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8강 관련-선을 행하지 않으면 불선만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190
애씀과 애씀없음
Āyūhanā saṅkhārā, anāyūhanā nibbānaṃ.(Ps.55)
【대역】
Āyūhanā애씀은; 모으고 행하고 애쓰는 성품은 saṅkhārā형성들이다. anāyūhanā애씀없음은; 행하지 않고 애쓰지 않음은; 애씀이 없는 성품은 nibbānaṃ열반이다.
‘āyūhana’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원래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집을 짓는다고 하면 집의 부분들을 모아서 적당하게 배치해야 합니다. 그것을 ‘집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집을 만든다’라고도 합니다. 사실은 각각 관련된 부분부분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을 빠알리어로 ‘āyūhana’라고 합니다. 미얀마어로는 ‘만든다, 노력한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하고 애쓰는 성품이 형성들이다’라고 했습니다.
형성saṅkhāra에는 형성되어지는 형성과 형성하는 형성, 두 가지가 있습니다.
“sabbe saṅkhārā모든 형성들은 aniccā무상하다. dukkhā괴로움이다. anattā무아다”라는 구절에서 형성들은 업과 마음, 온도, 음식 등 여러 조건법들 때문에 생겨나는, 물질‧정신 법들을 말합니다. 각각 관련된 조건들에 의해 형성된 형성들, 만들어진 형성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형성들은 ‘만든다, 애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성 무더기saṅkhārakkhandhā라는 (마음부수 50가지) 형성들이 바로 만들고 애쓰는 형성들입니다. 이 형성들은 몸의 여러 행위, 말의 여러 행위, 마음의 여러 행위를 행합니다. 그 (마음부수 50가지) 형성들 중에 의도라는 형성은 새로운 생의 재생연결을 시작으로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 과보도 생겨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의도를 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선업도 있고 불선업도 있습니다. 그 선업과 불선업이라는 의도를 여기에서 ‘saṅkhāra, 행하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라는 형성이 과보를 줄 힘이 아직 있으면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이 식멸熄滅1)되지 않습니다. 한 생 이어서 다시 한 생, 계속 이어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의도라는 애씀이 없어야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 법들이 생겨나지 않고 식멸됩니다. 그래서 “anāyūhanā애씀없음은; 행하지 않고 애쓰지 않음은; 애씀이 없는 성품은 nibbānaṃ열반이다”라고 『빠띠삼비다막가』에서 설하셨습니다.
여기서 “애씀이 없다”란 애쓰는 성품인 업이 더 이상 과보를 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과보를 줄 수 없는 것도 번뇌라는 동료가 없어서입니다. 위빳사나 관찰을 해서 아라한도의 지혜에 도달하면 모든 번뇌가 없어집니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이전의 업들도 새로운 생의 과보를 더 이상 생겨나게 하지 못합니다. 과보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업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라한도의 위력 때문에 이전의 업도 다해 버리고, 새로운 업도 생겨나지 않아서 아라한에게는 완전열반의 사멸 다음에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 무더기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고 모든 괴로움이 식멸되 버립니다. 이것이 무여열반anupādisesanibbāna입니다. 무여열반에 관해서는 뒤에 성전을 바탕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으로는 업이 다할 수 없다
‘애씀이 없다’라는 것은 지금 말한 대로 번뇌가 없어서 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을 ‘애씀이 없다’라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가 이러한 성전의 구절을 보이면서 잘못된 내용을 설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설하는가 하면, “애쓰면 형성 괴로움이 생겨난다. ‘sabbe saṅkhārā모든 형성들은; 모든 애쓰는 것이 형성들은 dukkhā괴로움이다’라고 설해 놓으셨다. 따라서 모든 행위는 다 괴로움일 뿐이다. 행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지내야 고요하다. ‘anāyūhanā애씀없음은; 행하지 않고 애쓰지 않음은; 애씀이 없는 성품은 nibbānaṃ열반이다’라고 설하신 내용도 있다. 따라서 보시나 계, 수행이라는 모든 선업은 행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마음 그대로 가만히 두면 열반을 얻는다”라는 등으로 성전의 한 부분만을 취해서 잘못된 의미를 설하고 있습니다.
본 승이 양곤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313년(1951년) 정도부터 그 법문이 확성기를 통해 설해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행하기 싫어하는 이들과 딱 들어맞는 법문입니다. 그러한 법을 좋아해서, 더 나아가 하나의 교리로 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법문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입니다. 삼장 전체에서 모든 불선법들을 제거하도록, 보시와 계와 수행이라는 모든 선법을 닦도록만 설해 놓으셨습니다. 수행bhāvanā이라는 명칭부터 벌써 ‘닦는다, 생겨 늘어나게 해야 한다’라는 뜻, 의미가 있습니다. ‘선법이나 수행을 하면 안 된다, 제거해야 한다’라는 내용은 어떠한 삼장이나 어떠한 문헌에도 없습니다. 선행을 행하지 않고 그냥 지내면 이전에 행했던 악업들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없앨 수 없습니다. 지난 상현의 8일 포살 법회 때도 이 내용과 관련해서 자세히 설한 바 있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너뜨리는 교리이기 때문에 지금 다시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불선법은 물이 흘러 내려가는 것처럼 쉽게 생겨난다
선법이란 강한 믿음과 열의와 노력으로 일부러 행해야 생겨납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불선법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법률과 현자나 참사람들을 고려해서 삼가고 있기 때문에 불선법이 조금 적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범부들에게는 계획하고 행하는 마음에 선과 불선, 두 종류만 있습니다. 선법을 행하지 않으면 불선 마음만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100분 중에 10분 정도 선 마음이 생겨났다면 불선 마음이 90분 생겨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선법을 전혀 행하지 않았다면 100분 내내 불선 마음만 생겨난 것입니다.
선법은 행하지 않고서 지낼 수 있습니다만 불선법은 수행이 없는 이들이라면 생겨나게 하지 않도록 단속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행이 없는 이들이 좋아할 만한 대상, 즐길 만한 대상과 만났을 때 좋아하지 않고 즐기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형색을 보면 좋아하고 즐기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고 즐기기 마련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좋아하고 즐기기 마련입니다. 수행 없이 그러한 것들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생겨나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한 이들이라면 배우자와 관련해서 좋아함이 생겨나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하지 않은 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생각하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줄곧 즐겨 왔던 대상, 물건을 즐기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화낼 만한 대상과 만났을 때 화를 내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한 마을에 삼촌이 조카의 뺨을 세게 때렸다고 합니다. 조카가 화가 나서 “왜 뺨을 때립니까?”라고 묻자 삼촌이 “‘마음을 마음 그대로 두면 번뇌가 없어진다’라고 네가 너무 지나치게 말해서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때렸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위빳사나 관찰을 해서 아라한이 되면 그러한 화가 없어집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리뿟따 존자는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소문을 믿지 못한 한 바라문이 사리뿟따 존자가 탁발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등을 때렸다고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서 그대로 가던 길을 계속 갔다고 합니다. 그제야 바라문은 소문을 믿고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위빳사나 관찰을 해서 아라한도로 성냄이 식멸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번뇌가 식멸되는 것은 선법을 행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합니다.
혐오할 만한 것, 싫어할 만한 것과 만났을 때 혐오하지 않도록, 싫어하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슬퍼할 만한 것, 마음을 상하게 할 만한 것, 걱정하게 할 만한 것과 만났을 때 슬퍼하지 않도록, 마음 상하지 않도록, 걱정하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이 없으면 단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합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과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않도록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타와 위빳사나 없이 마음을 마음 그대로 두는 것만으로는 단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불선만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 천상 등 선처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 선이 생겨나지 않고, 사악도와 나쁜 결과를 주는 불선들만 끊임없이 늘어날 것입니다. 보통의 보시, 계, 수행이라는 선이 있으면 현생에 도과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사람의 생, 천상의 생에 태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태어난 생에서 참사람법을 듣고서 수행을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성스러운 도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이에게는 선처의 생에 도달하게 하는 선조차 없습니다. 나쁜 결과를 주는 불선들만 시간을 꽉 채워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그 불선이라는 친구들이 사악도에 데리고 가기만 합니다. 열반에 도달한다는 것은 더욱더 먼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지 말라고 지도하는 교리는 매우 두려워할 만한 교리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할 만한 잘못된 길을 잘못됐다고 알고서 삼갈 수 있도록,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는 도반들도 주의를 줄 수 있도록, 이렇게 관련된 내용들을 첨가해서 본 승이 조금 정도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anāyūhanā애씀없음은; 행하지 않고 애쓰지 않음은; 애씀이 없는 성품은 nibbānaṃ열반이다”라는 내용에 대해 “수행하지 않고 지내야 열반을 얻는다”라고 잘못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anāyūhanā애씀없음”이란 수행을 애쓰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의 결과를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불선업과 선업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단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열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위빳사나 수행을 닦아 아라한 도의 지혜에 도달했을 때 번뇌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이전의 업도 새로운 생의 결과를 더 이상 줄 수 없고, 과보를 줄 새로운 업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라한 도를 통해 번뇌가 없어져 과보를 줄 수 있는 업이 없어지고 식멸하는 것만을 말합니다.
“anāyūhanā nibbānaṃ”라는 성전 구절은 사실 위빳사나 관찰을 하는 수행자에게 무너짐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가 생겨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그러한 지혜들도 위빳사나 수행을 진실로 열심히 애쓰는 이들에게만 생겨납니다. 그래서 “새로운생 생기도록 애쓰는업 형성이고 생기도록 애쓰는업 전혀없어 열반이네”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같이 독송합시다.
새로운생 생기도록 애쓰는업 형성이고
생기도록 애쓰는업 전혀없어 열반이네2)
1) 미얀마어로 ‘녜인’이라는 단어는 원래 ‘불이 꺼진다’라는 뜻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냥 ‘없다’라는 뜻보다 강해서 관련 되는 단어를 궁리하다가 ‘불이 꺼져 없어짐,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림’이라는 뜻의 ‘식멸’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2)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애씀인 업이 형성이고 그러한 애씀이 없어야 열반이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
사두 사두 사두 ~~^^