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구룡(九龍 주룽)은 영국령 시절인 1810년에 건설되기 시작한 시가지이다.
그런데 구룡 시가지 내에는 한때 최대의 인구 밀접 주거지인 '구룡채성(Kowloon Walled City)'이 들어서 있었다.
주거 건물들이 마치 성벽처럼 따닥따닥 붙어 있어 한때 인구 밀도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다.
일본이 세계2차대전때 이곳을 점령하였으나 일본 항복 후인 1948년 불법거주자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그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구룡채성은 갱단,마약,도박의 본거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구룡성채는 홍콩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33,000명이 한 건축가에 의해 기획된 것이 아닌 300개의 서로 얽힌 고층 건물에 살았다.
홍콩의 안전 보건 규제에도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카이탁공항 활주로 끝부분 주위에 정사각형의 조밀한 인구밀도를 가진 블록도시였다.
그러나 이 구룡성채는 1992년에 강제 철거되었다.
당시 캐나다의 사진작가인 그레이 기라드가 5년여 동안 이 곳 구석 구석을 취재하며 가치있는 사진자료를 남겼다.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으로 그 역사는 송나라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상 방어의 거점으로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지역 산물인 소금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기지로서 세워졌으며, 1810년에는 구룡성 포대가 되었다.
1842년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자, 영국의 움직임을 감시하고자 했던 청나라의 주요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1898년 영국과 신계 지역을 추가로 99년 동안 조차하여 사실상 홍콩권역으로 편입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단 구룡성채는 중국 관할 지역으로 남았으며, 당시 이 지역에는 약 700명이 살고 있었다.
중국은 구룡성채에 계속 군대와 행정관을 주둔시켜 주권을 행사하겠다고 했으므로, 영국의 행정권은 미치지 못했으나, 영국은 구실을 내세워 청나라의 행정관을 추방시켜 버린다.
구룡성채 관할권을 놓고 어느쪽도 확실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내전이 일어나면서 많은 중국인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어오게 되는데 사실상의 주권 공백지대인 구룡성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늘어난 인구만큼 콘트리트 건물이 우후죽순 증축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불과 0.03㎢의 면적에 최대 약 5만 명의 인구가 빽빽히 밀집하는 미로같은 고층 슬럼이 형성되었다.
1980년대 들어 홍콩의 중국 반환이 임박해오자,
구룡성채를 둘러싸고 중영 양국의 신경전은 잦아 들었다.
이 무렵부터 홍콩 정부가 구룡성채 지역에 경찰 파견 및 행정권 등의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중국 정부도 이를 묵인했으며1987년에 이 지역의 철거를 공식 발표, 주민과의 사이에 보상을 둘러싼 마찰이 발생했으나,1993년에 완전 철거되었고,
현재는 구룡성채 공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구룡채성 상공에는 항공기들이 매우 낮게 비행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이유는 구룡채성 인근에 지금은 없어진 카이탁 국제공항(1925~1998년 폐쇄)이 들어서 있었다.
공항 북쪽에는 산맥과 수많은 고층 건물들이 있어 착륙이 더 어려운 빅토리아 항구쪽으로 활주로 이용하다 보니 착륙 비행기들은 구룡채성 상공을 저공으로 비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아슬아슬한 활주로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이 공항은 폐쇄되고 신 공항으로 이전된 상태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룡채성의 미담들은 아직도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상태이다.
사진작가가 촬영한 구룡채성은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구룡채성은 없어지고 그 터에 구룡채성 공원(Kowloon Walled City Park)이 들어섰다.
1987년 1월 홍콩 정부는 구룡채성 철거 계획을 발표했고 1993년 3월부터 강제 철거를 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94년 4월에 마무리했다.
구룡성채의 남문과 야멘(yamen 衙門)인 관아만 남겨두고 모두 철거된 것이다. 그리고 이 터에다 구룡채성 공원을 조성하여 1995년 12월에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