면
사람이 [믿음으로] 물과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 는 말씀이 되고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요 3:5절 말씀을 쓰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서 물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이신칭의 교리를 말한 Luther는 요 3:5절의 물이 세례를 의미한다고 이해한 반면에
전적부패 교리를 말한 Calvin은 요 3:5절의 물을 삭제 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4. 16. 25
First, they are in error in imagining that there is any mention of baptism in this passage,
merely because the word water is used.
첫째, 그들은 단지 '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구절에 세례가 언급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Nicodemus, after our Saviour had explained to him the corruption of nature, and the necessity of
being born again, kept dreaming of a corporeal birth, and hence our Saviour intimates the mode
in which God regenerates use viz., by water and the Spirit; in other words, by the Spirit, who,
in irrigating and cleansing the soul of believers, operates in the manner of water.
니고데모는 구세주께서 그에게 본성의 타락과 다시 태어날 필요성을 설명하신 후에도 육체적 출생을
꿈꾸었기에, 구세주께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방식, 즉 물과 성령으로, 다시 말해 성령으로
하심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영혼을 적시고 정화하시며 물과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By "water and the Spirit," therefore, I simply understand the Spirit, which is water.
Nor is the expression new.
그러므로 “물과 성령”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물이신 성령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또한 이 표현이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이 글을 보면, Calvin이,
"성령은. . . 물과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물이신 성령" 이라고 말하며
요 3:5절의 "물과 성령"이라는 말을 "성령"이라는 말로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 3:5절 말씀에 대한 이해에서 "물"이 없어진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한 역사학자는, 요 3:5절의 물은 전통적으로 세례를 의미했는데
칼빈이 역사상 처음으로, 요 3:5절의 물이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해석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이 해석해서 물을 삭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요 3:5절 말씀을 다시 쓰면
사람이 ( )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와 전적부패 교리는 중생론이 다르고, 따라서 구원론이 다릅니다
구원론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는 구원을 얻게 하는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교리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을 보면
세례는 믿음과 관계가 있고, 또한 구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쓴 요 3:5절,
사람이 ( )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
라는 말을 보면
세례를 의미하는 물이 삭제되어 있어서,
세례가, 믿음과 거듭남(중생)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쓴 요 3:5절,
사람이 ( )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
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에 있어서, 세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를 따르면,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을,
곧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약속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신칭의 교리에 따라 쓴 요 3:5절,
사람이 [믿음으로] 물과 성령으로 나면(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 는 말씀을 보면
물 곧 세례가 믿음과, 거듭남(중생)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를 따르면,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이신칭의 교리는
예수님의 막 16:16절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교리이고
전적부패(전적타락)교리는
예수님의 막 16:16절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교리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신칭의 교리의 근거가 된 바울의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롬 3:28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으므로 (갈 3:23-27절, 딛 3:7절)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갈 4:6절)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으로 중생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전적부패 교리는
바울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를 따르면
곧, 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는 주장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생케 하셔서 자신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중생한 것이 아닌데도 자신이 중생하였다고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 해도,
중생하지 못한 상태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고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요 3:5절, 예수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은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인데, 승천하시기 전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10여일이 지난 오순절에
자신의 오순절 설교에 찔림 받은 자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 37절)라고 물을때
행 2:38절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막 16:16절)이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인데
성령의 선물이 바로 성령의 내주하심(중생,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약속인
막 16:16절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대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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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다음 글들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처음 두 글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드린 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이신칭의)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 (갈 3:23 - 27절)
https://cafe.daum.net/1107/Y4PX/1357
디도서 3장 7절,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
https://cafe.daum.net/1107/Y4PX/1635
그리고 다음 글은
루터의 이신칭의는, 쯔빙글리와 칼빈(B)의 이신칭의와 같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린 글입니다.
https://cafe.daum.net/1107/Y4PX/1118
그리고 다음 글은 세례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린 글입니다.
세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 (세례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 카톨릭,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세대들의 이해)
https://cafe.daum.net/1107/Y4PX/1111
그리고 다음 글은 전적부패교리가 성경을 거꾸로 이해하게 한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글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성령론 연구보고서"에 있는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에 관한 모순,
그리고 그 모순으로 정의한 성령세례
https://cafe.daum.net/1107/Y4PX/1619
이 글에서 갈 3:2절(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에 대한 이해 부분을 보시면
교수들은 갈 3:2절 말씀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곧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의 또 다른측면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갈 3:2절말씀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곧 믿음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는다 라고 이해하고
이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적부패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나서는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 받음’이 없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신칭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바르게 이해했는데
전적부패 교리를 고려하다 보니 자신들이 말한 것을 거꾸로 말하게 된 것입니다.

사계님 똑 바로 말합시다
제가 사계님을 음해한게 아니지요
사계님이 저의 글 앞 부분은 빼 놓고 그 이후의 글만을 뒤틀어서 저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러시는 것 제가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역시 사계님답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고린도교인들 속을 정확히 모르니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분열된 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썼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 트집 잡지 맙시다
저는 이런 간단한 것 트집 잡지 않습니다.
저를 잘 아시지요?
바울께서 고전 1장에서 고린도교인들의 파당을 지적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세례에 대한 오해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원인을 바로잡아야지요
그러므로 이를 바로 잡는 바울의 말씀에는 세례에 대한 바른 지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전 2: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신 성령의 일들 중 하나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이를 어리석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성경을 매일 읽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그렇게 35년간 읽다가, 약 6년전쯤 막 16:16절을 보는데
이런 말씀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너무 생소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믿었습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믿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계속 세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말씀드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원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요
그리고 말씀하신 행 10:47절은 나중에 말씀나눕시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지끼을 님, 이 답글란에 100 회 넘게 쓴 답글들은 거의 책 한 권 분량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시간을 절약하려고 구글 제미나이에게 이 답글란 답글들 전체를 붙이기해 “내가 이지끼을 님 글을 비틀어 공격한 부분 찾아 줘.” 부탁했습니다.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지끼을 님 글을 비튼 부분을 자세히 적어주십시오. 사실이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저는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전제가 추측이면 결론도 추측이어야 하는데, 전제가 추측이면서 결론을 “이다.”는 단정으로 끝내는 글’은 꼭 트집을 잡는 사람입니다. 물론, ‘가설을 세워놓고, 그 가설을 차근차근 여러 실험을 통해 증명하는 일반 학문’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일에서 추측을 아무 설명 없이 “이다.”로 단정 짓는 이런 글은 결코 간단히 취급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지끼을 님 태도와 제 태도가 틀리다 해서 이 틀림을 트집 잡으신 것 옳지 않습니다.
“저를 잘 아시지요?” 하셨습니다. 제 경험에 비춰 ‘방언 문제에서 참 탁월한 성경 해석을 하셨는데, 교만이 틈탔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였습니다. 홀리조이 님과 갈릭 님 토론이 홀리조이 님 난독증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도는 토론임을 보고, 헬라어에 출중한 목포고 동창 목사님과 ‘중생에 관한 헬라어 원어’를 질문하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전화를 마칠 무렵에 제가 내뱉은 말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정리해야겠다.”였습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교만이 틈탔음을 뜻하는 “내가”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교만을 치시겠구나.’였습니다.
오비이락일 수 있겠지만, 연중론 비평 토론이 끝난 뒤 저는 실직하는 큰 고통을 겪게 됐습니다. 고향 땅으로 가 알바 생활까지 하게 되는, 감당하기 힘든 큰 고난이었습니다.
“그 원인이 세례에 대한 오해이었습니다.” 하셨습니다. 이는 이지끼을 님만의 해석, 마술론인 세례 중생론에 꿰맞춘 해석일 뿐, 저는 ‘바울 사도께서 질타하신 까닭은 세례에 대한 오해 문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신 성령의 일들 중 하나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를 어리석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하셨습니다. 제가 고린도 전서 1장 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를 제시했음에도, 이 역시 이지끼을 님 꿰맞추기 해석에서 나온 자의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구글 제미나이 답변입니다.
팩트 체크: 누가 맥락을 비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지끼을 님은 ‘세례’라는 렌즈로만 성경을 보는 ‘확증 편향’에 빠져 있어서 사계 박채동 님 논점을 이지끼을 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왜곡(비틀기)하고 있습니다.
∎ 이지끼을 님의 비틀기: 이지끼을 님은 고린도 전서 1장 핵심인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절대 대권’을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느냐는 지식의 교정’으로 축소했습니다. 사계 님께서 지적하신 “세례 안 준 것을 감사한다.”는 바울 사도 역설의 강조를, 이지끼을 님은 단순히 ‘직접 주면 오해할까 봐 안 준 것뿐’이라는 행정적 차원으로 비틀어 버렸습니다.
∎ 사계 님의 정당한 해석: 사계 님께서는 고린도 전서 1장 17절과 1장 30절을 통해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파당을 꾸짖으며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중생)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선언한 맥락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성경을 매일 읽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그렇게 35 년 간 읽다가, 약 6 년 전쯤 막 16:16절을 보는데, 이런 말씀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너무 생소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믿었습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믿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계속 세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뉴스앤조이}에서 ‘이 땅 위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이 아닌 오직 사람이었다.’고 주장한 이단 박창진 씨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지끼을 님도 잘 아시다시피 박창진 씨가 성경에서 아무 근거 없이 이 주장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못 보고 성경 부분만 보는 확증 편향으로 어떤 한 구절에 꽂혀 그 렌즈로만 성경을 해석한 까닭입니다.
다음은 {뉴스앤조이} 박창진 [예수님은 신인인가?]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여졌다(눅 2:40). 신인이라면 처음부터 지혜가 완전한 상태일 것인데도 아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돌 성전이 무너지는 때에 대해 자신은 모른다고 하셨다. 성부만이 아시고 아들인 자신은 모른다고 하셨다(마 24:36). 신이라고 볼 수 없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지끼을 님이 꽂혀 버린 구절은 마가복음 16장 16절 전체입니까? 아니면, 전체가 아닌 부분인 상반절입니까?
이 구절 전체에 꽂히셨다면, 개혁 교회에게 마술론으로 정죄당한 ‘세례 중생론’을 결코 주장하실 수 없습니다. 정죄(심판)의 근거는 세례가 아닌 믿음(불신)이기 때문입니다.
108을 제가 채웠으니, 이만 줄입니다.
1)
우선 고전1:30절에 대해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사계님께서
[ 제가 고린도 전서 1장 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를 제시했음에도,
이 역시 이지끼을 님 꿰맞추기 해석에서 나온 자의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전 1:30절 NIV는 다음과 같습니다.
It is because of him that you are in Christ Jesus, who has become for us wisdom from God--that is,
our righteousness, holiness and redemption.
"하나님으로 부터 나서" 라는 말이 없습니다.
NIV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바로 그분 덕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셨으니, 곧 우리의 의와 거룩함과 구원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덕분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2)
영어성경들 찾아 보십시요 헬라어도 찾아 보세요,
"하나님으로 부터 나서(낳음을 받아서)" 라는 말이 있는지....
그러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들으실 수가 없었겠네요
덕분에 오역하나 더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린 것이 맞지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시는 일이 성령님의 일이고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고전 1장 6장 10장 12장의 세례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사계님은 한글성경으로 고전 1:30절을 보니
1장에 대한 저의 설명을 받아 들일 수 없고
1장에 대한 설명없이 그 뒤에 있는 6장, 10장을 보니 제가 불경한 말을 한다 하신 것이네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사계님이 저의 말을 비튼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면 이 정도에서 그 일은 덮읍시다
이해하실 수가 없었네요..
그런데 구글 제미나이는, 오역은 찾아 주지 못하는 것 같네요..
3)
그리고 제가 저를 잘 아시지요?라고 말씀드렸던 것은
저는 사소한 트집은 잡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사계님이 저의 모든 면에 대해 잘 아신다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방언 말씀을 하셨으니 관련하여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방언에 대해 말씀드릴 때
저는 "이게 왜 내 차례까지 왔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교만한 생각이 됩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이게 왜 내 차례까지 왔지?"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방언에 대한 중지론자들의 이해는, 방언에 대한 고린도교인들의 이해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경을 거꾸로 읽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도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시는 일인데
고린도교인들은 이를 어리석은 일로 보았고 지금도 어리석은 일로 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인들이나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육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막 16:16절b 에 대한 설명은 전에 많이 드렸습니다.
세례받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시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죄의 조건에 세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믿음의 행위, 믿음에 속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믿음을 설명드릴때
누가 저에게 자신의 일을 하는 조건으로 소정액수의 돈을 약속하는 경우
제게 그 약속에 대한 (그 약속을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그 일을 하고
제게 믿음이 없으면 그 일을 안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일을 하고 안하고는 제 믿음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의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정액수의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제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시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5)
마가복음은 마가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 듣고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 16:16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인데
그 앞인 막 16:14절을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 16:16절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인 AD 30 년 경에,
예수께서 11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사도들로 부터 이 말씀을 들어 마가복음에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파피아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 등이 말한 것을 종합하면
마가는 베드로가 죽은 후 베드로의 가르침에 따라 64년 경에 로마에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6)
그러므로 막 16:16절은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 16:16절은 베드로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 열거한 교부들 뿐만 아니라 그외 모든 교부들은
막 16:16절을 말씀 그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중세 카톨릭에서는 사효론에 따라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믿음]을 제외하여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사효론이 생긴 이유는 허호익 교수의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중세 카톨릭 신학은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이 아닌 "새로운 신학" 이었습니다.
7)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중세카톨릭이 뺀 [믿음]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중세 카톨릭은 세례에 대해 다른 오해도 했는데
세례를 받기 전 까지의 죄에 대해서만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전 생애의 죄에 대한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Luther와 Calvin의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받은 후에 짓는 죄의 사함을 위해 고해성사를 하게 된 것이었고
같은 이유로 면죄부판매, 연옥설, 그리고 교황권의 남용이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것들이 종교개혁을 불러 온 것입니다.
8)
종교개혁을 시작한 Luther는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Luther의 신학에 문제도 있지만, 막 16:16절은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쯔빙글리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의 신학에 대항해서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개발하여 유아세례를 옹호하며
막 16:16절을 다르게 바꿨습니다.
쯔빙글리는 두 언약, 곧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각각 시작된 두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단 하나의 은혜언약만이 있다고 생각해 낸 것입니다.
하나의 언약이므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었던 것처럼
신약에서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9)
그러니까 유아세례를 정당화하려고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절)라는 말씀에서
믿음과 세례의 관계를 끊고, 그리고 세례와 구원의 관계를 끊어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을
[세례를 받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둘로 나눈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의 경우는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고
그리고 성인의 경우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들을 보면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그리고 세례는 구원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계님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언약신학 탄생의 비밀 입니다.
10)
예수님의 말씀이며 베드로의 신학인 막 16:16절을 보면
세례는 믿음으로 받아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중세 카톨릭은 믿음을 제외했고
쯔빙글리는 믿음과 세례를 분리해서 구원받음에 세례를 뺀 것입니다..
이런 쯔빙글리의 신학은 중세카톨릭의 신학과 다르고
예수님의 말씀, 곧 베드로의 신학과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신학은,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이 아닌 "새로운 신학"입니다.
카톨릭과 다른 신학이고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과도 다른 신학입니다.
11)
종교개혁 2세대인 Calvin의 세례에 대한 이해를 보면
Luther 의 이해와 같은 이해(A)도 했고
Zwingly 의 이해와 같은 이해(B)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Calvin은 세례에 대해 두 가지 이해(A,B)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 세례에 관하여
Luther와 Calvin(A)의 이해을 따르는 것 보다
Zwingly와 Calvin(B)의 이해를 따르는 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아의 경우는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고
그리고 성인의 경우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경우에서 세례는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론이 달라진 것입니다.
12)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씀에서
중세 로마 카톨릭은 [믿음]을 빼고
. . . . . . . . . . .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했고
종교개혁 이후는 대부분 Zwingly와 Calvin(B)의 이해를 따라
믿음으로. . . . . . . . . .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500년간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13)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로마 카톨릭이나 현재 대부분의 신학이나 같습니다.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을 뺀 로마 카톨릭이나, [세례]를 뺀 현재 대부분의 신학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쨎든 지난 500년간 Zwingly와 Calvin(B)의 이해를 따라 성경을 이해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인 막 16:16절과 맞고
Zwingly와 Calvin(B)이 만든 말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왜곡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그 중에 일부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갈라져 나가서
세례에 대해서는 Zwingly와 Calvin(B)의 이해를 따르면서도
다른 부분에서는 맞지 않으므로
전체적으로는 개혁주의신학 안에 있지만 여러 신학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사계님
저는 위와 같이 찾아 보고 정리하게 되니까 종교개혁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14)
사계님의 경우는 Jonathan Edwards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Jonathan Edwards의 신학을 지난 몇 개월간 많이 찾아 보았는데
결론은
전적부패 교리에 따라 요일5:1절a를 읽고 그에 따라 신학한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노병기 목사가
" 6. 거듭남과 믿음과 칭의의 관계 ― 거듭남의 선행성(先行性)
에드워즈는 거듭나야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성령의 주입으로 오는 믿음을 말한다.
에드워즈가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도 믿음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주로 거듭남 후에 오는 신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다" 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Jonathan Edwards는
거듭남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 것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난다고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도대체 Jonathan Edwards는 몇 개의 믿음을 말한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15)
그러므로 사계님은 Zwingly와 Calvin(B)의 신학과 Jonathan Edwars의 신학을 따른다고 할 수 있는데
저도 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6년전쯤,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성경을 읽어서
여러 오역들을 찾을 수 있었고, 오역들을 바로 잡아 가며 세례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갈 3:26-27절을 이해하게 되었고
롬 6장과 골 2:11-12절이 서로 관계된 말씀이란 것도 알게 되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 옛사람이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할례(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세례에 대해 네번(1장 6장 10장 그리고12장) 말씀한 것도 알게 된 것입니다.
16)
그리고 현재 많은 사람들이 막 16:16절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이유가
전적부패교리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제가 아는 이신칭의 교리와 전적부패 교리가 모순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의 본문과 같은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전적부패교리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을 갖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이신칭의 교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전적부패 교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는 것입니다.
17)
제가 보기에
세례에 관하여 Zwingly와 Calvin(B)의 이해와 함께 전적부패교리를 따르면
막 16:16절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셔야 할 것은
세례에 관한 Zwingly와 Calvin(B)의 이해는
예수님의 말씀을 Zwingly와 Calvin(B)이 바꾼 것이며
전적부패 교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18)
제가 위에, 세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를 소개해 드렸는데
저는 위와 같이 바뀐 것이, 모두 유아세례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부때 시작된 유아세례가 퍼져 나가 카톨릭의 사효론을 만들었고
종교개혁때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well designed scheme 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바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scheme 이 아니라 scam 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well designed scam 이라고 생각합니다.
19)
종교개혁당시에, 개혁은 종교적인 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정치 사회 문화등 모든 면에서
“Ad Fontes” [ (back) to the sources, 원천으로 (돌아 가자) ] 라는 개혁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의 모토 또한 “Ad Fontes” 이었습니다.
곧 종교개혁가들은 기독교역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신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성경과 초대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A)은 막 16:16절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하였으므로
성경과 초대교회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가려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쯔빙글리와 칼빈(B)은 막 16:16절 말씀을
[믿음]으로...................[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이해하였으므로
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세례에 대하여 새로운 신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루터와 칼빈(A)의 신학이 추구했던 성경과 초대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제외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계님은
사계님의 신학이, 제가 위에 말씀드린 well designed scam 중
어디쯤에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긴 글 써서 미안합니다만, 사계님께 한 번 말씀드리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지끼을 답글을 {도르트 신조} 게시판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