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0
9월14일[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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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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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qLNE4vx02k
[서울대교구 송영욱 프란치스코(목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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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라는 화두로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없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네 인간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각자 등에는 저마다의 십자가 하나씩 짊어지고 때로 헐떡이며, 때로 용기를 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과 불행이 끝도 없이 교차해온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던 출애굽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즉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척박한 사막과 기약 없는 대규모 공동체 생활, 배고픔과 갈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보십시오. 우리네 지상 인생 여정은 그 누구든 어쩔 수 없습니다. 결핍과 고통 투성이입니다. 근원적 갈증과 배고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너그러운 마음이요, 고개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대함입니다.
가끔 기가 막힌 이웃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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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zeZ8iS_8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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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거울 효과>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다가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뱀이 곧 불평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살려달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도록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매단 짐승은 뱀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동물이 매달렸다면 어땠을까요? 전갈을 매달았으면 어떨까요? 양이나 소를 매달면 어떨까요? 그것이 분명 죗값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죄만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이 씻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죽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릅니다. 뱀이 모든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가 뱀임을 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뱀이 되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 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순결했던 주인공은 ‘창녀’라고 써진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해 그 글자를 지웁니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악해지기로 했을 때는 거울을 당당히 바라봅니다. 자기의 모습이 뱀이어도 상관없다고 할 때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거울을 비추어주심으로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하고 매도 죽도록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내 죗값은 두 배나 네 배로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죗값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셨습니다. 나가 곧 죄이고 나가 죽기 전까지는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죽는다면 비로소 자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뱀의 모습으로 우리 자아의 거울이 되어주셔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됐을까요? 안 됩니다. 뱀만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만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 한 목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목사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박 목사를 통해 자기 자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도 그 목사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였음을 본 것입니다.
만약 박 목사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는 볼 수 있지만, 죄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인다면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데 지금 뱀과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죄에서 해방해 주기 위해서는 그 거울 뒷면에 “넌 본래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보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또 죄를 짓습니다. 존엄한 존재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뱀이 나의 하느님과 같은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는데 내 안의 뱀이 나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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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샤워기의 밸브가 헛돌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밸브에 틈이 벌어졌습니다. 틈이 벌어졌으니 조이는 힘이 약해졌고, 그래서 헛돌았습니다. 더 벌어지기 전에 새로운 밸브를 구매해서 교체했습니다. 새롭게 밸브를 교체하니 잘 열리고 잠겼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도 자동차의 상태를 화면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엔진오일의 교체 시기도 알려주고, 타이어 압력 상태도 알려주고, 자동차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1년에 한 번은 ‘건강검진’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위내시경과 장내시경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미국에 와서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보려고 합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혹시 모를 몸의 이상을 점검하는 겁니다. 이상이 있다면 더 나빠지기 전에 조처하는 겁니다. 이상이 없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 일 년을 기다리는 겁니다. 신앙인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지, 선행은 하고 있는지, 영적 독서는 하고 있는지, 말씀은 가까이하고 있는지, 미사 참례는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40일 전에 있었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과 함께 묵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빛났고, 예수님의 옷도 하얗게 빛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여기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 다른 두 개는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만들겠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영광과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람의 일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 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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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요한3,13-17: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성 십자가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전승에의하면,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발견되었다.황제는 이를 기념하여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14일에 지내는 것은이날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모세에게 반항한다.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백성들이 회개하자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민수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8,28; 12,32),하늘의영광으로올려졌다는 뜻(사도2,33; 5,31;필립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우리에게도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모든 인간이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이 사랑의 업적은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영혼,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구원으로나아가게 될 것이다.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결과,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이것은 매순간 우리의 선택에달려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하느님에게서 멀어질수 있으나,항상 높이 들리신,즉 십자가와영광으로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그분을 닮는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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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십자가를 곳곳에 두고 살다 보니 무덤덤하여졌습니다. 길거리를 다녀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성당이나 수도원 안에는 거의 방마다 십자가가 있고, 어떤 경우는 장식품처럼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대 로마나 이스라엘 사람이 현대에 와서 이 모습을 보면 몹시 놀라고, 어쩌면 눈을 뜨고 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고통을 뜻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수치를 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형의 여러 방법 가운데서도 십자가형은 특수한 형벌로 여겨졌고, 유다인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자체를 하느님께 저주받은 표지로 여겼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현양’이라고 봅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이 그분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고 모든 이를 당신께 모으시는 때입니다. 그분께서 높이 들어 올려지는 그때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때입니다.
수치를 피하려 하고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온 세상을 정복하시고 모든 통치자를 굴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까지 끌어안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어디까지 가시는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영광이고 구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 어느 임금에게도 바치지 않을 깊은 경배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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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앞에서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에서 부활, 생명, 구원을 봅니다.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고, ‘하느님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부활신앙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이고, 신앙의 핵심이고, 신앙의 목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장애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 준 다음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0-12)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마지막 목적지는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도 없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날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2) 하느님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방법에 대해서, “왜 ‘십자가를 통해서’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4-15.17-18)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10)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또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죽음’이라는 것을 정복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치셨다.”라고 흔히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부활로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4-15.18ㄱ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양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빼앗긴 일이 아니라, 내준 일입니다.>
이 말씀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4)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곧 진정한 ‘십자가 현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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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고통을 받아 지는 십자가 현양>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십자가는 달리 표현하면 고통이요 희생이다. 인간의 행복은 누구나 겪게 되는 갖가지 고통과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고통 자체가 없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며, 고통스러울 때 자신을 비하하고 열등감과 체념 속에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오늘의 말씀들은 고통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의 길을 보도록 이끌어준다.
요한 복음사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3,13)고 말하며 예수님과 성부와의 신적 일치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통의 정점인 십자가상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 이유는 오직 그분을 믿는 사람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3,15 참조).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신 것이다.(3,16)
십자가 그 자체는 고통, 불의, 실패, 절망, 수치, 치욕, 파멸, 죽음 등을 상징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지극한 사랑으로 고통의 극치요 수치와 파멸과 죽음의 표지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셨다. 그 결과 십자가는 생명과 사랑, 빛과 기쁨의 표지요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어떻게 일상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를 현양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삶이 팍팍해지고 예기치 못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자주 이 근본적인 사실을 낭만에 초치는 소리라고 무시해버리고 딴데로 마음을 돌려버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구원의 힘에 대한 믿음 위에서 기쁘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 마지못해 지는 십자가는 더욱 무겁게 다가올 뿐이며 십자가 모욕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인류를 위해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되돌려주시기 위해 ‘비우시고’(필리 2,7),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시지(2,8) 않으셨는가!
십자가를 현양하는 삶은 거창한 것도 저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지금 여기, 일상의 삶에서 고통스럽고, 피곤하고, 하기 싫은 일, 불편한 관계, 사회의 불평등과 불의, 생활고 등 수없이 많은 십자가 상황을 묵묵히 십자가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이 바로 십자가 현양이다.
죽을만큼 고통스러울 때 십자가 현양이 사치스런 말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행복의 길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처럼 비우고, 낮추고, 작아지는 자세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잊지 말자! 늘 그분이 나와 함께 아파해주시고 함께 십자가를 져 주고 계심을 믿으면서...
우리네 삶 자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사랑의 견딤과 순종의 길이다. 고통을 견뎌내는 힘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뿐이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고통을 내 힘으로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던 그분에 대한 회상을 통해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생길을 사랑으로 그분의 십자가 길을 따라가는 순종의 길이다. 이제 사소한 고통이나 불편함에도 투덜거리는 유아적 태도를 버리고,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으신 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받아들과 견딤을 통해 십자가를 현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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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한 사건과 연결하여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십니다. 높이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영광에 싸여 윗자리로 영전 받는 것과 다릅니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손길에 의해 모두의 눈 앞에서 벌거벗긴 채 수치와 모욕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섭리 안에서는, 처참히 매달린 누군가가 구원의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는 이에게 생명을 선사합니다. 모세의 구리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내주신 아버지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지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이 외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예수님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세상의 죄를 속량하는 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1코린 1,23 참조)를 기꺼이 선택하셨지요.
제1독서인 민수기 속 광야 일화에서 우리는 기도의 순수성을 배웁니다. 불편하고 힘들다고 하느님과 자신에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인간적 분노나 실망감을 내비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징벌 앞에서 그들이 간청하자 별 생색도 원망도 없이 기도의 소명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즉각 들어주셨지요.
문득 '욥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삶의 찬란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락에 떨어졌던 욥에게 와서, 짧고 현학적인 주장으로 도리어 욥을 괴롭혔던 세 친구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주님은 그 무례하고 무도한 친구들에게 "나의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간청하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어 너희의 어리석음대로 너희를 대하지 않겠다."(욥 42,8)고 하셨지요. 그리고 욥이 세 친구를 위해 기도드리자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당신을 모함하고 음모를 꾸며 사형에 이르게 한 이들을 위해 바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역시 맥을 같이하지요.(루카 23,34 참조)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모든 죄악과 패덕을 순순히 받아들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가장 위대한 기도를 완성하셨지요. 예수님의 기도, 모세의 기도, 욥의 기도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올린 순수한 기도라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는 어찌보면 유다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걸림돌입니다. 또, 다른 민족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은 경쟁하고 따지고 소송하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쪽으로 자꾸 치달아가는데,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들어 주고, 받아 주고, 토닥여 주다가, 나를 해하는 이를 위해 생명까지 다 내놓고 기도해 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 여기 있으니, 나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불평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르라고, 입이 댓발 나올 만큼 억울하고 지치면 그냥 멈춰서 당신을 바라보라고요. 무죄하신 하느님이 죽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네 무게를 얹고 잠시 쉬렴."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과 십자가 길동무를 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가고 두터워집니다. 네 고통인지 내 고통인지 모를만큼 서로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또 그만큼 제 고통에 무뎌지면서, 둘은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그분과의 일치, 하나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그분 십자가에 합하여 봉헌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십자가가 힘든 줄 아는 우리는 그만큼 남도 힘든 줄 알지요. 그러니 우리, 기도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거룩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어갑시다.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말씀으로 연결된 우리기에, 서로의 순수한 기도가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바라보고 있을 무수한 길벗들을 기억하고 힘을 냅시다. 동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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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며,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3,16.17)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오늘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하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은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 성당 안에 걸어 현양顯揚(=높이 드러내다. 나타내어 드높인다는 의미)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3,9)하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약의 민수기의 구리 뱀의 비유를 인용하셨습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 민수기 21, 4-9절은 오늘 복음을 위한 밑그림입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들 가운데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21.9)라는 말씀처럼 믿음으로 바라본 사람은 살아났지만, 여전히 불신앙으로 바라보지 아니한 사람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사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 거의 200만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이 높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 뱀을 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물리적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보려고 애쓴 사람들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구리 뱀사건입니다.
모세가 만들어 기둥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능력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며,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3,16.17)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요한 4,9-16참조)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까닭이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당신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구원 섭리와 계획(=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결국에는 외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으며 길고 넓은지를 드러나셨습니다.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기묘한 사업』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21,8)하고 약속하셨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사랑과 구원의 표지인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되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상처는 상처로 낫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려고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죽음의 상처에서 낫게 하여 주셨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에나 높이 걸려 있는 십자가는 장식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시데, 다시 태어나려면 겉으로 드러난 십자가 표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고 그것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고 의탁한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으로 바라볼 때 그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회심과 치유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의 바라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면의 본래적인 자아가 그 사랑이신 그분과 만나고, 그분과 만남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모든 분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시길 권하면서, 이 바라봄의 의미를 꿰뚫은 시몬느 베이유의 「신을 기다리며」의 한 부분을 선물로 보냅니다. 『오늘날 오해받는 크리스챤 사상의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 “바라봄”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높이 매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이가 구원을 받듯, 완벽히 순수한 이 예수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높이 달린 그 거룩한 것 앞에 우리의 무능과 악이 드러나고, 영혼의 교만이 드러나며, 불꽃이 일어 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바라보는 이는 이렇게 하여 보는 상대(=십자가상의 예수)와 비슷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이는 말씀하시는 분을 닮는다. 영혼의 선익을 산출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바라봄, 말씀을 들음, 그 수동적인 순명, 기다림, 집중, 침묵, 고통과 기쁨을 관통하는 부동성.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모습은 모든 순명 행위의 모델이다.』
저희 수도회 행사 마무리에 항상 부르는 「십자가 찬미」를 기도 대신으로 보냅니다. 『십자가상에 한 사람 있네 왜 죽으셨는지 말해다오. 인간의 죄로 수난하셨네. 우리 위해 숨거두셨네. 십자가상에 한 사람있네. 홀로 매달려 계시면서 나에게 가르쳐주세요. 그의 죽음을 왜 몰랐는지 그날을 몰랐던 사람 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었다네. 집단으로 생애를 바침으로 그 일을 세상에 알리려네. 손에손에 십자가 들고 곳곳에 님사랑 전하려네. 십자가상에 한 사람 있네. 온세계 알기를 바라노라.』
60년 전 오늘, 1964년 9월 14일 예수고난회 미국 시카고 십자가 관구 소속 마 레이몬드 신부님께서 한국에 도착하신 날입니다. 곧 예수고난회 한국 진출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다시금 저희 수도회를 위해 기도 부탁드리며, 돌아가신 두 분 신부님들, 마 레이몬드 신부님(1964년 한국 오심, 2008년 12월 귀천)과 박 도세 유스티노 신부님(1965년 한국 오심, 2008년 10월 귀천), 그리고 건강 때문에 미국 관구로 귀원한 손 어진 신부님(1969년 한국 오심, 24년 1월 귀국)과 베트남에서 수련장으로 활동하고 계신 노 인조 수사님(1974년 한국 오심, 현재 베트남 생활)도 기억하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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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는 지인들과 함께 어느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낯선 자매님 한 분이 지인 중의 한 분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십니다. 지인은 갑작스러운 인사에 깜짝 놀란 뒤에, 잠시 밖으로 나가서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오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본당 신자인데요. 되게 잘 살아요. 그런데 요즘 냉담 중이세요.”
혼란이 왔습니다. ‘냉담 중인데 왜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인의 기준은 부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자매님은 큰 부자인가 봅니다. 건물도 몇 채 가지고 있고, 지금 하는 사업도 잘 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면 잘사는 것일까요?
현재 냉담 중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형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아서 이혼을 이야기하고 있고, 자녀들도 각종 문제를 일으켜서 복잡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부자라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되게 잘 살아요.”
돈, 명예, 권력이 잘 사는 기준이 되는 세상입니다. 돈, 명예, 권력이 세상의 꼭대기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들을 아무리 높여도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들어 올려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신 것은 우리처럼 자기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들어 올리려는 삶만 산다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 즉 사랑의 기준으로 들어 올리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 희생, 봉사, 나눔 등으로만 진정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가지고서 잘 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있는 모든 이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저 사람, 되게 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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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을 봐야 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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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루어야 할 꿈>
요한 3,13-17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루어야 할 꿈>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살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살리려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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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수녀님들(올리베따노회)의 날입니다. 수녀님들께 있어서 ‘십자가’는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원’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성적 모태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선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비록 죄가 없다할지라도,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를 ‘위하여’ 자신이 뒤집어써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되기를 ‘위하여 자신을 건네 주는 일’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덧붙임>, 여기에 한 가지 의미를 제 자신이 덧붙여 본다면,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이라고 여겨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아니,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조작하고 계획했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갑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이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제게는 ‘십자가’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58장 7절에 나오는 ‘성소식별’의 기준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고,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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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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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성 십자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시편78,7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선물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결코 잊지 말라는 화답송 후렴 말씀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성월 9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8월 6일 주님 변모 축일후 40일만에 맞이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볼 유일한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이겠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 있습니다. 피정집 제의방에서 미사전례 입당전 절을 하려는 데 십자가가 없어 당황했던 추억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어디에 절할 수 있겠는지요? 우주 인류 역사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주와 인류는 어둠의 블랙홀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우주와 인류의 빛이자 중심이요 의미가 되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기도 역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은혜를 요약합니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니 이미 성 십자가의 은총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텅빈 허무를 사랑의 충만으로 바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이,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이 되는 성 십자가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 복음의 예수님의 고백은 당신의 성 십자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표지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성 십자가의 은총만이 우리를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가장 짧고 중요한 기도 역시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참 자랑스런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바쳐온 참 좋은 기도, 성호경인지요! 알게 모르게 십자가의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는, 그리하여 각자 고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역사도 참 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335년 9월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기념성당을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9월14일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함으로 시작된 축일입니다.
후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합니다만, 62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수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됩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성주간 성 금요일 수난 예식중 십자가 경배시 노래했던 내용들은 얼마나 은혜로웠던지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 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내리라.”
이 모두를 요약한,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은혜를 노래한 오늘 감사송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나무에서 인류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주님의 성 십자가는 영적승리의 표징도 됩니다. 잃었던 에덴동산을 찾아주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생명나무에서 생명나무 열매인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고맙습니다. 축일의 유래는 제1독서 민수기에서 보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유랑시 모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바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불평으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한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가 되고 구리뱀은 성 십자가의 예표가 됩니다. 말 그대로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을 상징하는 주님의 성 십자가이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친히 확인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바라볼 사랑의 대상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인 파스카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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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이것이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묵상하고 제가 여러분과 나누려는 주제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은 어제의 일이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한 교구 신부님과 프란치스칸 영성을 공부하는데 어제는 프란치스코에 대한 그 신부님의 감탄에 저도 같이 감탄을 연발하면서 뭔가 허무함이랄까 공허함이랄까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대단한데 나는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이렇게 저를 위안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한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비록 앞줄에서 프란치스코를 따르진 못할지라도 따르고 있다.
사실 이렇게라도 프란치스코를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적어도 악마를 따르지 않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참 묘하다고 할까 교묘하다고 할까. 저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합리화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어떤 때는 겸손으로 기울다가 어떤 때는 합리화로 기운다는 말이고, 그래서 이런 것이 인간이지, 하다가도 이래선 안 되지, 하곤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높이 찬양하면서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길은 주님만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따라가긴 하지만 따랄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것이 패배이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헛수고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명백한 승리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 죽음을 이깁니까?
제 생각에 치달으면 이깁니다. 죽음 끝까지 가면 이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깁니다.
둘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능력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은 사랑으로만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참사랑이고, 참사랑이라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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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십자가 사랑!>
오늘 복음(요한 3,13-17)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7)고 말씀하시면서, 그 길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십자가 사랑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지요 드러남(계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근본이요 본질'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 중심에는 '십자가 고상'이 걸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 사랑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너를 위해 나 자신을 내놓는 '십자가 사랑'이 되어봅시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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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나무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이렇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기 21장 5절)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물어 죽게 합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간청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게 하여,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합니다.
이 구리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살아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과 증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이요, 생명의 상징이며,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제 어느 한 자매님께서 "신부님, 마음이 힘들어요."라는 문자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할께요. 힘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서."라는 답신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끔씩 아니 종종 나를 찾아오는 고통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짊어지셔야만 했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고통으로 우리는 예수님 수난에 동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고통 앞에서 불평을 드러내지 말고, 인내로써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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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아름다운 것이
정녕
무엇인지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로
삶의 숭고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새로운 이름은
십자가입니다.
사랑을
되찾아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잃어버린
사랑의 주소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로
말씀하십니다.
거짓을
벗어버리는
진실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심판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시는
구원의 완성인
사랑의 선택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의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에서
제 멋대로
살아온 우리들이
우리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을 봅니다.
사람의
가장 소중한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십자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자신보다
십자가를
높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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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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